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잖아, 다음에는 책방에서 만나자
김지선 지음 / 새벽감성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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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관계자'라는 말은 꽤나 근사한 말처럼 들린다. 우리가 어느 집 문패처럼 손쉽게 마주할 수 있는 '관계자 외 출입 금지'라는 팻말에서 보듯 '관계자'는 언제나 남들이 드나들 수 없는 통제구역을 무시로 출입할 수 있는 권한을 지닌, 말하자면 보통의 일반인들과는 차별되는 어떤 특수한 권한을 부여받은 소수의 몇몇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관계자'는 사실 권한보다는 책임을 더 크게 떠안은 사람이라는 걸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남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근사한 위치에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코로나 팬데믹 상황이 생각보다 길게 이어지면서 우리가 무시로 드나들던 대부분의 공간들조차 이제는 몇몇 '관계자'들의 전유물로 변한 느낌이 든다. 그중 하나가 도서관이나 서점이 아닐까 싶다. 특별한 일이 없어도, 약속 시간까지는 한참의 여유가 있을 때에도 내 집인 양 주저 없이 들어가 빈 시간을 편하게 보내곤 하던 공간인데 이제는 '관계자'로부터 출입에 필요한 허가를 득해야 할 것만 같은, 부담스러운 공간으로 변하고 말았다. 김지선 작가의 소설 <있잖아, 다음에는 책방에서 만나자>를 읽는 동안 나는 마치 몇십 년 전의 과거로 시간여행을 한 느낌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책방지기가 되었고 어느 날 갑자기 곰인형이 내게 왔던 것처럼 어느 날 갑자기 책방에서 일했던 알바생의 이야기는 소설이 되었다. 소설 속 화자를 주인이 아닌 알바생으로 정한 것은 책방을 잘 모르는 사람의 입장으로 책방에서의 일 년을 그려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정해진 업무만 하면 되는 알바생의 입장으로 책방을 묘사하고 싶었다."  (p.194 '나·김지선' 중에서)


책방에서 근무하는 알바생의 시점으로 1월부터 12월까지의 소소한 일상을 마치 한 권의 에세이처럼 엮은 이 소설은 나처럼 둔한 독자에게는 어쩌면 에세이라고 해도 깜빡 속아 넘어갈 듯하다. 나도 그렇게 알고 읽었는데 뒷부분에 실린 '일 년이라는 인연'과 '일 년의 나에게'를 읽고 나서 그제야 비로소 이 책은 작가의 이야기를 알바생에게 투영하여 쓴 한 권의 소설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실제로 양천구의 어느 골목에 위치한 독립서점 '새벽감성1집'을 운영하고 있다는 작가는 여행작가로 지내다가 독립서점의 사장님이 된 케이스.


"인생을 오래 산 것은 아니지만 처음 이곳에서 일을 시작했던 때는 내 삶에서 가장 힘들던 시기였다. 사라져 버리고 싶었지만 사라질 수 없었고 내가 힘들어하는 것을 보이면 나를 의지하는 가족들조차 무너져 버릴 것 같았기에 기를 쓰고 버텼다. 그러다 우연히 책방에 알바 자리가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적당히 외진 곳에 있고 적당히 숨을 수 있으며, 알바의 업무는 매출을 상승시키는 것이 아니라 사장의 빈자리를 그저 메워주는 역할이라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p.35)


소설은 그렇게 특별할 것 같지 않은 책방 알바의 이야기로 채워진다. 일월, 이월, 삼월, 사월... 특별할 것도 없는 한 달 한 달의 소제목을 따라 책방 알바가 겪고 느끼는 특별한 일상과 생각들이 특별하지 않은 소제목 밑에 채워지는 것이다. 마치 우리의 삶이 돌이켜보면 특별하지 않은 이름 밑에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특별한 경험들로 채워지는 것처럼 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도래하지 않은 앞으로의 일 년을, 오 년을, 혹은 십 년을 걱정하곤 한다.


"사장은 이곳에서 십 년 동안 책방을 하고 싶다 했다. 그 말을 들으며 십 년을 과연 버틸 수 있을까 생각했다. 그런데 중학교 때 오던 곳이 갑자기 생각나 고등학생이 된 지금 찾아왔다는 손님의 말에 뭉클한 감정이 들었다. 이 아이가 대학교에 간 후에 갑자기 생각나 찾아오거나 결혼하고 나서 갑자기 찾아왔는데 여전히 이곳에 책방이 있다면 어떨까? 모든 것이 빠르게 변하는 세상인데 언제 와도 늘 그대로인 이곳이 남아 있다면 어떨까?"  (p.146 '시 월' 중에서)


사실 이 소설은 책방 알바의 경험을 다룬 책이라기보다 책방이라는 특수한 공간에서 한 사람이 겪는 특별한 인연에 관한 책이라고 해야 할 듯하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로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라고 어느 시인이 노래하지 않았던가. 누군가를 만나 인연을 맺는다는 건 그 사람의 삶의 빗장을 열과 무시로 드나들 수 있는 관계를 득하는 일이다. 말하자면 모르던 누군가의 삶에 '관계자'가 되는 것이다. 실로 어마어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 나 역시 누군가의 삶에 '관계자'가 되어 그의 삶 속으로 깊이 들어가 보고 싶다. 여행을 하듯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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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핍이나 망실로 인한 불편이 크면 클수록 우리는 다른 어떤 것을 희생하더라도 그 불편을 회복하려는 경향은 누구에게나 있다. 인간의 변덕이란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몸은 건강하지만 상대적으로 돈이 부족한 사람은 '내가 한쪽 팔이 없어진다고 한들 돈만 많다면 더 바랄 게 없겠다.'라든가 '돈만 넉넉하다면 그깟 건강쯤이야...' 하는 식의 생각을 갖게 마련이다. 말하자면 지금 시점에서는 아무 문제가 없는 건강을 대가로 부족한 돈을 맞바꿀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막상 건강을 잃고 나면 사람은 누구나 그 반대로 생각하게 된다. 변덕이 죽 끓듯 하는 것이다.

 

며칠 전 윤 전 검찰총장에 대한 중요한 법원 판결이 있었다. 추미애 법무부 장관 시절 내려진 정직 2개월 징계가 정당했다는 판결이었다. 법원은 오히려 ""채널A사건 수사·감찰 방해와 재판부 문건을 징계 사유로 인정하면 면직 이상의 징계가 가능하므로, 정직 2개월의 징계처분은 양정기준에서 정한 징계양정 범위의 하한보다 가볍다."고 했다. 말하자면 윤 전 총장의 죄는 면직도 가능한 중대 범죄였다는 것이었다. 추미애 법무부 장관 당시 검사징계위원회는 ▲재판부 성향 자료 불법수집 ▲채널A사건 감찰 방해 ▲채널A사건 수사 방해 ▲정치적 중립 위반을 징계 사유로 인정했었던 바, 정치적 중립 위반만 무죄로 보았고 나머지는 모두 유죄로 판단했다.

 

이러한 법원의 판결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공정과 상식을 주장한다. 뻔뻔함의 극치가 아닐 수 없다. 어쩌면 그는 자신의 죄를 덮기 위해서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는지도 모른다. 자신이 야당의 유력 대선 후보로 부상하면 검찰이나 언론도 감히 함부로 하지 못할 것이기에 정직 2개월의 징계조차 법원 역시 부당하다고 인정해줄 것이라고 확실히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예상과 다른 판결이 나오자 그의 스텝은 꼬이기 시작했다. 이번 판결이 단순한 흠집 차원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공수처에 고발된 직권남용 혐의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 불 보듯 뻔한 상황에서 마냥 손을 놓고 기다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여 판결 하만에 항소를 하지 않았던가.

 

자신의 측근을 보호하기 위해 수사에 개입하고, 재판부 성향 자료를 불법적으로 작성하는 등 검찰총장으로 군림하면서 온갖 범죄를 저지르던 그가 이제는 손바닥에 왕(王) 자를 새긴 채 대한민국의 왕이 되려 하고 있다. 참으로 한심하기 그지없는 인물이다. 그를 지지하던 서민 교수도 법원의 판결이 나오자 "윤 후보에게 실망한 적 없었지만 이번 판결에 대한 반응을 보며 그에게 처음으로 실망한다.”고 썼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를 지지하는 아둔한 사람들은 또 뭐란 말인가.

 

그나저나 계절을 건너뛴 날씨가 갑자기 겨울로 향하는 듯하다. 바람이 불고 기온도 크게 떨어져 쌀쌀해진 느낌이다. 엊그제만 하더라도 한여름 더위가 기승을 부렸는데 갑자기 한파주의보라니... 날씨가 더울 때는 제발 기온이 좀 떨어졌으면 싶었는데 갑자기 날씨가 이렇게 급변하니 되려 옛 생각이 나는 걸 보니 인간의 변덕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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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페퍼로니에서 왔어
김금희 지음 / 창비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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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기억이라는 건 언제나 쓸쓸함을 전제로 한다. 그것의 들추어짐에서부터, 그리고 들추어진 기억이 자신의 머릿속에서 맴맴 맴을 돌거나 두서없이 타자에게 말해지거나 혹은 흐릿한 생명력으로 문자화되는 순간에도 거리의 낙엽처럼 부서질 듯 메마른 쓸쓸함은 삶의 덧없음 속으로 끝없이 유영한다. 물론 그 쓸쓸함의 기원은 대개 되돌릴 수 없는 시간여행자의 운명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과거를 끝없이 되새김질하는 인간 종의 비애를 한껏 드러내곤 한다. 과거의 기억과 그 쓸쓸함에 대한 헌사, 그것이 곧 김금희 소설의 원천이라고 나는 늘 생각해 왔던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쓸모도 없이 무작정 쌓여만 가던 어느 가을날의 낙엽 더미와 매캐한 연기와 함께 스러지던 시간의 흔적들처럼 무상한 느낌을 쓰고 또 지우게 하는 연례행사와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김금희의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어느 밤, 그렇게 흰 가지를 보고 있는데 바람이 불었고 어딘가에서 누가 종이 같은 것을 태웠고 한동안 잊고 있었던 소리들이 연상되었다. 기대와 상관없이 발생하고 의식이 수면 아래로 가라앉으면 저절로 소멸했다가 다시금 떠오르던 어떤 것들이. 그렇게 해서 복기한 밤의 소리는 엄마의 투명으로 한동안 나를 쥐고 있던 죽음의 세계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슬프게도 그것이 사실이었다."  (p.174 '우리는 페퍼로니에서 왔어' 중에서)


김금희 작가가 들려주는 슬픈 서사는 대개 주인공의 젊은 시절에 '발생'했던 사랑과 그로 인한 상처와 좌절, 그리고 그 기억이 쥐고 흔드는 현실의 뿌리들로 요약할 수 있다. 작가가 말하는 사랑은 개인의 의지나 삶의 계획과는 상관없이, 자연발생적인 어떤 것이며, 돌이킬 수 없는 커다란 결과를 떡하니 안겨주고 홀연 사라지는 삶의 불청객과도 같은 존재이지만 인간의 삶이란 결국 자신이 선택한 사랑의 파문임을 인식할 때, 각자에게 주어지는 다른 문양의 사랑을 우리는 모두 자신의 운명처럼 받아들여야만 하는지도 모른다.


"나는 평소에는 크게 관심도 없는 사랑의 면면을 왜 이 여름 이렇게 고심해야 하나 생각했다. 리애씨도 선생님도 모두 나보다는 근 십수년은 위인 여자들, 그러니까 더 늙고 경험 있는 연륜 있고 스펙 있는 여자들인데 인생의 중요한 마디마다 여전한 의문을 풀지 못한 채 살고 있는 듯했다. 어쩌면 신화에서 인간이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을 때 다 날아가고 남은 건 희망이 아니라 의문이 아니었을까."  (p.206 '기괴의 탄생' 중에서)


표제작인 '우리는 페퍼로니에서 왔어'를 비롯하여 '우리가 가능했던 여름', '크리스마스에는', '마지막 이기성', '기괴의 탄생', '깊이와 기울기', '초아' 등 일곱 편의 단편을 묶은 이 소설집은 일곱 편 모두 작가가 사십대에 쓴 작품이라고 한다.  사십대! 자신의 인생에서 결코 많지도, 적지도 않은 나이. 이제 막 인생의 반환점을 돌았을 그 나이에 이르면 삶의 무상함이 차츰 그 색깔을 더해가게 마련, 과거의 아름다웠던 기억들마저 쓸쓸하게 느껴지곤 한다.


"김금희의 소설은 매일의 나날과 축척을 같이하는데 부질없이 확대된 '나날들'의 지도에서 실패는 지루하고 패배마저 흐리멍덩하다. 어설픈 흔적처럼 존재하는 그것들은 작은 비고란에 기록될 법하지만 비고란이란 대개 비어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남모르는 울분이 있고 지워지지 않는 느낌이 있고 잦아들 수 없는 발버둥이 있고, 요컨대 어쩔 수 없는 고군분투가 있다."  (p.307~p.308 '해설'(황정아) 중에서)


2주째 대체공휴일이 이어지는 3일간의 연휴. 이따금 추적추적 가을비가 내렸고 잊혔던 기억들이 마른 낙엽처럼 흩날렸다. 우리의 삶이 우연처럼 주어진 사랑의 파문(派紋)이라면 운명처럼 찾아오는 사랑의 순간들을 우리는 과연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 결과가 암울한 불행으로 끝날지라도 우리는 다시 또 새로운 사랑을 시작해야 할까. 관객을 대상으로 끝없는 자기 검증을 반복하는 어느 연극의 시나리오처럼 우리는 매번 주어지는 사랑을 마다하지 않고 내 삶의 자기 검증을 이어가야 할까. 사랑이 깊어질수록 어쩌면 단조로운 일상들이 내 삶의 무늬 속에  굵은 밑선처럼 드러나겠지. 마치 단풍이 들듯 말이다. 김금희 작가의 소설집 <우리는 페퍼로니에서 왔어>는 석양 무렵 어느 농부의 낙엽 태우는 손길처럼 익숙하거나 때론 뭉근하다. 어쩌면 작가는 지난날의 사랑을 낙엽처럼 태우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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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살 것인가 - 우리가 살고 싶은 곳의 기준을 바꾸다
유현준 지음 / 을유문화사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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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체제하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원하는 물건을 선택하고 구매하는 데 있어 그 기준은 항상 구매력, 즉 자신의 경제적 형편에 달려 있는 듯 보인다. 불행하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좀 더 나은 선택을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자신의 구매력을 높이기 위해 투잡, 쓰리잡도 마다하지 않으며, 때로는 도시를 떠나 이거고 저거고 모든 걸 포기한 채 자연 속에서 유유자적하고 싶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그게 어디 나 혼자만의 생각일까마는 작게는 아주 소소한 기호식품의 구매에서부터 크게는 가족 전체가 살기 위한 주택의 구매에 이르기까지 모든 선택의 기준이 하나에서 열까지 모두 돈이라고 생각하면 머리가 지끈거리곤 한다.

 

건축가 유현준이 쓴 <어디서 살 것인가>는 자신 살 곳을 고르는 데 있어 모든 사람이 천편일률적으로 제시하는 돈이라는 기준에서 벗어나도록 돕는다. 그렇다고 이 책이 배산임수를 논하는 풍수지리서도 아니요, 자녀의 교육과 교통, 의료와 문화 시설에 대한 접근성 등을 따지는 부동산 관련 서적도 아니다. 인류 문화를 탄생시킨 요람으로서의 공간이 가진 기능과 그 역사를 살펴봄으로써 오직 돈에 매몰되어가는 현대인의 기준을 벗어나 우리는 어떤 공간에서 행복을 느끼며, 어떤 주변 환경이 우리를 더 풍요롭게 하는지, 물질적 풍요가 아닌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는 어떠해야 우리는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는지, 그러자면 우리는 어떠한 공간에서 어떻게 우리 아이를 성장하도록 해야 하는지 등 삶의 주체로서 우리가 자신의 삶을 가치 있게 변모시키기 위해 우리는 어떠한 선택적 대안을 제시하고 발전시켜야 하는지에 대한 제반 문제를 공간과 결부지어 이야기하고 있다.

 

"필자는 건축을 즐긴다. 건축을 공부했기 때문에 다른 도시로 여행을 가거나, 식당을 고르거나, 카페에 가거나, 길을 걸을 때 비전공자보다는 조금 다른 관점에서 볼 줄 알게 되고, 음악을 자꾸 들으면 귀가 만들어지듯이, 독자 여러분이 이 책을 통해서 건축을 맛보고 느낄 수 있는 감각이 조금이나마 키워졌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건축을 느끼면 인생이 더 풍요로워지기 때문이다. 결국 인생은 행복하기 위해서 사는 것이고 다른 많은 것과 마찬가지로 건축도 우리의 행복을 더하는 데 일조할 수 있기 때문이다." (p.372)

 

이 책에서 저자는 다양한 주제에 대해 이야기한다. 교도소를 닮은 현대 학교 건축에서부터 시작된 이야기는 힙합 가수가 후드티를 입는 이유와 쇼핑몰에는 왜 멀티플렉스 극장이 존재하는지, 파라오와 진시황제가 싸우면 누가 이길지, 현대인이 SNS를 많이 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등 건축과 상관도 없는 듯한 이야기들로 전개되다가 위기와 발명이 만든 도시를 통해 서울의 얼굴로 이어지고 자연스레 도시의 미래를 이야기한다. 그리고 저자는 벽, 창문, 기둥, 지붕, 길, 다리 같은 각각의 건축 요소를 통해 건축가의 시선에서 공간에 대한 생각들을 들려준다.

 

저자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건축은 일종의 인류 문화의 총체, 인간 정신의 구체적 발현처럼 느껴진다. 집이란 그저 다 늦은 저녁에 하루의 피로를 풀기 위한 장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현대인의 인식을 바로잡으려는 듯 저자는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의 공간이 우리의 삶을 어떻게 구획하며 어떤 방식으로 이끌어가는지, 삶이 진행되는 시간에 따라 우리는 어떠한 공간을 선택해야 하는지 과거와 현대를 넘나들며 다양한 이야깃거리를 통해 설득하고 있다. 책을 읽는 독자는 마치 한 편의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하고, 할머니의 무릎을 베고 누워 구수한 옛날이야기를 듣는 듯한 기분에 빠지기도 한다.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영화 속 주인공 키팅 선생님은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들에게 책상 위에 올라가라고 요청한다. 작지만 수십 센티미터 커지는 그 시점의 변화가 엄청난 생각의 변화를 가져온다. 일상에서 그 변화를 체험할 수 있는 곳이 계단이다. 어린아이들은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재미있어하는데 어쩌면 키가 작은 아이가 어른보다 커지는 체험을 할 수 있는 곳이 계단이어서일지도 모르겠다." (p.222)

 

사물에 대한 인식의 변화는 기실 우리의 사고만 변화시키는 게 아니다. 작게는 우리의 느낌을, 우리의 행동을 변하게도 하고, 크게는 우리의 가치관을, 인생관을 변화시킴으로써 우리들 삶 전체를 바꾸기도 한다. 가을 늦더위가 한풀 꺾인 오후, 옅은 침묵을 배경으로 드문드문 가을 우수가 빗방울처럼 흩어지는 주말 휴일에 나는 도서관 한켠에 앉아 이 글을 쓴다. 도서관을 방문할 때마다 나는 번잡한 도시의 한 공간에 위치하면서도 도시의 소음이나 경쟁으로부터 멀찌기 떨어져 있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책들이 빽빽하게 꽂힌 서가의 숲을 거닐다 보면 왠지 모를 슬픔과, 아련한 추억과, 내가 좋아하는 작가와, 오래전에 읽었던 많은 작품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도서관 공간이 주는 묘한 여운이 나의 생각에 화답하듯 멋진 화음으로 응답하는, 사람들의 책장 넘기는 소리가 마치 어느 동굴의 메아리처럼 울려퍼지는 그런 오후. 지금껏 돈에 대한 맹목적인 추종자로서의 빈껍데기 삶을 살아왔던 내가 건축가 유현준의 <어디서 살 것인가>를 읽고 모든 게 달라질 리 없지만 공간이 뿜어내는 울림 하나하나를 느끼고 기억하다 보면 나도 언젠가 그 울림에 화답하듯 '내가 살 곳은 바로 여기야!' 하고 외치게 될 날이 찾아오지 않을까. 그때 나는 가을이 깊어가던 어느 가을 오후를 떠올리며 입가에는 옅은 미소를 머금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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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을 탄다'는 건 어쩌면 절대적 고독을 인식하는 성숙한 개인에 대한 또 다른 표현일지도 모른다. 다양한 인간관계에도 불구하고 영원히 혼자일 수밖에 없는 고독한 존재로서의 자신을 의식한다는 건 어떤 철학적 사색이나 인문학적 소양에 바탕을 두지 않더라도 인간이라면 누구나 직감적으로 혹은 선험적으로 깨달을 수밖에 없는 기본 인식이리라. 그와 같은 고독감은 우리가 사는 경쟁의 틀 속에서 발현되고 강화된다. 개인이 갖고 있는 수많은 특성 중에 단지 몇몇 가지 능력만을 비교하여 차별하고 무시하며 때로는 개인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모욕감을 안겨주기도 하는 일련의 과정 속에서 인간은 좌절할 수밖에 없다. 그가 갖고 있는 수많은 장점과 비교되지 않은 여러 탁월한 능력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것은 차라리 폭력에 가깝다. 그러나 사회라는 거대구조에 속한 다수의 횡포를 한 개인이 거부하거나 저항하기에는 그 힘이 너무도 크고 막강하여 지레 움츠러드는 것 또한 사실이다.

 

우리가 반려동물을 키우거나 신에 매달리는 것도 따지고 보면 모두 그 밑바탕에는 치유되지 않은 인간의 고독감이 짙게 깔려 있는 탓일지도 모른다. 열기를 더해가는 대선 후보 토론회만 보더라도 인간의 폭력성과 야만성은 여실히 드러난다. 상대방이 평소에 어떤 생각을 갖고 있고, 그가 했던 말이 어떤 의도였는지 알아보기 위해 질문을 던지는 건 전혀 없고, 상대방의 과거나 토론회장에서 내뱉은 말을 빌미로 공격을 일삼는 게 토론의 전부이니 이를 지켜보는 국민들 또한 그런 폭력성 앞에서 깊은 절망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연유인지 정치 초년생인 모 후보는 집에 여러 마리의 강아지를 키우고 손바닥에는 '왕(王) 자'를 쓴 채 토론회장에 등장하기도 했다. 말하자면 그는 자신이 키우는 반려동물이나 그가 믿는 무속 신앙에 자신의 고독감을 반복적으로 표출해 왔을 터, 강아지나 신은 그가 표출하는 방식이 어떻든 그에 대해 평가하거나 비난하지 않은 채 들어준다는 걸 알기에 인간보다는 반려동물 혹은 무속 신에게 의지하고 자신의 스트레스를 풀어왔던 게 아닐까. '오죽하면...' 하는 생각에 일견 딱한 마음이 들기도 하는 것이다. 그 후보는 자신에 대한 비난 여론에 대해 "후보와 같은 아파트에 사는 지지자들이 매번 토론이 있을 때마다 응원한다는 의미에서 손바닥에 써준 것"이라고 변명했다. 물론 그럴 테지. 자신과 한 집에 사는 어떤 지지자(할머니 혹은 아주머니일 수도 있지만)는 박사학위 논문에서도 운세를 연구한 사람이니까.( 온라인 운세 콘텐츠의 이용자들의 이용 만족과 불만족에 따른 회원 유지와 탈퇴에 대한 연구)

 

오늘은 개천절.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는 건국이념은 온데간데없고 오직 개인의 욕망과 타인에 대한 비난만 드러내는 대선 후보들의 아귀다툼을 보면서 씁쓸한 마음이 절로 드는 것이다. 손에 '왕(王) 자'를 쓰고 토론회장에 나온 후보가 대통령이 되면 모든 국민은 자신의 손바닥에 '신(臣) 자'를 쓰고 생활해야 하는 걸까? 고민스럽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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