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하지 못한 말
임경선 지음 / 토스트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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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적'이라는 말의 느낌은 왠지 모르게 서글프다. 그래서인지 '일정한 기간에 한정되어 있는 것'이라는 뜻을 지닌 이 말을 나는 가급적 잘 쓰지 않는다. '일정한 기간'을 조금 더 확장하면 태곳적부터 지금까지의 모든 세상만물이 여기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사람도, 자연도, 우주도 다만 한시적인 존재일 뿐이라는 얘기다. 그렇게 생각하면 꽤나 허망해진다. 약간의 시차만 존재할 뿐 우리는 사라지는 존재로서의 내가 또 다른 사라지는 존재인 어떤 이와 관계를 맺고, 아등바등 다투기도 하고, 사랑하거나 미워하기도 하며, 이미 사라진 존재를 그리워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관계가 지속되었던 그 일시적인 기간을 우리는 어떻게 규정하고 추억해야 할까. 관계의 상대방이 사라진 반쪽짜리 추억도 우리는 온전한 것인 양 쉽게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을까. 습관처럼 우리는 자신에게 속한 허술한 기억을 곱씹으며 무료한 시간을 달래곤 한다. 나와 관계를 맺었던 상대방으로부터 내 기억의 전후 사정을 하나도 점검받지 못한 채. 우리의 기억은 그렇게 나와 당신(혹은 당신들)의 것이었다가 나만의 것이었다가 결국 누구의 것도 아닌 것이 되고 만다. 우리의 생명이 유한하듯 우리의 기억 역시 '한시적'인 것으로 소멸한다.


"지금 이 상태 그대로의 마음을 남기고 싶었어. 다 하지 못한 말을 하고 싶었어. 정말 좋았던 것, 너무 가슴 쓰라렸던 것, 당신을 속였던 것, 등등. 당신을 본 순간 이제야 찾았다 싶어서, 오래갈 거라고 혹은 영원할 거라고 마음대로 생각해서 순간순간 미처 하지 못했던 말들. 담아둘 수도, 버릴 수도 없었던 말들. 이 말들이 갈 곳은 단 한 곳, 오직 한 사람, 당신, 당신."  (p.207)


임경선의 소설 <다 하지 못한 말>은 여자 주인공인 '나'의 일기가 모여 한 권의 소설이 된, 지극히 사적이면서도 격정적인 사랑 이야기로 읽힌다. 나는 소설의 남녀 주인공이 사랑을 나누는 어떤 장면에서는 나도 모르게 문득 '아니 에르노'를 떠올렸으니까 말이다. 성실하고 독립적인 성향의 직장인이었던 '나'는 남성 피아니스트인 '당신'을 우연히 만나 사랑의 회오리에 빠져든다. 공연예술가로서 좌절을 마주한 '당신'의 스튜디오는 '나'의 사무실에서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있다. 방음처리가 완벽한 스튜디오는 '당신'의 숙소인 동시에 연습실이며 생활공간이 되기도 한다. '당신'을 만나기 전의 '나'는 여느 직장인과 다름없이 점심을 빠르게 해결한 후, 마음에 드는 카페에 들러 커피를 마시고 음악을 즐기는 등 평범한 직장인의 일상과 하등 다를 게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당신'이라는 세상을 알게 된 '나'는 이상한 나라에 떨어진 앨리스처럼 전혀 다른 사람이 되고 만다.


"우리는 낮에 만나면 실내에서 너무 '그짓'만 한다며, 낮 시간을 건전하게 바깥에서 보내자는 말을 가끔 나누었지. 하지만 그 말을 하면서도 어느새 상대의 셔츠와 블라우스의 단추를 풀고 있었으니, 그런 반성은 전희의 한 부분일 뿐이었어. 그러던 어느 날 당신은 스튜디오 문을 열어주자마자 내 손을 덥석 잡고 오늘은 덕수궁에 산책을 나가자고 했어."  (p.77)


임경선 작가에 대해 밝히고 넘어갈 게 있다. 과거 언제였는지 정확한 시점은 알 수 없지만 무라카미 하루키의 애독자였던 임경선 작가는 하루키 작품에 대한 오프라인 강의를 주기적으로 하고 있었고, 강의의 주요 내용이 온라인에 게시되기도 했었다. 나 역시 하루키의 애독자였던지라 임경선 작가의 강의 요지를 관심 있게 읽은 적이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임경선 작가가 전문 작가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고 하루키를 좋아하는 열혈 독자 중 한 명이겠거니 생각했었다. 그러다 우연히 가수 겸 작가인 요조와 함께 쓴 교환 일기 <여자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를 읽게 되었고, 그마저도 전문 작가의 작품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나로서는 어쩌면 <다 하지 못한 말>이라는 소설이 임경선 작가를 전문 작가로 인정하게 된 첫 번째 작품이 아닐까 싶다.


"<다 하지 못한 말>의 여자 주인공 '나'도 두려움 때문에 말을 아끼고, 어쩔 줄 모르는 고통 때문에 편지인지, 일기인지, 혹은 단순히 혼잣말인지 모를 글을 쓴다. 그것이 무엇이든 상대는 그 글을 받아 볼 필요는 없다. 이는 사랑에 빠지고 상처를 입은 이가 스스로를 구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몸부림일 뿐이니까."  (p.212 '작가의 말' 중에서)


분명한 것은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은 '한시적'이라는 사실이다. 사랑도, 미움도, 그리움도, 심지어 영원할 것만 같았던 우리의 기억마저도. 그러나 사랑에 빠진 남녀는 사랑하는 그 순간이 영원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 이별이나 상실의 아픔을 겪은 후에 우리는 결국 사랑도 미움도 '한시적'이었음을 깨닫게 되지만 그래서인지 '한시적'이라는 말은 누구에게나 가슴 절절한 의미로 다가오게 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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