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불호텔의 유령
강화길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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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일이든 의욕이 앞서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럴 때 기다림의 시간이 충분하지 않으면 대개는 자신의 의지나 기대와는 전혀 다른, 말하자면 기대에 못 미치는 실망스러운 결과를 맛보게 된다. 예컨대 투자자는 많은 돈을 벌겠다는 의욕이, 학생은 뛰어난 성적을 얻겠다는 의욕이, 스포츠인이라면 자신이 참가하는 대회에서 반드시 우승을 거머쥐겠다는 의욕이 앞선 까닭에 다른 제반 사항을 고려하지 못하는 우를 범하게 되고, 이는 곧 부상이나 과로, 투자 실패와 같은 좋지 않은 결과와 직결되기도 하는 것이다. 글을 쓰는 작가도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하다. 자신이 추구하던 문학 스타일과 전혀 다른 새로운 작품을 선보이고 싶다거나, 꾸준히 추구하던 성향의 작품에서 대작을 쓰고야 말겠다는 의욕이 앞선 나머지 전보다 못한 작품을 선보이게 되는 경우가 그렇다.

 

국내에서는 익숙지 않은 고딕 호러 장르를 꾸준히 시도하고 있는 강화길 작가의 신작 <대불호텔의 유령>을 읽고 들었던 생각이다. 작가의 두 번째 장편소설이기도 한 이 책은 6·25 전쟁의 비극적 상처가 가시지 않은 1950년대의 인천 대불호텔을 배경으로 그곳에서 생활하던 네 사람의 심령 체험을 이야기의 주된 테마로 삼고 있다. 그러나 액자 소설 형식을 취하는 까닭에 프롤로그와 1부에서는 강화길 작가를 연상시키는 화자 '나'의 이야기가 나온다. 소설가인 '나'는 <니꼴라 유치원>이라는 소설을 쓰려고 할 때마다 악의에 찬 목소리의 방해를 받았으며, 그 목소리는 '나'가 모언가를 성취하려 할 때마다, 소중한 누군가와 관계를 진전시키려 할 때마다 저주를 퍼붓는 등 자신 역시 악령에 씌었던 적이 있음을 고백한다. 자꾸만 위축되어가는 삶에 고통스러워하던 '나'는 점차 악의에 전염되고, 보란 듯이 더 깊은 악의로 점철된 소설을 써내 저주를 짓뭉개주겠다고 결심한다. '나'는 <니꼴라 유치원>의 풍경이 인천에 실존했던 대불호텔과 비슷하다는 엄마 친구 아들의 말을 듣고 1호선에 몸을 싣는데...

 

"그래서 나는 포기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의 가족 안에 비집고 들어가는 일은 말이다. 그 어처구니없는 소설을 쓰겠다며 진을 흔드는 일은 그만둬야겠다 싶었다. 그래, 무슨 소용이 있겠어. 다 의미 없는 일이야. 그런데 그 순간, 진이 뭔가를 결심했다는 듯 다부진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어떤 예감에 사로잡혔다. 인천에 오기 전에 나를 휘감았던 바로 그 감정. 그를 영원히 보지 못하게 될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깊은 불안."  (p.70)

 

소설의 2부에서는 이제 1955년 인천의 대불호텔이 배경이다. 더불어 이야기의 화자도 '나'(지영현)로 바뀐다. 6·25 전쟁 당시 북한군 병사들의 군복을 담당하던 '나'의 부모는 폭격으로 사망하고, 홀로 살아남은 '나'는 동네 사람들의 눈을 피해 당숙모에게 의탁한다. 그렇게 가까스로 성장한 '나'는 돈을 벌어 당숙모에게 갖다 바치는 생활을 이어오고 있다. '나'는 호텔 3층을 임차하여 숙박업소로 운영한 뒤 수익금으로 건물 주인에게 임차료를 내고 있는 고연주에게 고용된 몸으로, 손님 한 명을 호텔로 데려올 때마다 인센티브를 받는 호객꾼이다. 호텔에는 영어에 능통하고 장사 수완이 있는 고연주와 중식당에서 일하며 부엌방에 얹혀사는 화교 뢰이한이 있다. 어느 날, 한 미국인이 대불호텔에 장기 투숙하게 되자 고연주는 '나'에게 자신을 좀 도와달라는 부탁을 하게 되었고, 당숙모와의 갈등도 갈등이지만 고연주를 동경하던 '나'는 제안을 수락함과 동시에 짐을 옮겨 그녀와 호텔에서 함께 거주하며 호텔 일을 본격적으로 거들기 시작한다. 그 미국인의 이름은 '셜리 잭슨'으로 귀신 들린 집 이야기를 쓰기 위해 흉가를 찾아온 소설가이다.

 

젊은 여자의 몸으로 다 쓰러져가는 호텔을 임차하여 능숙하게 운영하는 고연주에 대해 사람들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그녀에게 귀신이 들러붙었다 둥, 드센 팔자라는 둥 이상한 소문과 억측이 뒤따랐다. 그럼에도 그녀는 어떻게든 셜리 잭슨을 더 오래 붙들어두기 위해 대불호텔에서의 자신이 겪은 공포 체험을 들려주며 환심을 사려 애쓴다. 연주와 셜리 잭슨이 붙어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호텔의 잡다한 일은 언제나 '나'의 몫으로 남게 되고 연주에 대한 '나'의 불만은 점점 깊어만 간다. 한편 대불호텔에서 거주하는 셜리와 고연주, 심지어 화교 뢰이한까지 유령의 소행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는 환각에 시달리며 그 건물에 영원히 갇혀버릴 것만 같은 공포를 느끼게 되는데, '나'에게만은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누구보다도 대불호텔에 자리 잡고 싶어하는 '나' 지영현에게는...

 

"당신들은 모두 웃고 싶어해요. 행복하기를 원해요. 하지만 서로를 믿지 못해요. 믿을 생각이 없어요. 믿으면 배신당한다고 생각하니까요. 그래서 자기 자신조차 믿지 못하니까요. 그게 당신들의 삶이었으니까요. 아, 그건 나의 삶이기도 해요. 네, 그래요. 왜 이토록 어려울까요. 불안함으로만 가득할까요. 누군가에게는 쉬운 일이 우리에게는 왜 이토록 고통스러울까요. 우리에게 사랑이란 덧없는 기억이고, 불행은 오래 남는 이야기죠."  (p.207)

 

소외감을 느끼던 '나'(지영현)는 결국 함께 지내던 사람들에게 원한을 터뜨린다. 광기에 휩싸인 대불호텔의 악의 속에서 사람들에게 내재된 원한이 분출된다. 좌익과 우익 간의 증오, 화교에 대한 미움, 젊은 여성을 향한 알 수 없는 적개심 등 쌓인 분노가 더 이상 누를 수 없는 악의로 터져 나온 것이다. 소설의 뒷이야기는 이제 3부로 이어진다.

 

"그들의 목소리가 호텔에 둥둥 울린다. 아주 오래전, 사람들로 가득했던 커다란 홀. 뜨거운 닭 국물과 향긋한 고수 냄새로 가득했던 오래된 벽돌 건물. 그들의 대답이 피아노 음처럼 건물 안을 가득 채운다. 그리고 어디선가 또다른 목소리가 들린다. 지나간 시간, 역사, 그곳을 거쳐간 사람들의 기억으로 남아 건물 자체가 된 모든 이들의 목소리. 그리고 그 이야기를 상상하는 사람의 목소리."  (p.298)

 

극한의 공포와 오싹한 느낌을 기대했던 독자라면 약간의 실망감으로 이 책을 덮을 수도 있겠다. 사람들에게 고딕 호러 장르는 여전히 낯선 어떤 것이며, 셜리 잭슨과 에밀리 브론테, 장화 홍련 등 우리 귀에도 익숙한 이름들의 차용은 왠지 소설에 대한 거부감을 일으킨다. 우리는 언제나 소설을 구성하는 익숙한 테마와 플롯, 가상이지만 각각의 인물에 걸맞은 적당한 이름들을 상상하며 책을 읽는 까닭에 우리의 상상을 뒤집는 새로운 것들이 등장할 때마다 소설에 대한 흥미와 가독력을 조금씩 잃게 된다. 작가라는 직업이 자신의 창의력과 욕구에 반할지라도 독자의 수요와 관심에 전적으로 부합하는 작품만 쓰는 것은 아니겠지만, 강화길 작가도 언젠가는 자신이 추구하는 고딕 호러 소설의 장르와 대중의 관심이 한 곳에서 만나는 새로운 시대를 개척하리라고 믿는다. 안방극장을 차지하는 드라마는 언제나 막장 드라마가 최고라고 확고하게 믿는 당신의 기대가 언젠가 깨지고야 마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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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거짓 눈물을 비유적으로 일컬어 '악어의 눈물(crocodile tears)'이라는 말을 종종 사용하곤 합니다. 악어는 사실 장기간 물 밖에 나와 있을 때 눈이 건조해져 상하지 않도록 눈물을 흘리며, 눈물샘을 관장하는 신경과 턱의 저작행위를 관장하는 신경이 동일하기 때문에 먹이를 씹어 삼킬 때에도 눈물을 흘린다고 합니다. 14세기 초 존 맨더빌의 여행기에 의하여 처음으로 소개되었다는 이 말은 셰익스피어에 의하여 널리 사용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물론 애먼 악어는 억울한 면이 있겠습니다만 말이죠.


얼마 전에도 우리나라 굴지의 우유 업체 회장 한 분이 '악어의 눈물'을 흘린 적이 있습니다. 여러 불미스러운 일들로 인하여 회사의 주가가 바닥을 치던 시기였습니다. 자신의 회사를 모 사모펀드에게 매각하고 자신은 즉시 회장직에서 물러남은 물론 아들들에게도 경영권을 물려주지 않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그 발표 이후 주가는 수직 상승했습니다. 회장의 눈물 어린 호소를 투자자들은 진심으로 받아들였던 것이지요. 그러나 회사의 매각은 물론 회장직에서 사퇴하는 것도 없었던 일이 되었고, 같은 회사에서 근무하는 아들들 역시 승진까지 했다고 하니 그는 어쩌면 '악어의 눈물'을 흘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그 회장은 정계에 많은 인맥을 형성하고 있는 걸로 유명한 인물이었습니다. 그것을 입증이라도 하려는 듯 회사의 고문으로 있는 그의 부인이 자택에서 단체 모임을 가졌다고 합니다. 열네 명이나 모였다고 하더군요. 물론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인물들이었겠지요. 그중에는 부산 시장도 있었다고 하니 참으로 대단한 분입니다. 5인 이상의 모임이 금지된 방역 4단계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모습은 권력의 상층부에 있었던 예전의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게다가 방역 4단계에도 불구하고 정무에 바쁜(?) 부산 시장이 불원천리하고 달려왔으니 말입니다. 그들은 아마도 방역은 개나 돼지만 지키는 것이지 자신들은 방역 단계를 결정하고 지도하는 특별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나 봅니다.


부산 시장과 같은 당에 있는 윤 모 의원이 최근에 또 '악어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언론사의 카메라 앞에서 젊은 당 대표와 손을 잡고 제대로 폼을 잡고 말입니다. 아마도 그 의원님은 자신의 비리가 영영 들키지 않을 줄 알았는데 너무도 빨리 밝혀진 것이 분해서 눈물을 흘렸는지도 모르지만 당 대표의 눈물은 좀 볼썽사나웠던 게 사실입니다. 물론 당 대표도 머쓱했겠지요. 야당 탄압이라고 주장하며 '악어의 눈물'을 흘리는 그 의원과 동조하자니 그도 역시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정황상 말입니다. 단지 정황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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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무스 2021-08-26 21: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모든 정황이 악어의 눈물이라는 팩트를 지목합니다! 그러면 악어의 눈물이 맞다고 해야할 것 같아요!ㅎ

꼼쥐 2021-08-28 18:16   좋아요 1 | URL
막시무스 님을 포함한 다수의 분들이 팩트라고 믿으신다면 아마도 그렇겠지요. ㅎ
 
일곱 해의 마지막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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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은 실재하는 현실이 아닌 우리의 상상이나 '이럴 것이다' 하는 추정 속에 존재한다고 믿게 되는 경우가 더러 있다. 보이지 않는 사실을 진실로서 받아들인다는 게 어쩌면 아이러니일 수 있지만 겉으로 보이는 현실은 인간의 온갖 탐욕과 위선으로 인해 보잘것없는 거짓이 영원불멸의 진실인 양 포장되는 경우가 하도 많아서 나는 오히려 우리의 상상 혹은 추정이 더 진실에 가까울 수 있다고 지금도 여전히 믿게 되는 것이다. 김연수의 소설 <일곱 해의 마지막> 역시 우리가 아는 시인 '백석'을 주인공으로 삼아 한국전쟁 이후 그가 걸었던(혹은 그러했으리라 추정되는) 삶을 복원함으로써 새롭게 구축된 사회주의 이념과 독재 정치가 자유를 갈구하던 한 시인의 삶을 얼마나 황폐하게 하였는지 독자들에게 그 실상을 생생하게 보여줌은 물론 잊혀가던 한 시인을 다시 그리워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기행은 지난가을, 옥심과 함께 바라보던 불을 떠올렸다. 얼마 전까지 누군가 살았던 집으로 번지던 불. 문짝을 태우고 기둥을 태우고 지붕을 태우던 불. 그때 그는 지금까지 자신이 알던 세계가 그렇게 불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바이러스와 병원균이 불타겠지만, 곧 그 불은 종파주의와 낡은 사상으로 옮겨붙을 것이고, 종내에는 서너 줄의 시구를 얻기 위해 공들여 문장을 고치는 시인이, 맥고모자를 쓰고 맥주를 마시고 짠물 냄새 나는 바닷가를 홀로 걸어가도 좋을 밤이, 높은 시름이 있고 높은 슬픔이 있는 외로운 사람을 위한 마음이 불타오를 것이다. 그렇게 한번 불타고 나면, 불타기 전의 세상으로는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p.165)

 

전쟁이 있었고, 하루아침에 세상은 바뀌었다. 북한 문단은 기행에게 당의 이념을 인민들에게 널리 알릴 수 있는 문학만을 강요했다. 당이 요구하는 시를 쓰지 않으면 평양에서 쫓겨날 수도 있는 상황임에도 기행은 차마 마음에도 없는 시를 쓰지 못한다. 주변 사람들은 그가 시를 쓰지 않는 것이라고 하지만 그는 자신이 더이상 시인이 아니라고, 당과 인민이 원하는 시를 쓸 수 없노라고 고백한다.

 

"저 역시 시를 썼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말들은 제 안에서 점점 지워지고 있습니다. 음식 이름들, 옛 지명들, 사투리들...... 폐허에 굴러다니는 벽돌 조각들처럼 단어들은 점점 부서지고 있어요."  (p.162)

 

기행이 '혼자서 사랑하고 몰두했던' 세계, 자음과 모음으로 이뤄진 언어의 세계, 하루에 일만 톤에 가까운 네이팜탄과 칠백 톤이 넘는 폭탄이 떨어지는 등 종일토록 불비가 쏟아져 평양 곳곳이 불타오르던 순간에도, 그리고 전쟁이 끝난 뒤까지도 살아남을 수 있게 했던 전쟁의 광기로 가득한 이 세계 속에서 자신을 구원했던 언어와 문자들. 문학에서 낡은 사상 잔재를 반대하는 투쟁에 나서라는 교시가 내려진 뒤, 반당 반혁명 작가의 책들을 회수해 공개적으로 불태우는 일이 곳곳에서 벌어진다.

 

"그러므로 책 한 권이 불타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당과 수령, 그리고 그들의 충실한 대리인인 병도는 자신들이 조립한 언어의 세계만이 리얼하다고 말하지만, 수많은 세계를 불태우고 남은 단 하나의 세계라는 점에서 그들의 세계는 한없이 쪼그라들다가 스스로 멸망하리라. 언어와 문자는 언어와 문자 자신의 것이다. 그것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니다. 리얼리즘이란, 그런 언어와 문자가 스스로 실현되는 현실을 말한다. 거기에는 당과 수령은 물론이거니와 기행의 자리마저도 없는 것이다."  (p.191)

 

소설가 김연수의 진실은, 그가 창조한 시인 기행의 세계는, 천불에 휩싸여 사라지는 그 순간까지 이어진다. 나는 소설가 김연수가 지어낸 허구가 아닌, 그가 창조한 리얼리즘의 세계를, 그가 엮은 진실의 꾸러미들을 찬찬히 읽어갔던 것이다. 1930~40년대에 시인으로 이름을 알렸던 기행이 전쟁 후 현실의 무게에 눌려 '희망과 꿈 없이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만 했던, 그럼에도 어떻게든 시인의 삶을 되찾으려 했던 그의 빛바랜 희망이 한 권의 소설 속에서 무지개처럼 되살아나는 진실. 나는 그렇게 김연수의 진실을 읽어내려갔다.

 

"당신 안에서 조선어 단어들이 죽어가고 있다면, 그 죽음에 대해 당신도 책임감을 느껴야만 해요. 날마다 죽음을 생각해야만 해요. 아침저녁으로 죽음을 생각해야만 해요. 그러지 않으면 제대로 사는 게 아니에요. 매일매일 죽어가는 단어들을 생각해야만 해요. 그게 시인의 일이에요. 매일매일 세수를 하듯이, 꼬박꼬박."  (p.165)

 

무거운 현실의 벽 앞에서 한 시인이 겪었을 절망의 푸른 멍자국이 이 소설의 진실이라면, 소설가 김연수의 진실은 시인 기행이 '죽는 순간까지도 마음속에서 놓지 않았던 소망에 대한 이야기'였으리라. 소설을 읽는 우리는 어쩌면 소설가 김연수의 진실을, 혹은 한국전쟁 이후 드러나지 않은 시인 '백석'의 삶과 그의 발자취에 얽힌 절망을 각자의 가슴속에 진실인 양 담게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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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이 바뀌려나 봅니다. 계절의 변화를 처음 목격한 돌쟁이 간난 아가도 아닌데 계절의 변화가 뭐 그리 새삼스러울 게 있을까마는 비도 한 방울 내리지 않고 한동안 강더위가 이어지던 지난날들을 생각하면 오늘처럼 서늘바람이 부는 날씨가 새삼 반가웠던 것입니다. 물론 계절이 바뀌고 선뜻한 냉기가 도는 만추를 기약하기에는 여전히 많은 날들이 흘러야 하겠지만 말입니다. 


오늘은 더위가 물러간다는 처서(處暑). 모기도 처서가 지나면 입이 삐뚤어진다거나 풀도 울며 돌아간다는 속담이 있습니다만 나날이 더워지는 날씨 탓인지 그 정도는 기대하기 어려울 듯합니다. 온종일 비가 내렸고 12호 태풍 '오마이스'의 상륙마저 예보된 처서의 풍경은 위기를 앞둔 팽팽한 긴장감이 넘쳤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처서에 비가 오면 독 안에 곡식이 준다.'는 속담이 있는 것처럼 이맘때의 비는 그닥 반가운 게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나와 같은 도시내기들은 에어컨 없이 밖에서 부는 바람만으로도 견딜 수 있는 이런 변화가 마냥 반가울 따름입니다.


이렇게 맥락도 없는 비가 그칠 줄 모르고 내리는 것은 계절을 오가는 불필요한 소모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처서에 내린 비로 한결 차분해진 나는 왠지 전에는 없던 기운이 불끈 솟아난 듯 퇴근하는 발걸음에 힘이 들어갔던 것입니다. 처서에 비가 내리면 독 안에 곡식이 준다는 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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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밤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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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소설은 한 글자 한 글자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꼼꼼히 읽어도 이해가 잘 되지 않는가 하면 또 어떤 소설은 눈밭을 스치는 바람처럼 반나절 만에 후루룩 읽어도 전에 이미 두어 번쯤 읽었던 것처럼 쉽사리 이해되기도 한다. 그렇지만 독자가 읽는 재미는 또 다른 것이어서 띄엄띄엄 어렵게 읽으면서도 끝내 손에서 책을 내려놓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쉽게 이해되면서도 몇 날 며칠을 방치하다 억지로 읽게 되는 경우도 더러 있다. 그러므로 쉽고 재미있는 소설을 고르겠다는 생각은 애저녁에 버리는 게 좋다. 소설은 그저 그저께 산 로또복권의 추첨을 기다리듯 그렇게 설레는 마음으로 펼칠 일이다. 번번이 꽝이 될지언정 1등 당첨을 간절히 바라는 심정으로 그렇게...


최은영의 소설을 선택한다는 건 실패가 없는 복권 추첨과 같다는 걸 알기에 나는 두려움 없이 집어들곤 한다. 재미의 차이는 조금 있을지언정 재미에 감동을 더하면 결과적으로 만족의 강도가 비슷하다는 건 소설가에게 있어서는 더없이 큰 선물을 부여받은 거나 다름없다고 나는 혼잣말처럼 되뇌곤 했었다. 그리고 <밝은 밤>은 그녀의 첫 장편소설이라고 했다. 처음이라는 두려움보다는 이전과 다른 작가의 모습을 상상하며 나는 설렘으로 책을 펼쳤다.


"엄마는 남자와 사는 삶에 희망이 있는 것처럼 말하곤 했지만, 그 말을 가만히 들어보면 도리어 엄마야말로 남자에 대한 희망이 없는 사람 같았다. 때리지 않고 도박하지 않고 바람피우지 않는 남자만 되어도 족하다니, 인간 존재에 대한 그런 체념이 또 어디 있을까."  (p.17)


소설은 서른두 살의 '나'(지연)가 이혼 후 서울을 떠나 바닷가 근처 작은 마을 희령으로 도망치듯 향하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이 소설의 화자인 지연은 이곳에서 오랫동안 연락이 끊겼던 (외)할머니와 우연히 재회하게 된다. 엄마와 사이가 틀어진 할머니는 지연의 결혼식에조차 초대받지 못할 정도로 데면데면한 관계를 지속하고 있었는데, 지연은 뜻하지 않게 이웃사촌이 된 할머니를 통해 저간의 어색한 관계를 복원하고 할머니로부터 할머니의 어머니, 할머니의 외할머니로 이어지는 지난했던 모계 3대의 삶을 전해 듣는다. 그 신산스러운 삶의 궤적을 따라가면서 지연 역시 단단해져 간다.


"고통 안에서 시간은 직선으로 흐르지 않았다. 나는 자꾸만 뒷걸음질쳤고, 익숙한 구덩이로 굴러떨어졌다. 다시는 회복될 수 없을지도 모르는 조바심 서린 두려움이 나를 장악했다. 나는 왜 내가 원하는 만큼 강해질 수가 없을까. 이렇게까지 노력하는데도 왜 나아지지 않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며 오래 울던 밤에 나는 나의 약함을, 나의 작음을 직시했다."  (p.156)


백정의 딸로 태어나 사람들의 멸시와 천대 속에서 자랐던 증조모는 병들어 누운 어머니를 홀로 모시는, 의지가지없는 신세였다. 일본군에게 잡혀갈 위기에서 구해준 사람이 증조부였고, 증조모는 어쩔 수 없이 증조부와 함께 개성으로 달아난다. 병든 어머니를 돌본 건 증조부의 친구였던 새비 아저씨였다. 새비 아저씨 부부가 증조모가 있던 개성으로 이사를 온 후 사람들로부터 따돌림을 받던 증조모는 새비 아줌마와 가장 절친한 동무로 지낸다. 증조모가 딸 영옥을 낳은 2년 후 새비 아줌마도 딸 희자를 낳는다. 그들 역시 친자매처럼 가깝게 지낸다. 새비 아저씨의 집안이 가세가 기울어 빚을 갚을 길이 없자 새비 아저씨는 돈을 벌기 위해 일본으로 떠나고 새비 아저씨는 결국 원폭 희생자가 되어 귀국한다. 해방이 된 후 새비 아저씨가 죽고 집안사람이 사상범으로 몰리자 새비 아줌마와 희자는 남한으로 탈출하여 새비 아줌마의 고모가 있는 대구에 정착한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증조부 내외와 영옥 역시 피난길에 올라 대구에서 새비 아줌마와 재회한다. 국군에 자원입대했던 증조부는 휴전이 되자 부모님의 소식을 쫓아 희령으로 이사한다. 그곳에서 영옥은 처자식이 있던 남자와 혼인하여 '나'(지연)의 엄마인 미선을 낳는다. 결국 영옥의 남편인 조남선은 본처를 따라 떠난다. 증조부도 교통사고로 죽고 희령에는 이제 증조모와 영옥 모녀만 남는다.


"눈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세상에는 진심으로 사과받지 못한 사람들의 나라가 있을 것이다. 내가 많은 걸 바라는 건 아니야, 그저 진심 어린 사과만을 바랄 뿐이야. 자기 잘못을 인정하기를 바랄 뿐이야. 그렇게 말하는 사람과, 연기라도 좋으니 미안한 시늉이라도 해주면 좋겠다고 애처롭게 바라는 사람과, 그런 사과를 할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애초에 이런 상처도 주지 않았으리라고 체념하는 사람과, 다시는 예전처럼 잠들 수 없는 사람과, 왜 저렇게까지 자기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드러내?라는 말을 듣는 사람과, 결국 누구에게도 이해받을 수 없다는 벽을 마주한 사람과, 여럿이 모여 즐겁게 떠드는 술자리에서 미친 사람처럼 울음을 쏟아내 모두를 당황하게 하는 사람이 그 나라에 살고 있을 것이다."  (p.252)


소설은 시대적 환경이나 경제적 여건에 관계없이 줄곧 약자의 입장에 있었던 여인의 삶을 조망한다. 할머니가 들려준 이야기, 새비 아줌마가 증조모에게 보내온 편지, 영옥에게 보내온 희자의 편지 등을 통해 여성이라는 이유로 감수해야만 했던 지난한 삶과 그들 사이의 진한 우정 혹은 동지 의식이 진한 감동으로 남는다. 그리고 '나'(지연)의 이혼을 바라보는 엄마와 '나'의 시각차와 그로 인한 갈등을 보여줌으로써 사회적 약자로서의 여성이 우리 사회에서 겪어야 하는 정신적, 육체적 고통은 지금도 여전히 현재 진행형임을 강조하고 있는 듯하다.


"예전처럼 며칠씩 서로 말도 붙이지 않을 정도로 신경전을 벌일 만한 일이 우리에게는 더이상 없었다. 큰불이 나기 전에 꺼버렸고, 상대에게 작은 불씨를 던졌다는 것에 문득 무안해지기도 하는 사이가 된 것이었다. 그건 우리가 그만큼 친밀한 사이가 아니라는 뜻이기도 했다. 서로에게 큰 상처를 입혔다가 돌이킬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우리는 눈빛으로 공유하고 있었다. 우리는 더이상 끝까지 싸울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p137)


소설에 등장하는 남자들은 한결같이 문제 투성이다. 바람을 피우고도 사과 한마디 없었던 '나'(지연)의 전 남편과 증조모를 무사히 구출했다는 이유로 평생 자기밖에 몰랐던 증조부, 본처가 있다는 사실도 숨긴 채 초혼인 척 결혼을 했던 할아버지 조남선 등은 어쩌면 우리 사회의 전형적인 남편상일지도 모른다. 그들은 스스로의 잘못도 인지하지 못한 채 여자들로부터 괜한 욕을 먹고 있다고 반박할런지도 모른다. 그런 까닭에 소설에 등장하는 여인들은 서로를 보듬고 너나 할 것 없이 서로의 삶을 위로한다.


"새비 아주머니의 시선은 증조모의 몸을 지나서, 마음을 지나서, 어쩌면 영혼이라고 부를 수 있는 장소에까지 다다랐다. 그곳에서, 아직 다섯 살도 되지 않은 어린 증조모는 햇볕에 따뜻하게 데워진 돌멩이를 안고서 내 동무야, 내 동무야, 말을 걸고 있다. 그런 작은 따뜻함이라도 간절해서, 하지만 사람은 너무 무서워서, 증조모는 마당 구석에 쪼그려앉아서 자기 그림자를 보고 있다."  (p.288)


누구에게나 삶의 풍경은 비슷할지도 모른다.  평범한 일상 사이로 드문드문 기쁘고 슬픈 기억들이 마치 아름다운 장식처럼 펼쳐지는 것. 소설 역시 그와 같은 삶의 풍경을 한 폭의 수채화처럼 그려낸다. 기나긴 어둠의 관습을 통과하면 네온사인 찬란한 '밝은 밤'이 기필코 찾아오고야 말 것이라는 작가의 기대는 '본인이 느꼈던 현실의 중력이 더는 작용하지 않는 곳'으로 향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현실의 중력이 조금 더 가벼워지기를 작가는 소설을 쓰는 내내 기도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렇게 희망 고문을 하면서 무거운 현실을 이기고 있노라고 세상을 향해 외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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