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조선미술 순례』


디아스포라 서경식이 만난

조국의 미술과 미술가들



나의 서양미술 순례』 이후 20년,

디아스포라 서경식의 또 다른 미술 순례기



한국의 많은 독자들이 서경식이라는 이름을 저자로서 기억하게 된 것은 1993년 번역 출간된 『나의 서양미술 순례』 덕분일 것이다. 이 책은 이제는 너무 많이 쏟아져 나와 거의 하나의 분야로 자리 잡은 ‘미술 기행’의 거의 첫 출발에 해당하는 책이었고, 지금까지도 꾸준히 판매되는 몇 안 되는 미술 기행기이기도 하다.

많은 독자들이 『나의 서양미술 순례』를 통해 그림 읽기의 새롭고도 친근한 방법을 배웠다고 고백한다. 조국에서 옥살이를 하는 형들(서승, 서준식)의 옥바라지를 하는 30대의 재일조선인 청년에게 유럽의 다양한 미술관에서 만난 작품들은 지하실에 난 창문으로 겨우 들어오는 희박한 공기였다고, 저자는 그 책에서 기록한 바 있다. 예술이 역사와 현실과 삶과 독특하게 뒤섞이며 서로를 해석하거나 확장하는 놀라운 장면들이 그 책에 가득 담겨 있었다.

이번에 출간되는 『나의 조선미술 순례』에서 저자는 이제 60대가 되어 유럽의 미술관이 아닌 한국의 미술관들을 순례한다. 30대의 재일조선인 청년이 집착했던 주제들, 죽음, 섹슈얼리티, 가족, 민족…… 같은 것들이 여전히 60대 재일조선인 노교수의 눈과 귀와 온갖 감각들을 사로잡고 날카로운 통찰들을 이끌어낸다. 하지만 시간과 공간과 삶의 변화를 따라 미묘하게 달라진 지점들 역시 드러난다.

가령 저자는 이제 홀로 유럽의 미술관을 돌아다니며 작품과 고독하게 마주하는 것이 아니라, 아내 F와 함께 때로는 제자들과 함께 ‘조국’의 미술관을 찾는다. 그리고 정말로 원한다면 그 작품을 만든 작가들과 직접 한국어로 대화를 할 수도 있다. 조국은 더 이상 그가 70년대에 보았던 군사독재 치하의 가난한 나라가 아니다. 또 이제 형들의 옥바라지를 위해 조국을 찾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연구와 활동을 위해 찾게 되었다. 이렇듯 달라진 상황에서 저자는 20년 전, 30년 전 그림들 앞에서 던졌던 것과 똑같은 물음을 던진다. ‘나는 누구인가?’ ‘우리는 누구인가?’

이번에는 이 물음들에 답할 수 있을 것인가? 저자는 이전에는 단순히 목격자에 머물 수 있었던 독자들을 이번 순례에는 더 깊이 동참시킨다. 위의 답을 혼자서는 도저히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20~30년 전의 그 순례와 지금의 이 순례의 미묘한 차이들을 읽어내는 것은 작가 자신의 변화를 읽어내는 일일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나 자신의 변화를 읽어내는 일이 된다.

한편 『나의 서양미술 순례』와 『나의 조선미술 순례』를 나란히 놓고 보는 일은 마치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 나란히 걸린, 렘브란트의 34세 때와 63세 때의 자화상을 보는 일 같기도 하다. 많은 것이 달라졌지만 삶의 질문, 궁극의 질문에 대한 답을 갈구하는 그 빛나는 눈은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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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인간 - 분석심리학자가 말하는 미래 인간의 모든 것
이나미 지음 / 시공사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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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톨릭 성당에 가면 미사 중에 신자들끼리 평화의 인사를 주고받는다. 미사를 주재하는 신부님이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면, 신자들이 한 목소리로 '또한 사제와 함께' 한다. 그리고 양 옆과 앞뒤 좌석에 있는 신자들을 향해 서로 가벼운 목례를 하며 '평화를 빕니다. 평화를 빕니다.' 인사를 하게 되는데 평소에 잘 알고 지내던 사람이든, 처음 본 사람이든 모두 그렇게 한다.

 

다소 엉뚱하지만 나는 '평화를 빕니다.'라는 인사를 받을 때마다 '고독을 빕니다.'로 해석하곤 한다. 상대방의 발음이 부정확하거나 내 귀가 어두워서 그렇게 듣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귀가 어두워도 '평화'를 '고독'으로 알아들을 사람이 어디 있겠나. 나는 다만 평화와 고독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전쟁이나 갈등이 없이 평온한 상태를 우리는 '평화'라 한다. 바꾸어 말하자면 위험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위험을 느끼지 않는 상태에서의 인간은 '연대(連帶)'의 필요성도 느끼지 않는다. 평화가 지속될수록 사람과 사람 사이의 결속력은 약해지게 마련이다. 새로운 관계의 추구나 기존 관계의 유지도 느슨해질 수 밖에 없는 대목이다.

 

얼마 전 지인으로부터 한 권의 책을 선물 받았다. 책의 제목은 <다음 인간>. 신경정신과 전문의이자 분석심리학자인 이미나의 신작이다. 딱히 관심이 가는 책도 아니었고, 그닥 재미있는 책도 아닌 듯하여 며칠 동안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그랬더니 웬걸, 나에게 책을 준 분과 우연히 마주쳤는데 나보고 다 읽었느냐 묻는 게 아닌가. 뜨끔했었다. 내가 우물쭈물 답변을 흐리자 재미있는 책인데 뭐 그렇게 오래 걸리느냐 타박 아닌 타박을 하셨다.

 

그날 저녁에 나는 책을 단숨에 읽어버렸다. 이 책을 쓴 저자의 의도는 단순했다. 기하급수적으로 발전하는 과학기술의 발달이 우리 인간의 심리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그 결과 미래의 인간상인 '다음 인간'은 어떤 모습일지 추측하는 것이다. 기술의 발전에 따른 생활상의 변화 또는 소비패턴의 변화 등 실생활과 밀접한 외부 환경의 변화를 추측하는 책은 많았지만 인간 내면의 변화를 예측하는 책은 상대적으로 적었고 우리의 관심도 뒤떨어졌던 게 사실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미래의 인간상에 대해 다소 비관적인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요즘 청소년들의 행태만 보아도 충분히 그렇게 예측할 수 있지만 말이다. 예컨대 무감동과 타성에 젖은 사람들, 사이코패스, 관계의 해체, 감정이 부족한 R 세대의 출현, 에볼라 바이러스 같은 전염병의 세계화 등을 예상하는 것이다. 우리가 다음 세대의 인간상을 예측해 보고 문제의 해결책을 함께 고민해보자는 이야기이다.

 

"오늘날 빈부의 격차는 점점 더 심해지고 신자유주의가 세습자본주의로 정착되면서 젊은이들은 패기를 잃었고 노인들은 여유를 잃었다. 지금보다 더 나은 미래를 상상하기 힘들다는 탄식이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다. 이런 상황을 바꾸기 위해서는 물론 정치나 경제의 구조적 개혁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사회 구성원들이 보다 적극적이고 긍정적으로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것도 필요하다." (p.15)

 

그러나 나는 위 대목에서 저자와 의견을 달리 한다. 우리 청소년들에게 발생하는 문제는 어떤 제도나 시스템의 실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보다는 오히려 물질적 풍요와 평화의 지속에서 오는 문제라고 나는 생각하는 것이다. 예컨대 삶에 대한 애착이나 결속의 필요성은 결핍이나 생명의 위협이 증가할 때 나타나는 인간 심리라고 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산업화 초기 단계에서는 전쟁이나 기아, 범죄와 질병 등 인간의 생명을 직접적으로 위협하는 요소들이 많았다. 이러한 문제는 개개인이 홀로 감당할 수 있는 차원의 것이 아니었다. 누가 가르치지 않아도 인간 관계의 중요성, 사회 공동체나 국가 공동체를 통한 결속의 필요성을 절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가족 구성원에 대한 사랑, 국가에 대한 충성을 강요하지 않아도 자발적으로 나설 수밖에 없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기술의 발전에 따른 위험 요소의 감소는 물질적 풍요와 육체적 편리를 가져다 준 반면 적극적인 인간 관계의 도모, 꿈과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는 열정, 가족 구성원과 국가 구성원에 대한 애정과 감사는 상대적으로 약해지게 된다. 필연적으로 말이다. 먹고 살 걱정이 없는데 굳이 일을 할 필요도 없고, 전쟁의 위협이 없는데 굳이 내 나라를 고집할 이유도 없는 것이다. 게다가 미디어의 발전은 최소한의 인간 관계를 유지 가능하도록 만들어 준다. 애써 노력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죽음과 종교에 대한 문제만 해도 그렇다. 저자는 종교의 쇠퇴와 종교인의 파산을 예측하면서 통합 종교의 출현도 예고하고 있다. 자살클럽의 증가와 잉여 살해를 돕는 비밀 조직의 등장도 말한다. 이것이 과연 사회 시스템이나 구조의 문제에서 비롯된 것일까? 나는 오히려 물질적 풍요, 평화의 지속에서 오는 삶의 '권태'에서 기인한다고 본다. 생명에 대한 위험 요소가 많을 때에는 살고자 하는 욕구가 강해지지만 그러한 요소가 사라졌을 때는 오히려 삶은 따분하고 권태롭기만 한 것으로 비춰지기 때문이다.

 

지금은 참치를 잡으면 냉동 상태로 반입되지만 냉동 기술이 발전하지 못했던 과거에는 참치를 살려서 들여와야만 했다. 원양어선에서 잡은 참치를 국내에 반입할 때까지 더 많이 살릴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던 중 참치 수조에 상어 새끼 한 마리를 넣어 두는 방법이 고안되었다. 참치만 담아 왔을 때는 폐사율이 높았지만 천적을 한 마리 넣어 둠으로 해서 폐사율이 현격히 떨어졌다고 한다. 생존을 위해 몸부림 칠 수밖에 없었으므로.

 

"미래에 대한 비전은 안팎으로 곤경에 빠졌을 때 포기하려는 나를 격려해주고, 때로는 건강하게 타협할 수 있는 힘을 준다. 일이 계획대로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그대로 주저앉지 않고 다시 시도해볼 수 있게 도와준다. 청사진을 갖고 씩씩하게 무언가를 시작했지만 도중에 크고 작은 실패에 좌절해 자신에 대한 믿음을 버리고 싶을 때 미래에 대한 희망은 다시 한 번 자신을 추스리게 만든다. 이것이 이 책에서 미래에 대한 여러 이야기를 펼친 가장 중요한 이유다." (p.238)

 

요즘 아이들에게 결핍이나 생명의 위협을 가르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이따금 지구의 어느 곳에서 내전이나 자연재해로 수백 명의 사람들이 죽었다는 기사가 전해지기는 하지만 그것은 개별적이고도 직접적인 죽음은 아니다. '살아야겠다' 또는 '열심히 살아가야겠다'는 다짐은 쉽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나는 풍요와 평화가 인간의 내면을 심하게 부패시킨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평화를 빕니다'는 인사는 '고독을 빕니다'로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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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 조르바 열린책들 세계문학 21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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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에 무슨 대작이 있겠습니까마는 몇 년째 준비하면서도 끝내 쓰지 못했던 책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몇 달도 아닌 몇 년째. 남들이 들으면 내가 마치 신춘문예에 출품할 작품이라도 구상하고 있으려니 생각하겠지요. 부끄럽지만 그것도 아닙니다. 나는 다만 책을 읽고 느꼈던 그 충만한 감동을, 그 순간의 내 솔직한 감정을, 언어 밖의 풍경으로 그려 보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나는 허섭스레기와 같은 글을 몇 줄 쓰다가 지우고, 한동안 잊고 지내다가 생각나서 또 쓰고 하기를 몇 년째 반복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치 그것은 짝사랑하는 연인 앞에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마냥 쭈볏거리기만 하는 숫총각의 마음과 같았습니다.

 

나는 작품 속 하나하나의 문장에 밑줄을 긋고, 의미를 되새기고, 부풀어 오른 감상에 젖어 확대해석하기도 하고, 때로는 나름의 생각을 끄적거려보기도 했지만 낙서는 낙서로만 존재할 뿐 그것이 추구하는 최종 목표, 하나의 완성된 문장, 마음에 흡족한 글로 재탄생하지는 못했습니다. 자신의 마음을 고스란히 글로 옮긴다는 게 어찌나 어려운 일이던지요. 거칠고 미욱한 나 자신을 탓해본들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답답하고 속만 뒤집히는 것을요.

 

아무튼 나는 이제는 더 이상 이렇게 마냥 시간만 허비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는 결론에 이르렀고, 어떻게든 매듭을 짓고 넘어가야 겠다 마음 먹었던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읽었을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무척이나 각별했던 책, <그리스 인 조르바>는 그런 책입니다. 적어도 나에게는 말입니다. 이 책을 처음 읽었던 고등학교 시절, 대학 캠퍼스를 오가며 짬이 날 때마다 읽고 또 읽었던 대학 시절, 힘든 사회 생활 속에서 사람들과 부대끼고 지쳐갈 때마다 문득문득 생각나서 이곳저곳을 펼쳐 보곤 했던 멀지 않은 과거, 책을 붙들고 씨름을 하듯 처음부터 다시 읽었던 근래의 날들을 생각하면 나는 왠지 눈물이 솟을 것만 같습니다.

 

"......산다는 게 곧 말썽이오. ......죽으면 말썽이 없지. 산다는 것은...... 두목, 당신, 산다는 게 뭘 의미하는지 아시오? 허리띠를 풀고 말썽거리를 만드는 게 바로 삶이오." (p.159)

 

위의 인용문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숨이 멎는 듯했습니다. 풀리지 않는 화두 하나를 받아든 느낌이었죠. 산다는 게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걸 어렴풋이 짐작하던 그 시기에 '산다는 게 말썽'이라는 한마디 말은 왜 나를 한꺼번에 와르르 무너지게 했던 것일까요. 지금 생각해 보면 소설의 얼개는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관념에 사로잡힌 서른다섯 살의 젊은이와 순간순간의 삶을 사랑했던 예순다섯 살의 노인이 크레타 섬에서 펼치는 한 판의 춤사위, 관념과 실재가 어우러진 한 편의 서사시 정도로 해두어야 겠군요.

 

"나는 아무도, 아무것도 믿지 않아요. 오직 조르바만 믿지. 조르바가 딴 것들보다 나아서가 아니오. 나을 거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어요. 조르바 역시 딴 놈들과 마찬가지로 짐승이오! 그러나 내가 조르바를 믿는 건, 내가 아는 것 중에서 아직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조르바뿐이기 때문이오. 나머지는 모두 허깨비들이오." (p.86)

 

"부드럽게 비가 내리는 시각에 그 비가 내부의 슬픔을 일깨운다는 것은 얼마나 관능적으로 즐거운 일인가! 그럴 때면 의식의 심연에 숨어 있던 쓰디쓴 추억, 친구와의 이별, 사라져 버린 여자의 미소, 날개를 잃고 다시 구더기가 되어 버린 나방의(구더기는 내 심장으로 기어오르며 심장을 갉아먹고 있었다) 덧없는 희망 같은 쓰디쓴 추억이 의식의 표면으로 떠오른다." (p.141)

 

나는 이 책을 통하여 삶의 본질을 꿰뚫는 나 나름의 시각을 배웠던 셈입니다. 한때 철학에 매료되어 현실적인 이상이나 꿈보다는 인간의 정신이나 영혼, 도덕적 관념이나 불변하는 진리를 추구했던 나에게 있는 그대로의 삶을 열정적으로 붙잡으려 했던 조르바의 태도는 충격적이다 못해 말을 잃게 할 정도였습니다. 단지 인식의 차원에서 머물렀던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가 심장 가까이로 '쿵'하고 떨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한 번뿐인 삶이기에 어느 하나를 선택하고, 다른 하나를 헌신짝처럼 버린다는 게 상식적으로 맞지 않아 보였습니다.

 

"인간 본질은 야만스럽고, 거칠며 불순한 것이다. 인간의 본질은 사랑과 육체와 불만의 호소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것을 추상적인 관념으로 승화시켜 보라. 정신의 도가니 속에서 연금술의 과정을 쫓아 순화시키고 증발시켜 보라." (p.209)

 

"최후의 인간은 자신을 비운 인간이다. 그 몸에는 씨앗도 똥도 피도 없다. 모든 것은 언어가 되고, 언어의 집합은 음악이 되어도 최후의 인간은 거기에서 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그는 절대의 고독 속에서 음악을 침묵으로, 수학적인 방정식으로 환원시킨다." (p.209)

 

궁극적으로 인간의 삶은 후회를 양산하는 일련의 과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처음부터 '최선의 선택'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실재하지도 않는관념과 도덕에 얽매어 자신의 삶을 출구가 없는 한 귀퉁이로 몰고, 종국에는 손과 발을 옥죄어 엉뚱한 방향으로 이끄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요.

 

"나는, 인간이 성취할 수 있는 최상의 것은 지식도, 미덕도, 선도, 승리도 아닌, 보다 위대하고 보다 영웅적이며 보다 절망적인 것, 즉 신성한 경외감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p.415)

 

"어릴 때부터 나는 초인(超人)에 관한 야망과 충동에 사로잡혀 이 세상일에 만족하지 못했다. 차츰 나이를 먹으면서 나는 조용해졌다. 나는 한계를 정하고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 인간적인 것과 신적(神的)인 것을 가르고 내 연(鳶)을 놓치지 않도록 꼭 붙잡았다." (p.463)

 

너무나 이질적인 두 사람의 만남은 결국 시간의 궤도를 달려 하나의 소실점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죽음'이라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무한의 영역으로 말입니다. 그 어둠의 영역에서 우리가 태어났고 다시 그 자리로 되돌아가는 것인지, 무한광대의 우주 속으로 어느 날 갑자기 '나'라는 생명체가 뚝 떨어졌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인지 나는 알지 못합니다. 다만 한 사람이 살다간 핏방울의 가치를 소중하게 여길 뿐입니다. 진정으로 삶을 사랑했던 어느 자유인의 절규를 오래도록 기억할 뿐입니다.

 

"꺼져가는 불 가에 홀로 앉아 조르바가 한 말의 무게를 가늠해 보았다. 의미가 풍부하고 포근한 흙 냄새가 나는 말들이었다. 존재의 심연으로부터 그런 느낌을 갖게 되는 한 그런 말들이 따뜻한 인간미를 지니고 있다는 증거가 될 수 있으리. 내 말들은 종이로 만들어진 것들에 지나지 않았다. 내 말들은 머리에서 나오는 것이어서 피 한 방울 묻지 않은 것이었다. 말에 어떤 가치가 있다면 그것은 그 말이 품고 있는 핏방울로 가늠될 수 있으리." (p.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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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인이 된 지인과 우연히 맞닥뜨릴 때가 있습니다. 연단에 선 강사와 한 명의 방청객으로, 조명을 받는 연주자와 어둠 속에 묻힌 관객으로, 또는 TV 화면에 존재하는 출연자와 존재하지 않는 시청자로서 말입니다. 그럴 때 우리가 공유하는 과거의 기억은 낯선 이의 방문처럼 어색하기만 합니다. 우리가 아닌 각자의 개별적인 영역에서 살아왔던 시간의 장막으로 인해 한때 우리가 알고 지냈던 과거 기억의 출현은 느닷없는 것으로 비춰지는 것이지요. 그것은 마치 뜨거운 감자가 손에 쥐어진 것처럼 우리를 한동안 어찌할 줄 모르고 허둥대게 합니다.

 

그때의 어색함이란 부러움이나 흔히 있을 수 있는 시기나 질투의 느낌과는 다른 것입니다. 어느 정도 나이가 든 사람이라면 이해할 수 있겠지만 개별적인 삶은 어떤 층위를 구분하여 규정되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단절된 시간에서 오는 생경한 느낌, 그렇다고 전혀 무관하다고 말할 수도 없는 모호한 관계, 시간의 양적 변화를 어쩔 수 없이 확인해야 한다는 부담 등으로 인해 과거의 기억을 현재라는 시간에 어떤 방식으로 배치해야 할지 고민하게 만들 뿐입니다.

 

찰나에 그친 눈빛 교환과 그것만으로도 서로를 확인하는 데 부족하지 않았던 감지, 그리고 어찌할 바 모르는 시선의 흔들림. '어떻게 지내냐?' 는 물음과 '그저 그렇지 뭐' 하는 대답은 어색함을 경감시켜보려 했던 처음의 의도와는 다르게 미처 깨닫지 못했던 시간의 암전마저 더해져 서로의 마음을 더욱 무겁게 합니다. 우리는 어떻게든 그동안 이어지지 않았던 시간의 간극을 애써 메워보려 하지만 말처럼 그렇게 쉽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어색한 자리를 서둘러 벗어나려는 발길을 애써 붙잡으며 우리는 말합니다. "'언제' 밥이나 한 번 먹자." 그 '언제'는 허공에서만 맴돌 뿐 그것이 우리의 마지막 인사였음을 어느 날 문득 깨닫게 됩니다.

 

모임이 잦은 요즘, 거리에는 눈송이처럼 빈말만 쌓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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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alia 2014-12-09 2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이거 진짜 마지막 인사인 줄 알고 가슴 철썩했네요.

마지막 인사 아니죠? ^^

꼼쥐 2014-12-14 13:46   좋아요 0 | URL
그럴 리가요. ㅎ
가끔 블로그를 접고 싶었던 적이 있기는 했어요.
 
체실 비치에서
이언 매큐언 지음, 우달임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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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에 느끼는 고독감은 그 속의 옅은 감미로움으로 인해 자기 도취에 이르는 실핏줄처럼 가는 숨구멍이 돼주곤 한다. 며칠 전 내려 녹다 만 잔설과 알싸한 추위가 마치 잘 조합된 피아노 협주곡처럼 겨울의 풍미를 더하는 휴일 아침에 나는 이언 매큐언의 소설 <체실 비치에서>를 읽었다. 작가의 섬세한 필치는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먼 이국의 어느 바닷가로 나를 안내한다.

 

이언 매큐언의 소설은 어느것 하나 매력적이지 않은 게 없지만 나는 유독 <체실 비치에서>를 좋아한다. 그것은 마치 내 젊은 시절의 벌거벗은 열정을, 인내와 절제로 갈무리되지 않았던 무모함의 실체를, 부풀 대로 부풀었던 자존심의 상흔을 하나하나 훑어내는 것만 같다. 솜이불 속에 박제된 여름날의 더위를 반추하는 것처럼. 나는 칼에 베인 듯 아팠을 젊은 시절의 사랑을, 그리고 실체가 없이 사라진 그 시간의 그림자를 하릴없이 좇고 있다.

 

소설은 스물두 살 동갑내기 신혼부부의 첫날밤을 매듭 삼아 이들 삶의 앞과 뒤를 조명한다. 로큰롤을 좋아하는 런던대 역사학도 에드워드와 현악 사중주단을 열정적으로 이끄는 왕립음악대학 학생 플로렌스는 그들이 자라온 환경만큼이나 다르지만 사랑에 빠져 결혼한다. 에드워드는 뇌손상을 입어 정신착란에 빠진 어머니와 쌍둥이 여동생, 그리고 집안일과 직장일에 지쳐 있던 아버지와 함께 어린 시절을 보냈다. 열네 살에 되어서야 비로소 자신의 어머니가 보통의 어머니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 에드워드는 대학에 진학하여 집을 떠날 결심을 굳히고 공부에만 매진한다. 언제나 손님처럼 자신의 집을 방문하는 모습을 상상하면서.

 

반면에 플로렌스는 성공한 사업가인 아버지와 대학교수 어머니를 둔 유복한 집안에서 자라났다. 체면과 격식을 중시하는 어머니를 보고 자란 플로렌스. 그녀는 어린 시절의 기억 때문에 섹스 자체를 혐오한다. 상반된 환경에서 자라난 두 남녀는 각자 다른 이유로 서로에게서 사랑을 느끼고 결혼에 이르지만 막상 신혼 첫날밤에 대한 두려움은 둘 사이에 묘한 기류를 형성한다.

 

칠월 중순의 어느 날 그들은 체실 비치의 외딴 호텔에 있다. 남편과 아내의 자격으로. 소설은 그렇게 시작된다. 일 년여의 연애 기간 동안 깊은 관게로 발전하지 못했던 것이 불만이었던 에드워드는 결혼이 “교구 목사의 축복까지 받은 음탕하고 유쾌한 벌거벗은 자유”라고 생각했지만, 플로렌스에게는 하나를 허락하면 또 다른 욕망을 갈구하는, 지속적인 압박 속에 가해지는 “끝없는 갈취”로만 여겨졌다.

 

소설은 두 사람의 감정 선을 따라 진행된다. 마치 세심한 연주자의 깊고 정확한 연주처럼. 소설의 무게중심은 에드워드보다는 플로렌스에게 있는 듯한데 여성의 심리를 어찌나 잘 묘사했던지 작가가 혹 여성이 아닐까, 하는 착각에 빠질 정도로 세밀하다. 섹스를 혐오하면서도 아내로서의 의무를 다하려 했던 플로렌스는 자신의 감정을 억누른 채 에드워드의 감정을 상하지 않도록 노력한다. 반면 자신의 욕망을 절제하며 첫날밤만을 기다려왔던 에드워드는 아내와의 결합을 서두르다 결국 삽입도 하지 못한 채 플로렌스의 배 위에 사정을 하고 만다. 그 기분 나쁜 경험을 끔찍하게 생각했던 플로렌스는 에드워드를 방에 남겨둔 채 뛰쳐 나간다. 그리고 플로렌스의 행동을 지켜본 에드워드는 오히려 자신이 모독을 당했다고 느낀다.

 

이러한 과정의 심리 변화를 아주 세밀하게 묘사한 것도 놀라웠지만 그보다 더욱 놀라웠던 것은 플로렌스를 찾아 나선 에드워드와 그를 피해 달아났던 플로렌스의 재회 장면이었다. 플로렌스는 자신의 감정과는 반대되는 말을 거침없이 내뱉는다. 마치 우리가 자신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엄마의 전화를 받으면서 퉁명스런 말투로 응대하는 것처럼. 자신의 불안 심리를 낮추기 위해, 또는 자신의 동기를 숨기기 위해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욕구나 감정과 반대되는 행동을 하게 된다. 심리학의 '반동형성'(reaction formation)을 작가는 아주 세밀하게 그리고 있다. 해변에서 등을 돌리고 떠나는 자신을 붙잡아주기를 간절히 바려면서 그녀는 에드워드의 곁을 떠난다. 그리고 그녀는 가방을 싸서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고 그들은 결국 파경을 맞는다.

 

"그의 분노가 그녀 자신의 분노를 일깨웠고, 그녀는 갑자기 그들의 문제가 뭔지 알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너무 예의발랐고, 너무 경직됐고, 너무 소심했고, 까치발을 든 채 서로의 주위를 빙빙 돌며 중얼거리고 속삭이고 부탁하고 동의했다. 그들은 서로에 대해 거의 알지 못했고 그럴 수도 없었다. 침묵에 가까운, 사교적인 배려라는 담요가 그들을 결속하는 만큼이나 그들의 차이를 덮어버리고 그들의 눈을 멀게 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이제나저제나 의견 차이가 날까봐 두려워했고, 이제 그의 분노가 그녀를 그런 두려움에서 해방시키고 있었다." (p.174~p.175)

 

플로렌스와 헤어진 에드워드는 백발의 통통한 노인네가 될 때까지 “반쯤 잠든 상태”에서 살다가, 그제서야 그들 사이에 필요했던 게 ‘사랑과 인내’였음을 깨닫는다.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한 채 어느 날 갑자기 성인이 된 에드워드와 어렸을 때의 나쁜 기억을 품은 채 체면과 격식을 따지는 엄격한 환경에서 자의식 강한 여성으로 성장한 플로렌스는 어쩌면 자신이 갖지 못한 모습을 서로에게서 보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둘의 결합은 로큰롤과 클래식의 결합만큼이나 어려웠던 것이었을 게다.

 

"한 사람의 인생 전체가 그렇게 바뀔 수도 있는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말이다. 체실 비치에서 그는 큰 소리로 플로렌스를 부를 수도 있었고, 그녀의 뒤를 따라갈 수도 있었다. 그는 몰랐다. 아니, 알려고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가 이제 그를 잃을 거라는 확신에 고통스러워하면서 그에게서 도망쳤을 때, 그때보다 더 그를 사랑한 적도, 아니 더 절망적으로 사랑한 적도 결코 없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의 목소리가 그녀에게는 구원의 음성이었을 것이고, 그 소리에 그녀는 뒤를 돌아보았을 거라는 사실을." (p.197)

 

나는 지난 여름의 달뜬 열기가 생각날 때마다 이언 매큐언의 소설 <체실 비치에서>를 떠올리곤 한다. 인내가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대지에 내리 쬐던 뜨거운 열기도 이 겨울의 추위 속에서는 한낱 한줌의 추억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체실 비치의 자글거리는 몽돌 소리와 함께 환청처럼 되새기고 있다. 한겨울에 읽는 <체실 비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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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09 21:5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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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14 14:0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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