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제의 음산하고 소란스러웠던 날씨에 대해 속죄라도 하려는 듯 어제는 맑고 쾌청하며 조용했다. 정말 그랬다. 누군가 낮은 목소리로 나를
불러도 불에 데인 듯 화들짝 놀랄 것처럼. 나는 무작정 떠오르는 추억의 한 장면을 소재로 '만약에 이러이러 했더라면...'하는 식의 상상에
빠져들었다. 지난 과거는 언제나 '만약에'로 시작되는 상상 속의 소설 한 편을 만들어내곤 한다. 그 때문에 무료한 시간이 가볍게 흘러가고는
하지만. 그러다 문득 지금 이 순간에 내가 선택하지 않은 어떤 일, 예컨대 아버지의 장례식에 조문을 왔던 친구에게 감사 메일을 보내야겠다
생각하면서도 차일피일 미루고만 있었던 것이 미래의 어느 순간 지금처럼 조용한 순간을 비집고 들어와 '만약에'로 시작되는 소설이 되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그때도 물론 상상 속에서 펼쳐지는 이야기이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가끔 레베카는 이런 생각을 했다. 인생의 길이 갈라졌던 그곳에 되돌아가서 가지 않았던 길을
선택할 수도 있지 않을까? 물론 지금은 처음에 선택한 길의 종점에 이른 시점이기는 하지만. 속임수 같았다. 자기 케이크를 다 먹고 남의
것마저 욕심내는 듯했다." (p.268)
앤 타일러의 소설 <인생>을 읽고 있노라면 삶은 한없이 조용하고 따뜻하게 흘러갈 것만 같은 착각에 빠지게 된다. '오래 전
우리가사랑했을 때'라는 부제가 붙은 이 소설에서 작가는 특별하지 않은 한 여인의 보편적인 삶을 보여줌으로써 우리가 인생에서 소중하게 여겨야 할
것이 과연 무엇인지,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다 해도 인생에는 스스로 발견할 수 있는 행복들이 얼마나 많은 것인지 깨닫게 한다.
소설에서 주인공 레베카는 대가족을 이끄는 안주인으로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하루하루를 보낸다. 전도 유망한 대학생이었던 레베카는 '오픈
암스'의 주인이었던 조를 만남으로써 그녀 인생의 모든 것이 바뀐다. 같은 동네에서 어릴 적부터 같이 자랐던 '윌'과 결별하고 딸 셋이 딸린
이혼남 '조'와 만난 지 2주만에 결혼한다. '조'와 레베카 사이에서 딸 한 명이 더 태어났고 시어머니가 죽은 후에는 홀로된 숙부까지
떠맡는다. 열다섯 살의 나이 차가 나는 남편 '조'가 결혼한 지 6년만에 교통사고로 갑작스럽게 죽는 바람에 레베카는 딸 넷과 숙부, 어린
시동생을 돌보는 처지가 되었다. 장성한 딸들이 모두 결혼하고 집에는 이제 숙부와 레베카 둘만 남았다. 숙부는 이제 100세를 눈앞에 두게
되었고 레베카도 여러 명의 손주를 둔 할머니가 되었다.
남편의 사업체였던 '오픈 암스'는 사람들에게 파티 음식과 장소를 제공하고, 파티의 성격에 맞게 '오픈 암스'를 장식하고 파티의 진행도 맡는
일을 한다. 레베카는 파티 예약에서부터 파티가 끝나는 순간까지 모든 것을 관리한다. 첫째 딸 비디와 함께 파티 의뢰인의 음식을 준비하고,
필요할 때마다 레베카를 찾는 딸과 사위들, 그리고 어린 손주들을 응대하고, 몸이 편치 않은 숙부도 돌보아야 한다. 끝이 없어 보이는 일상에
지쳐버린 레베카. 그녀는 어느 날 시동생에게 숙부를 맡기고 고향에서 홀로 사는 친정 어머니를 찾는다.
"어린 시절을 보낸 방에서 옷을 벗고 치마 잠옷을 걸치면서 과거의 자기가 이 모습을 봤다면 얼마나
숨막혔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예전의 레베카는 거울에 비친 이 여자를 몰라보겠지. 옥수수 수염 같은 머리칼이며, 아무렇게나 빚어진 듯한
얼굴하며. 예전의 레베카는 조심성 없이 발을 질질 끌며 침대로 다가가는 이 여자를 모른다 하리라." (p.118)
우리는 이따금 가족 행사에서 오랜만에 만난 조카를 보며, 우연히 나간 동창회에서 친구의 얼굴에 깊게 패인 주름과 처진 피부를 보면서, 또는
거울 속에 비친 낯선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의 지난 시간을 압축 파일로 배달 받은 것처럼 당혹스러운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그때의 느낌은
쓸쓸하거나 공허하다. '겨우 이거였나?' 하는 자조 섞인 물음이 저절로 튀어나오는 순간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삶이 계속되는 이유는
자신의 과거를 공유한 가족들의 사랑과 같은 시간을 지나온 수많은 사람들의 지지 덕분이 아닐까 싶다.
레베카는 어린 시절을 함께 보냈고, 결혼까지 생각했던 '윌'에게 전화를 한다. 그는 젊은 아내와 이혼하고 현재는 혼자 살고 있다. 그
사실만으로도 레베카는 한때 사랑했던 과거의 어느 순간으로 되돌아가 새로운 삶을 새로 시작할 수 있지나 않을까 기대에 부푼다. 레베카의 가족을
'윌'에게 소개하고, 레베카도 '윌'의 전부인과 함께 살고 있는 '윌'의 딸을 만나지만 그녀는 결국 '윌'이 결코 되돌릴 수 없는 과거의 남자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소설은 파피 숙부의 100세 생일을 맞아 가족 모두가 모인 성대한 가족 파티의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파피
숙부의 이 말은 인상적이다.
"난 늘 조에게 '봐라. 똑바로 봐. 진정한 인생 같은 건 없단다. 어떻게 끝내든 자기가
마무리짓는 게 진정한 인생이야. 갖고 있는 걸로 최선을 다할 뿐이지.'라고 말했지." (p.363)
소설은 늘 '만약에'로 시작된다. 한가하고 무료한 순간, 틈새를 비집고 들어와 시작되는 소설. 다른 것에 밀려 내가 선택하지 않았던
과거의 어느 시점을 배경으로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인생이 펼쳐지는 것이다. 다만 이것은 누구나의 소설, 결말 없는 삶의 유희가 아닌가.
그림 속의 인물처럼 생명이 없는, 오직 상상의 세계에서만 펼쳐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