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오미와 가나코
오쿠다 히데오 지음, 김해용 옮김 / 예담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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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1/10도 채 읽지 않았을 때, 나는 '이 책을 끝까지 읽어야 하나?' 고민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나는 "끝까지 읽을 수 있을까?' 하고 묻는 게 옳았을지도 모른다. 오랫동안 들춰내지 않았던, 일부러 피하고 외면했던 단어, 나는 그것을 정면으로 마주할 용기가 차마 나지 않았다. 마냥 피하고만 싶었던 그 단어를 책에서 확인했던 순간, 나는 갑자기 목이 턱 막혀와 숨을 쉬기조차 어려웠다. 성인이 된 지금까지도 나는 옆집에서 들려오는 아주 작은 소리의 말다툼에도 가슴이 쿵쾅쿵쾅 뛰고 금세 혈압이 높아지곤 한다. 어려서 겪었던 가정 폭력의 트라우마는 상당한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내 가슴속에서 지워지지 않은 채 시시때때로 나를 옥죄는 것이다.

 

"나오미는 이혼을 권할 생각이었다. 가정 폭력이 당사자들로만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은 부모님을 봐서 알고 있었다. 남자가 여자에게 휘두르는 폭력은 광기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며, 당사자들에게만 맡겨놓는다는 것은 방치나 다름없는 일이다." (p.45)

 

조금 솔직해질 필요가 있겠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나의 기분은 결코 유쾌하지 않은 것이다. 불행하게도 나는 아버지의 폭력과 어머니의 악다구니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기 때문이다. 적어도 도시로 전학을 하여 형과 함께 자취를 시작했던 중학교 2학년 전까지는. 그 시절 사흘돌이로 반복되었던 아버지의 폭력은 누구도 막지 못했다. 심지어 한 집에 같이 살았던 할머니도 어찌하지 못했다. 식구 중 형과 누나들은 모두 도시로 나가 있었고 집에 남아 있던 나와 여동생, 할머니와 엄마는 모두 아버지의 폭력 앞에서 속수무책 손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일단 아버지의 폭력이 시작되면 나와 여동생은 어떻게든 엄마를 보호하려 애쓰다가 그마저도 여의치 않으면 어디로든 아버지의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달아났다가 잠잠해졌다 싶으면 집으로 몰래 숨어들곤 했었다.

 

오쿠다 히데오의 신작 <나오미와 가나코>는 나도 모르게 떠오른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 인해 잔뜩 긴장한 채 손에 땀을 쥐고 읽어야만 했다. 500쪽에 가까운 제법 두꺼운 책이었지만 소설의 내용은 단 몇 줄로 요약이 가능할 듯한 명료한 줄거리의 이야기였다. 소설 속 주인공인 '오다 나오미'와 '시라이 가나코'는 둘도 없이 친한 친구 사이이다. 정의감이 넘치고 똑 부러지는 성격의 나오미와는 달리 가나코는 순종적이고 우유부단하다. 큐레이터를 꿈꿨지만 백화점 외판부 사원으로 들어가 VIP 고객들의 뒤치다꺼리나 하며 보내던 어느 날 결혼 후 전업주부로 있는 나오코의 집에 우연히 들렀던 나오미는 가나코의 몸에 난 멍자국을 보고서 남편으로부터 폭력에 시달린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나오미에게 가나코가 당한 폭력이 자신이 당한 것인 양 아프게 다가왔던 까닭은 가나코가 둘도 없이 친한 친구라는 이유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엄마가 아버지로부터 겪었던 폭력의 기억과 평생 고쳐지지 않는 폭력의 습관성에서 기인하는 바가 더 컸다. 나오미는 가나코에게 이혼이 최선이라며 이혼을 권하였지만 가나코는 남편 다쓰로가 혹시 자신의 친정에까지 해코지를 하지 않을까 두려워한 나머지 나오미의 권유를 거절한 채 남편의 폭력을 무기력하게 당하기만 한다. 결국 나오미와 가나코는 남편의 폭력에 대항해 '클리어런스 플랜(남편 제거 계획)'을 치밀하게 계획하고 이를 실천해간다.

 

'죽인다'는 말을 피하고 싶어서 '제거'라는 말로 바꾸기로 했다. 표현의 문제는 중요하다. 특별히 다쓰로를 죽이고 싶은 것은 아니다. 가장 좋은 것은 본인이 병사하거나 자살이라도 해주는 것이다. 그게 불가능하니까 차선책으로 이 쪽을 제거하는 것이다." (p.125)

 

남편을 살해하고, 시신을 운반하여 암매장하고, 남편이 마치 실종된 것처럼 조작하기까지 모든 상황이 절묘하게 맞물리며 유리하게 진행되어가자 나오미는 이 계획이 마치 운명 같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하던 가나코도 자신이 남편의 폭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은 남편을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하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는 데 동의하면서 적극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들은 남편 다쓰로를 살해하고 암매장해 단순 실종으로 처리하려고 했다. 남편과 닮은 중국인을 매수하여 돈을 인출하게 하고 다쓰로의 여권을 들고 출국하도록 한다. 그러나 완전범죄라고 믿었던 그들의 계획은 가나코의 시누이인 요코가 오빠의 실종 사건을 흥신소에 의뢰하면서부터 그 허점들이 하나 둘 드러나게 된다. 나오미와 가나코의 위기는 그때부터 시작된다.

 

"가나코는 자신들의 안이한 생각을 후회했다. 실행하기 전에는 완벽한 계획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실행에 옮기자 허술한 부분이 계속 나타났다. 세상은 그리 만만치 않다. 이건가. 아니,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겠다. 자신에게 확실한 것 한 가지는 죄를 인정할 마음이 조금도 없다는 점이다. 후회하지도 않는다. 가나코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p.423)

 

저항할 수 없는 폭력은 그 당사자에게 평생 잊혀지지 않는 트라우마를 남긴다. 오랫동안 병원 신세를 졌던 아버지는 지난해 당신의 그 길고 지난했던 생을 마감하셨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그 끔찍했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소설 속 주인공인 가나코의 살의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런 이유였다. 고백하건대 어려서의 나도 아버지에 대한 증오가 살의로 변질되었던 적이 얼마나 많았던지... 

 

"무엇보다 살인 사건이 일어났을 때 사실은 범인인, 피해자인 이웃이 태연한 얼굴로 텔레비전 인터뷰에서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별 문제 없었던 것 같은데요' 하고 대답하는 장면도 많은 걸 보면 인간이란 원래 이렇게 의뭉을 잘 떠는 생물인지도 모른다." (p.270)

 

오쿠다 히데오도 이 작품을 쓰면서 얼마나 많이 고민했을까 생각했다. 폭력의 당사자인 다쓰로를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지게 한다는 것, 그것도 자신의 부인에 의해서 살해되도록 한다는 것은 폭력의 부당함을 넘어서 또 다른 범죄로 이어지도록 만드는 것이기에 작가도 고민이 깊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와 같은 가정 폭력의 피해를 경험했던 한 사람으로서 작가에게 고마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내가 물려받은 모든 것을 내 대에서 단절시킬 수 있는 부모가 가장 좋은 부모'라는 말을 읽은 적이 있다. 나의 아버지도 그러셨을까 싶다. 나는 아내에 대한 폭력은커녕 아버지 살아 생전 그렇게 좋아하셨던 술도 입에 대지 않는다. 아무리 큰 죄인이라 할지라도 한 사람의 생명을 함부로 거두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아야 하겠지만 작가의 생각은 단호했다. 현실이 아닌 소설 속의 이야기였기에 나는 작가의 결단에 더 깊은 고마움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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