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남쪽 인도양에 위치한 휴양지 몰디브는 1200개의 섬으로 이뤄진 섬나라이다. 인구는 51만 명이고 국토 면적도 강원도의 태백시와 비슷하다고 하니 무척이나 작은 나라임은 분명하다. 이런 작은 나라는 대개 국가의 경제를 광업이나 관광 수입에 의존한다. 말하자면 관광은 국가의 주요한 수입원이 되는 셈이다. 몰디브 역시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몰디브는 돈보다는 정의를 선택한 듯하다. 지난 2일 팔레스타인에 대한 연대의 표시로 이스라엘 여권 소지자의 입국을 금지하기로 했다고 발표했으니 말이다. 그와 같은 결정을 내리는 데는 결코 가볍지 않은 고민이 동반되었을 것이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일과 독일 점령하의 유럽 각지에 있는 유태인을 체포하고 강제로 이주시키는 계획을 실행했던 인물 중에는 아돌프 아이히만(Adolf Eichmann, 1906~1962)이라는 인물이 있다. 연합군에게 독일이 항복한 후 아이히만은 가족과 함께 아르헨티나로 도망쳐 리카르도 클레멘트라는 가짜 이름으로 생활했다. 1960년 5월 이스라엘의 비밀 정보원들에게 체포되어 이스라엘로 송환되기까지 자동차 공장의 기계공으로 15년을 살았다. 1961년 12월 예루살렘의 법정에 선 아이히만은 무죄를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1962년 5월 교수형에 처해졌다. 당시 <뉴요커>의 특별 취재원 자격으로 재판 과정을 취재했던 한나 아렌트는 "나는 명령에 따랐을 뿐이며 명령은 따라야 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던 평범한 중년 남성인 아이히만을 보면서 '악의 평범성'을 생각했다. '악이란 뿔 달린 악마처럼 별스럽고 괴이한 존재가 아니라 선과 마찬가지로 우리 누구나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나치가 했던 짓을 이스라엘 네타냐후 총리와 그를 따르는 시오니스트들이 같은 방식으로 죄를 짓고 있다. 무고한 팔레스타인 주민들을 향해 사냥하듯 총을 난사하는 군인들이 아이히만이 주장했던 것처럼 네타냐후의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고 주장한다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것이 바로 '악의 평범성'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생각하고 무엇이 정의인가를 판단하지 않는다면 자신이 비록 명령을 내리는 최고 권력자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예루살렘 법정에 섰던 아이히만처럼 말이다. 이것은 비단 전쟁 중에 벌어지는 지극히 예외적인 참상에 대해서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스승의 날 카네이션조차 위법이라고 했던 권익위가 뇌물로 받은 디올백에 대해서는 직무 관련성이 없다며 사건을 종결했다.


나와 가깝게 지내는 친구나 지인들 중에도 공직에 있는 사람들이 꽤나 많다. 그들과 만나 식사라도 할라치면 나는 이따금 지나가는 말처럼 아돌프 아이히만의 이야기를 들려주곤 한다. 그들은 '내가 사람을 죽인 것도 아닌데 잘못한 게 뭐냐?'며 따지듯 묻곤 한다. 그러나 나는 그들의 표정에서 현 정부의 잘못을 그들도 인지하고 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악의 평범성'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사람을 죽여서가 아니라 자신의 상관이나 권력자의 잘못을 보면서도 제대로 지적하지 않는 것, 혹은 그들의 명령이 뻔히 잘못된 일인 줄 알면서도 군말 없이 따르는 것, 그것 역시 아이히만의 전철을 답습하는 게 아닐까. 내가 그들의 연금이나 노후를 책임지지 못하는 까닭에 그만두라거나 상관의 명령을 거부하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나의 양심은 언제나 구천을 떠도는 아이히만의 얼굴과 대면하고 있다. 습기를 머금은 텁텁한 바람이 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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