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까지 가자
장류진 지음 / 창비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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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인으로 돈을 벌었다는 사람들이 내 주변에도 더러 있었다. 일반인이 상상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돈은 아니지만 푼돈을 투자하여 목돈을 만들었다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싸르르 배가 아파왔다. 사촌이 땅을 사도 배가 아프다는데 하물며 촌수도 없는 무촌이 돈을 벌었다는데 배가 아프지 않을 리가 있겠는가. 몇십만 원을 투자하여 몇백만 원을 만들었다는 사람들의 투자 성공담을 들을 때는 그나마 '에이, 그 정도 돈이야 열심히 일해서 벌면 되지.' 하는 생각이 들다가도 단위가 커져 몇백만 원을 투자하여 몇천만 원을 벌었다는 얘기를 들을라치면 나의 무능이 발끝에서부터 머리끝까지 혈관을 타고 몇 바퀴 순환을 하는 듯 부끄러움에 얼굴이 벌겋게 변하기도 하고, 갑자기 배가 아파오기도 했다. 그럼에도 나는 통장의 돈을 뚝 떼어 코인에 투자할 용기는 나지 않았다. 워낙 간이 작은 탓도 있었지만.

 

장류진의 소설 <달까지 가자>는 마론제과에 다니는 세 명의 회사원이 어찌어찌 코인에 투자하여 성공을 거둔다는 이야기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마론제과에 다니는 정다해, 강은상, 김지송이 점심식사를 핑계로 늘 붙어다니다가 셋 중 나이가 가장 많았던 강은상의 권유로 이더리움에 투자하게 된다는 이야기. 소설의 화자인 정다해를 통해 펼쳐지는 그들의 이야기는 은근히 우습기도 하고, 아무렇지도 않은 장면에서 한참을 머물게도 한다. 공채 출신이 아니라는 까닭에 그들은 회사 안에서 '근본 없는 애'로 은근한 차별과 따돌림을 받기도 하고, 이런 까닭에 셋이서 수다를 떠는 온라인 채팅방의 이름도 'B03'이다.

 

"소설가라는 직업의 장점은 키보드와 모니터만 있으면 어떤 이야기든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누가 3억 주는 소설'을 써보고 싶다고 생각했고, 첫 장편소설을 구상하면서 '다해와 친구들에게 3억씩 나눠주는 이야기'를 만들어보기로 했다. 어차피 소설이라 내 마음대로 줄 수 있으니 좋을 것 같았다. 그렇게 단순한 발상에서 시작해 여기까지 왔다."  (p.361 '작가의 말' 중에서)

 

작가의 이러한 발칙한 상상 덕분에 소설은 내내 밝은 분위기 속에서 전개된다. 2017년 1월 17일 ~ 2018년 8월 18일의 약 1년 7개월에 걸친 마론제과 여사원의 일상을 통해 작금의 2030 세대의 현실과 꿈을 가늠케 된다. 그리고 돈만 바라보고 살았을 때는 보이지 않던 회사 생활과 직업의 의미를 우연한 행운처럼 다가온 코인 투자의 행복한 결말을 통해 조금씩 깨닫게 된다. 말하자면 이 소설은 젊은이들의 꿈을 완벽히 해결해주는 판타지 소설에 가깝지만 '돈'이라는 필수 아이템을 그들로부터 분리함으로써 각자가 추구하는 꿈을 선명하게 드러낼 수 있도록 하며, 돈이 지배하지 않는 그들 각자의 품성을 더욱 도드라져 보이게 한다.

 

"얼마간 걸었을까. 숲길의 모퉁이를 돌면서 나무들의 키가 점점 더 커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나무줄기를 따라서 고개를 쭉 들어 올려다봤다. 서로 다른 나무로부터 뻗어 나온 나뭇가지와 그 끝에 달린 나뭇잎들이 모여 그늘을 이루고 잇었는데 서로 닿을 듯 닿지 않으면서도 빈틈을 메우고 있었다. 누군가의 운명이 하늘색으로 적혀 있는 손금 같기도 했다. 그 틈새로 빛살이 갈래갈래 쏟아졌다."  (p.227)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강은상은 건물주가 되어 회사를 떠나고, 대만에 사는 연하남과 장거리 연애를 하던 김지송은 대만에서 흑당을 수입하는 사업을 구상하게 되었고, 특별한 계획이 없던 정다해는 좀 더 살기 좋은 집으로 이사를 하는 것으로 만족하며 회사에 남는다.

 

"최종적으로, 지송이는 2억 4,000만 원을 벌었다. 나는 3억 2,000만 원을 벌었다. 은상 언니는 33억을 벌었다. 내겐 이 모든 게 2017년 5월부터, 2018년 1월까지, 단 여덟 달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p.298~p.299)

 

우리는 어쩌면 물가상승률보다 더 빠른 속도로 각자가 원하는 자산 목표액을 증가시켜 왔는지도 모른다. 그에 비하면 자신의 능력은 자산 목표액에 비해 한참이나 뒤처진 듯 느껴졌을 테고 말이다. 자신의 능력과 목표로 하는 자산가액의 차에서 오는 괴리로 인해 '나는 왜 요 모양 요 꼴인가' 하는 현타를 수시로 자각하게 되고, 깊은 우울과 자괴감으로 인해 거리를 방황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삶은 자신의 꿈이 짜장 현실이 되는 그런 판타지 세상과는 확연히 다르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아프게 받아들여야 한다. 세월을 그렇게 무작정 흘려보내다 보면 하루하루 평범하게 산다는 게 다른 어느 것보다 힘들다는 걸 저절로 깨닫게 된다. 봄꽃 만발한 주말이면 남들처럼 가족과 함께 운중로를 걸어보기도 하고, 한강변에서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우기도 한다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걸 살다 보면 뻐근하게 느끼는 날이 온다. 돈이 조금 모자라더라도 '그게 뭐 대수인가?' 하고 가볍게 웃을 수 있는 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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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위가 높아질수록 운신의 폭이 넓어지고 개인의 자유 또한 비례하여 증가한다는 건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조직의 구성원을 제재하는 룰은 변하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지위가 올라갈수록 개인의 행동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상사 혹은 감독관의 수가 현저히 줄어들기 때문이다. 당연하게도 권력의 최정점에 오르면 시스템이나 규칙에 의한 제재만 가능할 뿐 다른 어느 누구의 간섭이나 영향력도 미치지 않음은 물론이다. '법보다 주먹이 가깝다'는 말에서 지적되는 것처럼 사실 유명무실한 룰이나 규칙보다는 한 사람의 상사가 더 두려운 법이다. 그러므로 조직의 최정점에 올라 자신에게 이래라저래라 할 상사를 더 이상 만나지 않아도 된다는 건 회사와 같은 조직의 구성원들에게는 꿈과 같은 일일지도 모른다. 그런 까닭에 많은 사람들이 권력의 최정점을 향해 기를 쓰는 것이다. 언덕 정상에 이르면 바로 굴러 떨어지는 걸 알면서도 무거운 바위를 굴리고 또 굴리는 시시포스처럼...

 

자유의 측면에서 보면 권력의 최정점에 이른 자는 아무도 없는 빈 방에 홀로 있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지위가 오를수록 스스로를 다스리는 신독(愼獨)에 힘써야 함은 권력에 오르는 자의 의무이자 자유가 방종으로 변질되지 않게 하는 방부제를 지니게 된다는 점이다. 대개의 권력자는 자신에게 무한대로 주어진 주체할 수 없는 자유로 인해 스스로를 망가뜨리고 종국에는 파멸의 불구덩이 속으로 빠져들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신독(愼獨)에 힘쓰지 않는 권력자는 결국 파멸의 길을 걷게 된다는 뜻이다. 예컨대 대중이 이용하는 열차의 의자에 구두를 신은 발을 버젓이 올려놓거나 하는 행위는 권력자의 입장에서 그게 무슨 큰 죄인가 싶겠지만 스스로를 엄격히 제어하거나 삼가지 않는 권력자의 태도에서 우리는 그의 말로를 예측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신독(愼獨)에 힘쓰지 않는 권력자의 자유는 일종의 폭력으로 인식하게 된다는 점이다. 여성가족부를 없애는 자유, 대통령 집무실을 용산으로 옮길 자유, 허위 경력과 주가 조작의 범죄 혐의를 받는 아내를 처벌하지 않을 자유, 멤버yuji와 같은 허접한 박사 논문을 그대로 yuji할 자유 등은 최고 권력자에게는 자유일지 몰라도 사회 구성원에게는 일종의 폭력인 셈이다.

 

사회적 지위가 오를수록 자신의 행동을 엄격히 통제하고 스스로를 살피고 삼간다는 건 다른 누군가를 위한 자선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곧 자신의 삶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방어 수단인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지위가 오를수록 신독(愼獨)에 힘써야 한다. 권력자가 약자를 다룸에 있어 손쉽다고 생각하는 건 실질적인 행위가 뒤따르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 생각만으로도 커다란 위협이자 폭력이다. 구조적으로 기울어진 운동장에서는 더더욱 그러하다. 여성이나 장애인을 다루기 쉬운 약자로 인식하고 아무렇게나 대접해도 된다고 믿는 사고방식 역시 우리 사회를 위협하는 커다란 폭력이라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21세기 대한민국은 실체가 없는 폭력에 의해 마구 흔들리고 있다.

 

리베카 솔닛은 말한다.  “어떻게 되든지 간에 괜찮거나 나쁘다는 게 아니라 미래가 불확실하고 결정된 바가 없기 때문에 변화가 가능하며 최상의 변화를 위해 노력할 도덕적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는 의미다. 희망은 훈련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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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푸른 상흔 프랑수아즈 사강 리커버 개정판
프랑수아즈 사강 지음, 권지현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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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빚어내는 은유는 그때마다 대상이 되는 인간에게 어떤 깨달음을 안겨주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영혼의 성숙도에 조금의 흔적을 남기는 건 사실이지 않을까 싶다. 열아홉이라는 비교적 어린 나이에 혜성처럼 등장하여 엄청난 성공과 폭발적인 인기를 거머쥐었던 프랑수아즈 사강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종종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삶에는 공짜가 없다는 사실과 함께 말이다. 그래서인지 작가 사강은 그녀의 초기작이었던 <스웨덴의 성>에 등장했던 두 인물을 그로부터 18년이 지난 그녀 나이 서른일곱 살에 다시 소환한다. 그리고 소설 속에서 두 인물의 서사를 써 내려가는 동시에 자신의 이야기도 함께 적는다. 일기처럼 혹은 자신의 삶에 대한 반성문처럼.

 

"사실 내가 섬기는 유일한 우상, 유일한 신은 시간이다. 오직 시간만이 나에게 심오한 기쁨과 고통을 줄 수 있다. 이 포플러가 나보다 더 오래 살리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대신 이 건초는 나보다 먼저 시들겠지. 나는 집에서 사람들이 기다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 나무 밑에서 한 시간 정도는 거뜬히 머물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서두르는 것은 굼뜬 것만큼 어리석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삶도 마찬가지다. 나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 이 과학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단지 운 좋은 순간일 뿐이라는 것을. 나로서는 그것만이 진짜다."  (p.42)

 

소설에 등장하는 세바스티앵과 엘레오노르 남매는 사강과 비슷한 또래의 스웨덴 출신 이민자이다. 무일푼이었던 그들은 대도시인 파리에서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특별한 재능이나 직업이 없었던 그들로서는 그것마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다만 자신들의 젊음과 몸이 재산이었던 까닭에 그들이 가진 재산을 후하게 평가하고 그에 대한 대가를 지불할 인물을 찾아 끝없이 부유한다. 그러나 그들 역시 세월을 거스를 수는 없는 법. 자신들의 유일한 재산인 육체의 젊음은 서서히 시들고 있다.

 

"요즘 사람들이 의도적으로 빼앗아가는 것은 뭔가 약하고 소중한 것, 기독교인들이(무신론자들은 다른 말을 사용한다) '영혼'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 영혼을 잘 돌보지 않으면 어느 날 숨이 턱에 차 은총을 구하는 영혼의 상흔을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상흔은, 분명 우리가 자초한 것이다."  (p.139)

 

사강은 세바스티앵과 엘레오노르 남매의 이야기를 풀어가는 한편 작가로서의 현실적인 고뇌, 독자에 대한 진심, 페미니즘의 문제 등 여러 사회 문제에 대한 견해를 소설 중간중간에 펼쳐 놓는다. 말하자면 이 책은 작가가 쓰는 허구의 소설과 현실에서의 작가 자신의 생각이 교차하는 '소설 에세이'라는 독특한 형식으로 전개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책을 읽는 독자는 소설을 쓰던 당시의 작가에 대한 궁금증을 일정 부분 해소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예컨대 소설이 손에 잡히지 않을 때 어떤 생각을 하며 시간을 보냈는지, 작가가 창조한 인물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갖고 있었는지 등 출간 후 기자들과의 인터뷰 자리에서나 겨우 들었을 듯한 이야기들을 같은 책에서 실시간으로 읽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소설이면 소설, 에세이면 에세이가 한 권의 책으로 엮이는 보편적인 구성과 비교할 때 흐름이 끊기고 가독력이 떨어지는 건 사실이다.

 

"로베르 베시는 그날 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는 남아 있던 알약을, 그것도 어렵게 삼켰다. 우연히도 양은 딱 죽을 만큼이었다. 가끔 추리소설에 나오는 표현처럼 그는 자기 자신과 부딪혔다. 삶에 부딪히고 그 삶을 넘어가지 못했다는 의미에서 꽤 시적인 표현이라 하겠다. 승마장에서 멋지고 혈기 왕성한 말이 울타리에 부딪힐 때가 있다. 그때 아예 일어나지 못하거나 일어났더라도 힘겨워하면 수의사가 끝을 내준다. 로베르 베시는 멋지지도 않았고 혈기 왕성하지도 않았으며 수의사도 없었던 셈이다."  (p.171)

 

<슬픔이여 안녕>을 읽어 본 독자라면 느끼겠지만 이 책의 곳곳에서 우리는 조금 더 성숙해진 사강의 면면을 볼 수 있다. 그것은 어쩌면 그녀의 삶을 관통했던 '솔직함'에 대한 성숙일 수도 있겠다. 어린 시절의 날 선 '솔직함'이 아니라 다른 어느 누구의 삶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부드러운 느낌의 '솔직함'이 문장 곳곳에서 감지된다. 그것은 이른 나이의 부와 성공으로 인해 빠져들 수밖에 없었던 마약, 사랑, 알코올 등 온갖 유혹에 대한 작가 자신의 경험담인 동시에 '마음에 들어가는 푸른 멍을 외면하는 모두에게' 드리는 경고인 셈이다. 우리는 어쩌면 마음에 들어가는 푸른 멍은 외면한 채 서로에게 형식적인 인사만 건네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의 상흔을 철저히 외면하고 있다.

 

한낮 기온이 초여름처럼 높다. 느슨해진 더위를 배경으로 사람들은 흐드러진 벚꽃 거리를 걷는다. 오늘이라는 시간이 초조하게 흐르는 오후의 어느 순간. 영혼에 든 푸른 멍이 하얀 벚꽃에 가려져 봄날처럼 화려하게 빛난다. 행복을 가장한 완성체의 영혼이 봄꽃 흐드러진 거리를 누비고 있다.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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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브로 봄.

매일 아침 오르는 산에도 어김없이 봄이 찾아왔다. 가지마다 연녹색 새순이 돋고 다소곳한 진달래도 꽃을 피웠다. 숲은 나름의 질서 속에 오가는 계절을 준비하곤 한다. 그러나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어서 산 주변은 온통 새로 들어선 아파트로 빼곡하다. 그렇게 아파트 건설이 한창이었던 몇 년 동안 숲과 그것에 기대어 살던 동물들이 수난을 겪었으리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소리에 민감한 뱀들이 제일 먼저 자취를 감추었고, 겨울철이면 먹이를 찾아 산 아래쪽을 향해 겅중겅중 뛰던 고라니도 보이지 않고, 이따금 나타나 나의 아침 산행길에 동무가 되어주던 너구리도 찾을 길 없고, 흔하디 흔하던 청설모도 모두 사라졌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숲의 어둠을 몇몇 산새들이 겨우 생명의 기척을 내고 있을 뿐이다. 숲은 이제 콘크리트 바다에 둘러 쌓인 작디작은 섬이다.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자연이 살아 있는 곳이 자연스러운 것처럼 언젠가 자연이 모두 사라지고 인간 홀로 남으면 인간다워지는 것인가, 하고 말이다. 사람에게는 '애정 총량의 법칙'이란 게 있어서 인간에 대한 애정이 없으면 동물에게 과도한 애정이 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여 사람을 믿지 못하는 사람은 개든, 고양이든 동물과 친밀해지는 게 어쩌면 당연한 귀결일지도 모르고, 그것이 꼭 나쁜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주가 조작과 허위 이력의 피의자가 처음 보는 경찰견을 꼭 끌어안고 찍은 사진이 온 국민이 꼭 알아야 하는 소식은 아닐 터, 요즘 기자들은 뉴스거리가 어지간히도 없는가 보다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게다가 그런 범죄를 저지른 자가 입은 후드티나 슬리퍼를 두고 검소하다는 둥 매진이 되었다는 둥 하는 가십 거리를 뉴스 지면에 실어준다는 것도 참으로 창피한 일이 아닌가. 대한민국의 기자는 참으로 한가한 사람들이다.


며칠 전에는 제74주년 4·3 희생자 추념식이 있었다. 그 자리에 보수 정권의 대표가 참석하는 건 어찌 보면 획기적인 일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묵념 사이렌 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당당하게 이동하는 태도는 뭐란 말인가. 지각 입장도 미안한 일인데 하물며 묵념도 하지 않고... 그런 오만방자한 태도가 보수의 품격임을 새삼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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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둘리지 않는 말투, 거리감 두는 말씨 - 나를 휘두르는 타인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책
Joe 지음, 이선영 옮김 / 리텍콘텐츠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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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는 것 없이 미운 사람이 있고, 받는 것 없이 예쁜 사람이 있다. 나와는 친분도 없고 특별히 해가 되는 행동을 하는 것도 아닌데 그 사람만 보면 기분이 나쁜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싫어할 만한 안 좋은 소문을 들었던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아침 출근길에서라도 우연히 마주친다면 평생 재수 옴 붙을 것만 같고, 승강기 내에서 말이라도 걸어온다면 절로 소름이 돋을 것만 같은 것이다. 뭐라 콕 집어 설명하긴 어렵지만 그 사람의 외모도, 스타일도, 심지어 목소리나 말하는 톤조차 느끼하고 거부감이 드는 것이다. 싫어하는 대상은 자신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사람일 수도 있고, 매일 마주쳐야 하는 직장 상사나 동료 직원일 수도 있다. 이처럼 싫어하는 대상과 업무를 볼 수밖에 없는 처지라면 일의 성과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인간관계에서 오는 피로도 역시 증가할 수밖에 없다. 물론 그와 반대되는 유형의 사람들만 쏙쏙 골라 즐거운 마음으로 일을 할 수 있다면 더없이 좋을 테지만 말이다.

 

"당신의 매력은 보여주지 않은 부분을 얼마나 늘리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인간은 종종 빛보다 그림자 부분에 마음이 끌리기 마련입니다. 보여주지 않은 부분이 늘어나면 주위 사람들은 거기에 뭔가 매력을 느낍니다. 그중에는 그 보여주지 않은 부분에 관심을 가지고 당신에게 적극적으로 접근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특정 누군가와 거리가 좁혀졌을 때 쌓아 올리는 관계는 지금까지 휘둘리기 쉬웠던 갑을 관계와는 다를 것입니다."  (p.226)

 

직장 내 괴롭힘 대책 상담사로서 개인 상담과 각지에서 강연 등의 활동을 하고 있다는 Joe의 저서 <휘둘리지 않는 말투 X 거리감 두는 말씨>는 인간관계에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마음 컨트롤을 위해' 실천할 수 있는 43가지의 기술을 소개하고 있다. '마음과 행동을 분리하고, 그것들을 자유자재로 활용하는 기술은 당신의 인간관계를 편안하고 풍부하게 만들어 줄 것'이라고 자신하면서 말이다. 이 책에서 말하는 남에게 휘둘리기 쉬운 인간 유형은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인간관계에서는 언제나 상대방에게 주도권을 빼앗기고, 항상 왠지 모르게 이용당하고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며, 사람을 만나고 오면 마음이 개운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그들의 공통점은 '상대방에게 자신의 마음을 너무 활짝 열어 놓고 있다는 것'이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사실 직장 내 분위기도 예전에 비해 많이 변했고, 꾸준히 변하고 있다고 말해지기는 하지만 연공서열이 확실한 대한민국의 직장 분위기는 서양의 그것과는 확실히 다른 면이 있어서 직장 내 분위기를 개선하려는 노력만으로는 한계를 보이게 된다. 말하자면 금세 바닥이 드러나는 것이다. 그리고  '달라진 게 없다'는 한결같은 불만이 터져 나오게 마련이다. 노골적인 갑질이나 강압적인 권위를 내세울 수는 없지만 무언중에 흐르는 눈치보기 문화마저 완전히 없앤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일지도 모른다.

 

"•사람은 원래 타인의 마음을 간파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속은 단지 상대방의 말과 행동에서 추측하고 있을 뿐이므로, 당신이 의도적으로 자신의 마음과 분리하여 말과 행동을 선택하면 상대는 당신의 마음을 알 수 없게 됩니다.

•마음을 꿰뚫지 못하면 그 사람은 당연히 당신을 휘두를 수 없고, 오히려 지금까지보다 당신을 존중하게 됩니다."  (p.19)

 

1장 '좋은 인간관계는 적당한 거리감이 유지되어야 한다', 2장 '누구도 파고들 수 없는 베이스를 만들어라', 3장 '미움받지 않는 '거절쟁이'가 되어라', 4장 '보이지 않는 무게감으로 상대를 사로잡아라', 5장 '사람을 끄는 매력적인 인간이 되는 법'의 총 5장에 담은 내용은 단순히 인간관계의 비법만을 명시한 것은 아니다. 그와 더불어 어쩌면 끊고 맺음에 있어 명확하지 못했던 당신의 처신을 획기적으로 개선하여, 당신과 상대방 모두에게 이로운 관계 설정을 새롭게 정립하는 데 그 목적이 있는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묵묵히 참아오던 당신이 갑자기 반기를 들면 상대가 놀라 당신에게 적대감을 드러내거나 조종의 강도를 더욱 높이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거절하려고 한다면 무조건 빨리 말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정말로 한계에 달하기 전에 "무리입니다."라고 말하세요."  (p.96)

 

직장, 가족, 모임 등 모든 인간관계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잃고 상대방에 의해 휘둘리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아마 없을 것이다. 물론 지금도 독재 권력에 기생하여 알아서 기는 사람들이 더러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들은 간혹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줄 거처럼 굴면서도 얼굴에는 웃음이 넘쳐나곤 한다. 자신이 마치 세상 어디에도 없는 성자인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남이 알지 못하는 고민이 있을 테지만 달리 해결책은 없어 보인다. 말하자면 그들은 '자발적으로 휘둘림을 당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는 어쩔 수 없이 휘둘림을 당하던 자의 고민을 다룰 뿐 기꺼운 마음으로 무릎을 꿇는 자의 고민을 말하지는 않는다. 당선인이 직접 대놓고 말하지 않아도 기꺼운 마음으로 무릎을 꿇고 손을 비비는 기자와 검찰, 그들에게도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싶은 욕구가 있을까? 나는 이 책을 읽는 내내 그것이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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