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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 상실, 사랑 그리고 숨어 있는 삶의 질서에 관한 이야기
룰루 밀러 지음, 정지인 옮김 / 곰출판 / 2021년 12월
평점 :
삶에 지치거나 푸석푸석 메마른 일상이 길게 이어질라치면 하시라도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하게 되는 스님이 한 분 있다. 그렇다고 내가 불교 신자라는 얘기는 아니다. 속세의 삶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기 위해서는 우리네 삶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채 살아가는 스님이나 신부님 혹은 수녀님과 같은 성직자들의 시선이 필요할 뿐이다. 물론 우리들 삶에서 시시때때로 부딪히는 시시콜콜한 문제들에 대해서는 주변의 친구들이나 목사님에게 조언을 구하는 게 더 빠르고 현명한 해결책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나는 종교에 상관없이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는 스님이나 신부님 혹은 목사님의 연락처를 마치 부적처럼 지니고 다닌다.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스님을 불쑥 꺼내 든 이유는 풀리지 않는 삶의 의문에 대한 스님의 견해와 최근에 읽은 한 권의 책이 나름의 인연으로 깊이 연결된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왜 사느냐?는 문제와도 직결된다. 또한 과학 전문 기자로 15년 넘게 미국 공영 라디오 방송국NPR에서 일하고 있는 룰루 밀러의 고민이기도 하다. 그녀의 논픽션 데뷔작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를 읽은 우리 모두의 고민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자신의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느냐 아니냐 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어린 시절의 경험과 성장 배경에 의해 결정될지도 모르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주어진 삶을 끝까지 살아내느냐 아니냐는 현실에서 또 다른 차원의 문제라는 걸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그러나 그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각자가 고민해야 할 개별적인 것일 뿐 모든 이에게 공통으로 제시할 수 있는 모범 답안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고 있을지도 모른다. 비관주의자인 저자 역시 자신의 삶을 통과하기 위해 비슷한 유형의 한 사람을 자신의 롤모델로 삼아 그의 생애를 세세하게 점검했던 것처럼.
"운명의 형태를 만드는 것은 사람의 의지다. 이 말은 그가 자기 자신에게 결코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던 바로 그런 종류의 거짓말이다. 사악함으로 이끌어가는 것이라고 그가 경고했던 그런 종류의 거짓말. 자기 경력을 바쳐 맞서 싸워왔던 그런 종류의 거짓말이자, 그가 죽기를 각오하고 싸울 가치가 있다고 말했던 그런 종류의 거짓말이다. 자연은 인간의 사정을 봐주지 않으니까! 그조차도 절망에 완전히 집어삼켜지지 않으려면 그 거짓말이 진실이기를 믿어야만 했던 것이다." (p.133)
'인간이 살아가는 방법은 매번 숨 쉴 때마다 자신의 무의미성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거기서 자신만의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했던 생물학자(분류학자)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 현실적인 절망(예컨대 자신의 전 생애를 바친 업적이 파괴된다든가 가까운 사람을 사고나 질병으로 잃는 것과 같은) 속에서 그가 선택했던 역경을 이겨내는 현실적인 방안이나 가르침을 배우기 위해 분투했던 저자. 그에 비하면 나는 스님을 통해 너무 쉽게 그 답에 접근했던 게 아닌가 하는 미안함마저 있었다. 스님은 우리 삶의 에너지가 각자가 지닌 '욕심'이라고 했다. 수도자의 답변치고는 너무나 세속적인 것이어서 당시에는 크게 놀랐던 기억이 있다.
"내가 물고기를 포기했을 때 나는, 마침내, 내가 줄곧 찾고 있었던 것을 얻었다. 하나의 주문과 하나의 속임수, 바로 희망에 대한 처방이다. 나는 좋은 것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약속을 얻었다. 내가 그 좋은 것들을 누릴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다. 내가 얻으려 노력했기 때문이 아니다. 파괴와 상실과 마찬가지로 좋은 것들 역시 혼돈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죽음의 이면인 삶. 부패의 이면인 성장. 그 좋은 것들, 그 선물들, 내가 눈을 가늘게 뜨고 황량함을 노려보게 해주고, 그것을 더 명료히 보게 해준 요령을 절대 놓치지 않을 가장 좋은 방법은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전혀 모른다는 사실을, 매 순간, 인정하는 것이다. 산사태처럼 닥쳐오는 혼돈 속에서 모든 대상을 호기심과 의심으로 검토하는 것이다." (p.263~p.264)
속세에 살면서 '욕심'을 버린다거나 '내려놓기'를 실천하는 것과 같은 세속적이지 않은 행동은 지극히 위험하다고도 했다. 속세를 떠난 자신과 같은 수도자는 세속적 욕심을 내려놓고 성불하겠다는 욕심을 부리는 게 당연하겠지만 속세에 살면서 세속적 욕심을 버린다는 건 격에 맞지도 않을뿐더러 에너지를 잃는다는 면에서 위험하다고도 했다. '욕심이 곧 삶의 에너지'라는 말은 수도자로부터 흔히 들을 수 있는 게 아니었기 때문에 내게는 가히 충격적으로 다가왔었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의 저자인 룰루 밀러 역시 그녀가 이상적으로 생각했던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 전혀 다른 인물임을 알게 되었을 때 충격이 크지 않았을까. 그러나 중요한 것은 책을 읽는 나도, 저자인 룰루 밀러도 각자가 생각하는 어떤 바람 혹은 '욕심'을 에너지 삼아 삶을 영위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룰루 밀러가 탐구했던 데이비드 스타 조던도, 내가 존경하는 스님도 크게 다르지 않을 터 사람은 모두 자신의 기준에 따라 미래를 욕심내며 사는 것이다.
19세기 미국의 천문학자 마리아 미첼Maria Mitchell이 천문학 수업에서 했다는 말 "삶에 별빛을 섞으십시오."는 마라아 포포바가 쓴 <진리의 발견>에서 읽은 구절이다. 자신의 삶에 별빛처럼 환한 아름다움을 섞고 싶다는 욕망은 어쩌면 속세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가 취할 수 있는 가장 선한 '욕심'인지도 모르겠다. 혼돈이 우리의 시야를 암흑처럼 가리는 이 세상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