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탐정으로 있어줘
고니시 마사테루 지음, 김은모 옮김 / 망고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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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소설과는 다르게 일본소설 중 몇몇은 책의 내용을 짐작할 수 없는 묘한 제목을 달고 출간된다. 예컨대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나 <어느 날, 내 죽음에 네가 들어왔다> 등은 제목만 들어서는 도무지 소설의 장르나 내용에 대해 감을 잡기 어렵다. 소설을 다 읽은 후에야 겨우 작가나 출판사가 왜 그런 해괴한 이름을 짓게 되었는지 이해하게 된다. 책의 제목이라는 게 물론 독자의 시선을 사로잡아야 하는 본연의 목적이 있기는 하지만 일본 작가에 비해 꽤나 점잖은(?) 한국 작가들은 그런 괴상망측한 제목을 그닥 선호하지 않는 듯하다. 고니시 마사테루의 소설 <명탐정으로 있어줘> 역시 책의 제목만 들었을 때는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제목에 '명탐정'이란 단어가 들어 있으니 추리소설인 듯한데 누군가에게 부탁하는 어투인 '있어줘'는 도대체 무슨 소용이람.' 책을 읽기도 전에 그런 궁금증이 들었던 건 나만의 괜한 호기심이었을까? 아무튼.


방송작가에서 미스터리 작가로 변신하였다는 고니시 마사테루의 소설 <명탐정으로 있어줘>는 그의 미스터리 소설 데뷔작인 셈이다. 그러나 다카라지마샤(宝島社)에서 발행하는 잡지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에서 대상을 받으며 화려하게 데뷔했으니 미스터리 작가로의 변신이 그의 작가 인생에서 큰 전환점이 될 것임은 분명해 보인다. 일본의 미스터리 소설이 대개 그렇듯 대화체 형식의 문체가 주를 이루는 까닭에 소설의 전개는 빠르게 진행되는 느낌이다. 책을 읽는 독자의 입장에서는 어려움 없이 술술 읽히는 건 물론이고 말이다.


"할아버지는 부드러운 웃음을 띤 채 커피를 또 한 모금 마시고는 신중한 손놀림으로 침대 옆 테이블에 컵을 내려놓았다. "그래, 네 말이 맞단다. 난 분명 루이소체 치매 환자야." 역시 가에데의 직감이 들어맞았다. 할아버지의 검은 눈동자와 그 속의 홍채는 세공된 유리처럼 섬세했고, 빨려들 것 같은 심원함으로 가득했다."  (p.27)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는 27세의 가에데에게는 교장 선생님으로 은퇴한 71세의 할아버지 히몬야가 유일한 가족이다. 가에데의 엄마는 가에데가 태어나기도 전에 결혼식장에서 스토커에게 피습을 당해 사망했고, 아빠마저 암으로 죽었기 때문이다. 가에데에게 친구이자 부모의 역할을 톡톡히 해왔던 할아버지는 이제 환상성 치매에 걸려 거동도 자유롭지 못하고 정신도 오락가락한다. 평소에 미스터리 추리소설의 열렬한 팬인 동시에 일상에서 벌어지는 불가사의한 일들을 본인이 직접 추리하여 해결하는 것을 취미로 삼으셨던 할아버지 밑에서 성장한 가에데는 차츰 정신을 잃어가는 지금의 할아버지 모습이 못내 안타깝다. 가에데는 치매에 걸린 할아버지를 돌보며 일상의 미스터리를 소재로 할아버지와의 대화를 이어간다. 할아버지는 여전히 자신이 해결하지 못한 미스터리의 비밀을 완벽한 추리를 통해 해결하곤 한다.


""어느 날 문득 깨달았죠. 애당초 가공의 세계이기에 미스터리는 아름다운 것 아니었느냐는 사실을요. 그리고‥‥‥다시 읽는 동안 어쩌면 엄마 사건도 가공의 세계에서 벌어진 일일지도 모른다고 여길 수 있게 됐어요. 현실 도피일지도 모르죠. 굴절된 심리일 수도 있겠고요. 하지만." 자아내면 모든 것이 스토리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스토리다. '지어낸 일'이기에 아름답다. 현실 세계도, 미스터리도, SF도‥‥‥그리고 연극도."  (p.277)


가에데가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미스터리는 마치 소설 속 액자 추리소설처럼 읽힌다. '요리주점의 '밀실'', '수영장의 '인간 소실'', '33인이 있다!', '환상의 여인' 등 가에데가 들려준 소제목의 미스터리를 두 사람은 열심히 추리한다. 그러나 가에데의 엄마를 살해했던 스토커가 가에데를 납치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할아버지의 추리가 이어지는데...


"가에데는 베개 끄트머리를 꼭 잡고 병실 창밖을 보았다. 저 무수히 많은 불빛 속에서 사람들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며 지내고 있을까. 어느 시대든 보통 사람은 생각지도 못할 추악한 계책을 사용하는 인간은 존재한다. 그보다는 할아버지가 보는 환시가 훨씬 아름다운 광경일지도 모른다."  (p.360~p.361)


우리는 종종 소설보다 더 끔찍한 일을 현실 세계에서 겪기도 하지만 그럴 때마다 우리를 다시 살게 하고, 용기를 북돋우는 건 인간 본성에 대한 신뢰와 순수한 인간 본성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이 보내는 헌신적인 사랑이다. 소설에서도 가에데의 곁에는 동료 교사인 이와타와 그의 후배 시키, 누구보다도 손녀를 사랑하는 할아버지 히몬야가 있었다. 풀벌레 소리가 들릴 듯한 저녁. 멀리서부터 어둠이 내려앉고 있다. 내일이면 또 분주한 한 주가 시작될 테고, 사랑하는 누군가를 위해 우리는 또 힘든 시간을 견뎌낼 것이다. 소설 속 가에데가 그랬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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