규칙적으로 아침 산행을 하는 사람들은 이따금 자신의 부지런함을 마치 전쟁터의 무용담처럼 떠벌리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본의 아니게 말입니다. 어제 아침의 일이었습니다. 비슷한 시각에 자주 마주치는 할머니 한 분과 처음 보는 아주머니 한 분의 대화를 옮겨 보면 이러했습니다. "형님, 일찍 나오셨네요. 언제 올라오셨어요?" 하면서 아주머니가 반갑게 묻자 "나? 나는 벌써 산에 올라갔다 내려와서 필라테스도 20분 하고 이제 막 내려가려는 중이야." 하면서 자신의 부지런함을 한껏 뽐내는 듯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머, 부지런도 하셔라. 몇 시에 나오셨는데요?" 하면서 치켜세우자 "5시가 채 되기 전에 집에서 나왔을 거야." 하면서 별것 아니라는 듯 낮은 목소리로 답을 하고는 잘 다녀오라는 인사와 함께 산을 내려가는 것이었습니다. 할머니의 평소 모습과는 사뭇 달랐습니다. 언제나 상냥하고 새초롬한 태도로 일관했던 할머니의 모습을 기억하는 나로서는 두 사람의 대화 장면이 꽤나 낯설고 어색하기만 했던 것입니다.


등산로에서 자주 마주치는 욕쟁이 할머니 역시 하루가 다르게 늙어가는 듯하여 안타깝기만 합니다. 불과 2년 전만 하더라도 지팡이 없이 씩씩하게 걷곤 하셨는데 이제는 지팡이에 의지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작은 언덕길에서도 가쁜 숨을 몰아쉬곤 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과의 대화에서도 양념처럼 가볍게 섞던 욕설을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어제는 내게, "여자가 이쪽으로 오면 저쪽으로 도망가고, 저쪽으로 오면 이쪽으로 도망가. 여기에 이상한 여자가 하나 있어." 하면서 말듯 모를 듯한 당부를 하셨습니다. 나는, "네, 알겠습니다. 조심히 내려가세요." 하면서 가볍게 헤어졌습니다.


윤석열 정부의 집회 대응 방식을 보면서 내가 등산로에서 만났던 이런저런 사람들을 떠올렸던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날이 그날 같은, 그닥 달라질 것도 없는 평범한 일상을 보내는 사람들은 이따금 미친(?) 짓거리를 하게 마련입니다.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던 평범해 보이는 여성 정유정이 끔찍한 살인을 저지르고도 아무런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최루탄과 화염병이 날아다니던 80년대의 집회 현장처럼 매일매일이 스펙터클한 일상이었고, 이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극도의 긴장감을 유지해야만 했던 경찰 공무원이라면 평화적인 시위가 무척이나 간절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폭력이 사라진 평화적인 시위가 오랜 시간 이어지다 보니 고위급 경찰 공무원들의 일상 또한 그날이 그날인 듯 지겹기만 했겠지요. 하여 아무런 죄의식도 없이 망루에 있던 노조원을 향해 진압봉을 휘둘러 진압하게 했고 피를 흘리는 모습을 보면서 모처럼 즐거운 시간을 보냈을지도 모릅니다. 아마도 그들에게는 조금 더 강한 자극이 필요했을 테고, 이것 또한 자신의 진급 기회를 획득하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이라고 믿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어쩌면 무방비 상태의 집회 참가자들에게 캡사이신을 마구잡이로 뿌려 고통을 당하게 하는 모습도 앞으로는 자주 보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런 행태가 이어지면 집회 참가자들 역시 자구책으로 다른 방법을 강구할 테고 우리는 오래전에 잊었던 80년대의 풍경을 일상처럼 마주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시골에 홀로 사시는 어르신들을 만나본 사람이라면 이런 상황이 십분 이해가 될 듯합니다. 대화 상대가 없어 말할 기회가 없었던 그들은 어쩌다 만난 사람이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던지 종일이라도 대화를 이어갈 수 있을 것처럼 말을 쏟아냅니다. 듣는 사람이 말을 끊고 돌아서는 게 미안할 정도로 말입니다. 현 정부의 고위 공직자들은 그날이 그날 같은 평화로운 일상이 무척이나 지겨웠는지도 모릅니다. 피를 흘리고 고통을 받는 모습이 그 시절의 낭만처럼 그리웠을 테지요. 아무런 죄의식도 없이. 때로는 혀를 자극하는 양념처럼 일상을 자극하는 강한 충동이 즉각적인 행동으로 옮겨지는 사람도 더러 있는 법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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