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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해의 마지막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7월
평점 :
진실은 실재하는 현실이 아닌 우리의 상상이나 '이럴 것이다' 하는 추정 속에 존재한다고 믿게 되는 경우가 더러 있다. 보이지 않는 사실을 진실로서 받아들인다는 게 어쩌면 아이러니일 수 있지만 겉으로 보이는 현실은 인간의 온갖 탐욕과 위선으로 인해 보잘것없는 거짓이 영원불멸의 진실인 양 포장되는 경우가 하도 많아서 나는 오히려 우리의 상상 혹은 추정이 더 진실에 가까울 수 있다고 지금도 여전히 믿게 되는 것이다. 김연수의 소설 <일곱 해의 마지막> 역시 우리가 아는 시인 '백석'을 주인공으로 삼아 한국전쟁 이후 그가 걸었던(혹은 그러했으리라 추정되는) 삶을 복원함으로써 새롭게 구축된 사회주의 이념과 독재 정치가 자유를 갈구하던 한 시인의 삶을 얼마나 황폐하게 하였는지 독자들에게 그 실상을 생생하게 보여줌은 물론 잊혀가던 한 시인을 다시 그리워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기행은 지난가을, 옥심과 함께 바라보던 불을 떠올렸다. 얼마 전까지 누군가 살았던 집으로 번지던 불. 문짝을 태우고 기둥을 태우고 지붕을 태우던 불. 그때 그는 지금까지 자신이 알던 세계가 그렇게 불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바이러스와 병원균이 불타겠지만, 곧 그 불은 종파주의와 낡은 사상으로 옮겨붙을 것이고, 종내에는 서너 줄의 시구를 얻기 위해 공들여 문장을 고치는 시인이, 맥고모자를 쓰고 맥주를 마시고 짠물 냄새 나는 바닷가를 홀로 걸어가도 좋을 밤이, 높은 시름이 있고 높은 슬픔이 있는 외로운 사람을 위한 마음이 불타오를 것이다. 그렇게 한번 불타고 나면, 불타기 전의 세상으로는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p.165)
전쟁이 있었고, 하루아침에 세상은 바뀌었다. 북한 문단은 기행에게 당의 이념을 인민들에게 널리 알릴 수 있는 문학만을 강요했다. 당이 요구하는 시를 쓰지 않으면 평양에서 쫓겨날 수도 있는 상황임에도 기행은 차마 마음에도 없는 시를 쓰지 못한다. 주변 사람들은 그가 시를 쓰지 않는 것이라고 하지만 그는 자신이 더이상 시인이 아니라고, 당과 인민이 원하는 시를 쓸 수 없노라고 고백한다.
"저 역시 시를 썼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말들은 제 안에서 점점 지워지고 있습니다. 음식 이름들, 옛 지명들, 사투리들...... 폐허에 굴러다니는 벽돌 조각들처럼 단어들은 점점 부서지고 있어요." (p.162)
기행이 '혼자서 사랑하고 몰두했던' 세계, 자음과 모음으로 이뤄진 언어의 세계, 하루에 일만 톤에 가까운 네이팜탄과 칠백 톤이 넘는 폭탄이 떨어지는 등 종일토록 불비가 쏟아져 평양 곳곳이 불타오르던 순간에도, 그리고 전쟁이 끝난 뒤까지도 살아남을 수 있게 했던 전쟁의 광기로 가득한 이 세계 속에서 자신을 구원했던 언어와 문자들. 문학에서 낡은 사상 잔재를 반대하는 투쟁에 나서라는 교시가 내려진 뒤, 반당 반혁명 작가의 책들을 회수해 공개적으로 불태우는 일이 곳곳에서 벌어진다.
"그러므로 책 한 권이 불타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당과 수령, 그리고 그들의 충실한 대리인인 병도는 자신들이 조립한 언어의 세계만이 리얼하다고 말하지만, 수많은 세계를 불태우고 남은 단 하나의 세계라는 점에서 그들의 세계는 한없이 쪼그라들다가 스스로 멸망하리라. 언어와 문자는 언어와 문자 자신의 것이다. 그것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니다. 리얼리즘이란, 그런 언어와 문자가 스스로 실현되는 현실을 말한다. 거기에는 당과 수령은 물론이거니와 기행의 자리마저도 없는 것이다." (p.191)
소설가 김연수의 진실은, 그가 창조한 시인 기행의 세계는, 천불에 휩싸여 사라지는 그 순간까지 이어진다. 나는 소설가 김연수가 지어낸 허구가 아닌, 그가 창조한 리얼리즘의 세계를, 그가 엮은 진실의 꾸러미들을 찬찬히 읽어갔던 것이다. 1930~40년대에 시인으로 이름을 알렸던 기행이 전쟁 후 현실의 무게에 눌려 '희망과 꿈 없이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만 했던, 그럼에도 어떻게든 시인의 삶을 되찾으려 했던 그의 빛바랜 희망이 한 권의 소설 속에서 무지개처럼 되살아나는 진실. 나는 그렇게 김연수의 진실을 읽어내려갔다.
"당신 안에서 조선어 단어들이 죽어가고 있다면, 그 죽음에 대해 당신도 책임감을 느껴야만 해요. 날마다 죽음을 생각해야만 해요. 아침저녁으로 죽음을 생각해야만 해요. 그러지 않으면 제대로 사는 게 아니에요. 매일매일 죽어가는 단어들을 생각해야만 해요. 그게 시인의 일이에요. 매일매일 세수를 하듯이, 꼬박꼬박." (p.165)
무거운 현실의 벽 앞에서 한 시인이 겪었을 절망의 푸른 멍자국이 이 소설의 진실이라면, 소설가 김연수의 진실은 시인 기행이 '죽는 순간까지도 마음속에서 놓지 않았던 소망에 대한 이야기'였으리라. 소설을 읽는 우리는 어쩌면 소설가 김연수의 진실을, 혹은 한국전쟁 이후 드러나지 않은 시인 '백석'의 삶과 그의 발자취에 얽힌 절망을 각자의 가슴속에 진실인 양 담게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