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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페퍼로니에서 왔어
김금희 지음 / 창비 / 2021년 5월
평점 :
과거의 기억이라는 건 언제나 쓸쓸함을 전제로 한다. 그것의 들추어짐에서부터, 그리고 들추어진 기억이 자신의 머릿속에서 맴맴 맴을 돌거나 두서없이 타자에게 말해지거나 혹은 흐릿한 생명력으로 문자화되는 순간에도 거리의 낙엽처럼 부서질 듯 메마른 쓸쓸함은 삶의 덧없음 속으로 끝없이 유영한다. 물론 그 쓸쓸함의 기원은 대개 되돌릴 수 없는 시간여행자의 운명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과거를 끝없이 되새김질하는 인간 종의 비애를 한껏 드러내곤 한다. 과거의 기억과 그 쓸쓸함에 대한 헌사, 그것이 곧 김금희 소설의 원천이라고 나는 늘 생각해 왔던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쓸모도 없이 무작정 쌓여만 가던 어느 가을날의 낙엽 더미와 매캐한 연기와 함께 스러지던 시간의 흔적들처럼 무상한 느낌을 쓰고 또 지우게 하는 연례행사와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김금희의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어느 밤, 그렇게 흰 가지를 보고 있는데 바람이 불었고 어딘가에서 누가 종이 같은 것을 태웠고 한동안 잊고 있었던 소리들이 연상되었다. 기대와 상관없이 발생하고 의식이 수면 아래로 가라앉으면 저절로 소멸했다가 다시금 떠오르던 어떤 것들이. 그렇게 해서 복기한 밤의 소리는 엄마의 투명으로 한동안 나를 쥐고 있던 죽음의 세계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슬프게도 그것이 사실이었다." (p.174 '우리는 페퍼로니에서 왔어' 중에서)
김금희 작가가 들려주는 슬픈 서사는 대개 주인공의 젊은 시절에 '발생'했던 사랑과 그로 인한 상처와 좌절, 그리고 그 기억이 쥐고 흔드는 현실의 뿌리들로 요약할 수 있다. 작가가 말하는 사랑은 개인의 의지나 삶의 계획과는 상관없이, 자연발생적인 어떤 것이며, 돌이킬 수 없는 커다란 결과를 떡하니 안겨주고 홀연 사라지는 삶의 불청객과도 같은 존재이지만 인간의 삶이란 결국 자신이 선택한 사랑의 파문임을 인식할 때, 각자에게 주어지는 다른 문양의 사랑을 우리는 모두 자신의 운명처럼 받아들여야만 하는지도 모른다.
"나는 평소에는 크게 관심도 없는 사랑의 면면을 왜 이 여름 이렇게 고심해야 하나 생각했다. 리애씨도 선생님도 모두 나보다는 근 십수년은 위인 여자들, 그러니까 더 늙고 경험 있는 연륜 있고 스펙 있는 여자들인데 인생의 중요한 마디마다 여전한 의문을 풀지 못한 채 살고 있는 듯했다. 어쩌면 신화에서 인간이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을 때 다 날아가고 남은 건 희망이 아니라 의문이 아니었을까." (p.206 '기괴의 탄생' 중에서)
표제작인 '우리는 페퍼로니에서 왔어'를 비롯하여 '우리가 가능했던 여름', '크리스마스에는', '마지막 이기성', '기괴의 탄생', '깊이와 기울기', '초아' 등 일곱 편의 단편을 묶은 이 소설집은 일곱 편 모두 작가가 사십대에 쓴 작품이라고 한다. 사십대! 자신의 인생에서 결코 많지도, 적지도 않은 나이. 이제 막 인생의 반환점을 돌았을 그 나이에 이르면 삶의 무상함이 차츰 그 색깔을 더해가게 마련, 과거의 아름다웠던 기억들마저 쓸쓸하게 느껴지곤 한다.
"김금희의 소설은 매일의 나날과 축척을 같이하는데 부질없이 확대된 '나날들'의 지도에서 실패는 지루하고 패배마저 흐리멍덩하다. 어설픈 흔적처럼 존재하는 그것들은 작은 비고란에 기록될 법하지만 비고란이란 대개 비어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남모르는 울분이 있고 지워지지 않는 느낌이 있고 잦아들 수 없는 발버둥이 있고, 요컨대 어쩔 수 없는 고군분투가 있다." (p.307~p.308 '해설'(황정아) 중에서)
2주째 대체공휴일이 이어지는 3일간의 연휴. 이따금 추적추적 가을비가 내렸고 잊혔던 기억들이 마른 낙엽처럼 흩날렸다. 우리의 삶이 우연처럼 주어진 사랑의 파문(派紋)이라면 운명처럼 찾아오는 사랑의 순간들을 우리는 과연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 결과가 암울한 불행으로 끝날지라도 우리는 다시 또 새로운 사랑을 시작해야 할까. 관객을 대상으로 끝없는 자기 검증을 반복하는 어느 연극의 시나리오처럼 우리는 매번 주어지는 사랑을 마다하지 않고 내 삶의 자기 검증을 이어가야 할까. 사랑이 깊어질수록 어쩌면 단조로운 일상들이 내 삶의 무늬 속에 굵은 밑선처럼 드러나겠지. 마치 단풍이 들듯 말이다. 김금희 작가의 소설집 <우리는 페퍼로니에서 왔어>는 석양 무렵 어느 농부의 낙엽 태우는 손길처럼 익숙하거나 때론 뭉근하다. 어쩌면 작가는 지난날의 사랑을 낙엽처럼 태우고 있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