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형제들에게 전화를 거네 민음사 모던 클래식 72
요나스 하센 케미리 지음, 홍재웅 옮김 / 민음사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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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창피한 일이지만 이 책이 말하는 바를 파악할 수 없다. '말하는 바'라고 하기 보다는 이 소설의 이야기 전개, 소설의 개요조차 감이 오지 않았다. 이건 숫제 열린 결말을 추구하는 프랑스 소설의 모호성보다 더 희미하게 다가왔다. 이런 소설을 만나본 게 언제였는지 모르겠다. 독서에 있어서 만큼은 나는 간혹 지나친 호승심을 느끼곤 하는데, 이를테면 작가가 독자와 숨바꼭질을 하는 것처럼 작품 속에서 자신의 의도를 확인할 수 있는 비밀의 열쇠를 아무리 꽁꽁 숨겨두었다 할지라도 나는 기필코 그 열쇠를 찾아내어 작가를 엿먹이고 말겠다는 결연한 다짐을 하는 것이다. 사실 그 싸움에서 내가 승리했다고 할지라도 누가 크게 기뻐하거나 알아주는 것도 아니지만 나는 그때마다 말할 수 없는 희열을 느끼곤 한다. 단지 그 하나의 이유만으로 나는 별 도움도 되지 않는 책을 이해가 될 때까지 반복하여 읽는 경우가 있다. 시간을 무한정 낭비하면서 말이다.

 

내가 이 책을 단 한 번 읽었을 때는 '이게 뭥미?' 하는 느낌밖에 없었다. 정말 그랬다. 그렇다고 이 얇디 얇은 책을 설럴설렁 읽었던 것도 아니다. 하나하나의 단어에 대해 어떤 상징성이나 함축적 의미를 파악하려는 나름의 시도도 없지 않았었다. 그러나 시간이 날 때마다 짬짬이 읽어서인지 소설을 이루는 전체적인 맥락이나 구조를 전혀 파악할 수 없었다. 젠장, 나는 작가에게 지고 말았다는 열패감을 감출 수 없었다. 책이 얇았으니 망정이지 하마터면 나는 분을 이기지 못해 폭발했을지도 모른다.

 

책의 처음부터 천천히 다시 읽어나갔다. 간혹 의미를 두지 않고 넘어갔던 문장들이 처음 보는 낯선 사람처럼 내 시선을 붙잡았다. 책을 처음 읽었을 때보다 시간은 더 걸렸으리라. 그러나 여전히 감이 오지 않았다. '이것이다!' 생각할 만한 강한 느낌이 없었다. 근 일주일 동안 책의 순서를 신경쓰지 않고 제멋대로 읽었다. 예컨대 '1부 샤비'를 읽고 '4부 카롤리나'를 읽는다거나 '2부 알렘'을 읽은 후 '5부 튀라'를 읽는 식이었다. 때로는 '3부 발레리아'만 하루 종일 읽었다.

 

'뭔 책인데 그렇게 열심히 읽으세요?'하는 질문을 도대체 몇 번이나 받았는지... 사람들은 내가 이 책이 어찌나 재미있던지 책을 손에서 놓기가 못내 아쉬워서 그러는 줄 알았다. '그게 아니라 도통 뭔 내용인지 알 수 없어서 그래.', 변명할 수 없었다.

 

2010년 12월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타이무르 압둘와하브(Taimour Abdulwahab)라는 남성의 자살 폭탄 테러를 배경으로 쓰여졌다는 이 책은 이민 2세대인 작가에게도 각별한 작품인 듯했다. 전 세계에서 일상처럼 흔한 일이 되어버린 테러, 그와 함께 확산되는 인종차별주의와 이슬람 혐오주의, 그리고 암묵적으로 용인되는 백색테러 속에서 살아가야만 하는 소수자, 약자, 혹은 혐오 대상자의 불안과 공포, 그 밑바탕을 이루는 정신적 기조에 대해 주인공 아모르를 통해 작가는 말하고 싶었나 보다.

 

"아모르, 한 가지 기억해 둬. 나는 홀을 향해 걸어갔다. 증오는 증오로 멈춰지지 않는 법이야. 신문 1면에는 부서진 자동차와 접근 금지 테이프, 연기, 그리고 제목이 보였다. 증오는 오직 사랑으로만 극복될 수 있어. 이게 영원한 규칙이야." (p.41~p.42)

 

소설은 친구 샤비가 주인공 아모르에게 전화를 거는 것으로 시작된다. 술에 취한 채 클럽에서 춤을 추고 있던 새벽에 말이다. 대화의 내용은 논리를 벗어난 듯 모호하다. 마치 술에 취한 두 사람이 각자 상대방의 얘기는 배제한 채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하는 것처럼. 주인공은 곧 이어 알렘의 전화를 받고, 또 발레리아의 전화를... 주인공이 전화를 받는 대상뿐만 아니라 전화를 받는 장소 또한 계속해서 바뀐다. 클럽에서 집으로 집에서 다시 테러 현장으로 시내로, 다시 집으로... 그러나 주인공의 동선 역시 구체적이지 않다. 실제와 의식 사이의 어느 한 지점인 듯, 현실과 의식이 한데 뒤섞인 플라즈마의 상태인 것처럼 혼란스럽다.

 

"나는 그의 머리색을 보며 이렇게 생각했다 : 이걸로 충분해. 그래서 나는 가까이 다가갔다, 나의 걸음은 납이었고, 나의 눈은 네온이었고, 나의 팔은 비소였다. 그리고 경찰들이 등지고 서 있는 그 남자는 궁지에 몰려 있었다. 그는 나의 형제였다." (p.117~p.118)

 

우리가 사는 세상에 대해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미래에 대한 예측도, 적과 친구의 구별도, 심지어 이곳과 저곳의 경계 또한 구별하기 어렵다. ‘주류 사회’에 속한 이민자의 삶은 그 경계를 더 모호하게 한다. 공포와 경계심이 상존하기 때문이다.

 

"네 발을 지녔건, 날개가 달렸건, 비늘이 있건, 아니면 털이 있건 간에 개개의 생명의 고유함에 대해 모두가 존중받아야 한다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P.107)

 

작가는 그 모든 상황을 전통적인 서사적 기법으로 보여줄 수는 없다고 판단했는지도 모른다. 주인공 아모르가 처한 상황과 그 주변 인물들의 심리를, 그리고 주인공이 스쳐가는 익숙한 환경을 주인공 아모르의 의식이 아닌, 작가 자신의 의식을 통과하여 흐르도록 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 소설을 '나'(아모르)에 의해 전개되는 1인칭 시점이 아닌, 작가 자신의 의식을 통과하여 배출되는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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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의 그림자 - 2010년 제43회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작 민음 경장편 4
황정은 지음 / 민음사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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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하지 않은 일이지만 방금 읽은 책의 줄거리는커녕 주인공의 이름조차 생각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머릿속은 성긴 부분이 점점 늘어만 가고 급기야는아무것도 없이 텅 빈 듯한 느낌, 무엇인가 떠올리기 위해 생각을 하면 할수록 점점 더 하얗게 변해가는 경험은 매번 낯설고 당혹스럽기만 합니다. 책에서 받는 이러한 느낌은 독자를 혼란스럽게 하려는 작가의 의도라기보다는 오히려 독자 개개인의 개별적인 독서 경험 내지는 개개인의 정서적 반영에 의한 것이겠지요. 이를테면 나는 황정은의 소설 <백의 그림자>를 읽고 어떤 알맹이도 손에 쥐지 못한 채 오롯이 따뜻한 느낌만 받았더랬습니다. 마치 내가 공들여 책을 읽었던 것이 아니라 그저 한 번 진하게 껴안았던 것처럼 말이죠. 아, 이것도 말이 되지 않는군요. 책이 살아 있는 생명체도 아닌데 체온을 가졌을 리 만무하니까요. 아무튼 나는 책에서 받은 느낌이 다른 무엇보다 소중할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을 품게 되었고, 그 느낌이 금세라도 사라질까봐 서둘러 리뷰를 쓰게 된 것입니다.

 

"은교 씨, 나는 특별히 사후에 또 다른 세계가 이어진다고는 생각하지 않고요, 사람이란 어느 조건을 가지고 어느 상황에서 살아가건, 어느 정도로 공허한 것은 불가피한 일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인생에도 성질이라는 것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본래 허망하니, 허망하다며 유난해질 것도 없지 않은가, 하면서요. 그런데 요즘은 조금 다른 생각을 하고 잇어요. 어떤 생각을 하느냐고 나는 물었다. 이를테면 뒷집에 홀로 사는 할머니가 종이 박스를 줍는 일로 먹고 산다는 것은 애초부터 자연스러운 일일까, 하고. 무재씨가 말했다. 살다가 그러한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은 오로지 개인의 사정일까, 하고 말이에요. 너무 숱한 것일 뿐, 그게 그다지 자연스럽지는 않은 일이었다고 하면, 본래 허망하다고 하는 것보다 더욱 허망한 일이 아니었을까, 하고요." (P.144)

 

소설의 배경이나 이야기의 뼈대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처음부터 말이지요. 그림자가 일어선다는 이야기, 일어선 제 자신의 그림자를 쫓아 한참이나 따라간다는 이야기, 나는 예전에 읽었던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를 떠올렸습니다. 그리고 이 소설의 주인공인 은교와 무재가 기척도 없이 등장합니다. 두 사람은 도심 재개발 사업으로 철거를 목전에 둔 낡은 전자상가에서 근무합니다. 별다른 설명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곳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들은 우리가 사는 도시와는 전혀 다른 부류의, 도심 속의 섬주민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소설은 자세한 묘사보다는 오히려 간결한 설명과 대사 위주로 이야기를 전개시키고 있습니다. 게다가 은교와 무재가 나누는 대화는 어휘의 반복을 통한 운율감과 상징적인 특정 단어를 강하게 부각시킴으로써 주인공의 심리와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길게 이어지는 산문시를 읽고 있는 듯한 느낌을 갖게 합니다. 그리스의 서사시 호메로스나 일리아스를 읽는 것처럼 문장 하나하나에서 정제된 아름다움과 여백을 느끼게 되는 것도 그런 까닭입니다.

 

"은교 씨, 뭘 그렇게 걱정하나요, 너무 어두워서요, 밤이니까 어둡죠, 그게 아니고요, 너무 어두워서, 정말로 밝은 곳에 당도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왜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해요, 말은 안 되는데요 무재 씨, 자꾸자꾸 드네요, 그런 생각이, 하고 대화를 나누다가 전방이 나루터임을 알리는 팻말의 반사광을 보았다." (P.163)

 

이상하게도 은교와 무재의 일상에서는 도시인의 맹목적성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를테면 언제쯤 결혼을 하고, 얼만큼의 돈을 모아 어떤 집을 사고, 몇 명의 아이를 낳아 어떻게 키우겠다는 식의 흔한 목적의식 말이지요. 그들의 하루하루는 그저 물 흐르듯 그렇게 흘러갈 뿐입니다. 노래 가사 속 '콩밭 매는 아낙'의 처지가 안쓰러워 '칠갑산'을 차마 부를 수 없다는 무재와 그만큼이나 순수한 심성을 지닌 은교의 연애담은 얼핏 한 편의 동화를 보는 듯 따뜻합니다. 그러나 스러져가는 전자상가에서 생계를 꾸리고 있는 은교와 무재를 둘러싼 환경은 비정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주인공의 따뜻한 심성과 냉혹한 도시 생태계의 비정함이 극명하게 대비됩니다.

 

"문턱에 코를 댄 채로 나뭇결이라고 진작되는 어두운 얼룩을 들여다보며 젖은 듯 마른 듯한 문턱 냄새를 맡고 있었다. 차라리, 라고 생각했다. 어두운 것이 되면 이미 어두우니까, 어두운 것을 어둡다고 생각하거나, 무섭다고 생각하는 일은 없지 않을까, 아예 그렇지 않을까, 어둡고 무심한 것이 되면 어떨까, 그렇게 되고 나면 그것은 뭘까, 뭐라고 부를 수 있을까, 아 모르겠다, 모르겠어, 모르도록 어두워지자, 이참에, 라고 생각하며 눈을 뜨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P.90)

   

작가가 생각하는 도시 소시민의 삶은 절망과 무력감 속에 묶여 제 자신의 그림자, 자신이 만든 어둠에 하염없이 이끌려 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들이 겪는 실존적 위기는 익숙한 어둠과 자포자기의 생활방식, 희망이 없는 현실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메르스 사태가 벌써 두 달째를 맞고 있습니다. 무능한 정부 때문에 빚어진 국민들의 극심한 불안과 공포, 곳곳에서 예견되는 암울한 미래, 내 이웃의 지금 모습은 소설 속 은교와 무재의 모습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쩌면 다들 제 자신의 그림자를 쫓아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런 목적도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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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의 가장 완벽한 순간
애너 퀸들런 지음, 유혜경 옮김 / 뜨인돌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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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졸업과 동시에 들어갔던 회사를 그만두고 지금은 모 결혼정보회사에서 근무하는 친구가 있습니다. 다니던 회사에서 명예퇴직이나 문책성 해고를 당한 것도 아닌데 친구는 어느 날 갑자기 냅다 사표를 던지고는 두어 달 동안 배낭여행을 떠났었지요. 한 가정을 책임지는 가장으로서 여간한 배짱이 아니고서는 감히 할 수 없는 일이었기에 그와 안면이 있는 친구들은 다들 그를 부러워했던 것 같습니다. 개중에는 물론 미친 거 아니냐, 비웃는 친구도 더러 있었지만 말이지요. 그러던 친구가 어느 날 돌연 까맣게 탄 몸으로 돌아와서는 다시 취직했노라 연락을 했고, 모 결혼정보회사의 명함을 보란 듯이 돌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선택한 회사나 직책이 모두 그의 전공이나 경력과는 무관한 듯 보였었기에 그 자리에 참석했던 친구들은 다들 뜨악한 표정으로 그의 명함을 받아들었습니다.

 

그와의 만남이 있은 지 얼마 후  그의 성격을 잘 안다고 자신했던 우리들은 그가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시 사표를 던질 거라는 데 의견이 일치했었고 다만 그 기간이 한 달, 두어 달, 길어야 일 년 등으로 분분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예상과는 달리 그는 지금까지도 그 회사에 출근하고 있습니다. 전혀 예상에 없던 일이었지요. 이따금 그 친구와 만나는 자리에서 우리는 영 멋쩍어 어쩔 줄을 몰라 하다가도 농담삼아 "혹시 재혼 상대자가 필요하면 너한테 꼭 연락할게." 한마디 툭 내뱉곤 합니다. 그러나 친구의 말을 들어보면 요즘의 젊은이들은 결혼에 대한 생각도, 배우자를 선택하는 조건도 우리가 젊었을 때와는 판이하게 달라져 있음을 느끼게 했습니다.

 

친구의 말을 빌리자면 초혼이든 재혼이든 일단 결혼정보회사의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들은 모두 소설 속에서나 나옴직한 어떤 순수한 사랑과는 거리가 멀다고 합니다. 상대방이 본인들이 요구하는 일정 조건에 맞지 않는다면 만나는 것 자체도 꺼려한다는 것이지요. 한번 선을 뵌다고 얼굴이 닳는 것도 아니지만 시간과 돈의 낭비라는 생각이 팽배하여 만나볼 상대방에 대하여 꼬치꼬치 캐묻기 일쑤이고 미안한 기색도 없이 번번이 퇴짜를 놓곤 한답니다. 하여, 있지도 않은 사실을 꾸며내거나 과장하여 말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는 말을 친구로부터 들었습니다.

 

나는 친구와의 대화에서 문득 애너 퀸들런의 <내 생의 가장 완벽한 순간>이 떠올랐습니다. 한 권의 책이라고 말하기도 어려운, 브로셔나 리플렛이라고 말하는 게 더 어울릴 듯한 아주 얇은 책이지요. 그러나 그 책의 내용마저 단순하고 가볍기 이를 데 없다고 말하는 건 아닙니다. 애너 퀸들런의 또다른 책 <어느 날 문득 발견한 행복>만큼 가볍지만 결코 가볍게 읽을 수 없는 책입니다.

 

"완벽해지기 위해 정말로 해야 할 일은 주로 당신이 살고 있는 시간과 장소의 시대적인 흐름을 읽고, 그 시대사조가 주문하거나 요구하는 것에서 최고가 되는데 필요한 가면을 쓰는 것입니다. 그것만 하면 됩니다. 이런 요구들은 물론 시시각각 변하지만, 당신의 머리 회전이 빠를 때는 그것들을 읽을 수도 있고 필요한 흉내를 낼 수도 있을 테지요."

 

어떻습니까. 책에서 작가가 말하려는 내용이 대충 감이 오지요? 작가는 학창시절 매사에 무엇 때문에 그렇게 열심이었나 자신에게 묻습니다. 어려서는 결코 대답할 수 없었던 이 질문에 대해 작가는 이제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고 합니다. 완벽해지기 위해서. 단순히 그것뿐입니다. 누군가의 기대에 자신을 맞추기 위해서, 자신이 속한 사회나 조직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 그것이 나 자신인 양 착각하면서 부단히 노력했었다는 사실을 작가는 깨닫습니다. 그것이 과연 작가 혼자만의 경험이었을까요? '인간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는 라캉의 말을 굳이 인용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어느 정도의 나이가 되면 순간순간 되묻게 됩니다.

 

"터무니없고 사람을 지치게 하는 완벽함을 추구하는 일을 포기해 보세요. 그것은 삶의 너무 많은 부분에서 우리를 집요하게 쫓아다닙니다. 우리 자신을, 우리의 진정한 자아를, 우리의 변덕과 약점과 미지의 세계로의 영웅적인 도약을 의심하게 하고 헐뜯게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이런 완벽함에 대한 추구입니다. 쉰이나 예순 살이 되면 우리는 대부분 대여섯 살 때의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충분히 끔찍한 일이지요"

 

나는 아직 미망에서 깨어나지 못한 까닭에 작가의 말처럼 지난 과거가 충분히 끔찍하다고는 생각되어지지 않지만 ,'무엇 때문에?' 나도 모르게 혼자 묻는 횟수가 점차 늘어나는 게 사실입니다. 그것은 내 삶을 부정하고 언젠가 본전 생각이 나게 되는 순간이 도래할 것이라는 슬픈 예감, 또는 그 전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작가는 <어느 날 문득 발견한 행복>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영혼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영혼을 생각하며 사느니 이력서에 자랑스럽게 쓸 일을 하는 게 쉽겠지요. 하지만 추운 겨울날, 이력서는 위로가 되지 못합니다.' 나는 오직 마지막 한 문장에 눈길이 머물렀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추운 겨울날, 이력서는 위로가 되지 못한다'는 그 말이 나를 한동안 붙들었던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자녀들에게 삶의 여정 내내 자신을 보호하는 등딱지로 몸에 익힌 습관과 매너리즘의 혼합물, 기대감과 두려움의 혼합물과는 전혀 다른 당신의 참된 자아를 보여줄 수 있다면, 당신은 그들에게 편협하고 인색한 이 세상이 기대하는 것에 전혀 신경을 쓰지 말라고 가르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어느 때부턴가 내 삶이 잘못된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감지했습니다. 그러나 겁 많고 용기가 부족했던 나는 '기대감과 두려움의 혼합물'을 내 참된 자아인 양 착각하며 살고 있습니다. 아니, 그렇게 나 스스로를 세뇌시키며 살고 있다고 하는 게 옳은 표현일지도 모릅니다. 내 삶에 한없이 비겁했던 나였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감히 아들에게 '편협하고 인색한 이 세상이 기대하는 것에 신경을 쓰지 말라'고 충고하지 못합니다. 애너 퀸들런의 글을 읽고 있노라면 어쩌면 나의 비겁함이 아들에게 대를 이어 상속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아직 다가오지 않은 많은 후회가 언젠가 나를 삼켜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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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오미와 가나코
오쿠다 히데오 지음, 김해용 옮김 / 예담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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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1/10도 채 읽지 않았을 때, 나는 '이 책을 끝까지 읽어야 하나?' 고민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나는 "끝까지 읽을 수 있을까?' 하고 묻는 게 옳았을지도 모른다. 오랫동안 들춰내지 않았던, 일부러 피하고 외면했던 단어, 나는 그것을 정면으로 마주할 용기가 차마 나지 않았다. 마냥 피하고만 싶었던 그 단어를 책에서 확인했던 순간, 나는 갑자기 목이 턱 막혀와 숨을 쉬기조차 어려웠다. 성인이 된 지금까지도 나는 옆집에서 들려오는 아주 작은 소리의 말다툼에도 가슴이 쿵쾅쿵쾅 뛰고 금세 혈압이 높아지곤 한다. 어려서 겪었던 가정 폭력의 트라우마는 상당한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내 가슴속에서 지워지지 않은 채 시시때때로 나를 옥죄는 것이다.

 

"나오미는 이혼을 권할 생각이었다. 가정 폭력이 당사자들로만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은 부모님을 봐서 알고 있었다. 남자가 여자에게 휘두르는 폭력은 광기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며, 당사자들에게만 맡겨놓는다는 것은 방치나 다름없는 일이다." (p.45)

 

조금 솔직해질 필요가 있겠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나의 기분은 결코 유쾌하지 않은 것이다. 불행하게도 나는 아버지의 폭력과 어머니의 악다구니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기 때문이다. 적어도 도시로 전학을 하여 형과 함께 자취를 시작했던 중학교 2학년 전까지는. 그 시절 사흘돌이로 반복되었던 아버지의 폭력은 누구도 막지 못했다. 심지어 한 집에 같이 살았던 할머니도 어찌하지 못했다. 식구 중 형과 누나들은 모두 도시로 나가 있었고 집에 남아 있던 나와 여동생, 할머니와 엄마는 모두 아버지의 폭력 앞에서 속수무책 손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일단 아버지의 폭력이 시작되면 나와 여동생은 어떻게든 엄마를 보호하려 애쓰다가 그마저도 여의치 않으면 어디로든 아버지의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달아났다가 잠잠해졌다 싶으면 집으로 몰래 숨어들곤 했었다.

 

오쿠다 히데오의 신작 <나오미와 가나코>는 나도 모르게 떠오른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 인해 잔뜩 긴장한 채 손에 땀을 쥐고 읽어야만 했다. 500쪽에 가까운 제법 두꺼운 책이었지만 소설의 내용은 단 몇 줄로 요약이 가능할 듯한 명료한 줄거리의 이야기였다. 소설 속 주인공인 '오다 나오미'와 '시라이 가나코'는 둘도 없이 친한 친구 사이이다. 정의감이 넘치고 똑 부러지는 성격의 나오미와는 달리 가나코는 순종적이고 우유부단하다. 큐레이터를 꿈꿨지만 백화점 외판부 사원으로 들어가 VIP 고객들의 뒤치다꺼리나 하며 보내던 어느 날 결혼 후 전업주부로 있는 나오코의 집에 우연히 들렀던 나오미는 가나코의 몸에 난 멍자국을 보고서 남편으로부터 폭력에 시달린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나오미에게 가나코가 당한 폭력이 자신이 당한 것인 양 아프게 다가왔던 까닭은 가나코가 둘도 없이 친한 친구라는 이유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엄마가 아버지로부터 겪었던 폭력의 기억과 평생 고쳐지지 않는 폭력의 습관성에서 기인하는 바가 더 컸다. 나오미는 가나코에게 이혼이 최선이라며 이혼을 권하였지만 가나코는 남편 다쓰로가 혹시 자신의 친정에까지 해코지를 하지 않을까 두려워한 나머지 나오미의 권유를 거절한 채 남편의 폭력을 무기력하게 당하기만 한다. 결국 나오미와 가나코는 남편의 폭력에 대항해 '클리어런스 플랜(남편 제거 계획)'을 치밀하게 계획하고 이를 실천해간다.

 

'죽인다'는 말을 피하고 싶어서 '제거'라는 말로 바꾸기로 했다. 표현의 문제는 중요하다. 특별히 다쓰로를 죽이고 싶은 것은 아니다. 가장 좋은 것은 본인이 병사하거나 자살이라도 해주는 것이다. 그게 불가능하니까 차선책으로 이 쪽을 제거하는 것이다." (p.125)

 

남편을 살해하고, 시신을 운반하여 암매장하고, 남편이 마치 실종된 것처럼 조작하기까지 모든 상황이 절묘하게 맞물리며 유리하게 진행되어가자 나오미는 이 계획이 마치 운명 같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하던 가나코도 자신이 남편의 폭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은 남편을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하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는 데 동의하면서 적극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들은 남편 다쓰로를 살해하고 암매장해 단순 실종으로 처리하려고 했다. 남편과 닮은 중국인을 매수하여 돈을 인출하게 하고 다쓰로의 여권을 들고 출국하도록 한다. 그러나 완전범죄라고 믿었던 그들의 계획은 가나코의 시누이인 요코가 오빠의 실종 사건을 흥신소에 의뢰하면서부터 그 허점들이 하나 둘 드러나게 된다. 나오미와 가나코의 위기는 그때부터 시작된다.

 

"가나코는 자신들의 안이한 생각을 후회했다. 실행하기 전에는 완벽한 계획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실행에 옮기자 허술한 부분이 계속 나타났다. 세상은 그리 만만치 않다. 이건가. 아니,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겠다. 자신에게 확실한 것 한 가지는 죄를 인정할 마음이 조금도 없다는 점이다. 후회하지도 않는다. 가나코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p.423)

 

저항할 수 없는 폭력은 그 당사자에게 평생 잊혀지지 않는 트라우마를 남긴다. 오랫동안 병원 신세를 졌던 아버지는 지난해 당신의 그 길고 지난했던 생을 마감하셨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그 끔찍했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소설 속 주인공인 가나코의 살의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런 이유였다. 고백하건대 어려서의 나도 아버지에 대한 증오가 살의로 변질되었던 적이 얼마나 많았던지... 

 

"무엇보다 살인 사건이 일어났을 때 사실은 범인인, 피해자인 이웃이 태연한 얼굴로 텔레비전 인터뷰에서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별 문제 없었던 것 같은데요' 하고 대답하는 장면도 많은 걸 보면 인간이란 원래 이렇게 의뭉을 잘 떠는 생물인지도 모른다." (p.270)

 

오쿠다 히데오도 이 작품을 쓰면서 얼마나 많이 고민했을까 생각했다. 폭력의 당사자인 다쓰로를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지게 한다는 것, 그것도 자신의 부인에 의해서 살해되도록 한다는 것은 폭력의 부당함을 넘어서 또 다른 범죄로 이어지도록 만드는 것이기에 작가도 고민이 깊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와 같은 가정 폭력의 피해를 경험했던 한 사람으로서 작가에게 고마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내가 물려받은 모든 것을 내 대에서 단절시킬 수 있는 부모가 가장 좋은 부모'라는 말을 읽은 적이 있다. 나의 아버지도 그러셨을까 싶다. 나는 아내에 대한 폭력은커녕 아버지 살아 생전 그렇게 좋아하셨던 술도 입에 대지 않는다. 아무리 큰 죄인이라 할지라도 한 사람의 생명을 함부로 거두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아야 하겠지만 작가의 생각은 단호했다. 현실이 아닌 소설 속의 이야기였기에 나는 작가의 결단에 더 깊은 고마움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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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동사니
에쿠니 가오리 지음, 신유희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3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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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대한 느낌이나 감상을 말하기에 앞서 먼저 별점 얘기부터 해야겠습니다. 나는 사실 이 책에 대한 독자들의 반응이 어찌나 궁금했던지 책을 다 읽은 후에도 서평을 쓸 생각은 도통 하지 않았던 듯합니다. 어떤 식으로 서평을 쓸까, 어떤 구절을 인용할까 궁리하기보다는 다른 독자들은 어떻게 반응했을까 머릿속은 온통 그 생각만으로 가득했던 것입니다. 인터넷 사이트에 올라온 서평 대부분을 훑어 보았나 봅니다. 클릭을 해대느라 어깨가 다 아플 지경으로 말이지요. 사실 서평의 내용보다 내가 더 궁금해 했던 것은 별점이었습니다. 다들 3개 내지는 4개의 애매한 태도를 취하고 있더군요. '내 그럴 줄 알았다.' 속으로 쾌재를 부르기도 했습니다. 나의 예감이 적중했던 것에 대한 묘한 흥분이 컴퓨터 모니터 위에 한동안 떠돌았거든요. 다른 책들과는 달리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 <잡동사니>에 대한 독자들의 평가는 서평에 드러난 본심과 별점에 주어지는 형식적인 점수가 서로 별개의 것인 양 사뭇 달랐기에 독자 개개인의 본심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서평을 꼼꼼히 읽어보는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었습니다.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이 대체로 그렇듯 이 소설 <잡동사니>의 문체 또한 맑고 투명합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만약 다른 작가가 같은 스토리의 소설을 썼더라면 아마도 삼류 로맨스 소설이 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소설의 내용만 보자면 위험하고도 아슬아슬한, 관점에 따라서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할 수 있는, 현실에서 있어서도 안 되고 있을 수도 없는 격정적인 사랑을 그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겉보기에는 그렇습니다. 독자들의 서평을 쭈욱 읽어본 바로는 정말 그렇게 읽으셨던 분들이 의외로 많다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얼마 전에 은퇴를 선언한 임모 드라마 작가의 작품이 그랬던 것 같습니다. '막장 드라마'로 통칭되는 그이 작품에 대해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하면서도 끝까지 '본방사수'를 고집하던 시청자가 의외로 많았으니까요. <잡동사니>도 많은 독자들이 그렇게 읽어냈던 듯합니다. 얼마나 맑고 투명하게 그려내고 있는지 '세상에, 어떻게 이럴 수가...'욕을 하면서도 다음 내용이 궁금해서 차마 책을 덮을 수도 없었나 봅니다.

 

책의 내용이 얼마나 외설적이기에 내가 이런 말을 할까 궁금해 하실 분들이 혹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우리의 윤리적 정서로 본다면 '일탈적 사랑'이라고 비난할 수도 있겠다 싶긴 하지만 말입니다. 예컨대 이 소설의 주인공인 미우미는 열다섯 살의 소녀입니다. 그럼에도 미우미는 중년의 남성을 유혹하여 관계를 맺습니다. 돈을 원해서도 아니었고, 강압에 의한 추행을 당한 것도 아닙니다. 순전히 미우미 본인의 의사였지요.

 

나는 이 책에서 스토리 전개보다는 오히려 작가의 배경 설명에 주의해서 읽었습니다. 제목의 '잡동사니'는 사람이 아닌, 물건을 지칭하기 때문입니다. 이 소설은 10대 소녀인 미우미와 40대 여성 슈코의 상반된 감성을 번갈아가며 보여줌으로써 전체 스토리를 이끌어가고 있지만, 남편과 사별하여 혼자 살고 있는 슈코의 어머니 기리코와 이혼 후 혼자 살고 있는 미우미의 엄마, 그리고 미우미 아빠의 일을 도와주고 있는 와타루와 그의 엄마 사야카에 대하여 작가는 그들의 성격이나 습관보다는 오히려 배경, 즉 그들이 소유한 물건에 집중하여 묘사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경제적으로 부유한 기리코의 집에는 남편이 살아 있을 때 구입했던 고급 가구들이 무질서하게 널려 있고, 남편과 이혼하고 자유롭게 연애를 하는 미우미의 엄마는 사귀는 남자와의 관계가 좋을 때는 집안의 물건을 잘 정리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그냥 내팽개치고, 남편과 사별한 사야카는 남편과의 추억이 서린 온갖 잡동사니를 끌어안고 삽니다. 반면 남편에게 집착하는 성향이 있는 슈코는 어떤 물건이든 완벽하게 정리를 해야만 직성이 풀립니다.

 

사랑을 구체적으로 '이것이다' 정의할 수는 없지만 에쿠니 가오리가 생각하는 사랑은 '사물에 투영된 열정의 강도'인 듯합니다. 지금은 없는 과거의 사랑만 남은 기리코에게 사랑은 기억 속에서 뒤죽박죽인 것처럼 그녀가 소유한 물건 또한 정리되지 않는 어떤 것일 터이고 지금의 사랑을 놓치고 싶지 않은 슈코에게는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물건이 없으며. 자신이 원하면 언제든 손에 넣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어린 미우미에게 지금 당장 물건에 대한 소유나 집착은 전혀 필요치 않을지도 모릅니다.

 

"내 인생은 퍼펙트해." 엄마는 말한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지만, 완벽하지 않은 인생이란 게 있을까. 모든 인생은 일종의 완벽이며, 나는 그것을 정사情事로부터 배웠다." (p.10)

 

사랑을 하는 그 순간에 우리가 소유하는 것은 정작 사랑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은 결코 소유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사랑을 잃게 되는 어느 순간이 오면 우리 손에 남겨진 것은 정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잡동사니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사랑을 하는 그 순간에 함께 소유했던 물건들 중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있겠습니까. 다만 나이가 어렸을 때의 사랑은 단순한 환상이며 언젠가 소유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만 존재할 뿐입니다. 미우미가 슈코의 남편을 유혹했던 것은 그 가능성에 대한 호기심이었을 뿐 결코 사랑이라고는 할 수는 없을 테지요.

 

"사람이 사람을 소유할 수는 있어도 독차지할 수는 없다. 그것은 내가 정사를 통해 배운 것 중 하나다. 그럼에도 어떻게 해서든 독차지하고 싶다면, 원치 않는 것들까지 포함한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소유하는 수밖에 없다. 예를 들면 남편의 여자 친구들이라든지......" (p.27)

 

사람과 사람이 만나 서로 사랑을 하고 추억을 공유하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자연스러운 만남을 방해하는 일부일처제는 어찌 보면 윤리적으로는 옳을지 몰라도 생물학적인 측면에서는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 <잡동사니>를 읽으며 독자들이 간과했던 것은 그런 게 아닐까 싶습니다. 누구나 윤리적으로 옳고 그름을 따져 스스로에게 그 잣대를 들이대지 않는다면 이 세상에 나이와 신분에 걸맞지 않는 두 남녀의 사랑이란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소설 속 주인공 슈코의 말처럼 너무도 쉬운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독자들이 작가의 의도를 배제한 채 윤리적 잣대로만 이 소설을 읽는다면 임모 작가의 막장 드라마와 하나도 다를 게 없겠지요.

 

"내 생각이긴 하지만, 만약 정말로 연애 관계 이외의 것을 바라지 않고 지낼 수 있다면 애인을 만드는 것은 간단한 일이다. 내 시간과 육체, 거짓 없는 말, 그리고 호의와 경의, 내가 줄 수 있는 건 그것뿐이었지만, 그 다섯 가지를 받고 만족하지 않는 남성은 없다." (p.160~p.161)

 

우리는 살아가면서 결국 몇 번의 사랑을 경험하게 되는 것일까요. 그 하나하나의 사랑은 모두 자신의 삶을 구성하는 한 부분이고 그러므로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게 없을 듯합니다. 그러나 각각의 사랑은 다른 어떤 것과도 일치하지 않는 개별적이고도 독자적인 것이지요. 우리의 삶도 그런 듯합니다. 다른 누군가의 삶과 비슷하게 살려고 아무리 노력해본들 완전히 똑 같은 삶을 살 수는 없는 것이니까요. 하나하나가 다 다르기에 우리의 삶은 완벽하다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에쿠니 가오리는 결국 삶의 일부분으로서의 사랑도 각각 다 다른 것이기에 완벽하다고 말하고 싶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때 일이 떠오르자 어쩐지 무서워진다. 슈코 씨는 냉정하고 온화하며, 아줌마 말투의 사야카 씨와는 하나도 닮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 같은 말을 했다. 두고두고 간직해두는 것. 두 사람에게 그것은 아마도 중요한 일이리라." (p.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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