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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바라기
시몬 비젠탈 지음, 박중서 옮김 / 뜨인돌 / 2005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누군가를 용서하고 누군가로부터 용서받는다는 것은 쉬운 듯하면서도 어렵기 짝이 없는 일이다.
어려서부터 나는 이 문제에 집착했었고 진정한 용서가 가능할까? 하는 의문에 휩싸였었다. 성경을 종교가 아닌 독서 혹은 상식의 차원으로 읽었던 내게 그들이 말하는 참회나 회개는 더더욱 이해하기 힘든 문제였다. 나의 상식으로는 어떠한 죄를 짓더라도 진심으로 뉘우치면 용서가 된다는 것이 궤변으로 밖에는 들리지 않았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존중한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신으로부터의 용서를 기대할 수 있는 죄의 범위는 분명 존재한다고 믿었다. 가령 거짓말과 같은 작은 죄는 용서가 되지만 살인과 같은 돌이킬 수 없는 범죄는 절대 용서받을 수 없는 범주에 속한다고 믿었다.
성경에 대한 이런 주관적 해석은 칸트가 말했던 정언명령에 더하여 감성적 일깨움으로 굳어지게 마련인데 나 또한 다르지 않았다. 순결 혹은 성적인 면에서도 자신이 책임질 수 없거나 사랑하지 않는 이성과의 육체적 결합은 신의 용서를 기대할 수 없는 범죄라고 굳게 믿었다. 그런 탓에 아내와 만나 결혼을 약속하기 전까지 나는 일체의 스킨쉽도 하지 않았다. 아내의 말을 빌자면 그때의 나는 숨이 콱콱 막힐 정도였다고 한다. 이러한 나의 태도는 어쩌면 열등의식을 숨기기 위한 방어기제, 또는 타인과 나를 구별하는 선민의식과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인식의 바탕에서 "용서"는 일종의 나약한 인간의 방어기제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진정한 용서는 대다수 일반인에게 불가능한 일임에도 자신만은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세상의 모든 이에게 보여주려는 유치한 발상에서 기인한 행동으로 보았던 것이다. 시쳇말로 쿨해 보이기 위한 치기어린 행동,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믿었다. 겉으로는 용서하는 체하면서도 마음 속에 존재하는 감정의 찌꺼기는 어찌할 수 없이 자신의 인내에 의존해야 한다고 믿었다. 즉 상대방에 대한 증오나 분노는 분명 이성의 힘으로 통제할 수 없는 감정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위선적 용서보다는 오히려, 지금은 나의 감정을 존중하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분노의 감정이 희석되기를 바라는 편이 옳다고 생각했었다.
그렇게 결론짓고 한동안 덮어 두었던 "용서"의 문제는 이 책으로 인해 불거졌다.
저자인 시몬 비젠탈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 포로 수용소에 갇혀 강제노역을 하였다. 하루하루의 삶이 늘 죽음과 함께 했으며 전쟁이 끝난 후 저자는 나치의 학살자들에 의해 무려 89명의 일가친척을 잃고 아내와 단 둘이서만 살아남았다고 한다. 저자는 이 책에서 수용소의 강제노역 도중에 만난 한 SS대원의 참회와 그에 대한 자신의 행동이 과연 정당했는지 묻고 있다.
저자는 어느 날 임시병동으로 쓰이던 기술전문학교 건물의 쓰레기 하치 작업에 동원되었다. 그 학교는 자신의 모교였고, 작업 도중 한 간호사에 의해 임종을 앞둔 젊은 SS대원의 병상으로 인도된다. 온몸에 붕대를 두른 채 누워있는 병사는 자신이 저지른 유대인 학살을 고백한다. 그리고 불이 붙은 채 건물 밖으로 떨어지던 유대인 부부와 아이의 얼굴을 잊지 못하겠다며 용서를 빈다. 단지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그 병사의 참회를 듣게된 저자, 자신도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태에 놓여있던 저자는 아무런 말도 없이 그 자리를 떠난다. 다음 날 병사는 죽었고 간호사는 그 병사가 자신에게 남긴 유품을 전하지만 거절한다. 전쟁이 끝나고 저자는 그 병사의 어머니를 만난다. 남편도 잃고 아들마저 잃은 그녀는 자신의 아들이 착한 아이였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저자는 그 아들로부터 들었던 이야기를 꺼내지 않은 채 그곳을 떠난다.
저자는 글의 말미에 독자에게 묻는다. "과연 나라면 어떻게 했을 것인가?"
이 책의 2부에는 이 문제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히는 28명의 주장이 실려 있다.
비젠탈의 행동은 옳았다고 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다는 사람들. 홍세화, 달라이 라마 등 각계의 유명인사들의 견해는 서로 달랐다. 성직자의 견해와 일반인의 견해는 분명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용서의 행위를 시간적 연속성(또는 관계의 지속성)을 전제로 한 행동이라고 간주할 때 이 책에서 제기한 용서의 문제는 조금 다르다. 그 병사는 임종을 앞두고 있었고,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 선 그 병사는 무엇보다 영혼의 안식이 필요했을 것이다. 관계의 지속성과는 거리가 먼 상황이라는 말이다. 또한 저자의 입장에서 임종을 앞둔 한 인간의 모습은 일말의 동정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어찌 보면 자신의 영혼을 구제하고 싶었던 지극히 이기적인 병사의 참회가 아니었을까? 그리고 용서의 주체가 될 수 없었던(병사의 행위는 자신에게 행해진 것이 아니기에) 저자의 갈등은 인간이기에 어찌할 수 없는 감정의 문제일 뿐이라고 본다. 그 상황을 재연할 수 없는 독자의 입장에서 비젠탈의 질문은 참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