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가장 보통의 인간 - SF 작가 최의택의 낯설고 익숙한 장애 체험기
최의택 지음 / 교양인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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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은 '정'이 많은 민족이라고 한다. 나도 그런 줄 알았다. 적어도 10여 년 전까지는 말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 이전까지로 몇 년 더 거슬러 올라갈지도 모르겠지만. 대한민국을 다녀간 외국인이나 오랫동안 우리나라에 살았던 외국인들은 서로 입을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너도나도 한국인의 '정'에 대해 말해 왔으니까 나 역시 그런 줄 알았고, 그러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게 사실이다. 나의 성장기를 뒤돌아보더라도 모두가 가난했던 그 시절의 사람들은 서로의 아픔을 그냥 지나치지 못했음은 물론 자신에게 있는 어떤 것을 타인에게 조금이라도 나누어 주고자 하는 마음이 일상이었으니까 지금도 여전히 그 오래전 풍습이 유지되고 있는 줄 알았다. 나는 그렇게 '옛날 사람'이었던 것이다. 영어 사전에도 없다는 '정'이 일종의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대한민국의 브랜드인 양 생각하며 살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브랜드가 이제는 더 이상 '정'이 아니라는 사실을 나는 독서를 통해 배우고 있다. 자신의 아픔을 책으로 쓴 에세이를 읽고도 사람들은 더 이상 내 일인 양 아파하거나 눈물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런 마음일지도 모른다. '세상에는 이런 사람도 다 있구나.' 하는 호기심 혹은 동물원의 희귀 동물을 구경하는 듯한 신기함, 어쩌면 그런 마음에서 한 발짝도 더 나아가지 않으려 하는지도 모른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더러 있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다수의 국민들이 그럴진대 대한민국의 브랜드가 더 이상 '정'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현실 아닌가. 나는 최의택 작가의 에세이 <어쩌면 가장 보통의 인간>을 읽는 내내 그런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나는 마지막으로 펜을 손가락 사이에 끼워 단단히 고정한 다음 자퇴서에 서명했다. 그리고 보조 선생님과 함께 엄마가 기다리고 있는 2층 교사 휴게실로 갔다. 2층 복도 저 끝에 가방을 들고 있는 인영이 보였다. 눈이 빛에 적응하자 엄마 얼굴이 보였는데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나는 온몸을 들썩이며 대성통곡을 했다. 엄마는 물론 보조 선생님까지 눈물을 보였다. 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면 눈앞이 뿌예진다. 하지만 그 이유가 뭔지는 잘 모르겠다. 억억억 하면서 엄마랑 학교를 나서면서 그때 막연하게나마 느꼈던 건 딱 하나였다. 모든 것이 끝났다는 허망함. 그 허망함을 자초한 건 분명 나였다. 지금도 그 선택을 후회하지 않으며, 내가 살면서 내린 선택 중 가장 현명한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아쉬운 부분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왜 어떤 사람의 인생은 스스로 내리치는 철퇴로 산산조각 내는 것이 최선일 수밖에 없을까."  (p.33~p.34)


근육병(선천성 근위축증)을 앓고 있는 작가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걸어본 적 없이 오직 휠체어에 앉아 세상을 바라봐 왔고, 고등학교를 그만둔 뒤 세상과 단절된 채 집에서만 지냈다고 한다. 그렇지만 자신의 삶에 대해 쓰고 있는 책의 곳곳에는 유머가 넘치고, 이 사람이 과연 그와 같은 고통 속에서 사는 사람이 맞나 하는 의심이 들게 하는 대목도 여럿 등장한다. 책을 다 읽은 후 나는 '가장 깊은 슬픔이 가장 큰 웃음이 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뜬금없이.


"나뿐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인생은 가까이서 볼 때, 전부는 아닐지라도 분명 비극적인 사건으로 점철돼 있다. 그러나 이 에세이처럼, 인생은 멀리서 조망하며 인생 자체를 개인이 감독으로서 재편집하는 작업을 통해 우리네 인생은 나름대로 재밌는 인생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p.222)


총 3장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책은 작가가 세상과의 단절을 경험하면서 작가 지망생으로서의 삶을 살았던 10여 년의 기억이 담긴 1장과 2장에는 <슈뢰딩거의 아이들>로 문학상을 받고 세상에 나오기까지의 고군분투가, 그리고 3장에는 SF 소설가로서 작가가 체득한 글짓기 방법과 최의택이라는 한 인물의 세계가 그려진다. 나는 책을 읽는 동안 이따금 직장 동료들과 이 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곤 했었다. '모든 것을 잃은 사람은 세상에 대한 기대가 크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더 긍정적인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요?'라고 말했던 어느 후배의 말이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그럼에도 여전히 나의 마음 한 구석에는 두려움 같은 게 웅크리고 잇다. 나의 장애를 똑바로 응시함으로써 알게 되는 현실의 무게에 짓눌려버리는 게 아닐까 싶어서. 삶의 의욕 자체를 잃어버리게 되는 상황이 두렵긴 하다. 하지만 이제 와 멈출 수도 없다. 그러니 너무 무겁게 생각하지 않고 여행하는 것처럼 가볍게 가보려 한다."  (p.13 '프롤로그' 중에서)


우리는 이제 당신의 아픔이 나의 언어가 아닌, 이해도 할 수 없는 먼 이국의 언어가 되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은 당신의 아픔이 우리로부터 분리된 채 당신만의 아픔으로 남게 되었음을 의미하며, 먼지만 날리는 슬픈 내 마음의 풍경을 누군가에게 보여주는 부끄러운 현실의 한 장면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당신의 아픔이 오롯이 나의 언어로 이해되는 그날을 꿈꾸고 있다. 그날이 오면 대한민국의 브랜드도 다시 '정'으로 환원되지 않을까. 그날이 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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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과 환희의 순간들
프랑수아즈 사강 지음, 최정수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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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일 중학교 운동장의 풍경은 허허롭다. 너른 운동장 한 귀퉁이에 한 소녀가 등장한다. 회색 트레이닝복 차림에 검은 가방을 멘 소녀는 뭔가 신경 쓰인다는 듯 이따금 뒤를 힐끔거리며 학교 건물을 향해 운동장을 가로지른다. 소녀의 뒤 10여 미터쯤 뒤에서 검은색 트레이닝복에 검은 가방을 멘 남학생이 소녀의 뒤를 따르고 있다. 나는 먼 거리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다. 소녀와 소년이 예전부터 서로 알고 지내던 사이였는지, 아니면 일요일인 오늘 아침에 우연처럼 마주친 사이였는지 나는 그 자세한 내막을 알지 못한다. 다만 뒤를 힐끔거리며 앞에서 걷는 소녀의 태도로 보아 두 사람은 이미 서로의 존재를 알고 있었던 사이가 아니었을까 내심 짐작할 뿐이다. 그러나 서로의 존재를 그저 알고만 있었을 뿐 다정한 말을 건네거나 우연한 기회에 서로에게 호감을 느껴 특별한 관계로 진행되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는, 데면데면한 관계로만 남았던 두 사람. 뒤에서 걷던 남학생도 여학생의 존재가 자못 신경이 쓰이는 듯 처음 설정한 거리를 더 넓히거나 좁히지 않는다. 나는 그 남학생에게 큰소리로 말해주고 싶었다. '어서 달려가서 여학생에게 네 마음을 고백해 봐. 먼 훗날 오늘의 일을 두고두고 후회하지 않으려면 말이야.' 여학생이 학교 건물의 출입구를 통과한다. 그리고 오래 지나지 않아 한 남학생이 다른 출입구를 통과한다. 나는 가을 햇살이 내리쬐는 그 건물을 오래도록 지켜보았다.


"추억 속에서 문학에 대한 사랑은 모든 짧은 사랑, 사람에 대한 사랑에 비해 큰 우위를 지닌다. 우리는 언제 그리고 어디서 그 '타인'을 만났는지, '그'가 그날 우리에게 어떤 인상을 주었는지 기억하지 못할 때가 있다(오히려 그날 밤 우리가 '그'를 즉시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에 매우 놀라워한다). 반대로 문학은 우리를 첫눈에 매료시킨다. 달리 말하면, 떠들썩한 굉음을 내면서 결정적이면서도 정확한 이끌림을 선사한다. 나는 내 인생의 위대한 책들을 어디서 읽었는지, 어디서 발견했는지 아주 잘 기억하고 있다. 거기에는 내 청춘의 내적 풍경과 외적 풍경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p.195)


우리가 프랑수아즈 사강의 매력에 쉽게 빠져드는 이유는 그녀 자신의 생각이 글로 전환되는 회로가 남들에 비해 매우 발달해 있다는 데 있을 것이다. 직관적이거나 감각적인 것으로 읽히는 그와 같은 생각들은 때로는 도발적인 듯 여겨지기도 하지만 대개는 사강 자신의 솔직함을 부각하는 장점으로 작용한다. 그녀의 글은 짧지만 후회 따위는 하지 않는 사랑, 뜨거웠던 여름과 우울함을 한껏 드러낸 그림자, 오만과 굴욕, 자기 자신으로 강렬하게 살다 지는 것, 밤의 유희와 한낮의 피곤, 뻔뻔스러움과 순수함 같은 것들로 가득 차 있지만 적어도 사강 자신이 추구했던 삶의 모습에서 철저히 등을 돌렸던 적은 단 한 차례도 없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한다. 두 번의 결혼과 이혼, 약물중독,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는 도발적인 선언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나는 기계적으로 태양을 향해 손바닥을 내민다. 그러나 손을 다시 쥐지는 않는다. 시간과 사랑을 붙잡으려고 애쓰지 말아야 하듯이, 태양도 인생도 붙잡으려고 애쓰지 말아야 한다. 나는 웃고 잊어버리는 사람들, 어느 곳이든 다른 곳, 그러나 이곳을 닮은 다른 곳, 혹은 이곳을 닮으려고 애쓰는 다른 곳, 그러나 결단코 그것에 성공하지 못할 다른 곳을 향해 다시 떠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에게로 내려간다."  (p.176)


사강의 에세이 <고통과 환희의 순간들>은 사강 자신이 스스로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찾아낸 고통과 환희의 순간들을 주저리주저리 써 내려가지 않았다는 데 놀라움이 있다. 어쩌면 그와 같은 글은 그녀의 성향에도 맞지 않는 주제일 테지만 말이다. 오히려 그녀는 자신이 만났던 여러 인물의 고통과 환희에 대해 쓰고 있다. 어쩌면 그것은 어느 누구의 삶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그렇지만 정작 본인은 알지 못하는 제삼자적 관점의 객관적인 평가일지도 모른다.


"빌리 홀리데이에 대한 내 경탄 혹은 내 기억의 힘은 이러하다. 그 공연이 보잘것없고, 끔찍하고, 웃음거리가 될 만한 결함을 보여줬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녀가 훌륭하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눈을 내리깔고 노래했다. 한 소절을 불렀고, 힘겹게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녀는 풍랑이 심한 바다에서 상갑판의 난간에 매달리듯 피아노에 매달렸다. 그 자리에 있던 다른 사람들도 분명 나와 똑같은 마음으로 그곳에 온 듯했다. 그녀에게 열렬한 박수갈채를 보냈으니 말이다. 그러자 그녀가 빈정거리는 듯하면서도 불쌍히 여기는 듯한 시선을 그들에게 던졌다. 사실 그것은 그녀 자신을 향한 사나운 시선이었다."  (p.35)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면면은 그야말로 화려하다. 재즈의 디바 빌리 홀리데이, 미국을 대표하는 극작가 테네시 윌리엄스, 미국의 배우 겸 영화감독 오손 웰스, 러시아 출신의 유명 발레리노이자 안무가 루돌프 누레예프, 프랑스를 대표하는 실존주의 사상가 장 폴 사르트르 등 사강 자신이 직간접적으로 관계를 맺고 좋아했던 인물들의 명과 암에 대해 주관적인 필체로 펼쳐 보이는 이 책은 사강이 썼던 다른 어떤 소설보다도 극적이고 화려하며 깊은 울림을 준다. 그렇다고 사강의 소설이 그녀가 쓴 이 한 권의 에세이에 비해 격이 떨어진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사강의 <고통과 환희의 순간들>은 우리가 아무리 겪어도 결코 완전하게 파악할 수 없는 인간 존재의 삶에 대해 쓰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유명인이라는 것도 그들이 겪었던 고통과 환희의 순간들이 보통 사람들에 비해 더 극적이었을 뿐 우리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사강은 독자들에게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휴일 오전에 보았던 중학교 운동장의 풍경이 마치 어느 영화의 한 장면처럼 잊히지 않는다. 해가 지고 있다. 종일 비었던 운동장엔 동네 꼬마들이 공을 차고 있다. 떠들썩한 소음도 늦가을 밭은 해걸음에 금세 사라질 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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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이 날 만큼 높고 푸른 하늘입니다. 이런 날이면 찬바람에 요동치던 첫눈의 흩날림처럼 마음은 좀체 진정되지 않은 채 흔들리고, 시기도 특정할 수 없는 먼 기억의 숲을 하염없이 헤매거나 다가오지 않은 어느 시점의 미래를 향해 이리저리 내달리곤 합니다.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전하면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일어나고 잠시 동안의 프롤레타리아 독재 과도기를 거친 이후 진정한 이상적 사회가 나타난다고 예견했던 마르크스의 주장은 완전히 빗나갔습니다. 오히려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전하면 제일 먼저 낭만이 사라지고, 감정이 무뎌진, 이를테면 기계화된 인간만 남게 된다는 게 나의 생각입니다.


10.29 참사 1주기를 하루 앞둔 오늘, 푸르디푸른 하늘을 향해 눈물 한 방울 떨구었던 게 내가 할 수 있는 조촐한 추모였습니다. 이상하게도 대한민국에서 보수 정권이 집권하면 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칩니다. 페리호 침몰과 성수대교 붕괴, 세월호 참사가 그렇고, 이태원 참사가 그렇습니다. 잠잠하던 묻지마 범죄도 횡행합니다. 가족 전체가 목숨을 끊는 일도 증가합니다. 이 모든 게 서로 아무런 연관성이 없는 개별적인 사건일까요? 나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자연과 인간에 대한 관심이 사라지고 오직 권력과 부의 쟁탈에만 몰두한 탓에 발생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가뜩이나 쪼그라든 출산율로 인구 자연감소가 진행되는 요즘, 사건 사고로 많은 생명이 사라진다는 건 참으로 용납하기 어려운 현실입니다. 월별 출생아 수가 2만 명을 밑도는 작금의 상황에서 합계출산율 0.7명선마저 무너질 날이 멀지 않은 듯합니다. 그럼에도 정부는 내년도 R&D 예산과 청년 취업 지원 예산 등은 대규모로 깎을 듯합니다. 검찰 특활비나 순방 예산은 증액하면서 말이지요.


도시에서도 그렇지만 지방으로 갈수록 아이 울음소리를 들었던 게 언제였는지 모르겠다고 한탄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대학을 졸업한 청년들은 양질의 일자리가 없어서 은둔형 외톨이로 전락하고, 그들은 결국 분풀이 삼아 묻지마 범죄를 저지르곤 합니다. 조금의 아량이나 관용도 없는 이 사회는 그들에 대한 처벌만 관심이 있을 뿐, 그들 또한 우리와 함께 살아가야 할 동료이자 이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려 들지 않습니다.


하늘은 눈물이 날 만큼 높고 푸르릅니다. 단풍이 드는 나뭇잎 사이로 푸석푸석한 생명들의 아우성이 들립니다. 내일은 10.29 참사 1주기, 그들을 기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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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탐정으로 있어줘
고니시 마사테루 지음, 김은모 옮김 / 망고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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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소설과는 다르게 일본소설 중 몇몇은 책의 내용을 짐작할 수 없는 묘한 제목을 달고 출간된다. 예컨대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나 <어느 날, 내 죽음에 네가 들어왔다> 등은 제목만 들어서는 도무지 소설의 장르나 내용에 대해 감을 잡기 어렵다. 소설을 다 읽은 후에야 겨우 작가나 출판사가 왜 그런 해괴한 이름을 짓게 되었는지 이해하게 된다. 책의 제목이라는 게 물론 독자의 시선을 사로잡아야 하는 본연의 목적이 있기는 하지만 일본 작가에 비해 꽤나 점잖은(?) 한국 작가들은 그런 괴상망측한 제목을 그닥 선호하지 않는 듯하다. 고니시 마사테루의 소설 <명탐정으로 있어줘> 역시 책의 제목만 들었을 때는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제목에 '명탐정'이란 단어가 들어 있으니 추리소설인 듯한데 누군가에게 부탁하는 어투인 '있어줘'는 도대체 무슨 소용이람.' 책을 읽기도 전에 그런 궁금증이 들었던 건 나만의 괜한 호기심이었을까? 아무튼.


방송작가에서 미스터리 작가로 변신하였다는 고니시 마사테루의 소설 <명탐정으로 있어줘>는 그의 미스터리 소설 데뷔작인 셈이다. 그러나 다카라지마샤(宝島社)에서 발행하는 잡지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에서 대상을 받으며 화려하게 데뷔했으니 미스터리 작가로의 변신이 그의 작가 인생에서 큰 전환점이 될 것임은 분명해 보인다. 일본의 미스터리 소설이 대개 그렇듯 대화체 형식의 문체가 주를 이루는 까닭에 소설의 전개는 빠르게 진행되는 느낌이다. 책을 읽는 독자의 입장에서는 어려움 없이 술술 읽히는 건 물론이고 말이다.


"할아버지는 부드러운 웃음을 띤 채 커피를 또 한 모금 마시고는 신중한 손놀림으로 침대 옆 테이블에 컵을 내려놓았다. "그래, 네 말이 맞단다. 난 분명 루이소체 치매 환자야." 역시 가에데의 직감이 들어맞았다. 할아버지의 검은 눈동자와 그 속의 홍채는 세공된 유리처럼 섬세했고, 빨려들 것 같은 심원함으로 가득했다."  (p.27)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는 27세의 가에데에게는 교장 선생님으로 은퇴한 71세의 할아버지 히몬야가 유일한 가족이다. 가에데의 엄마는 가에데가 태어나기도 전에 결혼식장에서 스토커에게 피습을 당해 사망했고, 아빠마저 암으로 죽었기 때문이다. 가에데에게 친구이자 부모의 역할을 톡톡히 해왔던 할아버지는 이제 환상성 치매에 걸려 거동도 자유롭지 못하고 정신도 오락가락한다. 평소에 미스터리 추리소설의 열렬한 팬인 동시에 일상에서 벌어지는 불가사의한 일들을 본인이 직접 추리하여 해결하는 것을 취미로 삼으셨던 할아버지 밑에서 성장한 가에데는 차츰 정신을 잃어가는 지금의 할아버지 모습이 못내 안타깝다. 가에데는 치매에 걸린 할아버지를 돌보며 일상의 미스터리를 소재로 할아버지와의 대화를 이어간다. 할아버지는 여전히 자신이 해결하지 못한 미스터리의 비밀을 완벽한 추리를 통해 해결하곤 한다.


""어느 날 문득 깨달았죠. 애당초 가공의 세계이기에 미스터리는 아름다운 것 아니었느냐는 사실을요. 그리고‥‥‥다시 읽는 동안 어쩌면 엄마 사건도 가공의 세계에서 벌어진 일일지도 모른다고 여길 수 있게 됐어요. 현실 도피일지도 모르죠. 굴절된 심리일 수도 있겠고요. 하지만." 자아내면 모든 것이 스토리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스토리다. '지어낸 일'이기에 아름답다. 현실 세계도, 미스터리도, SF도‥‥‥그리고 연극도."  (p.277)


가에데가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미스터리는 마치 소설 속 액자 추리소설처럼 읽힌다. '요리주점의 '밀실'', '수영장의 '인간 소실'', '33인이 있다!', '환상의 여인' 등 가에데가 들려준 소제목의 미스터리를 두 사람은 열심히 추리한다. 그러나 가에데의 엄마를 살해했던 스토커가 가에데를 납치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할아버지의 추리가 이어지는데...


"가에데는 베개 끄트머리를 꼭 잡고 병실 창밖을 보았다. 저 무수히 많은 불빛 속에서 사람들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며 지내고 있을까. 어느 시대든 보통 사람은 생각지도 못할 추악한 계책을 사용하는 인간은 존재한다. 그보다는 할아버지가 보는 환시가 훨씬 아름다운 광경일지도 모른다."  (p.360~p.361)


우리는 종종 소설보다 더 끔찍한 일을 현실 세계에서 겪기도 하지만 그럴 때마다 우리를 다시 살게 하고, 용기를 북돋우는 건 인간 본성에 대한 신뢰와 순수한 인간 본성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이 보내는 헌신적인 사랑이다. 소설에서도 가에데의 곁에는 동료 교사인 이와타와 그의 후배 시키, 누구보다도 손녀를 사랑하는 할아버지 히몬야가 있었다. 풀벌레 소리가 들릴 듯한 저녁. 멀리서부터 어둠이 내려앉고 있다. 내일이면 또 분주한 한 주가 시작될 테고, 사랑하는 누군가를 위해 우리는 또 힘든 시간을 견뎌낼 것이다. 소설 속 가에데가 그랬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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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에 관하여
정보라 지음 / 다산책방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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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정보라는 무척이나 학구적인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곤 한다. 그를 직접적으로 대면한 적은 단 한 차례도 없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쓴 소설의 일부 장면에서 일반 독자가 이해할 수 없는 전문적인 지식과 생경한 단어들의 조합이 맥락도 없이 길게 이어지곤 하기 때문이다. 그 분야의 전문가라면 오히려 아주 쉬운 단어를 동원하여 가장 쉬운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을 테지만,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둘 수밖에 없는 소설가가 특정 분야의 전문가가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지적 욕구가 왕성한 정보라 작가는 칭찬을 받으면 받았어야지 비판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작가를 사랑하는 애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소설의 흥미를 끊는 전문적인 서술 부분은 못내 아쉬운, 말하자면 정보라 소설의 '옥에 티'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물론 소설에서 언뜻언뜻 비치는 생경한 단어를 통해 작가의 높은 학구열은 십분 파악할 수는 있었지만 말이다.


소설의 시작은 상당히 도발적이다. 테러 사건의 범인 '태'와 유명 제약회사 사장의 딸인 '경'이 관계를 하는 장면이다. 그들에게는 '어린 시절에 겪었던 끔찍한 고통의 경험'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러나 제약회사 사장의 딸로 태어난 '경'과 달리 아버지에 대한 기억도 없는 '태'는 엄마의 손에 이끌려 형과 함께 사이비 종교 교단에서 성장했다. '태'가 속한 교단에서는 고통을 느끼는 것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 준다고 믿었고, '태'는 특별한 부작용 없이 강력한 진통 효과를 보이는 'NSTRA-14'를 개발하는 제약사에 폭탄을 던져 사상자를 발생시킨 혐의로 무기징역형을 받고 수감 중이다. 한동안 잠잠하던 교단은 연이어 벌어진 살인 사건에 엮이고, 수사팀은 교단의 내부 사정을 잘 아는 '태'를 동행한다. 그렇게 수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경찰은 '태'의 형 '한'을 만난다. 폭력을 동원하여 일부러 통증을 유발하고, 그것을 참고 견디는 게 일종의 수련 과정이며 구원의 길이라고 믿는 '한'은 수사가 진행될수록 살인범으로 의심받는다.


"인간은 고통에 의미를 부여하여 삶을 견딥니다. 고통에 초월적인 의미는 없으며 고통은 구원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무의미한 고통을 견디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생존의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 삶을 이어나가기 위해서 인간은 의미와 구원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p.284~p.285)


제약회사 대표의 딸로 태어나 부유한 가정환경에서 성장한 '경'은 신약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생체실험의 도구로 쓰였으며, 친족 성폭력을 경험하였고, '태'의 폭탄테러로 부모님을 잃고 토네이도에 의해 어린 오빠마저 잃었다. '경에게는 이렇다 할 삶의  목적이란 게 없었다. 그녀를 살아가게 하는 건 동성 배우자인 '현'의 존재였다.


"죽고 싶었는데, 죽고 싶은데도 죽을 수 없었는데, 그래서 살아남았는데, 죽지 않고 살아서 앞으로 찾아올 고통을 또 견뎌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저주했는데, 존재를 태워버릴 듯한 공포와 분노와 절망 또한 몸 안의 고통과 마찬가지로 흔적도 증거도 남기지 않았다. 그래서 경은 칼날로 살을 가르고 불로 몸을 태웠으나 그 역시 새로운 절망과 분노만을 남길 뿐 그 순간이 지나면 고통은 사라졌다. 흉터는 고통의 기억을 되살리지 못했다. 그것은 그저 시간과 함께 바래고 쪼그라드는, 오래된 절망의 초라한 흔적일 뿐이었다. 자신의 몸 전체가 - 존재 전체가 아마 그러할 것이라고 경은 흉터를 보며 가끔 생각했다."  (p.44~p.45)


작가는 '고통'을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의 사람들을 통해 우리 사회 곳곳에 산재한 여러 부조리를 파헤치려 한다. 가정 폭력, 아동 학대, 성폭력 등 우리 사회에서 근절되지 않는 폭력과 고통의 악순환은 어쩌면 그 밑바닥에 고통을 이용하여 돈을 벌고자 하는 악의 무리가 존재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예컨대 고통을 견디는 게 구원의 길임을 설파하는 종교 집단은 우리 삶에서 상존하는 고통을 통해 그들의 권위와 부를 축적하는가 하면 제약회사는 고통을 완화하고 조절하는 약을 판매함으로써 부를 취한다. 인간에게 고통이 없었더라면 그들에게 축재의 수단은 사라지는 셈이다. 어쩌면 우리 사회는 없던 고통도 만들어 냄으로써 고통이 만연한 사회, 고통에 중독된 사회로 나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자유 시장 경제를 추종하는 한국 사회에서 고통을 감내하는 무한 경쟁의 출혈은 전 생애 동안 계속된다.


"탐색은 실패했다. 이제 경은 그 사실을 이해했다. 사람의 삶은 모두 다르고 고통의 경험도, 고통에 대한 대응도 각각 달랐다. 자신의 고통은 자신만의 것이었다."  (p.301)


로고테라피를 창시한 빅터 프랭클은 말했다. '인간에게 모든 것을 빼앗아갈 수 있어도 단 한 가지, 마지막 남은 인간의 자유,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만은 빼앗아 갈 수 없다는 것이다.'라고. 정보라 작가는 자신의 소설에서 '경'이라는 인물을 통해 이와 같은 삶의 의미를 발견해가고 있다. 혹자는 우리에게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고 말한다. 그러나 마냥 즐길 수만도 없는 게 인생 아닌가. 고통을 수용하는 방식 또한 획일적으로 교육되고 그 결과를 요구한다면 그 또한 폭력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이 종교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우리네 삶에서 고통을 완전히 제거할 수 있는 신약을 발명한다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고통을 통해 구원을 받는다는 것도 일종의 세뇌가 아닐까.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고 깨달음의 과정 역시 다양하다는 것을 작가는 자신의 소설을 통해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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