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인 캐나다 - 순수한 열정으로 캐나다를 훔쳐버린 당찬 20인의 이야기
임선일 지음 / 라이카미(부즈펌)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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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는 탄생과 더불어 마음속에 작은 위성 안테나를 갖게 되나 보다.
그것을 통하여 다른 사람의 마음을 가슴으로 듣고, 별과 하늘과 나무와 대화하고, 알 수 없는 미래를 향해 두려움 없이 걷게 되는가 보다. 
젊은 시절 안테나는 언제나 밖으로 향한다.  내가 아닌 네가 궁금하고, 내 나라가 아닌 낯선 나라에 살고 싶고, 내 삶이 아닌 다른 사람의 삶을 동경하고...
그러다 점차 나이가 들면 그 안테나의 방향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의 집과 가족에게로  향해 있었다.  밖에 나가도 집에 가고 싶고, 가족이 궁금하고...
내가 그랬다.  대학 시절 마음속 주파수가 이끄는 곳 호주를 향해 어학연수를 떠났었다.
사진으로만 겨우 보았던 그 먼 나라를 향해 떠날 때의 두려움.
그 두려움을 잠재운 것도 내 마음속 깊은 곳의 작은 울림이 아니었을까?

<20 in Canada>, 이 책은 마음속 위성 안테나의 가녀린 주파수에 의지해 캐나다로 떠났던 유학생과 그곳에 정착한 사람들, 그리고 산업 디자인을 공부하는 저자의 이야기이다.
저자는 자꾸만 어정쩡해지는 자신의 상태를 뛰어넘기 위해 캐나다로 향했고,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고 또 떠나는 캐나다에 와서야 다양성과 열린 마음을 배우게 되었다고 한다.   남부럽지 않을 열정과 뜨거운 도전정신을 가지고 캐나다에 갔지만, 해가 갈수록 얻는 것보다는 잃은 것에 집착하는 자신을 보면서 꿈을 잃어가는 것은 아닌지, 인생을 낭비하며 보내는 것은 아닌지 불안한 마음에 캐나다에서 뜨거운 열정으로 찬란한 꿈을 만들어가는 사람들을 보며 희망과 용기를 얻고 싶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1년이 넘도록 캐나다에서 행복한 꿈을 꾸고, 자신의 꿈을 위해 노력하면서 당차게 도전하는 사람들의 행복한 꿈 이야기를 듣고 싶었단다.
이 책은 그들과의 인터뷰를 대화 형식으로 기록하여 책으로 엮은 것이다.
십대에서부터 삼십대의 다양한 연령층의 여러 나라 사람들이 들려주는 자신의 꿈과 캐나다 적응기, 그리고 캐나다를 찾는 이방인들에게 들려주고픈 자신만의 노하우를 신세대의 어투로 재미있게 그리고 있다.  화려한 사진과 함께.
인터뷰에 응한 사람들 중에 캐나다 현지인 프랭크는 유독 눈길을 끈다.  그는 길바닥에 그림을 그리며 자유롭게 사는 캐나다인이다.
난 있잖아.  꿈을 가지고 이 나라에 와서 일하고 공부하는 사람들이 너무 멋있어 보여.  꿈을 위해서 자기 세상을 박차고 떠나온 사람들만 가지고 있는 형형한 빛 같은 게 있거든.  모두들 겉으로는 너처럼 피곤에 찌들어 비틀비틀거린다고 해도, 목표를 이야기할 때면 빛을 내뿜는 사람이 되곤 하는게 내 눈엔 너무 좋아 보였어.  뭐, 그 빛은 희망 때문에 반짝반짝 빛나는 걸 수도 있고 너무 절박해서 독기로 시퍼렇게 빛나는 걸 수도 있지만, 하하.
그래서 나도 이 땅을 박차고 다른 곳으로 나가려고 하는 거야.  네가 꿈을 이루기 위해 너희 나라를 떠나서 캐나다에 온 것처럼, 나도 내 꿈을 가지고 다른 세상으로 나가고 싶어.(p. 180)
삶의 도피처가 아닌, 자신의 삶을 개척하기 위해 젊은 날에 떠나는 낯선 곳에서의 생활은 이방인으로 겪게 되는 고단함과 실수 연발도 아름다운 추억으로 자리잡게 될 것임을 나는 알고 있다.  
다만,언제나 그렇듯 삶에는 필요한 만큼의 비용이 따른다.
너무 부족해도, 지나치게 풍족해도 문제가 생기게 마련이다.  얼마라고 딱 잘라 말하기는 어렵지만, 생활을 지속할 적당한 액수의 돈은 우리에게도, 낯선 나라의 그곳에서도 필요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 필요한 비용을 스스로 계산하고, 떠나기 전에 자신의 노력으로 그 비용을 벌 수 있다면 더욱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그랬고, 나는 이국땅에서도 열심히 아르바이트를 했었다.  뜨거운 열정으로 떠나고 치열하게 살아가는 현지 생활이 넉넉한 집안에서 태어나 선택받은 사람들만 누리는 특권쯤으로 비춰져 그 가치와 필요성이 퇴색되는 일은 없어야겠다.
고등학교까지는 부모의 책임이라지만 대학생은 분명 자신의 인생을 누구에게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개척해야 하는 성인이 아니겠는가.  무일푼으로도 떠날 수 있는 용기와 도전정신이 그들의 특권이고 삶의 시간대에서 그 시기에만 가능한 소중한 자산인 것이다.
가볍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그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나는 잠시 젊었던 시절의 그 치열했던 경험을 아련한 추억으로 떠올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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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탑에 갇힌 세계화 - 미처 몰랐던 세계화에 대한 열두 가지 진실
페테르 빈터호프 슈푸르크 지음, 배명자 옮김 / 21세기북스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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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엔 얼마나 많은 사악한 것들이 숨어 있는가. 그러나 인간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는 한 우리는 그것들을 이길 수 있다. 어둠이 빛을 이기지 못하리라."  
이것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판도라가 인류에게 주는 메시지이다.
<거꾸로 읽는 로마 신화>의 유시주 작가는 상자를 연 판도라의 행위가 인간이 자신의 내면에 도사린 어둠을 자각하게 되었다는 걸 상징한다고 말한다.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자각하지 않고는 그것을 다스릴 수도 없기에  판도라는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밝은 면만이 아니라 어두운 면까지도 두려움 없이 통찰하게 함으로써 이성의 힘으로 그것을 통제하는 길을 열어 준 은인인 셈이라는 것이다.

이 책은 자유시장의 작동 원리를 강조하는 통화주의학파의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과  주주가치 지향의 기업정책을 강조하는 알프레드 레퍼포트에 의해 촉발된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의 물결에 대한 폐해를 조망하고 사회와 조직(또는 기업)을 통제하고 조종하는 권력자에게 바벨탑의 붕괴 조짐을 경고하고 있다.  판도라의 상자가 인간 내면에 도사린 어둠을 자각하게 하였듯 미디어 심리학과 조직 심리학을 가르치는 저자는 책을 통하여 현대 사회의 면면에 내재하는 온갖 부조리와 그 속에서 신음하는 개개인의 심리를 파헤침으로써 시대의 종말을 창세기의 바벨탑에 빗대어 피력하고 있는 것이다.
16세기 에스파냐령 네덜란드의 상업도시 안트베르펜은 구시대의 가치관과 통치 방식 그리고 새로운 시대를 향한 거대한 물결이 충돌하는 혼돈의 도시였다.
천재화가 피테르 브뢰겔은 중세에서 근대 산업사회로 변화하는 역사적 조류를 감지하고 바벨탑이라는 상징적 그림을 통하여 그림 곳곳에 시대의 종말을 은유적으로 암시하고 있다.
저자는 꼼꼼하고 영리한 한 화가의 그림 속에 숨겨진 암시를 정황적 근거와 함께 살펴봄으로써 사회적 토대의 균열 조짐이 보이는 현대 사회의 내면을 분석하고 현대의 종말과 그 원인 및 미래를 예견하고 있다.
경제 문제는 곧 권력 문제이기 때문에 사회적 조종과 통제는 정치적 참여 없이는 불가능하다.  ’소외된 중간계층’의 정치에 관한 부정적인 잡담, 그들이 내뱉는 비현실적 사회주의, 신낭만주의 환상세계로 후퇴하는 태도 등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하위 3분의 1에 속하는 사회집단이 상품화된 사건 세계 속에 갇혀 사는 태도 역시 아무런 도움이 못 된다.  그런 방식의 은둔은 한계에 이르렀다.(P.287)
세계적으로 모든 경계가 무너짐으로써 발생하는 급속한 변화 과정, 즉 세계화는 부의 극단적 양극화, 상품으로 전락한 노동의 가치 상실, 실직에 대한 두려움, 인간 감정의 상품화, 텔레비전 시청 시간의 증가와 정치에 대한 냉소적 태도, 국가와 정치가에 대한 불신, 정신병적 자기애에 집착하는 CEO와 엘리트 계층 그리고 그들의 성향을 부추기는 텔레비전의 보도 행태 등의 부정적 변화를 유발하여 사회 구성원인 개인을 만성적 무기력증으로 몰고 간다.
어쩌면 우리는 개개인의 면면을 살피기에 바빠 사회 전체의 모습을 바라보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마치 숲 속에서 전체 숲을 보지 못하듯이. 
정치가가 정책 없는 정치를 하고, CEO가 자신과 주주의 이익에만 치중하는 것을 방치하게 되는 환경은 바로 텔레비전이라는 세속 종교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세속 종교인 텔레비전은 세계를 개선하지는 못하고 기껏해야 이따금 견딜 만하게 하거나 오히려 더 악화시킨다.  미디어가 만들어 낸 더 좋은 세상의 꿈은 언젠가는 깨지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텔레비전의 패턴에 따라 일상생활을 지속적인 행복의 장소로 만들고자 하는 사람은 언젠가는 깨닫게 된다.  꿈의 아내는 신경을 거스르는 골칫덩어리고, 꿈의 남편은 속빈 자기과시자이고, 꿈의 자동차는 너무 비싸고, 꿈의 집은 전기 먹는 하마이고, 꿈의 직업은 해고의 위험이 높다는 사실을 말이다.(P.197 - 198)
판도라의 마지막 단어가 ’희망’이었듯 저자가 제시하는 이 모든 부정적 현상들에 대한 마지막 결말은 희망이라고 명확히 말하지 못한다.   동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 각자는 인간의 삶조차 상품화 되는 이 현상을 개선하기 위해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행동을 지속적으로 유지함으로써 새로운 시대를 폭력이 아닌 평화의 방식으로 맞아야 할 것이다.
우리 사회를 개선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그 방법을 알지 못한다.  아니, ’정확히’ 알지 못한다.  내가 아는 유일한 방법은, 브뢰겔처럼 시대적 중요 요소들을 각각 제시하고 그 요소들이 현실적인 전체 모습을 드러내리라 희망하는 것뿐이다.(P.251)
 우리는 피테르 브뢰겔의 두 번째 바벨탑과 같은 먹구름이 끼고 사람도 없는, 암울하고 을씨년스러운 그림을 미래의 청사진으로 그려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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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어사는 즐거움
강제윤 지음 / 도서출판 녹두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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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윤 시인의 사이트를 둘러 보았다.
시인의 글처럼 단아하고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법정 스님의 추천 도서를 골라 읽다가 실수로 만나게 된 책.  
같은 제목의 책이 또 있다는 사실을 책을 다 읽고나서야 알게 되었다.  
나의 실수로 만나게 된 인연.  
삶은 수없는 실수와 우연으로 빚어진 하나의 완성품이 아닐까?  
그의 글을 읽노라면 새봄의 온기가 내 온몸에 퍼지는듯 따뜻하다.
손가락 사이로 부드럽게 미끌어지는 잔모래처럼 내 마음에 물결무늬만 남기고 그의 글은 그렇게 흩어졌다.   
시인은 고향 보길도를 떠난 지 20여년 만에 돌아와 ’보길도 시인’으로 살며 고향의 자연을 지키는 일에 헌신했으며 33일간의 단식으로 보길도의 문화유산 파괴를 막아 내기도 했단다.  문화일보의 ’평화인물 100인’에 선정되기도 했다는 시인은 2005년 가을 홀연히 보길도를 떠나 청도 한옥학교 한옥 목수 과정을 졸업한 뒤 지금껏, 한국의 모든 섬을 순례할 계획으로 전국을 떠돌고 있단다.  이 책은 보길도 편지 두 번째 이야기로 오마이 뉴스에 연재한 글들을 모아 책으로 엮은 것이라 했다. 

시인의 글 속에서 시간은 한껏 여유로웠다.  그 발걸음이 여유로울수록 닿는 시선에는 작은 것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엄격함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마치 풀 수 없는 어느 경전의 문구처럼.  모순이 모순을 낳고 또 다시 모순이 모순을 낳아 풍선처럼 부풀어진 모순 속에서 우리는 실타래처럼 얽힌 모순을 풀어보겠다는 미련을 안고 산다.
생명을 만들어 내고 기른다는 것은 분명 경이롭고 신비한 체험입니다.
하지만 어찌 생명이 제 속에서 나온 생명만 소중하겠습니까.
마더 테레사가 언제 자기의 아이를 낳아봤기에 그렇게 이타적이고 큰 사랑을 실천할 수 있었겠습니까.
예수가 아버지 노릇을 해본 뒤에야 인류를 위해 목숨바쳤습니까.
자기 자식을 낳아서 아버지 어머니가 되어본 다음에야 진정한 사랑을 알고 온전한 인간이 된다는 말은 근거없는 통념일 뿐입니다.
부처는 자기 아들을 버린 다음에야 인류의 스승이 되지 않았습니까.
마리아는 자기 아들을 인류를 위해 바친 다음에야 비로소 인류의 어머니가 되지 않았습니까.
(P.243 - 244)
시인은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들과, 자연과, 안타까운 사연들에 대해 말한다.  시인에게 여행은 삶이고, 삶은 곧 여행이었다.  모든 생명체에게 따뜻한 시선으로 같이 신음하고. 같이 아파하면서 그들과 더불어 소소한 대화를 나누고 있다.
시 같은 일상이, 일상 같은 시가 그렇게 흘러간다.
가난하게 사는 것이야말로 나눔 이전의 나눔이며, 가장 큰 나눔의 실천입니다.
나눔이 무소유의 소극적 실천이라면 자발적 가난은 적극적 실천입니다.
역설적이지만 모두가 가난해지려고 노력할 때, 이 세계의 모든 가난은 끝나게 될 것입니다.(P.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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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비오따쓰 - 세상을 다시 창조하는 마을
앨런 와이즈먼 지음, 황대권 옮김 / 월간말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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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천안함 희생자들의 합동영결식이 있었다.
세계에서 유일한 분단국가.  냉전이 살아 숨쉬는 역사적 유적지에서 우리는 오늘도 살고, 또 그렇게 한동안 살아갈 것이다.  우리의 젊은이들이 원인도 모른 채 숨져갈 때 켸켸묵은 이념의 선전문구만 그들의 죽음을 감싸고 있었다.  아주 낡은 꼬리표처럼.
나는 그 46명의 젊은이들을 보내며 이 세상에서 이념의 제물이 된 많은 사람들을 생각하였다.
그리고 그 희생을 담보로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야욕을 채우기 위해 음모를 꾸미고 있을까 생각할 때, 이데올로기의 환상은 세대를 두고 끝없이 재생산되어 누군가의 배를 불리워 주리라는 끔찍한 상상에서 헤어날 수 없었다.
라 비올렌씨아!(폭력의 시대)하면 어느 팝송의 제목 쯤으로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1948년부터 1957년까지 콜롬비아 자유당과 보수당의 내전으로 20만 명 이상의 무고한 사람들이 희생되었고,  이것을 일컬어 폭력의 시대(라 비올렌씨아)라고 한다.  그 이후 지금까지 콜롬비아는 콜롬비아 무장 혁명군(FARC)과 정부군 또는 우익 민병대와 부호들의 개인 사병에 이르기까지 자국내 무장 세력들간의 끝도 없는 충돌과 약탈, 납치 등으로 가족을 잃고 재산과 땅을 잃은 사람들이 희망없는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이 책은 이와 같은 내전으로 혼란과 무질서 속에서 심신까지 파괴된 콜롬비아의 열악한 환경을 딛고 그들만의 마음의 안식처를 마련한 가비오따쓰 생태공동체의 이야기이다.
미국의 국영 라디오 방송에서는 베테랑 저널리스트 앨런 와이즈먼에게 세계적인 환경위기에 대한 해결책을 기록하는 일을 맡겼다. 그는 희망이 없어 보이는 이 나라의 무질서 속에서 외딴 섬처럼 존재하는 <가비오따쓰> 생태공동체를 듣게 되었다.  지구의 환경파괴 대가로 발전을 거듭한 세계적 도시와 인간의 욕심이 빚어낸 살육의 현장에서 그는희망과 승리의 상징을 발견한 것이다. <가비오따쓰>라는 마을은 <야노쓰>라는 거대한 열대 사바나의 젖은 사막, 표토의 깊이가 2센티미터 밖에 안 되고 그마저도 산성화되고 알루미늄 독성에 오염된, 콜롬비아에서 가장 척박한 땅 <야노쓰>에서 유토피아가 되었다.  저자는 이런 척박한 곳에서의 성공은 세계 어느 곳에서도 사람이 살아 갈 수 있게 만들 수 있다는 가능성과 희망을 발견한 것이다. 사막이란 상상력이 고갈된 상태일 뿐, <가비오따쓰>는 상상력이 만발한 오아시스였다. 앨런 와이즈먼은 계속 그곳을 방문하며 <가비오따쓰>에 관한 이야기를 자세하게 기록하였고, 이것을 바탕으로 소설 형식을 빌려 다큐멘터리와 같은 생생한 이야기를 독자들에게 전해 준다.
1971년 이탈리아 이민 2세대인 파올로 루가리는 일단의 콜롬비아의 이상주의자들과 기술자들을 이끌고 야노쓰로 향했다.  그는 야노쓰야말로 열대지역을 대신하여 이상적인 문명을 펼치는 데 가장 완벽한 환경이라고 믿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공동체에 적용할 수 있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찾아내고 자연을 닮았고 가장 환경 친화적인 도구들을 개발하였다. 
진창과 말라리아 모기가 들끓는 개울로 이뤄진 땅에서 깨끗한 물을 찾기 위해 수동펌프를 발명하고 식수의 세균을 제거하기 위해 태양열 주전자를 개발하였다.
또 열대바람을 에너지로 전환시키는 풍차, 비가 올 때도 작동되는 태양열 온수기, 식용 및 약용작물 재배를 위한 수경재배법 등도 고안했다,  1990년대에는 독창적인 방법으로 사라져 가는 열대우림을 되살려 또 하나의 기적을 이뤄냈다.  이처럼 30여년 동안 이 생태환경마을에 사는 과학자, 장인, 농부, 길거리를 떠돌았던 소년들, 그리고 인디언들은 세계적인 구호인 ’지속가능한 발전’을 현실로 일궈낸 것이다.
"가비오따쓰는 카오스에서 무작위로 태어난 것들의 총체입니다.  가비오따쓰는 ’불확정성의 원리’입니다.  그것은 기회가 만들어지는 장소, 경쟁 대신 협동이 들어서는 장소입니다."
가비오따쓰는 또한 분쟁지역 한가운데서 정부군과 게릴라 어느 쪽 편도 들지 않는 중립지대를 고수함으로써 좌우 어느 쪽으로부터도 침탈받지 않고 생태마을을 가꾸어 올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두 개의 축으로 구성된다.  생태공동체가 하나의 축이라면 또 다른 축은 좌우 이념의 대결을 넘어 피로 물드는 갈등을 겪지 않을 대안 사회에 대한 가능성이다. 
가비오따쓰 공동체의 설립을 주도한 파올로 루가리의 아버지는 이탈리아의 변호사이자 지질학자였으나 19세기 콜롬비아 대통령의 고종손녀와 결혼하면서 콜롬비아 엘리트층에 진입하였고,  이런 덕분에 루가리는 콜롬비아 내에서 최고 엘리트에 드는 가문에서 태어났다.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 주는 것이 발전이라는 한 신부님의 말에 감명을 받은 루가리는 보고타 국립대학을 졸업한 후 제3세계 발전 문제에 관심을 갖고 아시아와 남미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다 그가 선택한 곳이 바로 가비오따쓰였다.  그는 태양열 이용이 걸음마 단계였던 70년대 초반 고립무원의 제3세계 오지에서 태양력, 풍력과 같은 대체에너지만 이용해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 보인 것이다.   76년 유엔개발계획(UNDP)은 이곳을 공동체 모델로 선정했고, 이후 유엔을 비롯한 국제단체들은 가비오따쓰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석유위기를 거쳐 대체에너지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면서 가비오따쓰는 80년대에 세계의 대안으로 떠오른 것이다.  콜롬비아의 동쪽 초원 가비오따쓰는 정부나 반군 모두 콜롬비아의 미래로 인식하고 있다.  가비오따쓰인들은 이제 그들이 심었던 온두라스산 소나무에서 최고급의 송진을 채취하여 시판함으로써 경제적 자립을 이룩하였고,  코카 재배를 대체할 약용식물의 재배에 눈길을 돌리고 있다.  코카를 능가할 수익성이 보장되는 약용식물을 재배함으로써 사람들에게 콜롬비아는 세계적 마약 국가에서 친환경적 모범국가로 탈바꿈 하고있다는 모습을 보여주려는 야심찬 계획을 세우고 있는 것이다.
제1세계가 파괴한 지구환경을, 그들이 멸시하고 환경 파괴의 피해만 물려주었던 제3세계의 국가 콜롬비아 오지에서 가비오따쓰인들은 지구 환경 복원의 작은 씨앗을 틔우고 있는것이다.  인종과 직업에 의해 차별 받거나 무시되지 않는 사회, 지배자도 피지배자도 없는 평등한 사회, 경찰도 군인도 존재하지 않지만 법죄가 없는 사회, 교육과 의료 노후대책을 걱정하지 않는 사회, 우리가 진정으로 바라는 꿈의 도시를 그들은 스스로 만들어 가고 있었다.
이것은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아브람도 도서실 지붕을 고쳐야 하는 등 해야 할 일들이 쌓여 있었던 것이다. “당신은 우리 부서의 사람들을 모두 데려갈 수는 없습니다.” 그가 뽐삘리오에게 말했다. 그들은 머리를 맞대고 그 문제에 대해 의논했다. 파올로 루가리는 가비오따쓰인들이 늘 서로의 눈을 들여다보며 차분한 토론을 통해 결론에 이르는 모습을 경외에 찬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위협받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모두가 서로 존중하는 분위기였다. 결국 그들은 해결점을 찾았고 또 다른 문제로 넘어갔다. 모든 사람이 참여하는 공동체의 특징이었다.
(P.341-342) 
떠나면 그리워지고, 머물 때는 떠나고 싶지 않은 영원한 마음의 고향, 그 영혼의 안식처를 우리는 잊고 사는 것은 아닐까?  나는 이 책을 통하여 내 마음 한 귀퉁이에 내 영혼의 안식처를 꿈꾸게 되었다.  나는 그곳으로의 귀향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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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 라이프 - 우리가 꿈꾸는 또 다른 삶
쓰지 신이치 지음, 김향 옮김 / 디자인하우스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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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름값이 천정부지로 치솟는 요즘, 친구들 사이에선 차를 팔아야겠다는 말을 심심찮게 듣게 된다.  물론 그 말을 실천으로 옮기는 친구는 거의 없지만 다들 상당한 압박을 받고 있음은 분명해 보인다.
"과연 지금 시점에서 석유가 고갈되면 어떻게 될까?"  
모든 공장이 문을 닫고, 전기마저 끊긴 암흑세계에서 나는 살아날 수 있을까?
나는 농사 지을 줄도 모르고, 먹거리를 생산할 텃밭도 한 뙈기 없는데 무엇으로 내 생명을 연장할 수 있을지 생각하면 공포감이 밀려온다.  나와 내 가족의 생명과 안전을 나는 그 무엇에 의존하고 있으며, 그 의존도는 얼마나 되는지...  단 한 번도 깊이 생각하지 않은 채 '성공'이나 '부'로 대변되는 환상에 사로잡혀 오늘도 나는 내 삶을 즐길 여유조차 박탈당하고 있다.
이 책의 저자는 이규(李珪)라는 한국 이름을 가진 한국계 일본인이다.
코넬대학에서 인류학 박사학위를 받고 현재 메이지가쿠잉대학 국제학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전 세계적으로 환경운동과 문화운동을 하는 한편, 환경공생형 비즈니스에도 참여하고 있다.
그는 영어에도 존재하지 않는 슬로 라이프(slow life)라는 말을 처음으로 세상에 퍼뜨린 인물이기도 하다.  저자는 경제, 문화, 환경, 정치, 먹거리 등 다양한 분야의 키워드를 주제로 자신의 생각과 학자들의 말을 인용하며 독자의 각성을 촉구하고 있다.
그것은 강제적이거나 강압적이 아니며 어떠한 규칙도 제시하지 않는다.  이 새롭고 평화롭고 친환경적인 삶을 디자인해 나가야 할 사람은 바로 우리 자신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언제부턴가 돈과 직결되지 않는 모든 것을 잡일, ,잡담, 잡생각, 잡지, 잡념, 잡음 등으로 표현하며, 그런 일들을 천시하거나 터부시하여 왔다.  오직 효율성과 '빨리빨리'라는 속도에 나 자신을 맞추고 끝없는 경쟁구조로 내몰았던 것이다.
상대가 자연이든 사람이든, 우리는 기다리고 기다리게 하는 일에 점점 더 서툴러지고 있다.  요컨대 함께 살아가는 일에 점점 더 서툴러지고 있다는 뜻이 아닐까?  왜냐하면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기다리고 또 기다려주는 일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혹시 우리는 지금 남을 사랑하는 일이 점점 더 어렵게 느껴지는 것은 아닐까? 왜냐하면 기다림을 뺀 사랑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P.55)
더글러스 러미스가 주장하듯 경쟁사회를 떠받치고 있는 기본적인 정서는 공포심이다.  뒤쳐질지 모른다는 공포, 급기야는 낙오되어 버려질지도 모른다는 공포.  우리는 언제나 그 대열의 앞에 서야 하는데 그  줄의 끝은 보이지 않는다.  이처럼 정황조차 없는 긴박함과 절박함을 갖추어야만,  사람들은 비로소 공포감에 사로잡힌다.  일주일 생활비가 10달러에서 30달러로 바뀌는 것을 진보라 여겨 왔던 이유는 이러한 공포를 이용한 개발의 논리가 대중을 세뇌시켰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인구는 점차 줄어 가는데 1년에 몇십 만 채의 아파트가 계속해서 늘어나는 현상을 보면서도 아파트값이 매년 오를 것이라는 환상과 함께 그 대열에 참여하지 못하면 낙오자로 전락할 것이라는 공포를 심어주는 것은 성장을 지향하는 기업과 국가의 얄팍한 눈속임이다.   아무런 까닭도 모른 채, 우리는 그들의 논리에 잘도 이끌려 단문형 냉장고를 양문형 냉장고로 바꾸고,  일반 세탁기를 드럼세탁기로 바꾸며 살아 왔다.  우리의 정원이자 텃밭인 그린벨트를 해제하고, 수십만의 빈곤층이 생성돼도 GDP는 성장하고, 범죄와 질병이 증가해도 성장은 멈출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그러한 성장 논리의 세뇌에서 벗어날 시점이 되지 않았을까?  경제학자 슈마허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기술은 인간이 만든 것임에도 불구하고, 독자적인 법칙과 원리로 발전해 간다.  반면 자연계는 성장과 발전을 '언제, 어디서 멈출 것인가'를 알고 있다.  자연계의 모든 것에는 킈,빠르기,힘의 한도가 존재한다.  그렇기에 그 일부인 인간도 자연계 안에서는 균형, 조화, 정화의 힘이 작동동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 기술이라는 것은 크기,빠르기,힘을 스스로 제어하는 원리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거기에는 균형, 조정, 정화의 힘이 작동하지 않는다. (P.123)
요즘 아이들의 교육을 보면서 무서움을 느낄 때가 있다.  전에는 한 분야만 잘해도 그럭저럭 밥벌이는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요즘은 그렇지 않다.  학습 분야가 그만큼 늘어난 것이다.  어쩌면 인간의 능력이나 한계를 초과하는 범위로 확대되었다는 느낌마저 지울 수 없다.  성장의 논리로 따진다면 인간은 이미 그 한계를 넘어서고 있는 것이다.  오직 자신의 능력에만 의지할 수밖에 없는 현실은 어쩌면 협동과 조화를 상실한 현대사회의 당연한 귀결일지도 모른다.
세계의 시간 틀은 둘로 나뉜다.  첫째는 지구와 생물의 생태적인 시간의 틀, 거기에는 지구의 역사와 함께 발맞추어 온 생물 진화의 원대하고도 유장한 시간의 흐름, 개개 생명의 삶과 죽음의 사이클 등이 포함된다.  둘째는 산업이나 상업 등의 경제적 시간의 틀이다.  비즈니스는 속도를 다투고 변화를 좋아한다.  거기에는 가속화의 끊임없는 변화, 무한한 성장이 철칙이다.  이에 반하는 자는 그에 따른 제재를 받게 된다.  이것이 현대 세계의 지배적인 시간의 틀이라는 사실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P.199)
'녹색 성장'이라는 슬로건을 보면 절로 웃음이 나올 때가 있다.
자연 환경과 생태계의 보호나 개선을 의미하는 '녹색'과 경쟁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성장은'절대 같이 어울릴 수 없는 상반된 개념이다.  여기에는 그럴 듯하게 포장된 속임수만 존재한다.  결국 녹색이냐 성장이냐는 선택의 문제이지 공생이나 조화의 문제는 될 수 없는 것이다.
가끔 사람들은 불가능한 것조차 광고라는 프랑켄머쉰에 들어갔다 나오면 가능한 것으로 인식하곤 한다.  우리의 삶은 기다림의 연속이며 기다림 속에는 길게 이어지는 다양한 상념, 근원적인 어떤 것으로의 지향, 그 궁극적인 소실점에서 우리는 '사랑'이라는 단어와 마주하게 된다.
이 필연적인 상념의 터널을 통과하는 행위, 그 자체가 바로 '삶'이다.  우리는 지금도 기다림의 긴 터널을 '설레임'과  동반하여 천천히 걸어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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