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서 살 것인가 - 우리가 살고 싶은 곳의 기준을 바꾸다
유현준 지음 / 을유문화사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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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체제하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원하는 물건을 선택하고 구매하는 데 있어 그 기준은 항상 구매력, 즉 자신의 경제적 형편에 달려 있는 듯 보인다. 불행하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좀 더 나은 선택을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자신의 구매력을 높이기 위해 투잡, 쓰리잡도 마다하지 않으며, 때로는 도시를 떠나 이거고 저거고 모든 걸 포기한 채 자연 속에서 유유자적하고 싶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그게 어디 나 혼자만의 생각일까마는 작게는 아주 소소한 기호식품의 구매에서부터 크게는 가족 전체가 살기 위한 주택의 구매에 이르기까지 모든 선택의 기준이 하나에서 열까지 모두 돈이라고 생각하면 머리가 지끈거리곤 한다.

 

건축가 유현준이 쓴 <어디서 살 것인가>는 자신 살 곳을 고르는 데 있어 모든 사람이 천편일률적으로 제시하는 돈이라는 기준에서 벗어나도록 돕는다. 그렇다고 이 책이 배산임수를 논하는 풍수지리서도 아니요, 자녀의 교육과 교통, 의료와 문화 시설에 대한 접근성 등을 따지는 부동산 관련 서적도 아니다. 인류 문화를 탄생시킨 요람으로서의 공간이 가진 기능과 그 역사를 살펴봄으로써 오직 돈에 매몰되어가는 현대인의 기준을 벗어나 우리는 어떤 공간에서 행복을 느끼며, 어떤 주변 환경이 우리를 더 풍요롭게 하는지, 물질적 풍요가 아닌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는 어떠해야 우리는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는지, 그러자면 우리는 어떠한 공간에서 어떻게 우리 아이를 성장하도록 해야 하는지 등 삶의 주체로서 우리가 자신의 삶을 가치 있게 변모시키기 위해 우리는 어떠한 선택적 대안을 제시하고 발전시켜야 하는지에 대한 제반 문제를 공간과 결부지어 이야기하고 있다.

 

"필자는 건축을 즐긴다. 건축을 공부했기 때문에 다른 도시로 여행을 가거나, 식당을 고르거나, 카페에 가거나, 길을 걸을 때 비전공자보다는 조금 다른 관점에서 볼 줄 알게 되고, 음악을 자꾸 들으면 귀가 만들어지듯이, 독자 여러분이 이 책을 통해서 건축을 맛보고 느낄 수 있는 감각이 조금이나마 키워졌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건축을 느끼면 인생이 더 풍요로워지기 때문이다. 결국 인생은 행복하기 위해서 사는 것이고 다른 많은 것과 마찬가지로 건축도 우리의 행복을 더하는 데 일조할 수 있기 때문이다." (p.372)

 

이 책에서 저자는 다양한 주제에 대해 이야기한다. 교도소를 닮은 현대 학교 건축에서부터 시작된 이야기는 힙합 가수가 후드티를 입는 이유와 쇼핑몰에는 왜 멀티플렉스 극장이 존재하는지, 파라오와 진시황제가 싸우면 누가 이길지, 현대인이 SNS를 많이 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등 건축과 상관도 없는 듯한 이야기들로 전개되다가 위기와 발명이 만든 도시를 통해 서울의 얼굴로 이어지고 자연스레 도시의 미래를 이야기한다. 그리고 저자는 벽, 창문, 기둥, 지붕, 길, 다리 같은 각각의 건축 요소를 통해 건축가의 시선에서 공간에 대한 생각들을 들려준다.

 

저자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건축은 일종의 인류 문화의 총체, 인간 정신의 구체적 발현처럼 느껴진다. 집이란 그저 다 늦은 저녁에 하루의 피로를 풀기 위한 장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현대인의 인식을 바로잡으려는 듯 저자는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의 공간이 우리의 삶을 어떻게 구획하며 어떤 방식으로 이끌어가는지, 삶이 진행되는 시간에 따라 우리는 어떠한 공간을 선택해야 하는지 과거와 현대를 넘나들며 다양한 이야깃거리를 통해 설득하고 있다. 책을 읽는 독자는 마치 한 편의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하고, 할머니의 무릎을 베고 누워 구수한 옛날이야기를 듣는 듯한 기분에 빠지기도 한다.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영화 속 주인공 키팅 선생님은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들에게 책상 위에 올라가라고 요청한다. 작지만 수십 센티미터 커지는 그 시점의 변화가 엄청난 생각의 변화를 가져온다. 일상에서 그 변화를 체험할 수 있는 곳이 계단이다. 어린아이들은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재미있어하는데 어쩌면 키가 작은 아이가 어른보다 커지는 체험을 할 수 있는 곳이 계단이어서일지도 모르겠다." (p.222)

 

사물에 대한 인식의 변화는 기실 우리의 사고만 변화시키는 게 아니다. 작게는 우리의 느낌을, 우리의 행동을 변하게도 하고, 크게는 우리의 가치관을, 인생관을 변화시킴으로써 우리들 삶 전체를 바꾸기도 한다. 가을 늦더위가 한풀 꺾인 오후, 옅은 침묵을 배경으로 드문드문 가을 우수가 빗방울처럼 흩어지는 주말 휴일에 나는 도서관 한켠에 앉아 이 글을 쓴다. 도서관을 방문할 때마다 나는 번잡한 도시의 한 공간에 위치하면서도 도시의 소음이나 경쟁으로부터 멀찌기 떨어져 있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책들이 빽빽하게 꽂힌 서가의 숲을 거닐다 보면 왠지 모를 슬픔과, 아련한 추억과, 내가 좋아하는 작가와, 오래전에 읽었던 많은 작품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도서관 공간이 주는 묘한 여운이 나의 생각에 화답하듯 멋진 화음으로 응답하는, 사람들의 책장 넘기는 소리가 마치 어느 동굴의 메아리처럼 울려퍼지는 그런 오후. 지금껏 돈에 대한 맹목적인 추종자로서의 빈껍데기 삶을 살아왔던 내가 건축가 유현준의 <어디서 살 것인가>를 읽고 모든 게 달라질 리 없지만 공간이 뿜어내는 울림 하나하나를 느끼고 기억하다 보면 나도 언젠가 그 울림에 화답하듯 '내가 살 곳은 바로 여기야!' 하고 외치게 될 날이 찾아오지 않을까. 그때 나는 가을이 깊어가던 어느 가을 오후를 떠올리며 입가에는 옅은 미소를 머금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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