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 오래 전 우리가 사랑했을 때
앤 타일러 지음, 공경희 옮김 / 창해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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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의 음산하고 소란스러웠던 날씨에 대해 속죄라도 하려는 듯 어제는 맑고 쾌청하며 조용했다. 정말 그랬다. 누군가 낮은 목소리로 나를 불러도 불에 데인 듯 화들짝 놀랄 것처럼. 나는 무작정 떠오르는 추억의 한 장면을 소재로 '만약에 이러이러 했더라면...'하는 식의 상상에 빠져들었다. 지난 과거는 언제나 '만약에'로 시작되는 상상 속의 소설 한 편을 만들어내곤 한다. 그 때문에 무료한 시간이 가볍게 흘러가고는 하지만. 그러다 문득 지금 이 순간에 내가 선택하지 않은 어떤 일, 예컨대 아버지의 장례식에 조문을 왔던 친구에게 감사 메일을 보내야겠다 생각하면서도 차일피일 미루고만 있었던 것이 미래의 어느 순간 지금처럼 조용한 순간을 비집고 들어와 '만약에'로 시작되는 소설이 되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그때도 물론 상상 속에서 펼쳐지는 이야기이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가끔 레베카는 이런 생각을 했다. 인생의 길이 갈라졌던 그곳에 되돌아가서 가지 않았던 길을 선택할 수도 있지 않을까? 물론 지금은 처음에 선택한 길의 종점에 이른 시점이기는 하지만. 속임수 같았다. 자기 케이크를 다 먹고 남의 것마저 욕심내는 듯했다." (p.268)

 

앤 타일러의 소설 <인생>을 읽고 있노라면 삶은 한없이 조용하고 따뜻하게 흘러갈 것만 같은 착각에 빠지게 된다. '오래 전 우리가사랑했을 때'라는 부제가 붙은 이 소설에서 작가는 특별하지 않은 한 여인의 보편적인 삶을 보여줌으로써 우리가 인생에서 소중하게 여겨야 할 것이 과연 무엇인지,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다 해도 인생에는 스스로 발견할 수 있는 행복들이 얼마나 많은 것인지 깨닫게 한다.

 

소설에서 주인공 레베카는 대가족을 이끄는 안주인으로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하루하루를 보낸다. 전도 유망한 대학생이었던 레베카는 '오픈 암스'의 주인이었던 조를 만남으로써 그녀 인생의 모든 것이 바뀐다. 같은 동네에서 어릴 적부터 같이 자랐던 '윌'과 결별하고 딸 셋이 딸린 이혼남 '조'와 만난 지 2주만에 결혼한다. '조'와 레베카 사이에서 딸 한 명이 더 태어났고 시어머니가 죽은 후에는 홀로된 숙부까지 떠맡는다. 열다섯 살의 나이 차가 나는 남편 '조'가 결혼한 지 6년만에 교통사고로 갑작스럽게 죽는 바람에 레베카는 딸 넷과 숙부, 어린 시동생을 돌보는 처지가 되었다. 장성한 딸들이 모두 결혼하고 집에는 이제 숙부와 레베카 둘만 남았다. 숙부는 이제 100세를 눈앞에 두게 되었고 레베카도 여러 명의 손주를 둔 할머니가 되었다.

 

남편의 사업체였던 '오픈 암스'는 사람들에게 파티 음식과 장소를 제공하고, 파티의 성격에 맞게 '오픈 암스'를 장식하고 파티의 진행도 맡는 일을 한다. 레베카는 파티 예약에서부터 파티가 끝나는 순간까지 모든 것을 관리한다. 첫째 딸 비디와 함께 파티 의뢰인의 음식을 준비하고, 필요할 때마다 레베카를 찾는 딸과 사위들, 그리고 어린 손주들을 응대하고, 몸이 편치 않은 숙부도 돌보아야 한다. 끝이 없어 보이는 일상에 지쳐버린 레베카. 그녀는 어느 날 시동생에게 숙부를 맡기고 고향에서 홀로 사는 친정 어머니를 찾는다.

 

"어린 시절을 보낸 방에서 옷을 벗고 치마 잠옷을 걸치면서 과거의 자기가 이 모습을 봤다면 얼마나 숨막혔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예전의 레베카는 거울에 비친 이 여자를 몰라보겠지. 옥수수 수염 같은 머리칼이며, 아무렇게나 빚어진 듯한 얼굴하며. 예전의 레베카는 조심성 없이 발을 질질 끌며 침대로 다가가는 이 여자를 모른다 하리라." (p.118)

 

우리는 이따금 가족 행사에서 오랜만에 만난 조카를 보며, 우연히 나간 동창회에서 친구의 얼굴에 깊게 패인 주름과 처진 피부를 보면서, 또는 거울 속에 비친 낯선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의 지난 시간을 압축 파일로 배달 받은 것처럼 당혹스러운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그때의 느낌은 쓸쓸하거나 공허하다. '겨우 이거였나?' 하는 자조 섞인 물음이 저절로 튀어나오는 순간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삶이 계속되는 이유는 자신의 과거를 공유한 가족들의 사랑과 같은 시간을 지나온 수많은 사람들의 지지 덕분이 아닐까 싶다.

 

레베카는 어린 시절을 함께 보냈고, 결혼까지 생각했던 '윌'에게 전화를 한다. 그는 젊은 아내와 이혼하고 현재는 혼자 살고 있다. 그 사실만으로도 레베카는 한때 사랑했던 과거의 어느 순간으로 되돌아가 새로운 삶을 새로 시작할 수 있지나 않을까 기대에 부푼다. 레베카의 가족을 '윌'에게 소개하고, 레베카도 '윌'의 전부인과 함께 살고 있는 '윌'의 딸을 만나지만 그녀는 결국 '윌'이 결코 되돌릴 수 없는 과거의 남자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소설은 파피 숙부의 100세 생일을 맞아 가족 모두가 모인 성대한 가족 파티의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파피 숙부의 이 말은 인상적이다.

 

"난 늘 조에게 '봐라. 똑바로 봐. 진정한 인생 같은 건 없단다. 어떻게 끝내든 자기가 마무리짓는 게 진정한 인생이야. 갖고 있는 걸로 최선을 다할 뿐이지.'라고 말했지." (p.363)

 

소설은 늘 '만약에'로 시작된다. 한가하고 무료한 순간, 틈새를 비집고 들어와 시작되는 소설. 다른 것에 밀려 내가 선택하지 않았던 과거의 어느 시점을 배경으로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인생이 펼쳐지는 것이다. 다만 이것은 누구나의 소설, 결말 없는 삶의 유희가 아닌가. 그림 속의 인물처럼 생명이 없는, 오직 상상의 세계에서만 펼쳐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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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세의 여행 - 헤세와 함께 하는 스위스.남독일.이탈리아.아시아 여행
헤르만 헤세 지음, 홍성광 옮김 / 연암서가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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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인생관이나 세계관은 그 사람의 삶 전체를 관장하는 것이지만 일상에서 그것을 감지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어쩌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인지도 모른다. 사람과 사람이 어우러지는 일상에서 한 사람의 모습은 그저 처세나 임기응변, 인간성, 지적수준 등 삶의 기교와도 같은 비교적 가벼운 것들만 드러날 뿐 그에게서 철학적 울림과도 같은 인생관이나 세계관을 찾아볼 수는 없다.

 

그러므로 개인의 인생관이나 세계관은 은밀하고 사적인 것에 속한다. 그러나 우리가 꼭 그렇게만 볼 수 없는 까닭은 자연의 품에 안긴 고독한 영혼은 스스럼없이 자신을 드러내고, 뒤섞이며, 홀연 자신을 잊은 채 자연과 하나 되기에 이른다. 자연 속에서 자신의 인생관이나 세계관을 아무런 부끄럼 없이 드러낼 수 있는 한 인간의 모습은 얼마나 순수하고 아름다운가. 하지만 자연 속에서 느꼈던 자신의 인생관이나 세계관을 우리에게 말과 글로 전하지 않는 한 그것은 전설처럼 떠돌 뿐 우리가 공유할 수 있는 그 무엇이 되지는 않는다.

 

여행은 그런 것이어야 한다. 일상의 체험이 아닌, 한 인간의 영혼과 자연의 만남, 처음으로 마주하는 자신의 인생관과 세계관에 대한 응시, 자신의 총체적인 삶을 계획하는 밑그림, 그 모든 체험을 통하여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자신이 비로소 자연의 일부로 편입되었음을 인식하는 황홀한 경험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 대 인간의 교류가 아닌, 영혼과 자연의 강한 입맞춤이어야 한다.

 

"여행의 시학은 일상적인 단조로움, 일과 분노로부터 휴식을 취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우연히 함께하고, 다른 광경을 관찰하는 데에 있다. 여행의 시학은 호기심의 충족에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체험에, 다시 말해 더욱 풍요로워지는 데에, 새로 획득한 것의 유기적인 편입에, 다양성 속의 통일성과 지구와 인류라는 큰 조직에 대한 우리의 이해 증진에, 옛 진리와 법칙을 전적으로 새로운 상황에서 재발견하는 데에 있다." (p.36)

 

<헤세의 여행>은 가볍고 경박한, 때로는 우스꽝스럽고 천박하기까지 한, 여행에 대한 현대인의 잘못된 생각들을 돌아보게 한다. 일상에서 느끼는 경제적, 육체적 부담에서의 일시적 해방, 이제껏 가본 적 없는 어느 바닷가의 일출, 고지대에서 바라보는 멋진 풍광, 오직 그것만이 다인 양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사진을 찍어대는 현대인의 여행은 그것이 여행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장소만 바뀐 일상에 가깝다고 느끼게 한다.

 

사실 유럽의 작가 중에 헤세만큼 동양적인 작가도 드물 것이다. 그의 외삼촌이 불교연구의 대가였던 까닭도 있겠지만 그가 동양적인 사고의 유럽 작가가 된 데에는 수없이 많았던 여행이 한몫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에게 여행은 삶의 목적이자 전부였다. 자신을 방랑자나 유목민으로 이해하는 헤세는 여행은 단순히 일상으로부터의 해방이 아닌, 순수의 자신에게 이르는 고행의 한 방편으로 여겼던 듯하다.

 

“여행은 언제나 체험을 의미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정신적 관계를 가질 수 있는 환경에서만 뭔가 가치 있는 체험을 할 수 있다. 기회 있을 때마다 가는 즐거운 소풍, 어떤 음식점 정원에서의 유쾌한 저녁, 멋진 호수 위에서의 증기 기선 여행은 그 자체로 체험이 아니고,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해주지 못하며, 계속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자극이 아니다.” (p.33)

 

헤세의 여행은 일견 구도자의 그것처럼 따분할 수 있다. 자신을 포기하는 단계에 이를 때까지 그는 자신의 글에서 솔직하고 싶었다고 고백한다. 때로는 낭송을 목적으로, 때로는 휴식을 목적으로, 집필을 목적으로, 또는 지인을 만나기 위해 계속되었던 여행에서 그가 품었던 소회는 우리가 갖는 여행의 느낌과는 사뭇 달랐다. 그가 여행 중에 남긴 담백하고 아름다운 글 속에는 자연을 관조하고 자신을 살피는 대문호의 겸손함이 묻어난다.

 

"나는 오늘날 우리 같은 사람들이 쓰는 글은 그것에서 오늘날 장기간에 걸쳐 하나의 형식과 문체, 하나의 고전이 생겨날지도 모른다는 데서가 아니라 궁핍을 겪는 우리에게 최대한 솔직해지는 것 외에는 다른 도피처가 없다는 데에 가치가 있을 수 있음을 알고 있다. 솔직함과 고백, 최종적인 자기포기에 대한 요구와, 다른 한편 젊은 시절부터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아름다운 표현에 대한 요구, 이 두 가지 요구 사이에서 내 세대의 전체 문학은 절망적으로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가 자포자기에까지 이르는 최종적인 솔직함을 지닐 용의가 있다 해도 그런 솔직함을 위한 표현을 어디서 발견한단 말인가?" (p.437)

 

헤세의 여정은 니탈리아, 스리랑카, 말레이시아, 보덴 호수, 뉘른베르크 등 나열하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했지만, 그의 여행은 언제나 자연과 자기 자신, 인간과 삶에 대한 관조, 그리고 문학에 대한 열정 속에 있었다. “여행이란 우리가 사는 장소를 바꾸어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각과 편견을 바꾸어주는 것이다.” 라고 한 '아나톨 프랑스'의 말은 헤세의 여행이 주는 또 다른 교훈이다. 삶의 향기가 묻어나는 책, <헤세의 여행>은 그런 책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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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자꾸만 딴짓 하고 싶다 - 중년의 물리학자가 고리타분한 일상을 스릴 넘치게 사는 비결
이기진 지음 / 웅진서가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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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학자와 골동품 수집과의 상관관계, 교수와 동화 작가의 조합, 또는 물리학 교수와 만화 그리기의 연관성에 대해 골똘히 생각해 보았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이러한 조합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굳이 하겠다는 데 말릴 까닭도 없지만 첨단 과학을 연구하는 물리학자가,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가, 또는 50대 중반의 가장이 저지른(?) 일 치고는 왠지 심상치 않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나는 자꾸만 '딴짓'하고 싶다>의 저자인 이기진 교수는 조금은 특이한 물리학자이다. 내가 상상하는 물리학자는 흰 가운을 걸친 깔끔한 차림새로 연구실은 늘 말끔하게 정리되어 있고, 허튼 농담이나 실없는 말은 일체 입에 담지 않고, 집에서도 독서와 연구에 매진하는 그런 모습이다. 물리학자에 대한 편견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나의 생각은 이제껏 변한 적이 없었던 듯하다. 그러나 대개의 일반인이 가졌음직한 이러한 편견을 이기진 교수는 단번에 깨트린다.

 

연구실 한켠에 군데군데 서있는 깡통 로봇과 벽면에 붙은 엉뚱한 그림들과 이빨이 나간 백자며, 부엌에 있어야 할 조리기구며, 홍차를 거르는 기구며, 출처가 궁금한 호랑이 조각상이며, 심지어 낡고 허름한 개집까지. 이건 뭐 시골집 창고라고 해도 믿을 정도다. 그런 너저분한 연구실을 학기에 단 한 번 정리하고, 입는 옷도 1년에 한 번 몰아서 산다고 하니 그의 가족이나 지인들은 도대체 어떤 마음으로 이 사람을 너그러이 용서하는 것일까 궁금해진다. 그렇지 않은가. 웬만한 사람이면 대개 직장과 가족이 생기는 순간 자신이 몰입하던 취미와 결별하고, 새로운 환경을 마지못해 받아들이는 게 일반적이지 않은가.

 

"취미 생활은 연애와 같다. 애정과 관심에 따라 취미의 깊이가 달라진다. 조금 눈길을 멀리하면 토라져 버리고, 만남이 뜸해지면 헤어짐의 아픔을 당하기도 한다. 물질적으로 투자를 하면 둘 사이는 럭셔리해지고 급격하게 친밀해지기도 한다. 가끔 삼각관계에 휘말리기도 한다. 둘 중 한 사람을 버려야 하는 불편한 상황처럼, 애지중지하던 취미를 멀리하고 새로운 관심사로 갈아타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헤어진 애인의 편지와 선물을 처리하듯, 취미 생활에서 구입한 물건들이 눈길 한 번 주지 않는 폐기물처럼 방치되기도 한다." (p.87)

 

실험실 문을 나서는 순간부터 온갖 상상의 날개를 펴고 '딴짓'에 몰입할 수 있는 사람. 저자 이기진은 그런 사람이다. 내전중이던 아르메니아 공화국에서 보냈던 젊은 시절, 그곳에서 사귀었던 오래된 인연, 다락방 생활을 감행했던 프랑스 파리에서의 생활, 지도교수가 맘에 들어 7년을 보냈던 일본. 글을 못 읽어 학교까지 그만두어야 했던 초등학교 2학년의 어린 소년은 물리학을 만나 사랑에 빠졌고, 오래된 인연을 소중하게 여기고, 시간이 켜켜이 쌓인 물건에 탐닉하며, 추억의 장소를 찾는 어른이 되었다.

 

이러한 삶의 방식은 하루 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어린 시절의 환경, 부모님, 친구들, 그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저자를 자극하고 부추겼으리라. 대학생 시절부터 다니던 술집을 몇 십 년째 드나들고, 매일 같은 시각에 들르는 커피점, 수없이 드나들던 고미술 상가와 벼룩시장, 그의 주변에는 온통 '오래된 것들'만 넘쳐나는 것이다. 창성동에 마련한 한옥을 혼자만 즐기는 게 아쉬워 현재는 갤러리로 쓰고 있다는 저자.

 

나는 저자의 삶이 은근 부러워진다. 매시간, 매분, 매초, 매순간마다 미끄러지듯 흘러 다시는 되돌릴 길 없는 추억의 지하동굴에 저장되는 삶의 나락에서 우리는 그 지하동굴에서 건져 올린 추억에 나른한 감상을, 명징한 느낌을, 때로는 상큼한 쾌감을 적당히 섞어 행복이라는 삶의 와인을 들이켜곤 한다. 저자는 자신의 삶을 제대로 즐기고 즐길 줄 아는 몇 안되는 사람 중의 한 사람이다.

 

"세월을 거슬러 뭔가 상상하게 만드는 물건. 너무 많이 팔리는 바람에 벼룩시장에서조차 가장 싸게 구입할 수 있는 물건. 이런 물건을 오브제로 생각하며 사는 모습. 이런 풍경이 나는 좋다." (p.269)

 

삶이란 결국 다양한 경험을 첨가한 사유의 칵테일이 아닌가. 어떤 경험, 어떤 첨가물을 넣을지 결정하는 일은 순전히 본인에게 달려 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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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파수꾼 문학사상 세계문학 12
J.D.샐린저 지음, 윤용성 옮김 / 문학사상사 / 199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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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오후의 일은 판박이 스티커처럼 선명하게 기억할 수 있어. 이를테면 그렇다는 거지. 투명 셀로판지에 새겨진 다양한 그림들을 공책의 여백에 대고 엄지 손톱으로 박박 문지르면 순식간에 선명한 그림이 새겨지는 판박이 스티커 말이야. 간혹 힘이 약한 저학년 꼬마들이 문지르면 채 반도 새겨지지 않거나, 귀퉁이가 잘려나가곤 하지만.

 

아무튼 너도 그날 오후의 일을 잊지 못할거야. 뭐라고? 생각나지 않는다고? 어떻게 그날을 잊을 수가 있어?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우리들 중 가장 멍청한 질문을 해댔던 그날을 말이야. 펑퍼짐한 바지를 골반 위에 간신히 걸쳐 입고 다니던 국어 선생님은 기억하지? 그래, 맞아. 만나는 학생들마다 머리 깎았냐고 질문하던, 머리가 희끗희끗하고 자켓 주머니에는 항상 분필가루를 묻히고 다니던 그 국어 선생님'

 

9월 초의 어느 날이었을 거야. 운동장 한켠에 있던 등나무 벤치에서는 말매미 몇 마리가 살려달라는 듯 악을 쓰며 울어대고 있었지. 목청을 돋구어 우는 꼴이라니. 점심 도시락을 5분 내에 해치운 우리는 땀을 뻘뻘 흘리며 축구를 하고 있었지. 그날 5교시는 국어시간이었거든. 그날 5교시에 우리는 조금 얼띤 국어 선생님의 눈을 피해 다들 자거나 잡담을 할 생각을 하고 있었지. 늘 그래왔지만. 그런데 뜬금없이 야외수업을 하겠다는 거야. 음악이나 미술 시간에 야외수업을 한 적은 몇 번 있었지만 국어는 그렇지 않았잖아.

 

야외에서 작문 시간을 갖겠다는 국어 선생님의 발표는 그야말로 난데없는 폭탄발언이었지. 노트와 볼펜을 들고 학교 뒤편의 논둑길을 어슬렁거리며 걷는 꼴은 마치 젖도 떼지 않은 송아지가 어미소를 따라가는 형상이었어. 너도 알다시피 야외수업을 하던 장소는 논둑길을 따라 5분쯤 걸어야만 닿을 수 있는 솔밭이었잖아. 땀도 씻지 못하고 끌려갈 때의 심정은...

 

솔밭 그늘은 그나마 시원한 편이었다구. 하늘은 더없이 맑았고, 도자기 문양처럼 작은 구름만 떠다니고 있었지. 너도 알다시피 아무리 신경질적인 선생님도 일 년에 서너 번쯤은 아주 관대한 표정을 지을 때가 있지. 천사처럼 말이야. 그날 국어 선생님도 그랬어. 마치 '애기는 어떻게 생겨요?' 하고 실없는 질문을 던진다 해도 다 들어줄 것만 같은 그런 표정이었지. 선생님은 그때, "J.D.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 읽어본 사람 있나?" 하고 물었어.

 

다들 멀뚱멀뚱 눈빛만 교환하고 있었지. 나는 사실 읽어본 적은 있었지만 괜히 엉뚱한 질문을 받을까봐 손을 들지는 않았어.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잖아. 뭐랄까, 그냥 있으면 중간이나 갈 것을 어줍잖게 나섰다가 망신만 당할 수도 있겠다 싶었던 거지. 아무도 손을 들지 않고 눈치만 보던 그때 너가 손을 번쩍 들었던 거야. 나는 마른 하늘에 벼락이라도 친 줄 알았어. 평소에 책을 좋아하는 놈 같았으면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았겠지. 그런데 하필 너라니.

 

"어, 그래 재민이.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고 뭘 느꼈지?" 선생님은 더없이 반가운 표정으로 널 호명했어. "오래 전에 읽어서 내용은 잘 생각나지 않구요. 호밀이 뭔지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오, 맙소사! 그걸 대답이라고. 호밀이 뭐냐구? 그건 마치 초등학교 1학년 꼬마가 판박이 스티커를 어설프게 문지른 거랑 다를 게 없었어. 정말 그랬다구. 덩치는 산만한 놈이 그런 대답을... 주인공 홀든이 그렇게나 경멸하던 애클리보다 너는 한참이나 지능이 떨어지는 것처럼 보였어. 만약 애클리가 그 시간에 있었다면 천재라고 생각했을 거야. 그 후로 너는 국어 선생님께 완전히 찍혔던 거야. 홀든이 생각하는 여자 애들처럼 국어 선생님도 그랬으니까.

 

"여자 애들의 문제점은 일단 어떤 남자에게 호의를 가지게 되면, 그놈이 어떤 쓰레기 같은 놈일지라도 열등감이 있다고 말하는 거야. 반대로 싫은 사내애라면 아무리 좋은 놈일지라도, 아무리 열등 의식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그놈을 가리켜 거만하다고 말한다구. 머리가 좋은 애들도 그렇다니까." (p.199)

 

지금은 어느 정도 나이가 들었으니까 너도 많이 변했겠지. <호밀밭의 파수꾼> 정도는 까맣게 잊었을 테구. 그나저나 너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었어. 홀든이 컬럼비아 대학에 다니는 카알 루스를 불러내어 그에게 전공이 뭐냐구 묻지. 혹시 '변태 성욕'이냐구. 물론 농담으로 물었던 거야. 너는 국어 시간마다 턱을 괴고 졸았고, 선생님은 그런 너를 여지없이 혼내곤 했었어. 그랬던 네가 어떻게 교수가 됐니? 뭘 가르쳐? 혹시 졸음학? 물론 농담이야.

 

그런데 말이야. 너는 정말 시력이 좋았어. 인정해. 인정한다구. 그걸로 대학에도 들어간 거잖아. 너는 아마 50미터 밖에서도 남의 답안지를 훔쳐볼 수 있었을 거야. 네가 만약 결혼을 했고 아이가 둘쯤 있다면 그 아이들에게는 그렇게 말하지는 않겠지만 말이야. 순전히 실력으로 합격했다고 허풍을 떨겠지. 너뿐만이 아냐. 다들 그렇더군. 그런 걸 생각하면 웬일인지 슬퍼져.

 

네가 그때 정말로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었다면 이 대목은 기억할 수 있겠지? 펜시 고등학교에서 쫓겨난 홀든이 아무도 몰래 집으로 들어와 잠들어 있는 여동생 피비를 깨웠던 장면 말이야. 그때 피비는 어린애였지만 오빠가 고등학교에서 또 쫓겨났다는 걸 단박에 알아차렸지. 수요일에 오기로 돼 있었던 오빠가 일찍 나타났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던 거야. 피비가 물었어. 오빠는 뭐가 되고 싶으냐구. 그때 홀든은 이렇게 말하지.

 

"나는 넓은 호밍밭 같은 데서 어린아이들이 다같이 어떤 게임을 하는 장면이 눈에 선하단다. 몇 천 명의 애들이 있을 뿐 주위엔 아무도 없어. 나 이외에는 어른이 하나도 없단 말이야. 나는 위험한 벼랑 끝에 서 있는 거지. 내가 하는 일이란, 누가 잘못해서 벼랑으로 굴러떨어지는 일이 생기면, 그애를 붙잡아주는 거지. 말하자면 애들은 어디를 달리고 있는지 보지도 않고 뛰잖니? 그런 때에 나는 어디선가 재빨리 달려나와서 그애를 붙잡아주는 거야. 하루 종일 그 일만 하는 거라구. 호밀밭에서 붙잡아주는 역할, 즉, 호밀밭의 파수꾼이지. 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 (p.248)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을 때면 까닭없이 울적해지곤 해. 그렇다고 슬프거나 울고싶은 건 아니야. 그런 거랑은 근본적으로 다르지. 뭐랄까,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된 기분이랄까. 아무튼 그래. 그리고 작문 야외수업을 하던 그날, 네가 했던 대답은 정말 더럽게 유치한 것이었지만 가끔 그날이 그리워지기도 해. 네 눈꺼풀에는 항상 50톤의 졸음이 매달려 있었지. 구역질이 날 정도였다구. 실제로 토할 뻔했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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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cktan6 2014-11-13 11:24   좋아요 0 | URL
아름다운 사진으로 남은 기억과 기록이
친구를 그리고, 선생님을 그리고, 솔나무를 그리고,
그리고 동화를 그려낸 것 같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꼼쥐 2014-11-14 14:15   좋아요 0 | URL
이렇게 과분한 칭찬의 댓글을 남겨주셔서 고맙습니다. ^^
그리고 기쁩니다.
 
기적의 튜즈데이 - 한 남자의 운명을 바꾼 골든 리트리버
루이스 카를로스 몬탈반.브렛 위터 지음, 조영학 옮김 / 쌤앤파커스 / 2013년 5월
평점 :
절판


아버지의 장례를 치른 후 나는 난생 처음 아버지에 대해 객관적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평생을 술에 의지하여 살았던, 어머니와 어린 자식들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함으로써 자신의 설 자리를 스스로 지워버렸던, 겁 많고 소심했던 나의 아버지를 조금쯤 이해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당신의 속마음이 어땠는지 확인할 길 없으니 순전히 나의 추측과 어림짐작만으로 당신의 삶을 평가하는 것이지만, 한 인간으로서 당신의 삶은 너무도 황량하고 부조리한 것이었다.

 

아버지가 살아 계실 제 당신의 삶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던 까닭은 아버지에 대한 나의 원망과 이해득실이 객관성과는 사뭇 멀어지게 했기 때문이었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가까운 사람일수록 자신의 주관에 의해 평가되기 일쑤이고, 자신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에게는 오히려 한없이 너그러워지는 법이다. 예컨데 내가 아버지에 대해 가졌던 감정은 얼마 되지 않는 가산을 탕진하고 경제적으로 한없이 무능했던 것에 대한 원망, 술과 폭력으로 가족 구성원 모두를 불안에 떨게 했던 것에 대한 원망, 자식들의 바람을 거들떠도 보지 않았던 것에 대한 원망 등 나의 기대치에 견주어 내려진 평가일 뿐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가 하는 문제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지금으로부터 20여년 전 어느 날 대낮부터 술에 만취한 아버지가 동네 파출소에서 난동을 부렸을 때,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가 아파트 3층에서 뛰어내렸을 때 우리 가족 중 어느 누구도 아버지의 돌발행동의 원인이 무엇인지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았었다. 다만 알콜성 치매로 인한 환청과 환시 현상이라는 의사의 진단을 굳게 믿었을 뿐이었다. 북한군이 쫓아온다며 파출소로, 그리고 아파트 난간으로 달아나다 급기야 뒷베란다 밑 잔디밭으로 뛰어내리기까지 했던 그 일련의 행위가 어쩌면 어린 나이에 참전했던 한국전쟁의 영향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왜 그 누구도 하지 못했던 것일까.

 

그 사건 이후로 근 20년 동안 이어진 아버지의 병원 생활은 가족들의 원망을 가중시켰으면 시켰지 가족들과의 관계를 좋게 하지는 않았다. 나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비로소 당신이 겪었을 전쟁의 참상과 그 잔혹했던 현장을 목도함으로써 당신이 겪게된 트라우마에 대해, 평생을 두려움과 공포 속에서 살아야 했던 당신의 삶에 대해 조금쯤 이해하게 되었다.

 

"전쟁은 그런 것이다. 추악하고 폭력적이며 끝내는 깊은 상처를 남긴다. 죽음은 삶을 더욱 부각하므로 일상보다 더 현실적일 수도 있다. 죽음의 존재에 다가갈수록 우리는 삶의 맥박을 더 강하게 느낄 수밖에 없다. 이라크에서는 군의 결정에 따라 매일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나와 내 부하들의 결정 때문에 죽은 사람도 있다. 그리고 나는 매일매일 그 위력과 책임이 혈관 속에서 꿈틀대는 걸 느꼈다." (p.325)

 

<기적의 튜즈데이>는 라틴계 미국인인 루이스가 이라크전에서 부상을 입고 복귀한 후 겪게되는 처절한 트라우마와 도우미견 '튜즈데이'로 인해 치유되는 과정을 기록한 책이다. 겉보기에는 그렇다. 그러나 이 책의 핵심은 다른 데 있다. 전쟁터에서 실제로 전쟁을 수행하는 병사와 이를 지시하고 감독하는 고위층간의 상반된 인식과 전쟁에서 부상을 입고 복귀한 상이용사들의 처절한 삶과 일반인들의 차가운 시선이 그것이다.

 

저자인 루이스도 그랬다. 환각과 악몽, 편두통과 공황발작이 일상을 지배했고, 눈을 감으면 널브러진 시체들이 보이고 아이들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자신을 암살하려 했던 남자의 증오 가득한 눈동자와 자살폭탄 테러범의 마지막 얼굴이 그의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음료수 캔만 봐도 사제폭탄인 것만 같아 경기를 일으켰고, 직장생활은커녕 이웃과의 대화나 가벼운 나들이조차 불가능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가벼운 부상처럼 보였기에 가족들조차 그를 이해하지 못했다. 사랑하던 아내가 떠나고 부모마저 등을 돌리자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는 생각도 했다. 국가에서도 충분한 지원을 받지 못하고 희망 없는 나날을 술에 의지한 채 버텨가던 중 튜즈데이라는 기적을 만났다. 그리고 기적과 같은 치유가 시작되었다.

 

내가 태어나기도 한참 전, 아버지는 20대 초반의 어린 나이로 전쟁터에 나갔다. 낙동강 전투에 참전했었다는 이야기를 형을 통하여 어렴풋이 들었다. 형도 아마 국가 유공자 등록을 위해 서류가 필요했던 까닭에 알게 되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그때의 기억을 가족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고, 우리들 중 누구도 묻지 않았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아버지가 의지할 수 있었던 유일한 위로는 술이 아니었을까 싶다. 가장 가까워야 할 가족들조차 아버지의 삶을 이해하지 못했고, 그 무관심과 냉대는 당신이 겪었을 트라우마와 함께 평생을 지고 갈 짐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한 달. 나는 여전히 문득문득 병원비를 생각하고, 가끔 의무감으로 들렀던 병원 복도를 떠올리고, 병원 침대에 뉘어진 당신의 앙상한 몸을 생각한다. 왜 나는 아버지가 살아계셨던 그 긴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당신을 이해하려 들지 않았던 것일까. 자책보다는 진한 아쉬움이 가슴을 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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