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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문장이 찾아오는 순간 - 읽고 쓰기에 대한 다정한 귓속말
오가와 요코 지음, 김난주 옮김 / 티라미수 더북 / 2022년 1월
평점 :
절판
글을 그저 읽기만 하던 사람이 글을 쓰는 차원으로 진전시킨다는 것은 그리 녹록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몇 시간째 붓방아만 찧으며 글짓기 숙제를 부담스러워하는 아이들 앞에서 "나도 소싯적에는 글발깨나 날렸다."며 과장된 몸짓으로 허풍을 떠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는 행위이겠습니다만, 막상 펜을 들고 형식에 맞춰 문장을 쓰고 기, 승, 전, 결의 구성을 갖춰 글을 완성한다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학창 시절 이후로도 꾸준히 독서를 하고 일기와 같은 짧은 글일망정 간간이 글을 써오던 사람이라면 다르겠지만 말입니다.
"또 현실을 기억할 때도 있는 그대로 기억하는 일은 절대 없어요. 기쁜 일은 크게 확대하고 슬픈 일은 조그맣게 축소하는 등, 자기 마음의 형태에 맞게 변형해서 기억합니다. 현실을 이야기로서 자긴 안에 쌓아가는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보면, 사람은 살아 있는 한 누구나 이야기를 필요로 하며, 이야기의 도움으로 현실과 그럭저럭 균형을 잡아가고 있다고 할 수 있겠지요. 따라서 작가는 특별한 재능이 있는 게 아니라, 누구든 나날의 일상생활 속에서 만들어내는 이야기를 언어를 통해 의식적으로 표현하고 있을 뿐입니다. 저 자신의 역할도 그런 게 아닐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p.28)
오가와 요코의 에세이집 <첫 문장이 찾아오는 순간>은 '이야기'에 대한 세 번의 강연을 책으로 엮은 것입니다. 처음에는 강연을 '활자로 남길 예정이 아니었고, 그 자리에서 한 번으로 끝나는 얘기였'지만 최종적으로 출판을 결심하게 된 것은 '이 책을 보신 분들이 이야기의 매력을 다시금 확인하고 이야기의 역할을 새롭게 인식해서, '책을 읽는다는 건 얼마나 멋진 일인지!' 하고 생각해주셨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작가는 밝히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작가는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쓰기를 권하기보다 읽기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1부 '이야기의 역할'에서는 개개인의 삶에서 이야기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어떤 역할을 하는지에 대해 말하면서 독서의 유용성을 논했다면, 3부 '이야기와 나'에서는 어린 시절부터 시작되는 자신의 독서 이력을 하나씩 들춰 보고 돌아보면서 어떤 책이 자신의 인생관에 영향을 미쳤는지를 들려준다. 그리고 2부 '이야기가 태어나는 현장'에서는 20여 년 전 대학에서 문예과에 입학하여 문학을 공부하는 학생이었던 작가가 이제는 소설을 쓰는 일을 직업으로 갖게 되기까지 그 과정을 술회하고 있습니다.
"저도 젊은 시절에는, 저 자신이 가장 중요한 문제였어요. 내가 누구인지를 알기 위해 소설을 썼습니다. 20년 정도 쓰다 보니 점차 제 자신이 그렇게 물고 늘어질 만큼 대단한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리고 일단 저 자신을 떠나, 전에는 상상도 예상도 하지 못했던 넓은 장소에 서서 세계를 관찰하는 자세를 지니자, 살아 있는 인간도 죽은 인간도, 저 자신도 타인도, 동물도 풀도 꽃도 모두, 온갖 것이 고루 평등하게 보였습니다. 그렇게 스스로에게 매몰되지 않는 자세로 쓰자고 생각하게 된 것이 불과 1, 2년 전의 일입니다." (p.103)
《박사가 사랑한 수식》으로 잘 알려져 있고, 세계 평단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는 소설가 오가와 요코. 그러나 지금의 위치에 오른 그녀도 책을 좋아하고 소설가를 꿈꾸던 어린 시절이 있었을 터, 자신의 인생관에 영향을 미쳤던 두 권의 책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파브르 곤충기》와 《한밤중 톰의 정원에서》입니다. 《파브르 곤충기》를 읽으면서는 드넓고 위대한 세상에서 자신이 작디작은 일부라는 생각을 하였고, 《한밤중 톰의 정원에서》를 통해서는 자신이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유일무이한 존재라는 것을 배웠다고 합니다.
"인간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 이야기라면, 역시 너무 강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 될 수도 있겠지요. 너, 이 길로 가면 안 되지, 네가 갈 길은 이쪽이잖아, 하면서 읽는 이를 억지로 끌어당기는 이야기는 이야기의 진정한 모습이 아닙니다. 그래서는 읽는 이가 피로해질 뿐이죠. 읽는 이가 이야기의 견고한 윤곽에 맞추는 게 아니라, 이야기 자체가 어떤 사람의 마음에도 다가갈 수 있으리만큼 넉넉하고 유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도착 지점을 명기하지 않고, 방황하는 독자와 함께 이리저리 헤매는 그런 소설을 쓰고 싶군요." (p.149)
우리는 종종 읽는 이와 쓰는 사람이 엄격히 구분되어 있다고 생각하곤 합니다. 습관적으로 책을 읽고 리뷰든 일기든 쓰는 일에는 마냥 게으르기만 한 나와 같은 일차원의 독서가에게 오가와 요코의 성실함과 겸손함, 그리고 읽고 쓰기의 즐거움을 담은 책 <첫 문장이 찾아오는 순간>은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일상에서 발견하지 못했던 새로운 세상을 책에서 발견하곤 합니다. 배우고 때로 익히면 즐겁다지만 읽고 때로 발견하면 그 또한 즐거운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