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되다 - 인간의 코딩 오류, 경이로운 문명을 만들다
루이스 다트넬 지음, 이충호 옮김 / 흐름출판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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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펼칠 때면 언제나 다른 어떤 것보다 먼저 책의 목차 부분을 꼼꼼히 읽는 편이다. 책을 좋아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방식으로 책을 읽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내가 생각하는 책의 목차는 저자가 독자들을 향해 '내가 이러이러한 방식으로 당신들을 설득하겠소'라고 하는 선언이자 책의 결론이나 주제를 향해 저자가 세운 일종의 이정표인 셈이다. 목차를 읽은 독자는 그것이 자신의 맘에 들지 않더라도 감수하고 읽어 내려가거나  애저녁에 포기하고 책을 덮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결론에 이르는 더 빠르고 더 좋은 방법이 있는데 왜 그렇게 빙빙 돌아가는 것이요?'라고 따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런 의미에서 책은 양방향 소통 매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이 책에서 나는 인류의 역사를 깊이 파고들면서 문화와 사회와 문명에서 기본적인 인간성이 어떻게 표출되었는지 탐구할 것이다. 우리 유전학과 생화학, 해부학, 생리학, 심리학의 여러 가지 변화가 어떻게 표출되고, 어떤 결과와 영향을 미쳤을까(단지 중요한 단일 사건들에뿐만 아니라, 세계사의 중요한 상수와 장기적 추세에)?"  (p.15)


웨스트민스터대학 과학 커뮤니케이션 교수이자 과학 분야 베스트셀러 작가이기도 한 루이스 다트넬이 쓴 <인간이 되다(Being Human)>는 그가 다루는 주제나 논리의 전개 방식에서도 꽤나 매력적인 책이 아닐 수 없다. 물론 다트넬의 저서 <오리진>을 읽어본 독자라면 그의 이름만 듣고서도 책에 대한 호감도가 어느 정도 증가하겠지만 말이다. 책의 목차는 '머리말'에 이어 1장 '문명을 위한 소프트웨어', 2장 '가족', 3장 '풍토병', 4장 '유행병', 5장 '인구', 6장 '마음을 변화시키는 물질', 7장 '코딩 오류', 8장 '인지 편향', 그리고 '끝맺는 말'과 '도판 출처' 및 '주석' '참고 문헌'에 이어 '감사의 말'로 끝을 맺는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구성이다.


"진화는 우리에게 이득이 되는 행동을 촉진하는 일련의 내면적 추동을 발전시켰다. 배고픈 느낌이 강해지면 우리는 먹을 것을 찾고, 성욕과 오르가즘에 대한 기대는 우리에게 생식을 하도록 촉진한다. 진화는 또한 우리에게 집단생활에서 이득을 가져다주는 행동을 촉진하는 경향성을 만들어냈다. 생물학적으로 부호화된 이 반응들(우리가 감정으로 지각하는)에는 가족과 친구를 향한 애정, 고통받는 사람들을 향한 공감, 사기 행위에 대한 분노, 이타적 행동이나 정당한 처벌을 통해 얻는 만족감 등이 있다."  (p.55)


안타깝게도 나는 출판사에서 제공한 샘플북만을 손에 쥐고 있다. 샘플북은 '머리말'과 1장 '문명을 위한 소프트웨어'에서 끝이 난다. 말하자면 저자가 이 책에서 말하고자 했던 내용을 간략히 설명하고 있는 '머리말'과 인류가 문명을 형성할 수 있었던 내재적인 소프트웨어, 즉 인류 문명의 밑바탕이 되는 여러 가지 인간 본성을 설명하는 게 전부인 셈이다. 정작 내가 읽고 싶었던 부분은 따로 있는데 말이다. 나는 사실 7장 '코딩 오류'와 8장 '인지 편향'의 내용이 무척이나 궁금했었다. 그 때문에 내가 읽었던 샘플북은 완결 편 <인간이 되다>를 읽고 싶은 마음을 더욱 감질나게 했을 뿐이다. 아쉬운 마음에 출판사에서 소개한 책의 '끝맺는 말' 중 한 대목을 옮겨 본다.


"인류의 역사는 종으로서 우리가 지닌 기능과 결함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며 펼쳐졌다. 하지만 우리는 타고난 생물학적 조건의 무력한 노예가 아니다. 인류가 이룬 기술 진보는 우리가 자신의 자연적 능력을 높이고 증대하기 위해, 그리고 우리의 많은 생물학적 약점을 보완하거나 극복하기 위해 펼친 노력을 보여주는 이야기이다."  (p.385 '끝맺는 말' 중에서)


어제는 국민들의 눈과 귀가 온통 국회 청문회장으로 쏠렸던 날이다. 채 해병의 죽음에 직,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친 사람들과 이들을 처벌하지 못하도록 외압을 가한 권력자와 국가 시스템에 대한 비리와 작동 오류를 밝혀내기 위한 자리였다. 그러나 어느 것 하나 속 시원하게 밝혀진 것은 없었다. 1장에서 저자는 우리의 본성이 평화적인가 폭력적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토머스 홉스와 장 자크 루소를 등장시켜 설명하면서 '진실은 양자의 중간 어디쯤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결론짓는다. 청문회에서 보았던 것처럼 자신의 불이익을 감수하면서 진실을 밝히고 정의의 편에 서려고 했던 사람들과 어떻게든 진실을 감추고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려 했던 사람들의 민낯이 고스란히 드러났었다. 인류의 진화는 무척이나 더디지만 언제나 공동체의 이익에 우선하는 방향으로 발전한다고 나는 믿는다. 저자도 그리 생각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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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극단적인 정의일 수도 있겠지만 장서가로도 유명한 이동진 평론가는 자기계발서를 읽는 것 자체를 일컬어 '돈을 내고 꼰대의 얘기를 듣는 것'이라고 말했다. 나 역시 일부 동의하는 바이다. 물론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우리나라 젊은 직장인(혹은 취업 준비생)들이 읽는 책의 80~90%는 자기계발서라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젊은이들(물론 개중에는 나이 든 사람들도 더러 있겠지만)은 왜 그렇게 자기계발서를 좋아할까? 우리나라의 젊은이들이 자기계발서뿐만 아니라 다른 장르의 책도 무척이나 좋아한다는 사실을 지금에서야 비로소 알게 된 것일까? 나는 이도 저도 아니라고 본다.


내 주변에도 갓 입사했거나 입사한 지 채 5년이 되지 않는 젊은 직장인들이 여럿 있다. 다독가는 아니지만 다른 이가 읽는 책에는 관심이 많은, '독서 관음증' 환자랄 수도 있는 나는 그들이 읽는 책을 볼 때마다 그들의 독서를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책의 제목이나 저자를 알고 싶어 한다. 내가 읽을 것도 아니면서 굳이. 그렇게 입수한 책에 대한 정보에 의하면 십중팔구 최근 유행하는 자기계발서가 대부분이다. 그렇다. 자기계발서에도 유행이 있어서 유행에 뒤떨어진 책은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르지도 못할 뿐 아니라 추천 도서 목록에도 오르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한때 없어서 못 팔 정도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시크릿>과 같은 도서도 지금은 전국의 어떤 헌책방에서도 구매를 꺼리는 천덕꾸러기 신세로 전락하지 않았던가.


대한민국의 젊은 직장인들이 자기계발서에 열을 올리는 까닭은 목적 지향성 독서를 하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일반적이다. 말하자면 월급보다 많은 돈을 벌기 위해서, 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 남들 앞에서 절대 꿇리지 않는, 간지 쩌는 삶을 살아보고 싶어서 그렇게 시도 때도 없이 자기계발서를 읽어댄다는 것이다. 결국은 간 때문이야가 아니라 결국은 돈 때문에 피곤에 지친 눈을 비벼가며 책을 읽는다는 것인데 올바른 지적이긴 하다. 그러나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거기엔 '조급함'이라는 슬픈 허방이 존재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내가 조급함을 '슬픈 허방'이라고 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전에도 한 번 비슷한 얘기를 쓴 적이 있지만 사실 대한민국의 현실은 보이지 않는 계급이 더욱 단단하게 고착화되었거나 그렇게 진행되는 과정 중에 있다. '개천에서 용 난다'는 속담은 이제 전혀 통하지 않는 세상이 된 것이다. 그 사실은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고, 부정하지 않는다. 소위 '수저 계급론'은 그러한 비극적인 현실을 코믹하게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허방 앞에 슬픈 이라는 관형사를 둔 이유는 바로 그와 같은 현실 때문이다. 사회 시스템이 바뀌지 않는 한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결코 극복할 수 없는 장벽이 존재한다는 현실.


내가 생각하는 자기계발서는 자신이 처한 처참한 현실을 위로받거나 부정하는 데는 그럭저럭 쓸모가 있을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아무것도 안 하고 있다는 무력감보다는 이것이라도 하고 있으니 앞으로 조금 나아질 수 있을 거야 하는 희망이 언제든 나를 위로하는 것이다. 그러나 달라지는 건 크게 없다. 자기계발서를 읽는 데는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존재한다. 한 사람이 평생 동안 깨달은 바를 한 권의 책에 요약본으로 실었을 때 어떤 천재가 그것을 저자처럼 이해하고 실행할 수 있을 것인가. 말도 되지 않는다. 소설처럼 그렇게 두꺼운 책에 단 하나의 깨달음을 자세한 예시와 함께 실어도 이해하기 어려운 우리들이 아무런 삶의 예시도 없이 수없이 많은 깨달음을 한 줄 경구처럼 요약식으로 전달해도 다 이해할 수 있다고? 애초부터 말도 되지 않는 일이다.


젊은 직장인 대부분이 그와 같은 자기계발서를 읽고 미친 듯이 뛰어드는 게 주식과 코인 투자이다. 사람들은 그것을 일컬어 도전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도전이 아니다. 도전이란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어느 정도의 가능성이 있을 때 쓰는 말이다. 그러나 주식이나 코인 투자에서 꾸준한 수익을 낸다는 건 하늘의 별을 따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반면에 금수저로 태어난 이들은 머리를 싸매가면서 그런 골치 아픈 일에 매달리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상속을 받은 재산에서 월급 이외의 꾸준한 부수입이 유입된다. 말하자면 대부분의 젊은이들이 투자를 통한 손실을 보는 동안 그들은 오히려 원금이 꾸준히 불어나거나 적어도 투자를 통한 손실은 보지 않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격차를 줄여보겠다고 노력했던(잠을 줄여가면서 자기계발서를 읽었던) 부류와 상속을 받고 별 노력도 하지 않은 부류의 격차는 점점 더 크게 벌어지고 마는 것이다. 나는 무리한 투자를 하는 젊은 직장인들에게 원금을 잃지 않는 게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말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수시로 하곤 한다. 꼰대의 이야기로 들리지나 않을까 늘 걱정하면서 말이다. 자기계발서를 읽느라, 주식이나 코인 투자를 하느라 삶을 허비하느니 차라리 베짱이처럼 삶을 즐기는 게 낫다. 그것이 오히려 격차를 줄이는 방법이 될 수도 있다. 웃기는 말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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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강물처럼
셸리 리드 지음, 김보람 옮김 / 다산책방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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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초반부를 읽는 데 꽤나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 책을 덮었다 다시 펴는 일을 여러 번 반복하는 동안 내 유년 시절의 힘들었던 삶이 트라우마로 내재되었다는 걸 새삼스레 알게 되었다. 그 트라우마가 소설 속 주인공의 힘겨운 삶조차 가슴으로부터 완강히 밀어내고 있음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던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소설 속 주인공인 빅토리아가 사고로 엄마와 이모, 다정했던 사촌 오빠를 잃고 무뚝뚝한 아빠와 말썽꾸러기 남동생, 전쟁에서 부상을 입은 이모부를 돌보며 복숭아 과수원의 수확기에는 농사일까지 도맡아야 했던 현실은 그럭저럭 이해할 수 있었지만, 열일곱 살의 빅토리아가 이방인이었던 인디언 소년 윌슨 문에게 첫눈에 반해 사랑에 빠지고 그로 인해 마을을 떠나지 못하게 된 윌슨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숨어 살다가 결국 동생 세스와 그 패거리에 의해 살해되고, 빅토리아는 자신의 임신 사실을 들키지 않기 위해 마을을 떠나 숲 속의 산막으로 숨어들게 되는 장면과 어렵사리 아들을 낳아 결국 굶주림에 지친 몸으로 야유회를 나온 젊은 부부의 차에 아들을 버리는 장면까지 읽어내는 데 진이 빠졌던 것이다.


"나는 윌이 저 깊은 산속 산막에서 포근한 누비이불을 덮고 자고 있다고 상상했다. 산막에 하나 있는 자그마한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그의 완벽한 살갗에 보드랍게 내려앉는 모습을 상상했다. 도무지 견딜 수 없는 현실을 어떻게든 견뎌보려고 애썼다. 그러나 진실을 외면할 순 없었다. 무고한 소년을 포용하지 못할 만큼 이 세상이 잔인하다는 진실을.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가르지 못할 만큼 이 세상이 잔인하다는 진실을. 블랙 캐니언이 윌의 깊고 끔찍한 무덤이 되어버린 것은 그가 나를 사랑하기 위해 이 마을에 머물렀기 때문이라는 진실을."  (p.151)


소설의 초반부를 너무 힘들게 읽었던 탓인지 출산을 한 빅토리아가 가까스로 목숨을 건져 다시 마을로 돌아온 장면부터는 힘들지 않게 읽어나갈 수 있었다. 빅토리아가 다시 돌아오겠다는 편지 한 장을 써 놓고 집을 나간 이후 대충의 사정을 파악한 아버지는 빅토리아를 찾아 사방을 찾아 헤맸고, 혹시나 세스 패거리에게 해코지라도 당할까 봐 윌슨 문을 살해한 것이 세스와 그 일당이라는 사실을 보안관에게 알렸다. 결국 세스 패거리들은 마을을 떠났고, 휠체어를 타던 이모부마저 가족의 품으로 돌아갔다. 남겨진 가족은 오직 아버지 한 사람이었다. 산속에서 이러한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던 빅토리아는 출산을 한 후 어렵게 돌아왔지만 아버지의 몸은 이미 만신창이로 변해 있었다. 마을에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마저 잃은 후 빅토리아는 마을 사람들로부터 괴짜 노인이라며 늘 무시되고 천대를 받던 루비앨리스와 그녀의 반려 동물들을 돌보며 지낸다. 그러던 중 마을은 댐 건설 계획으로 인해 수몰지구로 변할 위기에 처하게 되고 인근 마을에까지 달콤한 육즙의 내시 복숭아로 이름이 났던 아버지의 과수원을 살릴 방법을 고민하게 된다. 빅토리아는 결국 과수원을 팔고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아 살릴 수 있는 복숭아나무를 새로운 땅에 옮겨 심는다. 내시 복숭아의 명성은 그렇게 이어지는데...


"강인함은 작은 승리와 무한한 실수로 만들어진 숲과 같고, 모든 걸 쓰러뜨린 폭풍이 지나가고 햇빛이 내리쬐는 숲과 같다. 우리는 넘어지고, 밀려나고, 다시 일어난다. 그리고 최선을 희망하며 예측할 수 없는 조각들을 모아가며 성장한다. 이토록 아름다운 방식으로 성장한다는 것 하나만으로 우리 모두는 함께였다."  (p.416)


태어난 고장이었던 아이올라에서 파이오나로 이사를 온 빅토리아는 오직 복숭아나무만 돌보며 과수원을 살리는 데 온 정성을 쏟는다. 이처럼 젊은 여자가 일만 하는 모습을 이웃인 젤다는 늘 안타깝게 생각하였고, 괜찮은 남자를 소개하여 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빅토리아는 과수원을 돌보는 일에만 몰두하였고, 다른 어떤 일에도 관심을 쏟지 않았다. 자녀가 없는 젤다 부부는 시간만 나면 여행을 떠났고, 늘 새로운 소식을 갖고 빅토리아의 집을 찾았다. 빅토리아는 아들과 헤어졌던 산속 공터의 바위 위, 젊은 부인이 자신에게 남겨주고 떠났던 커다란 복숭아가 있던 자리에 매년 돌멩이를 하나씩 올려놓았는데 어느 해 전에는 보지 못했던 낯선 메모지를 발견하게 되고...


"윌은 고개만 가로저을 뿐 조용히 있다가 한참 뒤 입술을 뗐다. "세스 같은 사람들은 밤하늘의 별보다 더 많아." 내 말을 듣지 않겠다는 의사와 날 안심시키려는 의도가 담긴 대답이었다. 그러나 안심은커녕 불안만 커지고 말았다. 그건 윌의 말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윌이 이곳을 떠나 어디로 간다 한들 세스 같은 사람이 없겠는가? 어디로 간들 세스처럼 분노로 가득한 사람, 피부색이 어둡다는 이유만으로 괴롭히려는 사람이 없겠는가? 윌은 도망칠 생각이 전혀 없었다. "흐르는 강물처럼 살 거야. 우리 할아버지가 늘 그러셨거든. 방법은 그뿐이라고.""  (p.143)


1940년대부터 1970년대를 배경으로 극심했던 인종차별과 베트남 전쟁의 시대 상황을 소재로 다룬 이 소설은 온갖 역경을 딛고 자수성가의 고지에 오르는 전형적인 미국 소설의 형식을 취하고는 있지만, 그 과정에서 우리가 취해야 하는 인류 보편의 정의와 인류애, 가족의 정서와 사랑 등을 주제로 감동적인 서사를 이끌어간다. 12년간 집필해 셸리 리드의 데뷔작으로 선보였다는 이 소설은 34개국에서 출간되어 세계인의 호평을 받고 있는 듯하다. 우리는 이따금 한 권의 소설을 통해 생각지도 못했던 자신의 내면을 마치 우연처럼 발견하기도 한다. 너무 힘들어서 잊고 싶었던 기억들, 다른 누군가에게 내보이는 일조차 힘겨워서 속으로 속으로만 감추었던 지난 일들이 돌덩이처럼 굳은 트라우마가 되어 나도 모르게 어떤 것을 배척하거나 멀리하게 되는 경험. 소설은 때로 깊이 감추어두었던 나를 불러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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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남쪽 인도양에 위치한 휴양지 몰디브는 1200개의 섬으로 이뤄진 섬나라이다. 인구는 51만 명이고 국토 면적도 강원도의 태백시와 비슷하다고 하니 무척이나 작은 나라임은 분명하다. 이런 작은 나라는 대개 국가의 경제를 광업이나 관광 수입에 의존한다. 말하자면 관광은 국가의 주요한 수입원이 되는 셈이다. 몰디브 역시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몰디브는 돈보다는 정의를 선택한 듯하다. 지난 2일 팔레스타인에 대한 연대의 표시로 이스라엘 여권 소지자의 입국을 금지하기로 했다고 발표했으니 말이다. 그와 같은 결정을 내리는 데는 결코 가볍지 않은 고민이 동반되었을 것이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일과 독일 점령하의 유럽 각지에 있는 유태인을 체포하고 강제로 이주시키는 계획을 실행했던 인물 중에는 아돌프 아이히만(Adolf Eichmann, 1906~1962)이라는 인물이 있다. 연합군에게 독일이 항복한 후 아이히만은 가족과 함께 아르헨티나로 도망쳐 리카르도 클레멘트라는 가짜 이름으로 생활했다. 1960년 5월 이스라엘의 비밀 정보원들에게 체포되어 이스라엘로 송환되기까지 자동차 공장의 기계공으로 15년을 살았다. 1961년 12월 예루살렘의 법정에 선 아이히만은 무죄를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1962년 5월 교수형에 처해졌다. 당시 <뉴요커>의 특별 취재원 자격으로 재판 과정을 취재했던 한나 아렌트는 "나는 명령에 따랐을 뿐이며 명령은 따라야 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던 평범한 중년 남성인 아이히만을 보면서 '악의 평범성'을 생각했다. '악이란 뿔 달린 악마처럼 별스럽고 괴이한 존재가 아니라 선과 마찬가지로 우리 누구나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나치가 했던 짓을 이스라엘 네타냐후 총리와 그를 따르는 시오니스트들이 같은 방식으로 죄를 짓고 있다. 무고한 팔레스타인 주민들을 향해 사냥하듯 총을 난사하는 군인들이 아이히만이 주장했던 것처럼 네타냐후의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고 주장한다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것이 바로 '악의 평범성'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생각하고 무엇이 정의인가를 판단하지 않는다면 자신이 비록 명령을 내리는 최고 권력자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예루살렘 법정에 섰던 아이히만처럼 말이다. 이것은 비단 전쟁 중에 벌어지는 지극히 예외적인 참상에 대해서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스승의 날 카네이션조차 위법이라고 했던 권익위가 뇌물로 받은 디올백에 대해서는 직무 관련성이 없다며 사건을 종결했다.


나와 가깝게 지내는 친구나 지인들 중에도 공직에 있는 사람들이 꽤나 많다. 그들과 만나 식사라도 할라치면 나는 이따금 지나가는 말처럼 아돌프 아이히만의 이야기를 들려주곤 한다. 그들은 '내가 사람을 죽인 것도 아닌데 잘못한 게 뭐냐?'며 따지듯 묻곤 한다. 그러나 나는 그들의 표정에서 현 정부의 잘못을 그들도 인지하고 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악의 평범성'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사람을 죽여서가 아니라 자신의 상관이나 권력자의 잘못을 보면서도 제대로 지적하지 않는 것, 혹은 그들의 명령이 뻔히 잘못된 일인 줄 알면서도 군말 없이 따르는 것, 그것 역시 아이히만의 전철을 답습하는 게 아닐까. 내가 그들의 연금이나 노후를 책임지지 못하는 까닭에 그만두라거나 상관의 명령을 거부하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나의 양심은 언제나 구천을 떠도는 아이히만의 얼굴과 대면하고 있다. 습기를 머금은 텁텁한 바람이 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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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하지 못한 말
임경선 지음 / 토스트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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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적'이라는 말의 느낌은 왠지 모르게 서글프다. 그래서인지 '일정한 기간에 한정되어 있는 것'이라는 뜻을 지닌 이 말을 나는 가급적 잘 쓰지 않는다. '일정한 기간'을 조금 더 확장하면 태곳적부터 지금까지의 모든 세상만물이 여기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사람도, 자연도, 우주도 다만 한시적인 존재일 뿐이라는 얘기다. 그렇게 생각하면 꽤나 허망해진다. 약간의 시차만 존재할 뿐 우리는 사라지는 존재로서의 내가 또 다른 사라지는 존재인 어떤 이와 관계를 맺고, 아등바등 다투기도 하고, 사랑하거나 미워하기도 하며, 이미 사라진 존재를 그리워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관계가 지속되었던 그 일시적인 기간을 우리는 어떻게 규정하고 추억해야 할까. 관계의 상대방이 사라진 반쪽짜리 추억도 우리는 온전한 것인 양 쉽게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을까. 습관처럼 우리는 자신에게 속한 허술한 기억을 곱씹으며 무료한 시간을 달래곤 한다. 나와 관계를 맺었던 상대방으로부터 내 기억의 전후 사정을 하나도 점검받지 못한 채. 우리의 기억은 그렇게 나와 당신(혹은 당신들)의 것이었다가 나만의 것이었다가 결국 누구의 것도 아닌 것이 되고 만다. 우리의 생명이 유한하듯 우리의 기억 역시 '한시적'인 것으로 소멸한다.


"지금 이 상태 그대로의 마음을 남기고 싶었어. 다 하지 못한 말을 하고 싶었어. 정말 좋았던 것, 너무 가슴 쓰라렸던 것, 당신을 속였던 것, 등등. 당신을 본 순간 이제야 찾았다 싶어서, 오래갈 거라고 혹은 영원할 거라고 마음대로 생각해서 순간순간 미처 하지 못했던 말들. 담아둘 수도, 버릴 수도 없었던 말들. 이 말들이 갈 곳은 단 한 곳, 오직 한 사람, 당신, 당신."  (p.207)


임경선의 소설 <다 하지 못한 말>은 여자 주인공인 '나'의 일기가 모여 한 권의 소설이 된, 지극히 사적이면서도 격정적인 사랑 이야기로 읽힌다. 나는 소설의 남녀 주인공이 사랑을 나누는 어떤 장면에서는 나도 모르게 문득 '아니 에르노'를 떠올렸으니까 말이다. 성실하고 독립적인 성향의 직장인이었던 '나'는 남성 피아니스트인 '당신'을 우연히 만나 사랑의 회오리에 빠져든다. 공연예술가로서 좌절을 마주한 '당신'의 스튜디오는 '나'의 사무실에서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있다. 방음처리가 완벽한 스튜디오는 '당신'의 숙소인 동시에 연습실이며 생활공간이 되기도 한다. '당신'을 만나기 전의 '나'는 여느 직장인과 다름없이 점심을 빠르게 해결한 후, 마음에 드는 카페에 들러 커피를 마시고 음악을 즐기는 등 평범한 직장인의 일상과 하등 다를 게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당신'이라는 세상을 알게 된 '나'는 이상한 나라에 떨어진 앨리스처럼 전혀 다른 사람이 되고 만다.


"우리는 낮에 만나면 실내에서 너무 '그짓'만 한다며, 낮 시간을 건전하게 바깥에서 보내자는 말을 가끔 나누었지. 하지만 그 말을 하면서도 어느새 상대의 셔츠와 블라우스의 단추를 풀고 있었으니, 그런 반성은 전희의 한 부분일 뿐이었어. 그러던 어느 날 당신은 스튜디오 문을 열어주자마자 내 손을 덥석 잡고 오늘은 덕수궁에 산책을 나가자고 했어."  (p.77)


임경선 작가에 대해 밝히고 넘어갈 게 있다. 과거 언제였는지 정확한 시점은 알 수 없지만 무라카미 하루키의 애독자였던 임경선 작가는 하루키 작품에 대한 오프라인 강의를 주기적으로 하고 있었고, 강의의 주요 내용이 온라인에 게시되기도 했었다. 나 역시 하루키의 애독자였던지라 임경선 작가의 강의 요지를 관심 있게 읽은 적이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임경선 작가가 전문 작가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고 하루키를 좋아하는 열혈 독자 중 한 명이겠거니 생각했었다. 그러다 우연히 가수 겸 작가인 요조와 함께 쓴 교환 일기 <여자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를 읽게 되었고, 그마저도 전문 작가의 작품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나로서는 어쩌면 <다 하지 못한 말>이라는 소설이 임경선 작가를 전문 작가로 인정하게 된 첫 번째 작품이 아닐까 싶다.


"<다 하지 못한 말>의 여자 주인공 '나'도 두려움 때문에 말을 아끼고, 어쩔 줄 모르는 고통 때문에 편지인지, 일기인지, 혹은 단순히 혼잣말인지 모를 글을 쓴다. 그것이 무엇이든 상대는 그 글을 받아 볼 필요는 없다. 이는 사랑에 빠지고 상처를 입은 이가 스스로를 구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몸부림일 뿐이니까."  (p.212 '작가의 말' 중에서)


분명한 것은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은 '한시적'이라는 사실이다. 사랑도, 미움도, 그리움도, 심지어 영원할 것만 같았던 우리의 기억마저도. 그러나 사랑에 빠진 남녀는 사랑하는 그 순간이 영원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 이별이나 상실의 아픔을 겪은 후에 우리는 결국 사랑도 미움도 '한시적'이었음을 깨닫게 되지만 그래서인지 '한시적'이라는 말은 누구에게나 가슴 절절한 의미로 다가오게 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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