밖에는 지금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비로 인한 큰 피해만 없다면 비 내리는 풍경은 제법 운치가 있습니다. 이런 날이면 평평한 듯 보였던 학교 운동장에도 낮은 골을 따라 흐르는 여러 갈래의 물길이 마치 한 폭의 추상화를 그려 놓은 듯 멋진 풍경을 연출하곤 합니다. 그렇게 각각 흩어져서 흐르던 물길도 수로를 만나 하나가 되어 흘러갑니다. 멀지 않은 과거에 우리 이웃들의 마음도 비 내리는 날의 물길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듯합니다. 각각의 방향으로 흐르던 '마음길'이 오늘처럼 깊은 우울이 내려앉는 날이면 비슷한 마음결로 모여 하나의 길을 내고 어느새 더 큰 '마음길'이 되어 내를 이루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공감(共感)'이라 불렀습니다. 무너진 논두렁을 손보기 위해 집을 나섰던 사람도, 봇도랑으로 콸콸 넘치는 물을 걱정스레 바라보던 사람도 종래에는 결국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서로를 걱정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언제부턴가 우리의 '마음길'은 예전처럼 길게 흐르지 않습니다. 누군가의 마음을 만나 더 큰 '마음길'이 되고, 종래에는 내를 이루고 도도하게 흐르는 공감대를 형성하는 일은 우리의 눈으로 직접 목도하기 힘든, 극히 드문 경우가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 각자의 마음이 낮은 골을 따라 흐르다가 어느 순간 멈추어버려 더이상 흐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와 당신의 마음이 두물머리에서 만나 하나가 되어 흐르는 일은 더이상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흐르는 데도 인내력이 필요한 까닭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마음의 힘줄, '인내력'에서 힘 력(力)자를 잃고 말았습니다. 마음의 체력이 약해진 현대인들은 어떤 일에 대해 파르르 분노하다가도 어느 순간 쉽게 풀어지곤 합니다. 나의 마음이 닿기도 전에 당신의 마음길이 닫히고 말았던 것입니다. 결국 나와 당신은 '공감'이라는 마음의 광장에서 만나 내를 이루거나 강이 되어 흐를 수는 없겠습니다.


밖에는 여전히 비가 내리고 나는 베란다 창문에 어린 빗줄기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습니다. 마냥 고르게만 보이는 유리창에도 우리가 모르는 높낮이가 존재하는지 창에 부딪히는 빗물은 일정한 길을 따라 꾸불꾸불 고집스럽게 흘러내립니다. 빗소리는 여전히 끊이지 않고 우리에게 큰 피해만 없다면 비 내리는 풍경은 제법 운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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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루스트와 오징어 - 독서의 탄생부터 난독증까지, 책 읽는 뇌에 관한 모든 것
매리언 울프 지음, 이희수 옮김 / 어크로스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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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이던 아들은 휴학을 하고 얼마 전에 군인이 되었다. 물론 아직은 훈련병 신분이지만 말이다. '까꿍' 놀이를 좋아하던 아들이 어느새 자라 군에 입대를 한다는 사실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20여 년의 세월이 무성영화의 필름처럼 빠르게 감긴 느낌이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아들은 순하고 명랑한 아이였다. 그러나 심하지는 않았지만 아토피성 피부염을 앓았던 아들의 건강에 대해 예민할 정도로 신경을 썼던 아내는 가뜩이나 약했던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아들의 먹거리와 위생에 온 힘을 쏟았다. 달리 도와줄 게 없었던 나는 하루 건너 한 번씩 아들을 데리고 잤다. 나와 함께 자는 날이면 아들은 늘 <사과가 쿵>이나 <마녀 위니>를 들고 와서 내게 읽어 달라곤 했다. 다 읽고 나면 다시 제일 첫 페이지를 펴서 다시, 금세 또 다 읽으면 다시 첫 페이지를... 나는 그렇게 책 읽기 개미지옥에 빠져 벗어나지 못했다.


"동화를 들으면서 감정을 통해 다른 사람들과 연결되는 동시에 타인과 나를 구분 짓는 경계선이 있다는 점을 인지하기 시작할 무렵, 이번에는 보다 인지적인 차원의 통찰이 떠오른다.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책 속에는 마치 그림처럼 늘 똑같은 자리에 놓여 있는 길고 짧은 단어들이 가득하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점진적인 지적 발견을 시작으로 아이는 책에는 고유한 언어가 있다는 보다 넓고 암묵적인 발견에 도달하게 된다."  (p.166)


지금도 나는 아들이 어떻게 읽고 쓰는 것을 스스로 터득하게 되었는지 자세히 알지 못한다. 언젠가 집에 놀러 오셨던 수녀님 앞에서 자신의 이름을 써보겠노라며 연필을 쥔 손에 힘을 주기 위해 바들바들 떨며 글자를 써 내려가던 아들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아들은 그렇게 한글을 읽고 쓰는 법을 익혔고, 차를 타고 가면서도 도로 주변의 도로 표지판을 빼놓지 않고 읽었다. '주차 금지'라는 말을 들었던 할아버지가 '금지'가 무슨 뜻이냐? 고 물었을 때, 아들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작은 두 손을 X자로 겹쳐 주차하면 안 된다는 뜻이라고 말하였다. 어린 아들의 설명을 듣고 대견해하시던 할아버지는 지금은 우리 곁에 없다.


인지신경학자이자 아동발달학자인 매리언 울프의 저서 <프루스트와 오징어>를 읽는 내내 나는 아들의 성장 과정을 떠올렸다. 1부 '뇌는 어떻게 글을 읽게 되었을까', 2부 '뇌가 독서를 배우는 방법', 3부 '뇌가 독서를 배우지 못할 때' 등 총 3부로 구성된 이 책은 인류가 독서를 통해 지식을 습득하고, 문화를 창조하며, 대를 이어 정보를 전달하는 등 인류의 독보적이면서 경이로운 독서 능력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구체적이면서도 과학적인 설명으로 독자들의 이해를 돕는다. 독서의 과정이 먼저 글자를 시각적으로 인지하고, 뇌가 그 정보를 처리하고, 그것을 우리의 기억과 연결시키고, 그렇게 누적된 지식을 바탕으로 우리는 자신의 삶에서 필요한 지혜를 얻게 된다. 독서는 이처럼 경이로운 과정이라는 사실을 저자인 매리언 울프는 독자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나 역시 이 책을 읽지 않았더라면 아들의 성장 과정을 하나하나 되짚어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독서가 아들의 성장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미쳤는지 미처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주말마다 했던 대형서점으로의 나들이를 기쁘게 받아들였던 아들, 유학 한 번 다녀온 적 없고 과외 한 번 시킨 적 없는 아들이 스스로 공부하여 토익 만점을 받는 기적과도 같은 성취를 보여주었던 이면에는 어쩌면 '독서'라는 비밀 병기가 숨어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저자는 이 책에서 난독증에 대해 비중 있게 다루고 있다. 세계적인 읽기 연구자인 저자가 난독증에 걸린 아들을 키우게 되었다는 건 하나의 아이러니일지도 모른다. 물론 그런 이유로 난독증에 대해 더 깊이 파고들었을 수도 있었겠지만 말이다. 토머스 에디슨, 레오나르도 다빈치 등 창의적인 천재들에게도 자주 발견되는 것을 보면 독서는 타고난 능력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이다.


"과학의 관점에서 난독증 연구는 빠른 속도로 헤엄치지 못하는 새끼 오징어를 연구하는 것과 비슷하다. 그 오징어가 가진 약간 별난 회로를 들여다보면 헤엄을 잘 치기 위해 필요한 것과 그 오징어가 다른 오징어들처럼 헤엄치지 않아도 죽지 않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독특한 재능에 대해 알 수 있다."  (p.57~p.58)


인류는 지금 디지털 대 전환기의 시기에 직면해 있다. 소크라테스가 독서에 대해 염려했던 것처럼 독서에 익숙한 우리들 역시 동영상 매체를 탐닉하는 다음 세대의 행동 양식을 비판한다. 그러나 문자 언어가 아닌 다른 형태의 언어를 통해서도 독서하는 뇌의 발달은 지속될 것이다.


"'초월적 사고를 하는 시간'이라는 이 신비한 무형적 산물이 바로 독서하는 뇌가 이룩한 가장 큰 업적이다. 몇 밀리세컨드에 불과한 이 내재적 시간이 지식을 발전시키고 덕에 대해 사색하고 단 한 번도 표현되지 않았던 것을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인간 능력의 발판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표현된 말은 다시 새로운 도약대를 만든다. 그러면 인간은 그것을 딛고 심연으로 돌진해 들어갈 수도, 창공으로 날아오를 수도 있다."  (p.389)


불쾌지수가 높아지는 요즘, 자리에 앉아 진득하게 책을 읽는 일도 쉽지 않다. 그러나 매리언 울프가 설명하는 인류가 독서 능력을 취득하게 되는 흥미진진한 과정을 책으로 읽다 보면 시간은 어느새 훌쩍 흘러가게 된다. 별도의 피서가 필요치 않은 것이다. 책을 읽고 깊이 사색할 수 있는 이 시간이야말로 삶에 있어서 얼마나 귀중하고 값진 기회인가. 매리언 울프는 우리에게 그런 소중한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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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 자맥질을 하듯 내리다 그치기를 반복하던 비는 새벽이 되어서야 멈췄다. 하염없는 빗소리와 함께 까무룩 선잠이 들었다가 깨기를 반복하던 나도 새벽이 되어서야 겨우 잠에 빠져들 수 있었다. 이렇게 잠을 설친 다음날이면 오랫동안 방치한 낡은 기계를 돌리듯 이곳저곳이 끽끽 소리를 내며 성치 않은 티를 내는 것이다. 늦은 아침을 먹고 가까운 공원으로 산책을 나왔다. 하늘은 여전히 어둡고 빗발이 잦아든 휴일 오전의 대기는 텁텁하다.



백수린 작가의 산문집 <다정한 매일매일>을 어제 받았다. 작가의 소설을 두어 권쯤 읽어본 게 다인 나로서는 백수린 작가에 대한 이렇다 할 정보를 가진 게 없다. 책을 펼쳐서 한두 꼭지의 산문을 읽어보았다. 길지 않은 각각의 글들은 작가의 일상과 음식, 과거에 읽었던 한 권의 책이 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글에서 언뜻언듯 드러나는 다정함의 온기들. 글이란 어쩌면 자신의 생각을 문자를 통해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문자를 통해 자신의 체온 속으로 누군가의 느낌이 스며들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눅눅했던 대기가 조금씩 가벼워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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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습기를 머금은 바람결. 나는 그 공기 알갱이 사이사이로 스며든 물 알갱이들을 하나하나 다 헤아릴 수 있을 듯합니다. 평소 같았으면 그러려니 흘려보냈을 일이지만 오늘 남쪽에서 불어와 볼을 스쳐가는 바람은 그 습습한 기운으로 인해 장맛비에 대한 걱정을 한껏 끌어올렸던 것입니다. 프랑스 시인 폴 발레리가 쓴 <해변의 묘지> 마지막 연은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로 시작하는 것처럼 우리도 역시 바람이 불고 장맛비가 세차게 내린다고 할지라도 '살아야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다시 세워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인지 대한민국 국회 국민동의청원 사이트에 올라온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 즉각 발의 요청에 관한 청원'에 58만 명 이상의 국민이 동의한 듯합니다. 오죽하면 대기인원이 몰리는 바람에 접속지연 사태까지 벌어졌겠습니까. 나라가 이 지경이 되었지만 넋 놓고 앉아있기보다는 다시 한번 힘을 내 '살아봐야겠다'고 생각한 국민들이 적어도 58만 명 이상이나 된다는 의미일 테지요.


김진표 전 국회의장의 회고록에 등장한 윤 대통령의 말이 언론의 이슈가 되고 있습니다.  2022년 12월 5일 윤 대통령과의 국가조찬기도회 독대 상황에서 대통령이 10.29 참사가 특정 세력에 의해 유도되고 조작된 사건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 정권은 무능함을 넘어 사악하기까지 한, 정말로 더이상 존재해서는 안 될 무도한 정권임을 증명한 사례라고 하겠습니다. 물론 채 해병 사망 원인을 밝히는 것에도 소극적이거나 앞장서서 방해하려는 행태를 보면 현 정권이 결코 국민 편에 있지 않다는 걸 쉽게 판단할 수 있지만 말입니다.


현 정권의 조세정책만 보더라도 그 뻔뻔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적어도 일말의 양심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일부 계층에게만 해당이 되는 상속세율 인하를 말하기 전에 전 국민에게 혜택이 가는 소득세 조정을 먼저 말했을 듯합니다. 예컨대 소득세율을  이만큼 인하할 테니 상속세도 이 정도로 조정하는 게 어떨까요?라고 묻는 게 순서 아닐까요? 금투세도 다르지 않습니다. 금투세 대상은 극소수의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세금입니다. 그렇다면 주식투자를 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혜택을 입는 거래세를 없앨 테니 금투세도 없애도록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하는 게 마땅한 순서이겠지요. 그러나 국민을 개, 돼지로 취급하는 현 정부는 그와 같은 말은 절대로 하지 않습니다. 정부 재정의 원천인 세금이 하나의 세목에서 줄어든다면 반드시 다른 세목에서 늘어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상속세가 줄어들면 소득세든 부가세든 조세 저항이 심하지 않은 세목에서 늘려야 하는 게 당연한 결과이겠지요. 부가세 인상을 들먹이는 것도 그런 까닭입니다. 다 알다시피 부가세는 간접세인 까닭에 조세저항이 심하지 않으니까요.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나는 그 공기 알갱이들에 스며든 아주 작은 물방울들의 개수를 모두 헤아릴 수 있을 듯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우리 자신을 시험에 들게 하는 장마와 맞서 싸우고, 뒤이어 다가오는 바람 한 점 없는 무더위를 이겨내면 어느새 아침저녁으로 소슬한 바람이 부는 초가을의 입구에 서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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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그리고 저녁
욘 포세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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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경과를 무시하거나, 건너뛰거나, 사건의 순서를 뒤바꾸기만 해도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하게 마련이다. 한 방향으로 흐르는 시간의 순리를 우리는 단 한 번도 거스르거나 의심해 본 적 없기 때문이다. 주어진 삶에서 시간만큼 익숙한 것도 다시없을 터, 시간은 그만큼 우리의 삶을 강한 힘으로 움켜쥐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죽음 저편에서 바라보면 아무것도 아닌 듯 하찮게 보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지난해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욘 포세가 쓴 <아침 그리고 저녁>은 빽빽한 시간의 경과를 가볍게 무시하는 소설이다. 익숙했던 흐름에서 한 발 물러선 이 소설을 대하는 태도 혹은 책을 읽는 독자의 첫 번째 반응은 어쩌면 '낯섦'이라는 단어로 귀결될지도 모른다. 이제 막 시간의 도약대에 선 요한네스가 번지점프를 하듯 기척도 없이 삶의 이쪽 편에서 죽음의 저쪽 편으로 옮겨갔기 때문이다. 그렇다. 소설의 1부에서 어부인 올라이와 그의 아내 마르타를 부모로 정한 채 산파인 안나의 도움을 받아 이제 막 삶을 시작한 요한네스. 올라이 부부에게는 둘째인 동시에 할아버지의 이름을 물려받아 요한네스로 불렸던 그가 아니었던가.


"아가 요한네스, 다 잘될 거다, 올라이가 말한다 요한네스라고 부를 거란 말이지요, 늙은 안나가 말한다 그리고 더이상 고요한 것은 없고 모든 것이 그저 날카로운 울림을 지닌 움직임이 되어 열리고 닫힌다 그리고 그래 그래야 한다 그리고 느리고 빠른 움직임들은 맞서고 합쳐지고 그리고 확실히 아무것도 아닌 것은 없다 아무것도 모든 것은 움직임일 뿐이며 색도 규칙적인 박동도 없이 더이상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는다 고요히 고요히 앞으로 모든 것이 그저 나아간다 그리고 더이상 그 무엇도 구별할 수 없고 어린 요한네스는 큰 소리로 운다 그리고 아이의 목소리는 우렁차게 울린다 그리고 아이는 목소리 안에 있고 목소리 밖에 있어 홀로 색깔도 소리도 빛도 없이 아픈 것은 그의 팔 다리 배가 아니라 이 빛 이것 이 움직임들 이것 저 숨 이것들이 아픈 것이다"  (p.25~p.26)


시간의 경과를 무시하는 작가는 문장의 순서를 결정하는 마침표나 쉼표, 느낌표 등 거추장스러운 문장부호를 가볍게 생략한다. 오직 자신의 감각을 날카롭게 벼린 채, 그 감각을 통해 인지되는 모든 것들을 문자 텍스트로 전환하기 위해 분투할 뿐이다. 그와 같은 과정은 마치 빅뱅 직후 플라스마 상태의 우주처럼 모든 게 뒤섞이고 혼란스러운, 물질과 시간마저 제 형태를 갖추지 못한 원시 우주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작가는 어쩌면 우리의 모든 삶과 죽음이 시간을 무시해도 좋은 빅뱅의 순간과 무척이나 닮았다고 느꼈는지도 모른다.


1부가 우렁찬 울음소리와 함께 삶을 시작한 요한네스의 탄생의 순간을 묘사했다면 2부는 노인이 된 요한네스의 자연스러운 일상으로 옮겨간다. 찌뿌둥한 몸으로 누워 있던 그는 담배 생각이 간절하여 몸을 일으킨다. 젊음은 이미 먼 옛날 이야기가 된 지 오래인 그의 유일한 낙은 결혼하여 근처에 사는 딸 싱네가 이따금 찾아오는 것이다. 작가의 시선은 요한네스의 동선을 따라간다. 요한네스는 친구인 페테르를 만나 낚시를 하고,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 편지를 건넸었던 여인과 마주치기도 하고, 먼저 세상을 떠난 아내 에르나까지 만난다. 너무나 쉽게 말이다. 말하자면 이 소설은 한 어부의 아들로 태어난 요한네스의 탄생 장면과 죽음 이후의 모습을 한 권의 소설에서 다루고 있는 것이다. 삶과 죽음은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모습으로 맞닿아 있는 것이다.


"우리가 가는 그곳에는 너도 나도 없다네, 페테르가 말한다 좋은가, 그곳은? 요한네스가 묻는다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어, 하지만 거대하고 고요하고 잔잔히 떨리며 빛이 나지, 환하기도 해, 하지만 이런 말은 별로 도움이 안 될 걸세, 페테르가 말한다"  (p.132)


작가가 묘사하는 사후의 세계는 삶에서의 일상이 단지 시공간을 확장한 것처럼 익숙하고 편안하다. 육체를 벗고 자유로워진 영혼이 어떤 구속이나 장애도 없이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나고, 하고 싶은 이야기를 자연스레 이어가는 것이다. 비록 서로가 서로를 만질 수도 없고 육체를 통한 삶의 온기를 나눌 수는 없지만 말이다. 책에서 작가는 요한네스가 삶에서 죽음으로 넘어오는 장면을 그리지 않았다. 그의 죽음은 그만큼 자연스러운 어떤 것이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 요한네스 자신의 장례식 장면, 구체적으로 자신의 관에 흙이 덮이고 딸 싱네의 생각이 흰 구름처럼 떠간다.


삶에 대한 집착은 죽음에 대한 공포를 지나치게 키운다. 돌이킬 수 없는 진행이라는 건 세상 사람들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호들갑을 떨 일은 아니지 않느냐고 작가는 묻는 것이다. 다른 이들은 다 제쳐두고 오직 나 한 사람만 죽는 일도 아니라는 걸 작가는 새삼 일깨우고 싶었던 것이다. 이 세상에 왔던 누구나가 겪는 일, 삶과 죽음은 그렇게 자연스러운 것임을 작가는 말하고 싶었나 보다.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는 것처럼. 곧 장마가 시작된다는데 이 또한 걱정이 된다. 그러나 삶에서의 이러한 고비들 역시 자연스레 지나갈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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