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20대 대통령이 되기 위한 치열한 각축전이 시작되었다. 여와 야의 유력 정치인들이 속속 대선 출마를 선언하며 대중의 시선을 사로잡기 위한 본격적인 행보에 돌입했다는 건 바야흐로 대한민국의 유권자 전체를 두고 내 편으로 얼마나 많은 숫자를 끌어들일 수 있는가 하는 숫자 싸움에 골몰하는 시간이 선거 막판까지 지루하게 이어질 것이라는 예측과 크게 다르지 않다. 대선 출마자들이야 그 시간이 촌각을 다투는 짧은 여정으로 여겨지겠지만 이를 지켜보는 유권자들은 서로가 서로를 비난하고 헐뜯는 진흙탕의 아수라장을 수개월 동안 지켜봐야 하는 현실이 참으로 암담하고 길게만 느껴지는 것이다. 저절로 긴 한숨이 터져 나올 정도로 말이다.

 

장년기를 지나 노년기에 접어든 한 인간이 뒤늦게 선보이는 도리도리 까꿍도 그닥 귀엽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00의 아바타입니까?' 하고 물었던 어느 정치인의 유치 찬란한 질문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다. 게다가 그의 부인은 자신이 쥴리가 아니라고 말함으로써 대중의 머릿속에 그녀가 쥴리일지도 모른다는 강한 인식을 심어주었다. 그것은 마치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라고 말하면 계속해서 코끼리를 생각하게 되는 이치와 크게 다르지 않다. 게다가 남에게 10원 한 장 피해 준 적 없다던 그의 장모는 3년형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되기도 했다. 이것은 다만 출마 선언 직후에 터진 몇몇 예고편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보다 더 큰 사건이 앞으로 얼마든지 더 터질 수 있다는 얘기다.

 

게다가 야당의 유력 대선 후보 중 한 명인 홍 모 의원 역시 '도리도리 윤'에 대해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대통령 직무는 날치기 공부해서 습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거나 "도리도리 윤은 평생 검찰 사무만 한 사람이다. 대통령 직무에서 검찰 사무는 0.1%도 해당되지 않는다."라고 하면서 그의 '경험 부족'을 지적했던 것이다. 역시 늙은 생강이 맵다더니 정치권에서 굴러먹은 홍 의원의 시각은 날카로웠다.

 

반면 여권에서의 출마자들 간 경쟁은 다소 싱거운 맛이 있다. 지지율에서 한참 앞서가는 이 지사와 이를 견제하는 다수의 경쟁자들은 자신의 존재감을 부각하기 위해 갖은 애를 쓰고는 있지만 시간적으로나 인지도 면에서나 역부족인 듯 보이는 게 사실이다. 물론 국무총리를 지낸 분이 두 명이나 있으니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언론의 카메라는 도리도리 윤과 이 지사에게 집중되는 걸 보면 그놈의 인기라는 게 마냥 거품은 아닌 모양이다.

 

대선 경쟁이 시작된 것처럼 뒤늦은 장마가 시작되었다. 경쟁이 치열할수록 나라가 두 쪽으로 쪼개져 치유가 불가능해지는 것처럼 성질이 극단적으로 다른 두 기단이 만나면 장마의 피해는 심해지게 마련, 부디 장마도, 대선도 무난하게 넘어가야 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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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린의 기억, 시네마 명언 1000 - 영화로 보는 인문학 여행
김태현 지음 / 리텍콘텐츠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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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에는 딱히 특별한 의미를 발견하지 못했던 말도 어떤 상황, 어떤 장소에서는 더없이 훌륭한 의미로 전해질 때가 있다. 사람도 시대와 상황에 따라 필요한 능력이 달라지는 것처럼 하찮아 보이는 말도 때와 장소에 따라 그 진가가 달라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생각하는 명언이란 적절한 상황에서 발견되는 것일 뿐이지 지식이 많은 몇몇 사람들의 전유물은 아니라는 걸 잘 알 수 있다. 심지어 우리는 마냥 어리다고만 생각했던 어린이의 입에서 어른도 미처 생각할 수 없었던 천금 같은 명언을 이따금 듣기도 한다.

 

그러나 자신이 살아온 모든 순간들을 하나하나 복기할 수도 없고, 자신이나 주변 인물들의 말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도 없는 우리는 '그 말 참 명언이었어' 하고 감탄하게 되는 경우는 많지 않다. 그러므로 다양한 삶의 장면들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영화 장르에서 우리는 공감할 수 있는 명언들을 너무도 쉽게 발견하게 되는지도 모른다. 물론 대본을 쓴 천재적인 작가의 뛰어난 역량 덕분이기도 하지만 그들도 역시 자신의 삶에서 명언을 찾아가는 '명언 발견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줄곧 그들이 발견한 빛나는 명언들을 영화 곳곳에서 새롭게 발견해가는 것이다. 마치 숨겨진 네잎클로버를 찾는 것처럼...

 

"소설에 명문장이 숨어 있듯, 영화에도 명대사가 있습니다. 때로는 감정에 푹 빠지게 되고 때로는 삶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그런 명대사, 명언 말입니다."  (p.5 'prologue'중에서)

 

책에 등장하는 영화 중에는 아주 오래전 청소년기에 텔레비전을 통해 보았던 영화도 있고, 젊은 피가 끓던 청춘 시절에 어두운 영화관의 뒷좌석에서 보았던 영화도 있고, 쓸쓸함을 견디기 힘들었던 어느 가을날 홀로 찾았던 어느 작은 영화관의 추억이 묻은 영화도 있고, 어린 자식을 잠시 누군가에게 맡기고 휴식 같은 달콤한 데이트를 즐기기 위해 아내의 손을 잡고 찾았던 집 주변의 오래된 영화관에서 보았던 영화도 있을 터이다. 혹은 누군가의 강력한 추천에 의해 유튜브나 넷플릭스를 통해 보았던 영화일 수도 있다. 경로야 어떠하든 간에 영화의 감동과 명대사가 전해주는 묵직한 삶의 의미를 우리는 오래도록 잊지 못한다.

 

"언뜻 보면 단순한 액션과 총격전을 보여주는 듯한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관객들에게 스릴 그 이상을 보여줍니다. 우연히 돈가방을 손에 넣게 된 주인공과 그를 찾는 살인마, 그리고 이들의 뒤를 쫓는 보안관의 쫓고 쫓기는 과정에서 던져지는 의미심장한 장면과 대사들을 유심히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266 그러니 다음 수순은 뻔하지? 삶에 미련을 버려. 모양새 나빠지지 않게. And you know what's going to happen now, Carson? You should admit your situation. There would be more dignity in it."  (p.102~p.103)

 

저자는 책의 구성에 있어 Part 1. '꿈과 자유를 찾아주는 명대사', Part 2. '사랑이 싹트는 로맨틱 명대사', Part 3. '인문학적 통찰력을 길러주는 명대사', Part 4. '사랑의 심리를 파고드는 명대사', Part 5. '지친 마음을 힐링해 주는 명대사', Part 6.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명대사', Part 7. '불굴의 의지를 보여주는 명대사', Part 8. '내 안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명대사'의 여덟 부분으로 나누어 그에 걸맞은 영화를 선별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구분도 저자의 주관적인 판단에 근거한 것이지만, 책을 읽다 보면 우리는 그러한 구분에 상관없이 저자가 고른 영화와 함께 추억의 시간여행을 하게 된다. 그리고 머릿속에 각인되었던 영화 속 명대사로 인해 그 시절의 한 장면이 파노라마처럼 흘러간다.

 

"768 너도 알듯이 언젠가 이 모든 것이 끝날 거야. 그때 술 한 잔 하자고 하려던 참이었어. Someday, this is all holding to end, you know. I was going to say we'll have a drink then."  (p.268 영화 '쉰들러 리스트' 중에서)

 

영화는 잊고 지내던 삶의 한 장면을, 허물어진 관계의 옛 구조물을 고스란히 옮겨 놓음으로써 영상 속에서 우리의 추억을 되살린다. 한 편의 영화를 재탕, 삼탕 다시 보아도 매번 새롭게 느껴지는 이유는 우리에게 재현되는 추억의 장면들이 매번 다르기 때문이다. 같은 영화를 보면서도 우리는 다른 추억을 재현하고 있는 셈이다. 영화는 그렇게 우리의 지난 삶을 되돌리면서 앞으로의 삶을 뿌리부터 통째로 흔들어놓는 것이다.

 

"005 카르페 디엠, 매 순간 즐기며 살아라. 너희만의 특별한 삶을 살아라. Carpe Diem, Seize the day. Make your lives extraordinary."  (p.17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 중에서)

 

한 편의 영화를 본다는 건 자신의 지난 삶을 압축적으로 톺아본다는 의미일지도 모른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자신의 가슴에 새겨지는 명대사를 만나기도 하고, 주인공의 슬픈 눈망울을 평생 기억하기도 한다. 그렇게 우리는 자신의 추억을 영상에 담기 위해 오늘도 영화 보기를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영화를 본다는 건 자신의 과거를 톺아본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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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인이라면 누구나 출근 시간에 늘 반복적으로 하는 행동이 있게 마련입니다. 일종의 루틴인 셈이지요. 저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메일을 체크하고 자신의 일과를 정리하는 일이야 기본 중에 기본이니 차치하더라도 바쁜 현대인들이 오전 시간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보내는가 하는 문제는 업무 성과에 있어 대단히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듯합니다. 예전에 다니던 직장에서는 하루 일과를 시작하기 전에 서너 종류의 종이 신문을 읽는 게 나만의 경건한 의식인 양 행해지곤 했습니다. 그러자면 업무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남들보다 한 시간 먼저 출근해야만 했고, 빈 사무실의 고요함 속에서 신문을 읽는 재미는 그야말로 꿀맛이었습니다.

 

그러나 직장을 옮겨 새로운 일을 시작하면서부터 종이신문을 접할 기회는 영영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아무도 펼쳐보지 않은 종이신문에서 풍기는 구수한 잉크 냄새와 사무실에 퍼지는 종이 접히는 소리 등은 마치 오래된 동무처럼 익숙한 풍경이었는데 그마저도 사라지고 나니 세상은 온통 IT 기계와 스크린 속 활자로만 가득한 듯 여겨졌고, 그 삭막함 속에 힘껏 내동댕이쳐진 느낌이었습니다. 나는 결국 평일에 내가 머무는 숙소에서 종이 신문을 구독하기로 하고, 무려 네 종류의 신문을 구독하게 되었습니다. 종이신문으로는 한겨레, 조선, 매일경제를, 그리고 Financual Times 온라인판이 그것이었습니다. 나는 언제나 같은 기사일지라도 성향이 다른 두 신문사의 기사를 함께 읽는 버릇이 있는지라 한겨레와 조선이라는 어찌 보면 극과 극의 이념 성향을 보이는 두 신문사를 선택했던 것이지요. 물론 최근의 한겨레는 열심히 우클릭을 한 탓에 진보 신문이라고 말하기도 민망한 수준의 반거들충이 진보 신문이 되었지만 말입니다.

 

그렇게 나는 몇 년째 열혈(?) 구독자로 잘 지내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최근 불거진 조선일보의 패악질로 인해 나는 조선일보의 구독을 사실상 끊었습니다. '사실상'이라고 쓴 이유는 매우 단순합니다. 구독 철회를 통보하자 무료 구독 서비스를 제공할 테니 계속해서 신문을 구독하라며 원하지도 않는 신문을 줄기차게 배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배달된 신문들을 문 앞에 차곡차곡 쌓아 놓고 있는 실정이지만... 아무튼 나는 조선일보를 끊고 중앙일보로 대체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신문은, 더구나 최대 구독자수를 자랑한다는 일간지는 일개 기자의 한풀이 수단이나 평소 자신의 이념과 달랐던 특정인을 향한 조롱이나 모욕의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되는 순간 그것은 신문이 아닌 특정인이 제작한 조악한 전단지로 전락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전단지를 읽을 필요도 없겠거니와 돈을 내면서 구독할 필요는 더더욱이 없는 것이지요. 관련도 없는 기사에 현직 대통령을 모사한 일러스트를 삽입하는 정도는 그저 애교 수준에 불과했는지도 모릅니다. 하다 하다 이제 더 이상 할 게 없었던지 성매매 관련 기사에 조국 전 법무부 장관과 딸의 삽화를 삽입하는,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짓을 백주 대낮에 버젓이 아무 거리낌 없이 저지르고야 말았습니다. 무슨 짓거리를 해도 어떤 처벌도 받지 않으니 간이 배 밖으로 나왔던 것이지요.

 

종이 신문을 구독한다는 게 이렇게나 어렵습니다. 공짜로 보는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이름만 대면 다 알 만한 중앙 일간지의 기사가 일개 네티즌의 댓글 수준보다도 못하다는 사실이 한국 언론의 현 수준을 말해주는 듯합니다. 영국 옥스퍼드대학교 부설 로이터저널리즘연구소가 발간한 '디지털 뉴스 리포트 2021' 조사에 따르면 한국의 뉴스 신뢰도는 32%로 조사 대상 46개국 중 38위라고 합니다. 주요 매체별로 보면 조선일보가 34.82%로 지역신문보다 낮게 나와 최하위를 기록하였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정작 놀라운 사실은 이런 질 낮은 언론 매체를 여전히 신뢰하고 있는 국민이 34%나 된다는 것입니다. 미치지 않고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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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위한다는 착각 - 종말론적 환경주의는 어떻게 지구를 망치는가
마이클 셸런버거 지음, 노정태 옮김 / 부키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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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호한 논리일지라도 감성에 호소하는 글이 이성적인 글보다 훨씬 더 잘 읽히는 것은 물론 독자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측면에서도 유리할 때가 많다. 이를테면 가슴에 와닿는 글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저자의 주장에 동조하게 되거나 그럴 것이라고 믿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구체적인 통계자료나 과학적인 증거 논리로 대중을 설득하는 것보다 가슴을 적실 듯한 하나의 사례를 들어 감동을 이끌어내는 것이 저자 자신의 주장을 독자들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방법일지도 모른다. 모름지기 글이라는 게 본디 토론이나 세미나와 같이 상대방의 논리를 정면으로 반박하는 직접적인 경쟁의 장이 아니라 조용한 곳에서 한 사람이 하는 독자적인 행위인 까닭에 다소 낭만적일 수도, 감상적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독서 행위가 아니 다른 곳에서도 인식의 오류는 언제나 존재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전 세계적으로 광범위하게 퍼진 잘못된 인식은 그리 많지 않다. 그들 중 대표적인 것이 '종말론적 환경주의'가 아닐까 싶다. 종말론적 환경주의는 어쩌면 지구온난화와 기후변화에 힘입어 과학계와 환경 운동 진영에 국한되던 일부 논리가 언론과 일반 대중에게까지 급속도로 전파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의 논리는 단 한 번도 제대로 검증되지 않은 채 추측성으로 만들어진 억측 또는 소문(일명 '카더라 통신')일뿐이라는 사실을 세계적인 환경 전문가인 마이클 셸렌버거가 자신의 저서 <지구를 위한다는 착각(Apocalypse never)>에 쓰고 있다. 저자는 이 책에서 자신이 겪은 30년간의 현장 활동과 연구, 고민과 열정, 대안과 해법을 밝힘으로써 최근 유행하고 있는 종말론적 환경주의에 강력한 의문을 제기한다.


"환경과 기후 문제에 관해 사람들이 주고받는 이야기 중 상당수는 잘못되었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 그 잘못된 정보를 바로잡아야 한다. 환경 문제를 과장하고, 잘못된 경고를 남발하고, 극단적인 생각과 행동을 조장하는 이들은 긍정적이고, 휴머니즘적이며, 이성적인 환경주의의 적이다. 그런 주장에 신물이 났기에 나는 이 책을 쓰기로 했다."  (p.28 '프롤로그' 중에서)


우리가 언론을 통해 종종 듣게 되는 종말론적 표현은 매우 다양하다. 기후변화로 "수십억 명이 죽을 것이다" "거주불능 지구가 될 것이다" "곧 세계 종말이 닥친다" 같은 과장된 억측에서부터 "인구가 폭발하고 식량이 고갈될 것이다" "태풍, 가뭄, 홍수, 산불 등 기상 이변과 자연재해 피해가 급증하고 있다" "얼음이 녹아 북극곰이 굶어 죽어 가고 있다" "아마존이 곧 불타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다" "채식을 하면 탄소 배출을 대폭 줄일 수 있다" 같은 익숙하면서도 그럴듯한 주장에 이르기까지 과학적 근거나 증명 없이 종말론적 환경주의는 무차별적으로 전파되고 있다.


사실 고래를 살린 건 그린피스가 아니라, 유전 개발로 등유가 생산되어 조명 연료 시장에서 고래기름을 몰아냈기 때문이며, 식물성 기름이 마가린과 비누 원료인 고래기름을 대체함으로써 고래를 멸종 위기로부터 구해냈던 것이다. 바다거북과 코끼리를 살린 것 역시 플라스틱의 개발로 거북 껍데기와 상아의 수요를 대체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20세기 후반 '녹색혁명'으로 지칭되는 식량 생산량의 획기적 증가로 인해 인류는 현재 100억 명을 먹여 살릴 식량을 생산하고 있으며, 이와 같은 변화에도 불구하고 선진국의 온실가스 배출은 계속 줄어들고 있다. 이에 따라 지구 평균 기온도 티핑 포인트인 4도가 아닌 2~3도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는 게 정설이다.


"환경주의자들은 부유한 국가에서는 에너지 소비를 억제해 경제 발전을 가로막을 정도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아 왔다. 하지만 약하고 가난한 나라에 대해서는 지난 50년간 에너지 소비를 억제해 경제 발전을 가로막기에 충분한 권력을 휘둘러 왔다. 현재 세계은행은 수력 발전, 화석 연료, 원자력처럼 저렴하고 신뢰성 있는 에너지원에 지원하던 자금을 태양광과 풍력처럼 비싸고 신뢰도가 떨어지는 에너지원 쪽으로 돌려 투입하는 중이다."  (p.449)


지난 30년간 식량 생산은 늘고 온실가스 배출은 계속 줄어들었지만 이와 같은 성과는 환경 지킴이 덕분이 아니라 기술과 경제 성장의 힘이었다. 그럼에도 환경주의자들은 태양광과 풍력 등 신재생 에너지만 고집한다. 문제는 에너지 밀도가 낮은 태양광과 풍력으로 오늘날의 고에너지 도시산업 사회와 문명을 지탱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현대의 문명을 버리고 과거로 되돌아갈 수는 없지 않은가. 또 다른 문제는 화석연료에서 시작하여 오늘날과 같은 선진 문명을 누리는 선진국들이 이제 막 발전 단계에 있는 가난한 국가에게도 자신들의 방식을 고집함으로써 발전을 가로막는 '환경 식민주의'다.


오늘날 환경 종말론은 발달된 통신 수단을 기반으로 세계인의 가슴에 금과옥조처럼 각인되었다. 저자는 환경 종말론이 일종의 세속 종교가 되어 버렸다고 지적한다. 말하자면 환경 종말론이 선악을 구분하는 기준 역할을 하는 것은 물론 많은 사람들의 삶의 척도이자 인생의 목적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기술과 경제 발전을 부정하고 도래하지 않은 미래의 위험만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극단적인 비효율의 길로 나아가기보다 인류 번영과 환경 보호가 함께 달성되는 '환경 휴머니즘'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고 역설한다. 물론 경제 발전 과정의 부산물인 기후 변화와 삼림 파괴, 플라스틱 쓰레기의 처리 문제를 고민하고 적절히 통제하면서 말이다.


500쪽이 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나 역시 많은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언론에 노출된 종말론적 환경주의에 세뇌되어 온 탓인지 나의 내면에는 '발전보다는 환경이 우선'이라는 인식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누구나 그렇지만 내면화된 신념은 몇몇 증거나 통계 수치만으로 쉽게 변화하지 않는 것이다. 게다가 누군가를 설득하는 데는 이성보다 감성이 앞선다는 것도 이 책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책을 읽은 효과가 전혀 없었던 건 아니다. 어떤 부분에서는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고, '그럴지도 몰라' 하는 의구심이 내가 믿던 '종말론적 환경주의'에 금이 가도록 만들었으니까 말이다. 저자가 주장하는 이러한 세속 종교를 무너뜨리는 데에는 앞으로 많은 시간과 함께 감성에 호소하는 많은 글들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내재화된 신념은 쉽게 변하지 않는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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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상거래업체 쿠팡의 경기도 이천 덕평물류센에서 난 화재는 인적, 물적 피해와 함께 이를 지켜본 국민들로 하여금 많은 생각이 들게 했던 사건이었다.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서 쿠팡의 성장세는 놀라웠지만, 그에 비해 노동자들의 인권과 복지에 대해서는 철저히 눈을 감았던 게 사실이다. 혹자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기업이 자본주의 논리에 따르는 게 뭐가 잘못이냐고 말이다. 과도한 노동에 시달리던 택배 기사들이 목숨을 잃고 하나 둘 사라지더라도 기업이 현행법을 어긴 게 아니라면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비정한 논리. 그렇다면 쿠팡의 소비자이자 쿠팡 노동자들의 이웃일 수 있는 우리는 이러한 비정상적인 상황을 그저 맥 놓고 바라보아야만 하는가. 그게 동시대를 살아가는 시민으로서 할 짓인가. 우리는 과연 자신의 양심과 시민의식에 비춰 한 점 거리낌도 없었을까.

 

화재현장에서 실종됐던 소방관이 끝내 숨진 채 발견됐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뉴스 속보를 통해 들었다. 누군가의 남편이자 아버지였던 그는 결국 화마 속에 묻히고 말았다. 어쩌면 그것은 돈과 탐욕이라는 자본주의 불길이 누군가의 생명을 불쏘시개 삼아 훨훨 타올랐던 것인지도 모른다. OECD 산재 사망률 1위인 대한민국 노동 현실의 초라한 성적표는 수술실 cctv 설치만큼이나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제자리걸음만 거듭하고 있다.

 

한낮의 기온이 화재현장의 불길처럼 뜨거워졌다. 나는 쿠팡 노동자들의 죽음을 접하면서부터 쿠팡과의 거래를 완전히 끊었다. 나 한 사람쯤이야 쿠팡의 전체 매출액에 비하면 그야말로 조족지혈에 불과하겠지만 나는 적어도 내 양심에 비추어 그들의 희생을 나의 편리와 맞바꿀 수 없었다. 목소리조차 크게 낼 수 없는 그들의 희생을 우리는 언제까지 지켜보고만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악이란 뿔 달린 괴물처럼 괴이한 존재가 아니며, 언제나 우리 가운데 존재하는 진부하고 평범한 것"이라는 아렌트의 말을 곱씹어 생각하게 되는 요즘, 투명한 여름 햇살이 가난한 이의 살갗에만 머무를 게 아니라 어느 기업가의 비열한 눈동자에 깃든 탐욕의 덩어리를 태울 수만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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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레사 2021-06-20 13: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