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그리고 저녁
욘 포세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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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경과를 무시하거나, 건너뛰거나, 사건의 순서를 뒤바꾸기만 해도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하게 마련이다. 한 방향으로 흐르는 시간의 순리를 우리는 단 한 번도 거스르거나 의심해 본 적 없기 때문이다. 주어진 삶에서 시간만큼 익숙한 것도 다시없을 터, 시간은 그만큼 우리의 삶을 강한 힘으로 움켜쥐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죽음 저편에서 바라보면 아무것도 아닌 듯 하찮게 보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지난해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욘 포세가 쓴 <아침 그리고 저녁>은 빽빽한 시간의 경과를 가볍게 무시하는 소설이다. 익숙했던 흐름에서 한 발 물러선 이 소설을 대하는 태도 혹은 책을 읽는 독자의 첫 번째 반응은 어쩌면 '낯섦'이라는 단어로 귀결될지도 모른다. 이제 막 시간의 도약대에 선 요한네스가 번지점프를 하듯 기척도 없이 삶의 이쪽 편에서 죽음의 저쪽 편으로 옮겨갔기 때문이다. 그렇다. 소설의 1부에서 어부인 올라이와 그의 아내 마르타를 부모로 정한 채 산파인 안나의 도움을 받아 이제 막 삶을 시작한 요한네스. 올라이 부부에게는 둘째인 동시에 할아버지의 이름을 물려받아 요한네스로 불렸던 그가 아니었던가.


"아가 요한네스, 다 잘될 거다, 올라이가 말한다 요한네스라고 부를 거란 말이지요, 늙은 안나가 말한다 그리고 더이상 고요한 것은 없고 모든 것이 그저 날카로운 울림을 지닌 움직임이 되어 열리고 닫힌다 그리고 그래 그래야 한다 그리고 느리고 빠른 움직임들은 맞서고 합쳐지고 그리고 확실히 아무것도 아닌 것은 없다 아무것도 모든 것은 움직임일 뿐이며 색도 규칙적인 박동도 없이 더이상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는다 고요히 고요히 앞으로 모든 것이 그저 나아간다 그리고 더이상 그 무엇도 구별할 수 없고 어린 요한네스는 큰 소리로 운다 그리고 아이의 목소리는 우렁차게 울린다 그리고 아이는 목소리 안에 있고 목소리 밖에 있어 홀로 색깔도 소리도 빛도 없이 아픈 것은 그의 팔 다리 배가 아니라 이 빛 이것 이 움직임들 이것 저 숨 이것들이 아픈 것이다"  (p.25~p.26)


시간의 경과를 무시하는 작가는 문장의 순서를 결정하는 마침표나 쉼표, 느낌표 등 거추장스러운 문장부호를 가볍게 생략한다. 오직 자신의 감각을 날카롭게 벼린 채, 그 감각을 통해 인지되는 모든 것들을 문자 텍스트로 전환하기 위해 분투할 뿐이다. 그와 같은 과정은 마치 빅뱅 직후 플라스마 상태의 우주처럼 모든 게 뒤섞이고 혼란스러운, 물질과 시간마저 제 형태를 갖추지 못한 원시 우주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작가는 어쩌면 우리의 모든 삶과 죽음이 시간을 무시해도 좋은 빅뱅의 순간과 무척이나 닮았다고 느꼈는지도 모른다.


1부가 우렁찬 울음소리와 함께 삶을 시작한 요한네스의 탄생의 순간을 묘사했다면 2부는 노인이 된 요한네스의 자연스러운 일상으로 옮겨간다. 찌뿌둥한 몸으로 누워 있던 그는 담배 생각이 간절하여 몸을 일으킨다. 젊음은 이미 먼 옛날 이야기가 된 지 오래인 그의 유일한 낙은 결혼하여 근처에 사는 딸 싱네가 이따금 찾아오는 것이다. 작가의 시선은 요한네스의 동선을 따라간다. 요한네스는 친구인 페테르를 만나 낚시를 하고,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 편지를 건넸었던 여인과 마주치기도 하고, 먼저 세상을 떠난 아내 에르나까지 만난다. 너무나 쉽게 말이다. 말하자면 이 소설은 한 어부의 아들로 태어난 요한네스의 탄생 장면과 죽음 이후의 모습을 한 권의 소설에서 다루고 있는 것이다. 삶과 죽음은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모습으로 맞닿아 있는 것이다.


"우리가 가는 그곳에는 너도 나도 없다네, 페테르가 말한다 좋은가, 그곳은? 요한네스가 묻는다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어, 하지만 거대하고 고요하고 잔잔히 떨리며 빛이 나지, 환하기도 해, 하지만 이런 말은 별로 도움이 안 될 걸세, 페테르가 말한다"  (p.132)


작가가 묘사하는 사후의 세계는 삶에서의 일상이 단지 시공간을 확장한 것처럼 익숙하고 편안하다. 육체를 벗고 자유로워진 영혼이 어떤 구속이나 장애도 없이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나고, 하고 싶은 이야기를 자연스레 이어가는 것이다. 비록 서로가 서로를 만질 수도 없고 육체를 통한 삶의 온기를 나눌 수는 없지만 말이다. 책에서 작가는 요한네스가 삶에서 죽음으로 넘어오는 장면을 그리지 않았다. 그의 죽음은 그만큼 자연스러운 어떤 것이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 요한네스 자신의 장례식 장면, 구체적으로 자신의 관에 흙이 덮이고 딸 싱네의 생각이 흰 구름처럼 떠간다.


삶에 대한 집착은 죽음에 대한 공포를 지나치게 키운다. 돌이킬 수 없는 진행이라는 건 세상 사람들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호들갑을 떨 일은 아니지 않느냐고 작가는 묻는 것이다. 다른 이들은 다 제쳐두고 오직 나 한 사람만 죽는 일도 아니라는 걸 작가는 새삼 일깨우고 싶었던 것이다. 이 세상에 왔던 누구나가 겪는 일, 삶과 죽음은 그렇게 자연스러운 것임을 작가는 말하고 싶었나 보다.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는 것처럼. 곧 장마가 시작된다는데 이 또한 걱정이 된다. 그러나 삶에서의 이러한 고비들 역시 자연스레 지나갈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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