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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직임 ㅣ 소설, 향
조경란 지음 / 작가정신 / 2024년 5월
평점 :
중편소설 <움직임>에서 작가 조경란이 그리고자 했던 가족은 소설 속 주인공인 '나'(신이경)가 가꾸던 작은 화단에 지나지 않았다. 아무런 힘이 없는 까닭에 주변의 어떤 이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가족. '담배꽁초와 빵봉지들'이 쌓인 척박한 환경이지만 거름을 주고 잘만 돌보면 언젠가 분꽃, 채송화처럼 아름답게 피어날 것이라는 기대만 가득했던 가족. 그러나 시름시름 앓던 엄마를 잃고 외할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억지로 새로 꾸린 가족은 '가족'이라기보다는 혈연관계라는 외피를 두른 '이상한 동물원'에 가까웠다.
"이 목욕탕집에 처음 왔을 때 내게 유일하게 위안이 됐던 건 이 화단뿐이었다. 사과 궤짝만 한 작은 화단에는 담배꽁초와 빵봉지들이 널려 있다. 나는 매일매일 화단에 물을 주고 쓰레기들을 골라낸다. 지금은 분꽃, 채송화가 한창이다. 곧 봉숭아도 몽우리를 터뜨릴 것 같다." (p.19)
완전한 성년도 미성년도 아닌 스무 살의 '나'는 목욕탕집 일 층의 단칸 셋방의 가족 구성원으로 편입한다. 일 층에는 여섯 가구가 세 들어 살고 있고, 이 층은 목욕탕, 삼 층은 안마시술소가 운영되고 있다. 다락방이 있는 외갓집에는 결혼도 하지 않은 외삼촌과 이모, 외할아버지가 함께 산다. 늑막염을 앓고 있는 외삼촌은 매일 한 움큼의 알약을 털어 넣고, 밤마다 흉몽에 시달리는 이모는 깊이 잠들지 못한다. '나'는 허허벌판의 벽돌공장에서 블록벽돌을 만드는 외삼촌과 외할아버지를 위해 도시락을 싸고, 빨래를 하고, 청소를 한다. 농협에서 하루 종일 돈을 세고 퇴근하는 이모는 책상도 없는 단칸방에 엎드려 새벽까지 외국어 공부를 하고, 지긋지긋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내가 산책을 다녔던 샛강과 할아버지의 벽돌공장, 문득문득 마주치곤 했던 장님들과 삼촌의 여자, 그리고 다락방이 있던 어두운 집과 남자의 방이 떠오른다. 그 밖에 더 이상 기억할 게 없다. 기억할 게 많은 사람들은 떠나지 못하는 법이다. 나는 그 모든 것들을 툭툭 털어내버린다." (p.85)
딱히 할 일을 찾지 못했던 '나'는 무료한 시간을 달래기 위해 화단을 가꾸고, 기차역을 서성이기도 하고, 앞방 남자를 기웃거리기도 한다. 나처럼 우편물이 오지 않는 앞방 남자는 가느다란 안전줄에 매달려 유리창을 닦는다. 남자 방의 열쇠 하나를 훔친 '나'는 남자가 없는 방에서 이불에 밴 남자의 체취를 맡기도 하고, 3개월이나 밀린 방세 중 한 달치를 남자 몰래 대신 내주기도 한다. 책상을 사기 위해 이모의 지갑에서 몰래 빼돌려 오랫동안 모았던 돈이었다.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나를 위해 검정고시 교재를 사다 주었던 이모는 어느 날 회사 근처로 나를 불러 점심으로 냉면을 사주었다. 그리고 아무런 말도 없이 집을 나갔다. 농협에 맡긴 고객의 돈을 들고 앞방 남자와 함께.
"서랍에서 검정고시 학습지를 꺼내 읽다 보면 또 시간이 갔다. 꽃들은 다 어디로 날아가버렸는지 한 포기도 보이지 않는다. 작고 까만 씨앗들도 떨어져 있지 않다. 아전부터 쓰레기통이었던 것처럼 담배꽁초며 과일 껍질들만 쌓여 있다. 모종삽으로 화단 흙을 쑤석거린다. 잔돌멩이가 많고 시멘트 조각들이 박혀 있다. 이 거친 흙을 뚫고 한때 꽃들이 피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지경이다. 묵묵히 흙을 파헤친다. 삼촌의 오줌이라도 몰래 뿌리고 싶다. 거름이 필요할 것이다. 내년 봄에도 나는 이 작은 화단에 꽃씨를 뿌리고 있을까." (p.98)
<움직임>에서 작가 조경란의 문체는 사뭇 건조하다. 건조하고 짧은 문장들이 흩어지는 모래알처럼, 같은 혈연이지만 함께 섞일 줄 몰랐던 외갓집 식구들처럼 내내 서걱거린다. 그럼에도 작가는 소설 속 주인공인 '나'를 통하여, 내가 가꾸는 작은 화단을 통하여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가족이란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척박한 환경에서 자란 까닭에 서로를 사랑하는 방법도, 상대방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방법도 배우지 못했지만, 때가 되면 그들 모두가 저마다의 꽃을 피울 것이라고 강하게 믿고 응원하는 관계. 아카시아 꽃잎이 하얗게 쏟아지는 5월. 꽃잎을 떨군 아까시나무는 제 소임을 다한 듯 제법 원숙하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