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의 튜즈데이 - 한 남자의 운명을 바꾼 골든 리트리버
루이스 카를로스 몬탈반.브렛 위터 지음, 조영학 옮김 / 쌤앤파커스 / 2013년 5월
평점 :
절판


아버지의 장례를 치른 후 나는 난생 처음 아버지에 대해 객관적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평생을 술에 의지하여 살았던, 어머니와 어린 자식들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함으로써 자신의 설 자리를 스스로 지워버렸던, 겁 많고 소심했던 나의 아버지를 조금쯤 이해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당신의 속마음이 어땠는지 확인할 길 없으니 순전히 나의 추측과 어림짐작만으로 당신의 삶을 평가하는 것이지만, 한 인간으로서 당신의 삶은 너무도 황량하고 부조리한 것이었다.

 

아버지가 살아 계실 제 당신의 삶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던 까닭은 아버지에 대한 나의 원망과 이해득실이 객관성과는 사뭇 멀어지게 했기 때문이었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가까운 사람일수록 자신의 주관에 의해 평가되기 일쑤이고, 자신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에게는 오히려 한없이 너그러워지는 법이다. 예컨데 내가 아버지에 대해 가졌던 감정은 얼마 되지 않는 가산을 탕진하고 경제적으로 한없이 무능했던 것에 대한 원망, 술과 폭력으로 가족 구성원 모두를 불안에 떨게 했던 것에 대한 원망, 자식들의 바람을 거들떠도 보지 않았던 것에 대한 원망 등 나의 기대치에 견주어 내려진 평가일 뿐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가 하는 문제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지금으로부터 20여년 전 어느 날 대낮부터 술에 만취한 아버지가 동네 파출소에서 난동을 부렸을 때,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가 아파트 3층에서 뛰어내렸을 때 우리 가족 중 어느 누구도 아버지의 돌발행동의 원인이 무엇인지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았었다. 다만 알콜성 치매로 인한 환청과 환시 현상이라는 의사의 진단을 굳게 믿었을 뿐이었다. 북한군이 쫓아온다며 파출소로, 그리고 아파트 난간으로 달아나다 급기야 뒷베란다 밑 잔디밭으로 뛰어내리기까지 했던 그 일련의 행위가 어쩌면 어린 나이에 참전했던 한국전쟁의 영향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왜 그 누구도 하지 못했던 것일까.

 

그 사건 이후로 근 20년 동안 이어진 아버지의 병원 생활은 가족들의 원망을 가중시켰으면 시켰지 가족들과의 관계를 좋게 하지는 않았다. 나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비로소 당신이 겪었을 전쟁의 참상과 그 잔혹했던 현장을 목도함으로써 당신이 겪게된 트라우마에 대해, 평생을 두려움과 공포 속에서 살아야 했던 당신의 삶에 대해 조금쯤 이해하게 되었다.

 

"전쟁은 그런 것이다. 추악하고 폭력적이며 끝내는 깊은 상처를 남긴다. 죽음은 삶을 더욱 부각하므로 일상보다 더 현실적일 수도 있다. 죽음의 존재에 다가갈수록 우리는 삶의 맥박을 더 강하게 느낄 수밖에 없다. 이라크에서는 군의 결정에 따라 매일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나와 내 부하들의 결정 때문에 죽은 사람도 있다. 그리고 나는 매일매일 그 위력과 책임이 혈관 속에서 꿈틀대는 걸 느꼈다." (p.325)

 

<기적의 튜즈데이>는 라틴계 미국인인 루이스가 이라크전에서 부상을 입고 복귀한 후 겪게되는 처절한 트라우마와 도우미견 '튜즈데이'로 인해 치유되는 과정을 기록한 책이다. 겉보기에는 그렇다. 그러나 이 책의 핵심은 다른 데 있다. 전쟁터에서 실제로 전쟁을 수행하는 병사와 이를 지시하고 감독하는 고위층간의 상반된 인식과 전쟁에서 부상을 입고 복귀한 상이용사들의 처절한 삶과 일반인들의 차가운 시선이 그것이다.

 

저자인 루이스도 그랬다. 환각과 악몽, 편두통과 공황발작이 일상을 지배했고, 눈을 감으면 널브러진 시체들이 보이고 아이들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자신을 암살하려 했던 남자의 증오 가득한 눈동자와 자살폭탄 테러범의 마지막 얼굴이 그의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음료수 캔만 봐도 사제폭탄인 것만 같아 경기를 일으켰고, 직장생활은커녕 이웃과의 대화나 가벼운 나들이조차 불가능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가벼운 부상처럼 보였기에 가족들조차 그를 이해하지 못했다. 사랑하던 아내가 떠나고 부모마저 등을 돌리자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는 생각도 했다. 국가에서도 충분한 지원을 받지 못하고 희망 없는 나날을 술에 의지한 채 버텨가던 중 튜즈데이라는 기적을 만났다. 그리고 기적과 같은 치유가 시작되었다.

 

내가 태어나기도 한참 전, 아버지는 20대 초반의 어린 나이로 전쟁터에 나갔다. 낙동강 전투에 참전했었다는 이야기를 형을 통하여 어렴풋이 들었다. 형도 아마 국가 유공자 등록을 위해 서류가 필요했던 까닭에 알게 되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그때의 기억을 가족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고, 우리들 중 누구도 묻지 않았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아버지가 의지할 수 있었던 유일한 위로는 술이 아니었을까 싶다. 가장 가까워야 할 가족들조차 아버지의 삶을 이해하지 못했고, 그 무관심과 냉대는 당신이 겪었을 트라우마와 함께 평생을 지고 갈 짐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한 달. 나는 여전히 문득문득 병원비를 생각하고, 가끔 의무감으로 들렀던 병원 복도를 떠올리고, 병원 침대에 뉘어진 당신의 앙상한 몸을 생각한다. 왜 나는 아버지가 살아계셨던 그 긴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당신을 이해하려 들지 않았던 것일까. 자책보다는 진한 아쉬움이 가슴을 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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