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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던 수필 - 새로 가려 뽑은 현대 한국의 명산문
방민호 엮음 / 향연 / 2003년 7월
평점 :
절판
아침부터 바람이 불었다.
뜨겁게 내리 쬐는 햇살, 그러나 가을 바람은 무더위에 지친 사람들을 감질나게 하던 한여름의 그것과는 사뭇 달랐다. 초가을의 향수가 마음 가득 안겨오는 주말의 아침. 여름이 다 가기도 전에 나는 벌써 한 해가 다 간 듯한 쓸쓸함을 느끼는 것이다. 그리고 버석거리며 밟힐 듯한 낙엽과 과거로 향하는 가을 한낮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학창시절 국어 교과서에 자주 등장하여 꽤나 낯이 익은 문인들의 수필을 읽었다. 문학 평론가로 활동하는 방민호 교수가 가려 뽑은 것인데, 일제 식민지 시대를 살았던 우리 문인들의 산문 중 지금 읽어도 그 생생한 생명력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을 선별하였다고 한다. 가을은 할 말이 많은 계절이다. 가끔 떠오르는 옛친구의 얼굴에서, 지금은 잊혀진 아련한 첫사랑의 미소에서, 끊이지 않는 이야기가 샘솟을 듯한 계절. 그 계절의 초입에서 나는 숱한 이야기의 향연에 초대를 받았다.
"이 산문 선집을 펴내며 글을 고른 기준을 들라면 바로 이 영원한 현재성을 꼽고자 한다. 오늘의 우리가 읽을 때 그 글이 우리 선배들의 글이라는 점 말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막막한 심정을 위로해 주고 스스로 자기의 삶을 구성해 가는 여유와 지혜를 주는 글이야말로 훌륭한 글이 아니겠는지? 나는 이러한 글을 찾아내기 위해 고심하였다." (P.286)
1920년대부터 해방직후의 근대문학 공간에 발표된 명산문 91편(51명)을 가려 뽑은 「모던수필」은 발표 당시의 판본을 토대로 당대의 명문장가를 비롯 카프계열, 친일계열, 소수파 여성계열 등을 망라했다. 총 4장으로 구성됐는데 첫장에서는 계절과 자연물, 음식 등을 둘째장에서는 문사들이 느끼는 생활자로서의 번민을, 셋째장에서는 문화의 변화를 바라보는 문학인의 시각을, 넷째장에서는 요절한 문인을 추모한 조사와 예술관을 소재로 담았다. 작가연보와 주석이 실려 있다.
나는 이따금 아이들에게 이런 말을 한다. "아무리 재미있고 유익한 글도 일단 국어 교과서에 실리면 가장 재미없는 글로 전락하는 신세를 면치 못할거야. 왜 그런고 하니 그 글은 시험에 출제되는 지문으로서의 자격 말고는 아무 것도 남지 않았기 때문이지. 심지어 너희들이 즐겨 보는 만화도 교과서에 실리면 재미없다고 느낄걸."하고 말이다.
이 책에 실린 문인들의 글을 읽으면 생각나는 대로, 붓 가는 대로 쓴 글이라는 수필의 취지에 걸맞게 정형화된 글쓰기 방식으로는 쉽게 담을 수 없는 크고 작은 생각들을 자유롭고 솔직한 태도로 표명하고 있지만 한치의 어긋남도 없이 완벽한 글을 탄생시키는 놀라운 재주에 그저 감탄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그 내용에 있어서도 암울한 시대에 씌어진 글들이니 그 분위기 또한 그렇겠거니 짐작한다면 큰 오산이다. 일상에서 벌어졌던 재미있는 일화를 소개하는 등 글은 비교적 경쾌하고 밝다. 특히 노자영의 <오천 원의 꿈>과 엄흥섭의 <탈모주의자>는 시종 웃음을 머금게 했다.
내가 재미있게 읽었던 대목은 예컨대 이런 것이다.
"만일 기아가 닥쳐든다 하더라도 쥐의 기사(饑死)는 멀리 인간 기사 후에 속한다. 그런 까닭으로인지 식(食)에 복(福)하고 한쪽에서 굶어도 먹을 것이 풍요한 사람은 대개는 쥐 상(狀)으로 보인다." (김광섭의 <꽃을 먹는 쥐>중에서) 나는 이 대목에서 현실 정치인 중 한 사람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쩌면 작금의 세태와 그렇게도 잘 들어맞는지.
그런가 하면 문학과 현실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엿볼 수 있는 대목도 있다.
"어쨌든 오늘의 세대에서 살아가기가 어려운 이상으로 창작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역시 작가에게 있어서 최대의 교훈자요 최후까지의 동반자는 현실이 있을 뿐이다. 이 현실을 응시하고 이것과 결리고 여기서 배우고 그 밑에서 얻어내는 바가 없이는 진정한 창작이 나올 수 없는 것이다." (한설야의 <고난의 교훈>중에서)
"이광수의 산문은 종교적 깊이가 있고 김기림 은 예지적이며 정지용은 단소(短小)한 가운데 독한 기운이 있고 이태준은 부드럽고 엷은 거죽 속에 강잉(强仍)한 신조가 담겨 있다. 채만식은 포즈로 가장한 속에 진실 을 숨겨두고 딴청을 부리는 묘미가 있다"고 저자는 평한다. 그러나 나의 소회로는 그 시대에 씌어진 글들을 읽을 때마다 범접할 수 없는 엄숙함을 느끼곤 한다는 것이다. 풀 먹인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듯, 글의 풍모는 고고한 난초를 보는 듯하다. 어쩌면 그것은 지금의 작가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깊은 사색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