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차 방앗간의 편지
알퐁스 도데 지음, 이원복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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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나 우화처럼 담백하고 꾸밈이 없는 글을 쓴다는 건 오히려 어렵다. 더구나 길이에 제한이 있는 짧은 글을 통해 글쓴이의 의도를 독자들에게 정확히 전달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쉽고 담백한 글을 쓰는 작가에 대한 독자의 찬사와 경탄은 찾아보기 어렵다. 찬사는 고사하고 무시와 조롱이 뒤따르는 경우도 허다하다. 쉽게 읽히는 글일수록 작가의 더 많은 피와 땀이 요구된다는 걸 독자들은 알 길이 없기 때문이다. 뭔 뜻인지 이해도 되지 않는 현학적인 글을 천의무봉의 완벽한 글인 양 경탄의 눈으로 바라보지는 않았는지 나는 이따금 반성하고 또 반성한다.


"그랭구아르, 이건 자네와 나, 우리 둘만의 속내 이야기인데, 까만 털의 젊은 수컷 영양이 여복이 있었던지 블랑케트의 마음에 든 모양이야. 두 연인은 한두 시간 동안 숲에서 쏘다녔어. 녀석들이 무슨 말을 속삭였는지 알고 싶거든 이끼 밑에 숨어서 졸졸 흐르고 있는 수다쟁이 샘물에게 물어보게."  (p.45 '스갱 씨의 염소' 중에서)


알퐁스 도데의 단편 소설집 <풍차 방앗간의 편지>는 「레벤망」지와 「르피가로」지에 연재했던 글들을 모아 출판한 책으로, 책에 실린 단편 소설들은 대부분 알퐁스 도데의 고향인 남프랑스 프로방스 지방을 배경으로 씌었다. 프로방스의 날씨, 풍경, 전설 등을 소재로 하여 작가 특유의 따뜻한 시선이 가미된 아름다운 작품은 읽는 이들의 미소를 자아내게 한다. 그의 소설은 동정심이 많은 인간성과 사물 및 개인의 신비에 대한 외경심도 포함하고 있는데, 그런 점에서 그의 소설은 모파상이나 찰스 디킨스와도 유사점이 있다고 평가된다.


"나는 프로방스 농부들이 이야기할 때 곁들이는 멋진 지방 속담이나 대중적인 속담 혹은 격언 중에서 이보다 더 생생하고 독특한 속담은 들어보지 못했다. 나의 풍차 방앗간에서 60킬로미터 이내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앙심을 품고 복수를 벼르고 있는 사람에 대해 말할 때 이렇게 내뱉는다. "저 사람! 조심들 하게! 7년 동안이나 뒷발질을 벼르고 별렀던 교황의 노새 같은 사람이니까!" 나는 도대체 이 속담이 어디서 유래한 것인지, 교황의 노새가 어떤 것이며, 또 7년 동안이나 참았다는 뒷발질이 무슨 뜻인지 알아내려고 꽤 오랫동안 사방팔방으로 돌아다니며 수소문했다."  (p.68 '교황의 노새' 중에서)


작품 중에는 산업혁명의 영향으로 시골의 풍경이 변하게 되고 농경사회에서 공동체를 형성하며 지켜오던 전통이나 풍습이 파괴되고 급기야 농촌사회가 무너지기 시작한 지중해 연안 지방의 역사를 느낄 수 있는 작품도 있다. 이는 증기 제분 공장이 들어서면서 일거리를 잃게 된 방앗간 주인의 이야기로 대표된다. 뿐만 아니라 <메뚜기 떼>처럼 작가의 개인적 체험을 바탕으로 사실에 기반한 작품이 있는가 하면 <세관원>, <황금 두뇌를 가진 사내의 전설> 등 비극적인 내용의 작품도 있다.


"경제적 고통과 오랜 지병으로 인한 육체적 고통을 끈기 있게 극복해 가면서 창작 생활에 온 힘을 기울인 도대의 모든 작품에는 소외된 인간들에 대한 따뜻한 인간애, 현실에 대한 씁쓸하고도 냉정한 인식, 당시 프랑스 사회에 대한 예리한 풍속 묘사 등 생생한 감동이 녹아 있다."  (p.292 '역자 후기' 중에서)


알퐁스 도데의 작품을 읽는 독자라면 누구나 평생 종지기로 살면서 아름다운 동화를 남긴 아동 문학가 권정생 선생을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지병과 가난 속에서도 인간으로서의 품위와 아름다움을 지향하는 맑은 눈을 잃지 않았기에 도데의 작품 속에서도, 권정생 작가의 작품 속에서도 순수함에 깃든 푸른 감동을 가슴으로 느낄 수 있었던 게 아닐까. 평생을 고위 공직자로 살면서 단 한 번도 가난한 자의 편에 서지 않았던 자가 표를 위해서라면 서민의 대변자인 양 잘도 꾸며대는 작금의 세상에서 정작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인간성 회복, 바로 그것이 아닐까. 알퐁스 도데의 <풍차 방앗간의 편지>를 읽는다는 건 누군가를 향해 보복의 정치를 꿈꾸는 이에 대한 거부의 몸짓이라고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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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아침. 그렇지만 이렇듯 조용한 시간에 우리는 저마다의 삶이 우리를 사박스럽게 몰아붙이고 있음을 처연히 깨닫는다. 바쁘고 정신없었을 때는 모른 척 지나쳤을 것들도 조용한 오전의 균질한 침묵 속에서만큼은 예외가 된다. 햇살 속에서 확연히 드러나는 먼지처럼 나의 실존은 침묵 속에서 가려지는 그 무엇인지도 모른다. 거울을 보듯 추레한 나의 삶을 바라보는 일은 결코 즐겁지 않다. 즐겁기는커녕 꽤나 불쾌한 일이다. 그러므로 삶에 있어서 침묵의 시간을 가급적 줄이는 게 불행을 막는 제 일의 법칙이라고 나는 오래전부터 생각해왔다. 더구나 자신의 삶을 소재로 글을 쓴다는 건 섶을 지고 불행의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드는 것과 같아서 행복한 삶을 원한다면 부지불식간에 하는 낙서조차 금할 일이다. 그러나 나는 지금 두 가지 일을 병행하며 자발적 불행을 향해 전속력으로 치닫고 있다.


텔레비전 뉴스에서는 대선 후보들의 행보가 매 시간 속속들이 보도되고 있다. 제1야당의 대선 후보에 대한 소식은 언제나 술과 뒤섞이는 경우가 많다. 체질상 술을 한 잔도 마시지 못하는 나로서는 매일 폭탄주를 마셔대는 그의 일상이 그저 놀랍기만 하다. 어쩌면 그는 자신의 몸이 견딜 수 있는 정도의 알코올을 매일 쏟아 부음으로써 불행을 감지하는 뇌세포를 철저히 박멸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공산당을 없앤다는 '멸콩' 놀이를 할 게 아니라 뇌세포를 없애는 '멸뇌' 놀이를 하는 게 격에 맞지 않을까 싶기는 한데, 아무튼. 언젠가 그의 뇌는 행복을 감지하는 뇌세포마저 모두 사라질 테지만 적어도 그전까지 그는 어린아이처럼 마냥 행복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가 걱정해야 할 것은 그가 자연인 윤 모 씨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그는 현재 제1야당의 대통령 후보라는 사실이다. 그럴 리야 없겠지만 정말 대한민국의 국운이 다하여 그가 정말 대통령이라도 된다면 우리의 불행은 그때부터 시작될지도 모르기 때문에 과하게 우려도 하고 걱정도 하는 것이다. 뇌세포가 부족하여 정상인보다 판단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그래서 사사건건 누군가에게(주로 무속인일 테지만) 그 판단을 미루는 일이 반복된다면 우리는 그 후보에게 투표했던 자신의 손가락을 두 눈 질끈 감고 부러뜨려야 할지도 모른다.


이러한 우려를 반영한 듯 일본을 제외한 대부분의 해외 언론(물론 미국과 유럽 국가들이 대부분이지만) 중 우리나라의 정치에 관심이 있는 언론은 제1야당의 대선 후보에 대해 부정적으로 보도하고 있는 듯하다. 일본의 언론은 크게 다르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우리나라의 대다수 언론이 제1야당의 대선 후보에 대해 무척이나 긍정적인 보도를 연일 쏟아내는 건 다소 의외라는 반응이다. 그러나 언론, 특히 주류 언론이 그럴 수밖에 없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언론사가 누렸던 과도한 혜택과 기자라는 특수한 신분의 명예와 특권이 점차 사라지고 있기 때문에 일말의 위기의식이 발동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현상은 종교계에서도 나타난다. 성직자로서 갖는 각종 혜택과 지위가 땅으로 떨어진 요즘, 과거에 대한 향수는 그들로 하여금 복권 내지 과거로의 회귀를 도와줄 인물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것이다. 개신교뿐만 아니라 불교계에서도 이러한 현상은 심심찮게 나타난다. 얼마 전에 있었던 승려대회 역시 그러한 맥락의 연장선이 아닌가 싶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 개신교에서 더 노골적이고 직접적으로 드러나지만 말이다. 이러한 속셈은 진보를 주창하던 군소 언론사도 다르지 않다. 변절자 소리를 듣더라도 자신들부터 살고 봐야겠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것이다.  결국 그들은 '백 투 더 퓨쳐(Back to the future)'가 아니라 '백 투 더 패스트(Back to the past)'를 두 손 모아 기도하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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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르니에 선집 1
장 그르니에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199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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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력의 밑바탕에는 말할 수 없이 깊은 공허가 자리 잡고 있다는 걸 사람들은 종종 간과하곤 한다. 이를테면 저따위를 해서 뭘 하나? 하는 심리는 생활에 필요한 대부분의 행동을 가로막고 종국에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도록 한다. 무기력은 아마도 벗어나기 힘든 늪이나 수렁과 같아서 타인의 도움 없이 스스로의 힘만으로 벗어나기란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무기력의 늪에 빠진 누군가를 구조할 때 우리들 대부분은 그저 늪의 주변만 빙빙 맴돌면서 왜 빠져나오지 않느냐는 타박만 늘어놓을 뿐 묵묵히 도움의 손길을 내밀거나 최선을 다해 구조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이는 찾기 어렵다.

 

"나는 쾌감이 전혀 없지도 않은 채 그냥 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로 인하여 결국 어떤 결과에 이르게 되는 것일까? 무엇이나 다 어디엔가로 인도하게 마련이다. 오직 그것에만 아무런 출구가 없었다. 설사 그 상태의 끝에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더라도 나의 삶 자체가 어찌나 죽음과 흡사한 것이었는지 그 차이를 분간하지 못했을 것이다. 심지어 동물도 죽을 때는 본능적으로 경련하는 법이라지만."  (p.30)

 

알베르 카뮈의 스승으로도 잘 알려진 장 그르니에의 수필집 『섬』은 일반 독자들보다는 작가들에게 더 인기가 있는 책일지도 모른다. 그와 같은 추론은 대개 작가들의 추천 도서 목록에 오르는 횟수에서 기인한다. 말하자면 일반 독자들이 『섬』에 대해 자신의 블로그에서 리뷰를 쓰거나 『섬』을 자신이 추천하는 도서로 지인들에게 일독을 권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장 그리니에의 『섬』이 갖는 특성, 이를테면 작가의 깊은 사색과 정제된 문장에서 오는 생각할 거리가 일반 독자들보다는 글쓰기를 업으로 하는 작가들에게 훨씬 더 깊은 울림으로 다가올 수 있다는 점이다.

 

"사실 언제나 똑같은 내용이긴 하지요. 그렇지만 사랑하는 마음을 나타내려고 할 때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말 이외에 다른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사랑은 마음속에서 모든 순간들과 모든 존재들을 하나로 합쳐주는 것입니다."  (p.64)

 

프랑스 알제 대학교의 철학교수를 지내면서 많은 명상적인 에세이를 남겼던 장 그르니에. 『섬』이 세계적인 문호 알베르 카뮈에게 영감을 주고 글을 쓰겠다는 결심을 불러일으켰던 것처럼 다른 많은 작가들에게 영향을 주고 앞으로도 꾸준히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이 책을 읽어오며 하나의 결론에 이르렀다. 결론이라는 게 사실 어떤 객관적 근거에 기반하는 게 아니라 단순히 나의 추측에 불과한 것이지만 말이다. 결론인 즉 장 그르니에의 산문집 『섬』에 실린 글의 대부분이 특정한 목적을 갖고 쓰지 않았던 것은 물론 오랜 시간을 두고 쓰고 또 고치면서 각고의 노력으로 완성한 게 아니라 글의 윤곽이 떠오른 어느 날 단숨에 써내려갔을 것이라는 추측, 바로 그것이었다. 누군가에게 큰 감동을 주는 글은 하루에 한두 문장씩 긴 시간의 사투로 완성되는 게 아니라 오랜 시간 동안 이루어진 사색의 결과를 일필휘지로 단숨에 써내려가는 게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저 형언할 길 없는 과거의 냄새를 맡고 있노라면 나는 나를 에워싸고 있는 맹목적이고 엄청난 힘들로부터 헤어나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것은 인식에 대한 관심이라기보다는 무(無)에 대한 섬뜩함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정신적인 생활을 하게 된 셈이지만 그것은 실상은 거꾸로 된 정신적 생활이었다. 저 성벽처럼 쌓인 책들 속에는 얼마나 대단한 매혹이 깃들여 있었던가! 그러나 도서관 밖을 나설 때면 머리가 아팠고 마음은 더욱 메말라가는 듯 느껴졌다."  (p.120~p.121)

 

고백하자면 나 역시 사색의 에너지가 충분하지 않은 일반 독자들 중 한 명인 까닭에 200쪽도 되지 않는 이 책을 그저 눈으로만 서너 차례 읽었을 뿐 가슴으로 읽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게다가 책에 대한 느낌이나 어설픈 리뷰를 써보자 결심했던 것도 최근의 일이고 보니 책에서 장 그르니에가 말하고자 했던 것이 바로 이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더더욱 아니어서 리뷰를 쓰면서도 핵심에는 접근하지 못한 채 그저 겉도는 이야기만 쓸 수밖에 없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자신이 관찰하는 대상을 멀찌기서 바라볼 뿐 자신만의 잣대로 판단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등 적극적으로 개입하려들지 않는 점은 그르니에로부터 배웠다는 것을 밝히고 싶다. 그것이 내가 여전히 미숙한 독자임을 밝히는 꼴일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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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너편의 인도에는 도로를 따라 키가 큰 전봇대가 가지런히 늘어서 있다. 가지런하다는 것, 규격이나 제원에 맞춰 일률적인 거리와 높이를 유지한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 풍경처럼 우리에게 크나큰 절망감을 안겨 주기도 한다. 변하지 않는 삶에 변하지 않는 풍경을 덧입힌다는 건 얼마나 잔인한 일인가. 나는 짐짝처럼 무거운 시간을 걸머진 채 휴일 오후로 향하고 있다. 께느른한 졸음이 쏟아지는 낯선 시간들이 휑한 공간에 둥둥 떠다니는...

 

엊그제 있었던 대선 후보들의 TV토론을 보면서 그들도 역시 '떡 줄 놈은 생각도 않는데 김칫국부터 마신다'는 속담으로부터 한 치 벗어남이 없다는 생각을 했다. 명절 연휴에 친척들과의 만남에서도 '어쩌면 저렇게 자신의 욕망을 대선 후보들에게 고스란히 투영하면서 나는 너희와 다르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집값이 너무 많이 오른 탓에 이번에는 야당 후보에게 투표하겠다는 20대 조카와 대선 후보 중 수도권의 집값을 그나마 많이 떨어뜨리지 않을 것 같아 야당 후보에게 투표하겠다는 50대의 사촌을 보면서 그들 둘이 지지하는 후보는 같은데 방향은 극과 극이라는 사실에 무척이나 놀랐었다. 말하자면 그들은 서로 동상이몽을 하는 셈인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지금도 집값이 높다고 아우성인데 안 떨어지고 지금 상태를 유지하면 청년들은 도대체 어떻게 살라는 말이냐?"고 사촌에게 따지자 사촌 왈, "내가 천년만년 살 것도 아닌데 내가 죽고 나면 자식들이 물려받을 텐데 그렇게 되면 그들 역시 좋은 게 아니냐?"는 반론이었다. 어이가 없어서 아무런 말도 없이 그를 한참이나 쳐다보았다. "그러면 자식들은 부모가 죽기 전까지 수십 년을 집도 없이 떠돌아야 한단 말입니까?" 하자 머쓱한 웃음을 지으며 물러났다. 우리는 각자의 욕망을 대선 후보에게 투영하면서 안 그런 척 자신을 숨기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양심을 표와 맞바꾸는 게 뭐가 나쁘냐는 듯 당당하게.

 

대선 후보들 역시 유권자인 국민들의 욕망을 한껏 부추기면서 득표 전략을 세우곤 한다. 기업이 2050년까지 사용 전력량의 100%를 풍력, 태양광 등 재생에너지로 조달하겠다고 자발적으로 선언하는 국제 캠페인인 RE100은 이제 국가와 기업에 있어 먼 미래의 일이 아닌 발등에 떨어진 불인 셈이다. 그럼에도 대통령이 되겠다는 자가 강 건너 불구경하듯 관심이 없다는 건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다. 기껏 한다는 게 별 필요도 없는 사드를 추가 배치하겠다는 공약이나 내세우고, 군대도 다녀오지 않은 자가 암것도 모르면서 선제타격이나 운운하다니... 그것도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감수하면서. 이쯤 되면 막가자는 것이 아닌가.

 

입춘도 지났는데 날씨는 한겨울처럼 춥기만 하다. 사용후 핵연료를 안전하게 보관할 장소도 마련하지 못한 채 원자력 발전소를 계속해서 짓겠다는 무대책의 발상과 경제적 손실이 몇십조가 되든 사드를 추가 배치하겠다는 공약은 도대체 누구를 위한 정책인지 묻고 싶다. 대한민국 국민을 위한 정책이 아니라면 그는 분명 매국노일 터,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서울의 집값을 안 떨어뜨릴 것 같아 야당 후보를 지지한다는 사촌과 수도권에서 싼 값으로 집을 살 수 있게 해줄 것 같아 야당 후보를 지지한다는 조카. 그들의 동상이몽은 당분간 계속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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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를 걷는 여자들 - 도시에서 거닐고 전복하고 창조한 여성 예술가들을 만나다
로런 엘킨 지음, 홍한별 옮김 / 반비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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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향은 눅진하게 퍼지듯 다가오지 않고, 가고자 하는 대상을 향해 찌르듯 덮쳐온다. 그러므로 솔향을 맡는 이는 누구나 고즈넉함에 기대어 소나무와 대화할 준비가 되었음을, 조용히 마음으로 다가갈 준비가 되었음을 알리는 것이다. 어쩌면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도 이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마음의 문을 열기 전에 우리는 서로의 내음을 먼저 맡았던 게 아닐까. 그렇게 조용조용 서로를 탐구하며 가까워졌던 게 아닐까. 그러므로 냄새는, 아니 향기는 마음보다 먼저라고 말할 수 있다. 마치 전조처럼. 혹은 징후처럼.


"우리는 자신의 삶에 대해 객관적일 수가 없어서 카드에 의존한다. 그래서 점을 치는 게임이나 수맥 찾는 막대기 같은 것을 좋아한다. 길을 찾아줘. 금이 어디에 묻혀 있는지 알려줘. 나도 전에 영화에서 본 방법을 써본 적이 있다. 책 한 권을 집어 아무 쪽이나 펼친 다음(『오만과 편견』이 내가 가장 많이 쓴 책이다. 엘리자베스 베넷의 분별력에 도움을 받기를 기대하면서.) 손으로 짚고 손가락이 가리키는 단어를 예언이나 지침으로 삼는 것이다. 이런 방법을 '책점'이라고 하는데 오래된 점술법이다."  (p.356)


로런 엘킨의 <도시를 걷는 여자>는 독특한 여행기이자 도시를 빈둥거리며 구경하는 플라뇌즈로서의 도시 비평서이기도 하다. 엘킨의 여행은 우리를 파리, 런던, 도쿄 등의 풍경 속으로 데려갈 뿐만 아니라, 직접 마주하는 것보다도 더 생생하게 이 도시들의 속살을 보여준다. 작가는 책에서 때로는 관광객이었다가, 또 때로는 동네 주민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이민자가 되기도 했다. 그것은 독자들에게 무척이나 생경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엘킨의 숨김없고 솔직한 글쓰기가 빛을 발하는 것도 이처럼 낯선 느낌에서 비롯되는지도 모른다.


"젊은 여자가 호텔 방에 있다. 낯선 도시에서 보내는 첫날밤이다. 그러니까 바로 그 도시, 뉴욕에서. 빙하 위의 동굴에 비할 만큼 에어컨이 세게 나오는 방에서 담요를 둘둘 말고 있다. 기침이 나고 열이 오르는 것 같지만 프런트에 전화를 걸어 에어컨을 꺼달라고 부탁할 용기가 없다. 누군가가 올라오면 팁을 얼마나 줘야 할까? 팁도 없이 돌려보내거나 아니면 너무 많이 줘서 호구로 보이느니 차라리 추운 게 나을 것 같다."  (p.395)


책을 좋아하고 여행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단연코 선택 1순위에 올려놓을 듯한 이 책은 사실 하나의 장점이 더 있다. 400여 페이지에 이르는 책의 두께가 그것이다. 책에 빠져들 만하면 금세 책이 끝나버리는 불합리한 책의 두께가 늘 불만이었다면 이 책은 그런 것에 대한 해답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작가가 주목한 여성 산책자들은 조르주 상드, 버지니아 울프, 소피 칼, 아녜스 바르다 등'걷기와 사색을 통해 자기가 관찰한 삶에 질문을 던지고 도전하고 새로 만들어낸' 예술가들이라고 극찬하며 그들의 작품을 작가만의 새로운 시각으로 읽어낸다.


"울프는 거리에서 이야기를 캐냈고 자기가 관찰한 사람들, 걷고 물건을 사고 일하고 멈추어 서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책을 채웠다. 특히 여자들. 기차에서 맞은편에 앉은 여자를 묘사하면서 울프는 이렇게 선언했다. "모든 소설은 반대편 구석의 늙은 여자로부터 시작한다." 아니면 상점의 젊은 여자. "나는 나폴레옹의 150번째 전기나, Z교수가 심혈을 기울이는 키츠가 밀튼을 어떻게 사용했는지에 대한 70번째 연구보다는, 그 여자의 진짜 삶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  (p.129)


2022년의 설 명절은 가만가만한 냄새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분주함 속에 내재된 불안이라고 해야 할까 도무지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코로나19의 위협과 그 위협을 더는 용납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의 반감이 만들어낸 거친 시간이었다. 사랑한다는 건 그와 같이 치솟는 감정을 가만가만 누르며 다시 일상으로 복귀해야 한다는 것을 묵묵히 인정하는 침묵의 울음이 아니었을까. 다만 이리저리 공간만 바삐 달라졌을 뿐 '언제'라는 시간에서 다시 또 '언제'라는 시간으로 되돌아온 나는 로런 엘킨의 <도시를 걷는 여자들>을 읽었고, 잔설이 남은 아파트 화단을 먼 시선으로 보고 있다. 멀리서 다가오는 솔향. 뭔가 대화를 시작하려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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