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너편의 인도에는 도로를 따라 키가 큰 전봇대가 가지런히 늘어서 있다. 가지런하다는 것, 규격이나 제원에 맞춰 일률적인 거리와 높이를 유지한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 풍경처럼 우리에게 크나큰 절망감을 안겨 주기도 한다. 변하지 않는 삶에 변하지 않는 풍경을 덧입힌다는 건 얼마나 잔인한 일인가. 나는 짐짝처럼 무거운 시간을 걸머진 채 휴일 오후로 향하고 있다. 께느른한 졸음이 쏟아지는 낯선 시간들이 휑한 공간에 둥둥 떠다니는...

 

엊그제 있었던 대선 후보들의 TV토론을 보면서 그들도 역시 '떡 줄 놈은 생각도 않는데 김칫국부터 마신다'는 속담으로부터 한 치 벗어남이 없다는 생각을 했다. 명절 연휴에 친척들과의 만남에서도 '어쩌면 저렇게 자신의 욕망을 대선 후보들에게 고스란히 투영하면서 나는 너희와 다르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집값이 너무 많이 오른 탓에 이번에는 야당 후보에게 투표하겠다는 20대 조카와 대선 후보 중 수도권의 집값을 그나마 많이 떨어뜨리지 않을 것 같아 야당 후보에게 투표하겠다는 50대의 사촌을 보면서 그들 둘이 지지하는 후보는 같은데 방향은 극과 극이라는 사실에 무척이나 놀랐었다. 말하자면 그들은 서로 동상이몽을 하는 셈인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지금도 집값이 높다고 아우성인데 안 떨어지고 지금 상태를 유지하면 청년들은 도대체 어떻게 살라는 말이냐?"고 사촌에게 따지자 사촌 왈, "내가 천년만년 살 것도 아닌데 내가 죽고 나면 자식들이 물려받을 텐데 그렇게 되면 그들 역시 좋은 게 아니냐?"는 반론이었다. 어이가 없어서 아무런 말도 없이 그를 한참이나 쳐다보았다. "그러면 자식들은 부모가 죽기 전까지 수십 년을 집도 없이 떠돌아야 한단 말입니까?" 하자 머쓱한 웃음을 지으며 물러났다. 우리는 각자의 욕망을 대선 후보에게 투영하면서 안 그런 척 자신을 숨기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양심을 표와 맞바꾸는 게 뭐가 나쁘냐는 듯 당당하게.

 

대선 후보들 역시 유권자인 국민들의 욕망을 한껏 부추기면서 득표 전략을 세우곤 한다. 기업이 2050년까지 사용 전력량의 100%를 풍력, 태양광 등 재생에너지로 조달하겠다고 자발적으로 선언하는 국제 캠페인인 RE100은 이제 국가와 기업에 있어 먼 미래의 일이 아닌 발등에 떨어진 불인 셈이다. 그럼에도 대통령이 되겠다는 자가 강 건너 불구경하듯 관심이 없다는 건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다. 기껏 한다는 게 별 필요도 없는 사드를 추가 배치하겠다는 공약이나 내세우고, 군대도 다녀오지 않은 자가 암것도 모르면서 선제타격이나 운운하다니... 그것도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감수하면서. 이쯤 되면 막가자는 것이 아닌가.

 

입춘도 지났는데 날씨는 한겨울처럼 춥기만 하다. 사용후 핵연료를 안전하게 보관할 장소도 마련하지 못한 채 원자력 발전소를 계속해서 짓겠다는 무대책의 발상과 경제적 손실이 몇십조가 되든 사드를 추가 배치하겠다는 공약은 도대체 누구를 위한 정책인지 묻고 싶다. 대한민국 국민을 위한 정책이 아니라면 그는 분명 매국노일 터,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서울의 집값을 안 떨어뜨릴 것 같아 야당 후보를 지지한다는 사촌과 수도권에서 싼 값으로 집을 살 수 있게 해줄 것 같아 야당 후보를 지지한다는 조카. 그들의 동상이몽은 당분간 계속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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