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하지 못한 말
임경선 지음 / 토스트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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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적'이라는 말의 느낌은 왠지 모르게 서글프다. 그래서인지 '일정한 기간에 한정되어 있는 것'이라는 뜻을 지닌 이 말을 나는 가급적 잘 쓰지 않는다. '일정한 기간'을 조금 더 확장하면 태곳적부터 지금까지의 모든 세상만물이 여기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사람도, 자연도, 우주도 다만 한시적인 존재일 뿐이라는 얘기다. 그렇게 생각하면 꽤나 허망해진다. 약간의 시차만 존재할 뿐 우리는 사라지는 존재로서의 내가 또 다른 사라지는 존재인 어떤 이와 관계를 맺고, 아등바등 다투기도 하고, 사랑하거나 미워하기도 하며, 이미 사라진 존재를 그리워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관계가 지속되었던 그 일시적인 기간을 우리는 어떻게 규정하고 추억해야 할까. 관계의 상대방이 사라진 반쪽짜리 추억도 우리는 온전한 것인 양 쉽게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을까. 습관처럼 우리는 자신에게 속한 허술한 기억을 곱씹으며 무료한 시간을 달래곤 한다. 나와 관계를 맺었던 상대방으로부터 내 기억의 전후 사정을 하나도 점검받지 못한 채. 우리의 기억은 그렇게 나와 당신(혹은 당신들)의 것이었다가 나만의 것이었다가 결국 누구의 것도 아닌 것이 되고 만다. 우리의 생명이 유한하듯 우리의 기억 역시 '한시적'인 것으로 소멸한다.


"지금 이 상태 그대로의 마음을 남기고 싶었어. 다 하지 못한 말을 하고 싶었어. 정말 좋았던 것, 너무 가슴 쓰라렸던 것, 당신을 속였던 것, 등등. 당신을 본 순간 이제야 찾았다 싶어서, 오래갈 거라고 혹은 영원할 거라고 마음대로 생각해서 순간순간 미처 하지 못했던 말들. 담아둘 수도, 버릴 수도 없었던 말들. 이 말들이 갈 곳은 단 한 곳, 오직 한 사람, 당신, 당신."  (p.207)


임경선의 소설 <다 하지 못한 말>은 여자 주인공인 '나'의 일기가 모여 한 권의 소설이 된, 지극히 사적이면서도 격정적인 사랑 이야기로 읽힌다. 나는 소설의 남녀 주인공이 사랑을 나누는 어떤 장면에서는 나도 모르게 문득 '아니 에르노'를 떠올렸으니까 말이다. 성실하고 독립적인 성향의 직장인이었던 '나'는 남성 피아니스트인 '당신'을 우연히 만나 사랑의 회오리에 빠져든다. 공연예술가로서 좌절을 마주한 '당신'의 스튜디오는 '나'의 사무실에서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있다. 방음처리가 완벽한 스튜디오는 '당신'의 숙소인 동시에 연습실이며 생활공간이 되기도 한다. '당신'을 만나기 전의 '나'는 여느 직장인과 다름없이 점심을 빠르게 해결한 후, 마음에 드는 카페에 들러 커피를 마시고 음악을 즐기는 등 평범한 직장인의 일상과 하등 다를 게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당신'이라는 세상을 알게 된 '나'는 이상한 나라에 떨어진 앨리스처럼 전혀 다른 사람이 되고 만다.


"우리는 낮에 만나면 실내에서 너무 '그짓'만 한다며, 낮 시간을 건전하게 바깥에서 보내자는 말을 가끔 나누었지. 하지만 그 말을 하면서도 어느새 상대의 셔츠와 블라우스의 단추를 풀고 있었으니, 그런 반성은 전희의 한 부분일 뿐이었어. 그러던 어느 날 당신은 스튜디오 문을 열어주자마자 내 손을 덥석 잡고 오늘은 덕수궁에 산책을 나가자고 했어."  (p.77)


임경선 작가에 대해 밝히고 넘어갈 게 있다. 과거 언제였는지 정확한 시점은 알 수 없지만 무라카미 하루키의 애독자였던 임경선 작가는 하루키 작품에 대한 오프라인 강의를 주기적으로 하고 있었고, 강의의 주요 내용이 온라인에 게시되기도 했었다. 나 역시 하루키의 애독자였던지라 임경선 작가의 강의 요지를 관심 있게 읽은 적이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임경선 작가가 전문 작가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고 하루키를 좋아하는 열혈 독자 중 한 명이겠거니 생각했었다. 그러다 우연히 가수 겸 작가인 요조와 함께 쓴 교환 일기 <여자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를 읽게 되었고, 그마저도 전문 작가의 작품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나로서는 어쩌면 <다 하지 못한 말>이라는 소설이 임경선 작가를 전문 작가로 인정하게 된 첫 번째 작품이 아닐까 싶다.


"<다 하지 못한 말>의 여자 주인공 '나'도 두려움 때문에 말을 아끼고, 어쩔 줄 모르는 고통 때문에 편지인지, 일기인지, 혹은 단순히 혼잣말인지 모를 글을 쓴다. 그것이 무엇이든 상대는 그 글을 받아 볼 필요는 없다. 이는 사랑에 빠지고 상처를 입은 이가 스스로를 구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몸부림일 뿐이니까."  (p.212 '작가의 말' 중에서)


분명한 것은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은 '한시적'이라는 사실이다. 사랑도, 미움도, 그리움도, 심지어 영원할 것만 같았던 우리의 기억마저도. 그러나 사랑에 빠진 남녀는 사랑하는 그 순간이 영원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 이별이나 상실의 아픔을 겪은 후에 우리는 결국 사랑도 미움도 '한시적'이었음을 깨닫게 되지만 그래서인지 '한시적'이라는 말은 누구에게나 가슴 절절한 의미로 다가오게 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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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나는 다만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이란 수많은 사람들이 깁고 덧대고 이어 붙여서 오늘에 이른 까닭에 비록 그것이 유구한 역사를 거쳐 오늘날 우리가 믿는 통일된 기준을 마련했다고는 하지만 그에 반기를 드는 사람이 아주 없다고는 할 수 없겠습니다. 사람들의 일반 상식도 이럴진대 멧돼지 세계에서의 일반 상식이란 얼마나 허황되고 보잘것없는 것일까요. 그래서인지 아내 멧돼지가 받은 뇌물에 대해 멧돼지의 권익을 보호하는 권익위원회의 수장인 철완 멧돼지가 배우자에 대한 제재 규정이 없다며 깔끔하게 종결 처리했습니다. 그렇다고 공직에 있는 모든 멧돼지의 배우자가 마음 놓고 뇌물을 받아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우리 부부에게나 해당하는 상식이지 다른 멧돼지에게도 널리 통용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부부는 지금 멀리 타국에 나와 있습니다. 아내 멧돼지와 함께 마음 편히 해외여행을 나온 것도 근 6개월 만이고 보니 참으로 만감이 교차합니다. 게다가 북한의 정은 멧돼지가 남한을 향해 수많은 똥풍선을 날려 보내는 바람에 리더 멧돼지로서의 체면도 말이 아니었지만 더러워서 남한에선 잠시도 더 머물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던 것입니다. 물론 정은 멧돼지가 똥풍선을 보내게 된 계기도 따지고 보면 남한에 있는 탈부기 멧돼지들이 먼저 그들을 향해 오물 풍선을 보냄으로써 그들의 화를 돋군 측면도 없지 않았습니다. 나 역시 그들의 행위를 제지하거나 말리지 않았습니다. 접경지의 멧돼지들이야 죽든 말든 자유를 위해서라면 남한의 모든 멧돼지들이 죽어나자빠진들 포기할 수 없는 가치라고 나는 예전부터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자식이 없는 우리 부부는 이미 살아볼 만큼 살았기 때문에 지금 죽는다 해도 여한이 없는 까닭입니다.


바람을 타고 날아오는 똥풍선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딱히 떠오르지 않습니다. 좌시만 할 뿐입니다. 이전의 어떤 연설에서 나는 좌시하지 않겠다고 뻥을 쳤지만 나의 뻥이야 한두 번 있었던 일이 아닌 까닭에 지금은 다들 그러려니 이해하는 편입니다. 며칠 전에는 포항 앞바다에 석유가 매장되어 있다고 뻥을 쳤더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리더 멧돼지가 그렇게 간 큰 뻥을 치기야 하겠어?' 하는 생각이었는지 대략 이틀 정도는 반신반의 믿어주는 분위기였습니다. 물론 삼일 이후부터는 '에이, 그러면 그렇지.' 하면서 믿지 않는 분위기로 되돌아가고 말았지만 말입니다.


어떤 멧돼지는 우리 사회에서 뻥과 편법이 사라지고 상식과 공정이 되살아나야 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내가 정권을 잡고 있는 한 공정과 상식은 그저 헛된 구호로만 존재할 뿐입니다. 아내 멧돼지 역시 받을 수 있는 모든 뇌물을 거절하지 않고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정은 멧돼지가 이를 비웃으며 남한을 향해 지금보다 더 많은 똥풍선을 보낸다 할지라도 아내 멧돼지의 뜻을 꺾을 생각은 없습니다. 그때마다 철완 멧돼지는 배우자에 대한 제재 규정이 없다며 종결 처리할 것입니다. 고맙게도 말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이란 오랜 세월 많은 이들이 깁고 덧대고 이어 붙여서 오늘에 이른 것이지만 리더 멧돼지인 나는 그것을 믿지 않습니다. 나는 다만 한 마리의 미친 멧돼지일 뿐입니다.


*경고 : 이 글은 단지 허구에 의한 소설일 뿐 특정 사실이 아님을 엄중 고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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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신세계
올더스 헉슬리 지음, 프레드 포드햄 그림, 문형진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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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서 벗어난 조금 다른 이야기부터 시작해 보자. 나는 사실 올더스 헉슬리의 소설 <멋진 신세계>를 여러 번 읽었던 까닭에 그때마다 비슷비슷한 내용의 진부한 리뷰를 써왔던 게 사실이다. 물론 숫자를 세어보면 리뷰를 쓰지 않고 그냥 지나쳤던 게 훨씬 더 많겠지만 말이다. <멋진 신세계>의 주요 내용이나 주제는 아니지만 나는 책을 읽을 때마다 언제나 신과 종교의 문제에 대해 생각하곤 했었다. 그러나 책에서도 그와 같은 주제에 대해서 잠시 언급되기는 하지만 주요 테마나 주제에서는 살짝 벗어난 느낌이 없지 않았기에 이전의 리뷰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게다가 종교는 언제나 민감한 문제이기에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지나 않을까 은근히 겁이 나기도 했고, 종교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맹목적인 광신자의 격분한 비판을 생각하면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오는 까닭에 일부러 외면한 측면도 없지 않았다.


나는 사실 천주교 세례를 받은 가톨릭 신자이다. 물론 바쁘다는 핑계로 주일 미사마저 거르기 일쑤인, 일종의 패션 신자에 가깝지만 말이다. 내가 여타 종교에 대해 깊이 연구한 바는 없지만 종교가 존속하기 위한 기본적인 전제 조건은 불행한 사람들이 자신이 믿는(혹은 믿으려고 하는) 신과 교리를 통하여 자신의 처지를 얼마나 잘 납득하고 이해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달려 있다고 믿는다. 즉 종교란 행복한 사람보다는 불행한 사람을 위한 시스템이며, 종교를 통하여 그들이 처한 작금의 다급한 처지를 개선해 주겠다는 헛된 약속으로 그들의 환심을 사려한다기보다는 지금은 마음의 위로 외에는 달리 해줄 게 없지만 내세에는 반드시 보상을 받을 것이라는 확신을 심어줌으로써 현재의 어려움을 참고 견디라는 메시지로 그들을 설득한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는 경구는 어찌 보면 교회 입장에서의 가장 강력하고 효과적인 영업 멘트가 아닐까 싶다. 사는 게 곧 고통임을 설파하는 불교의 교리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내세에서의 삶은 어쩔 수 없는 경쟁과 불평등이 상존하는 까닭에 신이 아니라 신의 할아비가 온다 하더라도 현실에서 이를 해결할 방법은 딱히 없는 것이다.



'그래픽 노블'로 출간된 <멋진 신세계>의 장점은 가독력과 이해력이 높아졌다는 점이다. 물론 시각적인 효과보다는 묘사에 의한 상상력을 중시하는 독자라면 '그래픽 노블'의 출간에 대해 환영하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문자 텍스트보다는 시각적 이미지나 동영상에 익숙한 현대인의 기호에 맞춰 우리가 한 번쯤 읽어보아야 할 고전 소설을 그래픽 노블로 재출간하는 건 그리 나쁘지 않은 선택이지 싶다.


워낙 유명한 소설인지라 줄거리는 대충 알겠지만 반역자였던 왓슨과 총독의 대화는 의미심장하다. 총독의 주장을 옮겨 본다.


"사람은 젊음과 번영을 누릴 때에만 신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으나, 그 독립이 인생의 최후까지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글쎄, 우린 지금 인생의 최후까지 젊음과 번영을 보장받고 있다네. "종교적 신앙심이 우리가 겪는 모든 상실을 보상해 줄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보상을 받을 만한 그 어떤 상실도 없는 걸. 그리고, 젊음에 대한 갈망이 완전히 충족되었는데 왜 그 대체제를 찾아 헤매야 할까?  (p.202)


<멋진 신세계>의 작가 올더스 헉슬리 역시 동의하는 바이지만 불행한 사람보다 행복한 사람의 비율이 조금이라도 높다면 종교는 존재하지 않는다. 불행한 사람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은 까닭에 종교는 존재하며 신에 대한 갈망과 기도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이다. 결국 지구상의 모든 종교는 인간의 불행을 밑천으로 살아남는 것이다. 인간의 풍요와 만족, 온갖 유희와 쾌락 등이 과학이 발달한 먼 미래에도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공평하게 제공될 리 없지만 그와 같은 불평등한 구조 역시 종교를 영구적으로 존재하게 하는 하나의 틀임은 분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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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 기온은 높지만 아침저녁으로는 선선한 바람이 부는, 기분 좋은 날들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징검다리 휴일 사이에 끼인 금요일 오후, 휴가를 떠난 직원들의 빈자리에서 "야호!" 소리가 수시로 들리는 듯한 착각 속에서 출근한 직원들의 후줄근한 얼굴들이 겹쳐집니다. 휴가 신청 순위에서 밀렸거나 급하게 처리해야 할 피치 못할 업무 때문에 출근을 강행할 수밖에 없었던 동료들. 나는 그들 한 명 한 명으로부터 숙명과도 같은 직장인의 비애를 읽을 수 있었습니다. 오늘의 하늘처럼 어두웠던 깊은 우울과 함께 말입니다. 한 주를 마감하는 금요일이고 이틀 동안의 휴일이 기다리고 있다는 말은 그들에게 그닥 큰 위로가 되지는 못하는 듯했습니다.


한 주를 돌이켜보면 금주의 가장 큰 이슈는 단연 동해안 유전 소식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지난 3일 윤석열 대통령은 "포항 영일만 앞바다에서 막대한 양의 석유와 가스가 매장돼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물리탐사 결과가 나왔다"며 "최대 140억 배럴에 달하는 석유와 가스가 매장돼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연구기관과 전문가들 검증도 거쳤다"고 주장했습니다. 갑작스럽고 뜬금없는 발표였습니다. 보수 언론과 정부 관계자들은 대통령의 발표가 마치 산유국 대한민국의 증표라도 되는 양 호들갑을 떨었고, 관련 주가는 폭등했습니다. 나는 인터넷 매체를 통해 그 소식을 전해 듣자마자 주가조작의 기시감이 들었습니다. 대통령의 지근거리에 주가조작 전문가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대한민국 국민 중 모르는 이가 없을 테니까 말입니다. 21%라는 처참하게 낮은 지지율을 회복할 방법은 전무해 보이는 까닭에 대통령이라는 지위와 권력을 이용하여 실컷 돈이나 벌어보자는 쪽으로 국정 기조를 바꾼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시추공 하나를 박는 데 일천억 원가량의 천문학적인 비용이 든다지만 그게 어디 대통령의 개인 돈이겠습니까. 어차피 그 많은 돈이 세금에서 지출되더라도 석유의 존재 유무는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후 한참이나 지나서야 밝혀질 테니까 말입니다. 대통령의 국정 브리핑을 적절히 이용만 하면 관련 종목의 주가를 띄우는 일이야 그야말로 '누워서 떡 먹기'가 아닐 수 없고, 그 소식을 가장 먼저 알 수 있는 주가조작 전문가는 차명계좌를 이용하여 원하는 만큼 돈을 벌 수 있지 않겠습니까.


어제는 제69회 현충일이었습니다. 한국전쟁 참전용사이셨던 저의 선친 역시 현충원에 잠들어 계신 까닭에 현충일은 왠지 모르게 숙연해지곤 합니다. 대통령은 추념사에서 "북한 정권은 역사의 진보를 거부하고 퇴행의 길을 걸으며 우리의 삶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서해상 포사격과 미사일 발사에 이어 최근에는 정상적인 나라라면 부끄러워할 수밖에 없는 비열한 방식의 도발까지 감행했습니다. 정부는 이러한 북한의 위협을 결코 좌시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생계비가 탐이 나서 지속적으로 삐라를 살포하는 탈북자 단체의 행위 역시 비열한 방식의 도발이 아닐 수 없겠습니다만 이에 맞대응하는 북한의 오물 풍선을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막겠다는 건지, 아니면 그냥 좌시만 하겠다는 건지 도대체 알 수 없는 연설이었습니다.


주말 휴일에는 비가 예보되어 있습니다. 벌써부터 습도가 높아지는지 기온이 떨어져도 후텁지근합니다. 로또 복권을 사는 것처럼 어느 날 있을 대통령의 국정 브리핑이 내가 보유한 주식에 관련된 내용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더도 말고 두 번만 상한가를 갔으면 좋겠습니다. 비실비실하던 '한국석유' 주가가 그랬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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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탈로니아 찬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6
조지 오웰 지음, 정영목 옮김 / 민음사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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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보다 더 큰 그릇을 알지 못한다. 매 순간 지구에 사는 수십억 명의 기억을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을 지구가 아닌 우주의 차원으로 넓힌다면 '시간'은 가늠할 수 없는 용량으로 늘어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시간'에 담긴 인류의 과거 기억들을 찾아 여행을 떠나다 보면 장소와 시간은 다르지만 현재의 상황과 흡사한 어떤 사건들과 더러 마주치게 된다. 역사는 끝없이 반복되는 까닭에 실체적인 사실은 기록을 통해 확인한다고 하지만 기록되지 않은 개개인의 감정이나 느낌은 또 어찌하랴. 우리는 역사 속 실체가 업는 누군가의 감정이 그리울 때 그 시절에 쓰인 시를 읊거나 소설을 읽는다. 그렇게 우리가 시대를 오가며 감정을 공유하는 까닭은 변하지 않는 인간의 도리를 '시간' 속에서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조지 오웰의 <카탈로니아 찬가> 역시 그런 소설 중 한 권이 아닐까. 인간이라면 마땅히 읽어야 할, 스페인 내전에서 죽어간 어떤 순수한 영혼을 통해 밝혀진 불멸의 정의를 깨우치는 기회를 갖기 위해.


"나는 신문 기사를 쓸까 하는 생각으로 스페인에 갔다. 하지만 가자마자 의용군에 입대했다. 그 시기, 그 분위기에서는 그것이 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유일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때까지도 카탈로니아는 무정부주의자들이 실질적으로 장악하고 있었다. 혁명은 여전히 활발하게 진행중이었다."  (p.11)


일반 독자들이 하는 조지 오웰에 대한 가장 큰 오해는 그가 단지 <1984>나 <동물농장>과 같은 소설을 통해 문단에 진출했을 거라는 막연한 추측이다. 그러나 이튼을 졸업한 후 대학에 진학하지 않았던 그는 인도 제국경찰에 들어가 버마(미얀마)에 부임하였고, 그곳에서 제국주의의 모순과 한계를 절감하였던 그는 제국주의의 허상을 비판하는 일에 누구보다도 앞장서게 되는데 그것이 그가 문필 활동을 하게 된 계기였다고 한다. 파리에서 노숙자 생활을 경험했던 그가 그때의 기억을 되살려 쓴 르포르타주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 잉글랜드 북부 노동자의 가난한 삶을 그린 <위건 부두로 가는 길>, 1937년 1월 스페인 통일노동자당 민병대 소속으로 스페인 내전에 참전하여 바르셀로나 전선에서 목에 총상을 입고 스페인을 탈출하여 프랑스로 건너간 후 그때 느꼈던 이데올로기에 대한 환멸을 기록한 <카탈로니아 찬가> 등은 기자 혹은 에세이스트로서의 그의 역량을 여실히 드러낸 작품으로서 많은 비평가들도 인정하는 바 나 역시 산문가로서 조지 오웰의 천재성을 실감하게 된다.


"아침 5시, 한쪽 구석에서 있었던 일이다. 아침 5시는 늘 위험한 시간이었다. 동이 트면서 해를 등지게 되기 때문이다. 흉벽 위로 머리를 내밀면 하늘을 배경으로 머리 윤곽이 뚜렷이 드러났다. 나는 보초들에게 교대 준비를 하라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하는 도중이었는데 갑자기 어떤 느낌이 왔다. 아주 생생하게 기억하기는 하지만, 그 느낌을 말로 표현하기는 무척 어렵다. 대략적으로 말해서, 폭발 한가운데 서 있는 느낌이었다. 크게 꽝 하는 소리와 함께 사방으로 빛이 번쩍거려 앞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엄청난 충격을 느꼈다." 통증은 없었다. 아주 격렬한 충격만 느꼈을 뿐이다. 전극에 몸이 닿았을 때의 느낌과 동시에 완전한 무력감을 느꼈다. 짓눌리고 움츠러들어 무(無)로 변해버리는 느낌이었다."  (p.238)


자신의 의용군 체험담과 아울러 스페인 공산당에 대한 고발을 담은 <카탈로니아 찬가>는 조지 오웰의 이력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소련이 연합국의 일원이었던 관계로 소련에 대한 비판을 쉬쉬하는 분위기였지만 오웰은 "서양의 사회주의 운동에 소련의 신화가 끼친 부정적 영향"에 맞서 싸우려 노력했다는 점이다. 조지 오웰은 자신이 왜 의용군에 입대해 싸웠는지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무엇을 위해 싸우느냐고 묻는다면 '공동의 품위를 위해서'라고 대답했을 것이다."라고. 어쩌면 우리는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인 '공동의 품위'를 너무 등한시하며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법은 만인에게 평등하지 않고 만 명에게만 평등하다.'고 비꼬았던 고 노회찬 의원의 말이 지금도 생생하다.


"이상한 일이지만, 그 경험 전체를 통해 인간의 품위에 대한 나의 믿음은 약해지기는커녕 오히려 강해졌다. 내가 한 이야기가 사람들을 오도하지 않기 바란다.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누구도 완벽하게 진실하지도 않고 또 진실할 수도 없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본 것 외에는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확신하기 힘들며, 모두가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당파적인 입장에서 글을 쓰게 된다."  (p.294)


조지 오웰을 떠올릴 때마다 나는 언제나 김훈 작가를 생각하곤 한다. 두 사람 모두 저널리스트로서 문단 활동을 시작했다는 점에서 글의 논리성이나 문장의 적확성을 따지는 면에서 무척이나 닮아 있다. 다만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의 맹점이나 허점을 적극적으로 비판하고자 했던 조지 오웰에 비해 김훈 작가는 너무나 나약한 측면이 있는 건 사실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민간인 학살, 윤석열 정권의 민주주의 파괴 등 우리가 직면한 위기를 가장 먼저 감지하여야 하는 이가 모든 예술가라면 이에 가장 선봉에 서서 저항해야 할 사람들 역시 바로 그들일 것이다. 문학이, 그림이, 음악이 지구인의 아픔을 보듬지 않는다면 그것은 다만 헛된 노력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 정도의 작품은 감정이 없는 인공지능에 맡겨도 충분할 테니까 말이다. 우리가 예술을 감상하는 까닭은 서로의 가슴으로 흐르는 감정을 공유할 수 있기 때문일 터 그것이 없다면 예술은 무슨 소용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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