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나는 다만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이란 수많은 사람들이 깁고 덧대고 이어 붙여서 오늘에 이른 까닭에 비록 그것이 유구한 역사를 거쳐 오늘날 우리가 믿는 통일된 기준을 마련했다고는 하지만 그에 반기를 드는 사람이 아주 없다고는 할 수 없겠습니다. 사람들의 일반 상식도 이럴진대 멧돼지 세계에서의 일반 상식이란 얼마나 허황되고 보잘것없는 것일까요. 그래서인지 아내 멧돼지가 받은 뇌물에 대해 멧돼지의 권익을 보호하는 권익위원회의 수장인 철완 멧돼지가 배우자에 대한 제재 규정이 없다며 깔끔하게 종결 처리했습니다. 그렇다고 공직에 있는 모든 멧돼지의 배우자가 마음 놓고 뇌물을 받아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우리 부부에게나 해당하는 상식이지 다른 멧돼지에게도 널리 통용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부부는 지금 멀리 타국에 나와 있습니다. 아내 멧돼지와 함께 마음 편히 해외여행을 나온 것도 근 6개월 만이고 보니 참으로 만감이 교차합니다. 게다가 북한의 정은 멧돼지가 남한을 향해 수많은 똥풍선을 날려 보내는 바람에 리더 멧돼지로서의 체면도 말이 아니었지만 더러워서 남한에선 잠시도 더 머물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던 것입니다. 물론 정은 멧돼지가 똥풍선을 보내게 된 계기도 따지고 보면 남한에 있는 탈부기 멧돼지들이 먼저 그들을 향해 오물 풍선을 보냄으로써 그들의 화를 돋군 측면도 없지 않았습니다. 나 역시 그들의 행위를 제지하거나 말리지 않았습니다. 접경지의 멧돼지들이야 죽든 말든 자유를 위해서라면 남한의 모든 멧돼지들이 죽어나자빠진들 포기할 수 없는 가치라고 나는 예전부터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자식이 없는 우리 부부는 이미 살아볼 만큼 살았기 때문에 지금 죽는다 해도 여한이 없는 까닭입니다.


바람을 타고 날아오는 똥풍선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딱히 떠오르지 않습니다. 좌시만 할 뿐입니다. 이전의 어떤 연설에서 나는 좌시하지 않겠다고 뻥을 쳤지만 나의 뻥이야 한두 번 있었던 일이 아닌 까닭에 지금은 다들 그러려니 이해하는 편입니다. 며칠 전에는 포항 앞바다에 석유가 매장되어 있다고 뻥을 쳤더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리더 멧돼지가 그렇게 간 큰 뻥을 치기야 하겠어?' 하는 생각이었는지 대략 이틀 정도는 반신반의 믿어주는 분위기였습니다. 물론 삼일 이후부터는 '에이, 그러면 그렇지.' 하면서 믿지 않는 분위기로 되돌아가고 말았지만 말입니다.


어떤 멧돼지는 우리 사회에서 뻥과 편법이 사라지고 상식과 공정이 되살아나야 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내가 정권을 잡고 있는 한 공정과 상식은 그저 헛된 구호로만 존재할 뿐입니다. 아내 멧돼지 역시 받을 수 있는 모든 뇌물을 거절하지 않고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정은 멧돼지가 이를 비웃으며 남한을 향해 지금보다 더 많은 똥풍선을 보낸다 할지라도 아내 멧돼지의 뜻을 꺾을 생각은 없습니다. 그때마다 철완 멧돼지는 배우자에 대한 제재 규정이 없다며 종결 처리할 것입니다. 고맙게도 말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이란 오랜 세월 많은 이들이 깁고 덧대고 이어 붙여서 오늘에 이른 것이지만 리더 멧돼지인 나는 그것을 믿지 않습니다. 나는 다만 한 마리의 미친 멧돼지일 뿐입니다.


*경고 : 이 글은 단지 허구에 의한 소설일 뿐 특정 사실이 아님을 엄중 고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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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신세계
올더스 헉슬리 지음, 프레드 포드햄 그림, 문형진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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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서 벗어난 조금 다른 이야기부터 시작해 보자. 나는 사실 올더스 헉슬리의 소설 <멋진 신세계>를 여러 번 읽었던 까닭에 그때마다 비슷비슷한 내용의 진부한 리뷰를 써왔던 게 사실이다. 물론 숫자를 세어보면 리뷰를 쓰지 않고 그냥 지나쳤던 게 훨씬 더 많겠지만 말이다. <멋진 신세계>의 주요 내용이나 주제는 아니지만 나는 책을 읽을 때마다 언제나 신과 종교의 문제에 대해 생각하곤 했었다. 그러나 책에서도 그와 같은 주제에 대해서 잠시 언급되기는 하지만 주요 테마나 주제에서는 살짝 벗어난 느낌이 없지 않았기에 이전의 리뷰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게다가 종교는 언제나 민감한 문제이기에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지나 않을까 은근히 겁이 나기도 했고, 종교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맹목적인 광신자의 격분한 비판을 생각하면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오는 까닭에 일부러 외면한 측면도 없지 않았다.


나는 사실 천주교 세례를 받은 가톨릭 신자이다. 물론 바쁘다는 핑계로 주일 미사마저 거르기 일쑤인, 일종의 패션 신자에 가깝지만 말이다. 내가 여타 종교에 대해 깊이 연구한 바는 없지만 종교가 존속하기 위한 기본적인 전제 조건은 불행한 사람들이 자신이 믿는(혹은 믿으려고 하는) 신과 교리를 통하여 자신의 처지를 얼마나 잘 납득하고 이해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달려 있다고 믿는다. 즉 종교란 행복한 사람보다는 불행한 사람을 위한 시스템이며, 종교를 통하여 그들이 처한 작금의 다급한 처지를 개선해 주겠다는 헛된 약속으로 그들의 환심을 사려한다기보다는 지금은 마음의 위로 외에는 달리 해줄 게 없지만 내세에는 반드시 보상을 받을 것이라는 확신을 심어줌으로써 현재의 어려움을 참고 견디라는 메시지로 그들을 설득한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는 경구는 어찌 보면 교회 입장에서의 가장 강력하고 효과적인 영업 멘트가 아닐까 싶다. 사는 게 곧 고통임을 설파하는 불교의 교리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내세에서의 삶은 어쩔 수 없는 경쟁과 불평등이 상존하는 까닭에 신이 아니라 신의 할아비가 온다 하더라도 현실에서 이를 해결할 방법은 딱히 없는 것이다.



'그래픽 노블'로 출간된 <멋진 신세계>의 장점은 가독력과 이해력이 높아졌다는 점이다. 물론 시각적인 효과보다는 묘사에 의한 상상력을 중시하는 독자라면 '그래픽 노블'의 출간에 대해 환영하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문자 텍스트보다는 시각적 이미지나 동영상에 익숙한 현대인의 기호에 맞춰 우리가 한 번쯤 읽어보아야 할 고전 소설을 그래픽 노블로 재출간하는 건 그리 나쁘지 않은 선택이지 싶다.


워낙 유명한 소설인지라 줄거리는 대충 알겠지만 반역자였던 왓슨과 총독의 대화는 의미심장하다. 총독의 주장을 옮겨 본다.


"사람은 젊음과 번영을 누릴 때에만 신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으나, 그 독립이 인생의 최후까지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글쎄, 우린 지금 인생의 최후까지 젊음과 번영을 보장받고 있다네. "종교적 신앙심이 우리가 겪는 모든 상실을 보상해 줄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보상을 받을 만한 그 어떤 상실도 없는 걸. 그리고, 젊음에 대한 갈망이 완전히 충족되었는데 왜 그 대체제를 찾아 헤매야 할까?  (p.202)


<멋진 신세계>의 작가 올더스 헉슬리 역시 동의하는 바이지만 불행한 사람보다 행복한 사람의 비율이 조금이라도 높다면 종교는 존재하지 않는다. 불행한 사람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은 까닭에 종교는 존재하며 신에 대한 갈망과 기도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이다. 결국 지구상의 모든 종교는 인간의 불행을 밑천으로 살아남는 것이다. 인간의 풍요와 만족, 온갖 유희와 쾌락 등이 과학이 발달한 먼 미래에도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공평하게 제공될 리 없지만 그와 같은 불평등한 구조 역시 종교를 영구적으로 존재하게 하는 하나의 틀임은 분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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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탈로니아 찬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6
조지 오웰 지음, 정영목 옮김 / 민음사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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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보다 더 큰 그릇을 알지 못한다. 매 순간 지구에 사는 수십억 명의 기억을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을 지구가 아닌 우주의 차원으로 넓힌다면 '시간'은 가늠할 수 없는 용량으로 늘어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시간'에 담긴 인류의 과거 기억들을 찾아 여행을 떠나다 보면 장소와 시간은 다르지만 현재의 상황과 흡사한 어떤 사건들과 더러 마주치게 된다. 역사는 끝없이 반복되는 까닭에 실체적인 사실은 기록을 통해 확인한다고 하지만 기록되지 않은 개개인의 감정이나 느낌은 또 어찌하랴. 우리는 역사 속 실체가 업는 누군가의 감정이 그리울 때 그 시절에 쓰인 시를 읊거나 소설을 읽는다. 그렇게 우리가 시대를 오가며 감정을 공유하는 까닭은 변하지 않는 인간의 도리를 '시간' 속에서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조지 오웰의 <카탈로니아 찬가> 역시 그런 소설 중 한 권이 아닐까. 인간이라면 마땅히 읽어야 할, 스페인 내전에서 죽어간 어떤 순수한 영혼을 통해 밝혀진 불멸의 정의를 깨우치는 기회를 갖기 위해.


"나는 신문 기사를 쓸까 하는 생각으로 스페인에 갔다. 하지만 가자마자 의용군에 입대했다. 그 시기, 그 분위기에서는 그것이 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유일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때까지도 카탈로니아는 무정부주의자들이 실질적으로 장악하고 있었다. 혁명은 여전히 활발하게 진행중이었다."  (p.11)


일반 독자들이 하는 조지 오웰에 대한 가장 큰 오해는 그가 단지 <1984>나 <동물농장>과 같은 소설을 통해 문단에 진출했을 거라는 막연한 추측이다. 그러나 이튼을 졸업한 후 대학에 진학하지 않았던 그는 인도 제국경찰에 들어가 버마(미얀마)에 부임하였고, 그곳에서 제국주의의 모순과 한계를 절감하였던 그는 제국주의의 허상을 비판하는 일에 누구보다도 앞장서게 되는데 그것이 그가 문필 활동을 하게 된 계기였다고 한다. 파리에서 노숙자 생활을 경험했던 그가 그때의 기억을 되살려 쓴 르포르타주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 잉글랜드 북부 노동자의 가난한 삶을 그린 <위건 부두로 가는 길>, 1937년 1월 스페인 통일노동자당 민병대 소속으로 스페인 내전에 참전하여 바르셀로나 전선에서 목에 총상을 입고 스페인을 탈출하여 프랑스로 건너간 후 그때 느꼈던 이데올로기에 대한 환멸을 기록한 <카탈로니아 찬가> 등은 기자 혹은 에세이스트로서의 그의 역량을 여실히 드러낸 작품으로서 많은 비평가들도 인정하는 바 나 역시 산문가로서 조지 오웰의 천재성을 실감하게 된다.


"아침 5시, 한쪽 구석에서 있었던 일이다. 아침 5시는 늘 위험한 시간이었다. 동이 트면서 해를 등지게 되기 때문이다. 흉벽 위로 머리를 내밀면 하늘을 배경으로 머리 윤곽이 뚜렷이 드러났다. 나는 보초들에게 교대 준비를 하라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하는 도중이었는데 갑자기 어떤 느낌이 왔다. 아주 생생하게 기억하기는 하지만, 그 느낌을 말로 표현하기는 무척 어렵다. 대략적으로 말해서, 폭발 한가운데 서 있는 느낌이었다. 크게 꽝 하는 소리와 함께 사방으로 빛이 번쩍거려 앞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엄청난 충격을 느꼈다." 통증은 없었다. 아주 격렬한 충격만 느꼈을 뿐이다. 전극에 몸이 닿았을 때의 느낌과 동시에 완전한 무력감을 느꼈다. 짓눌리고 움츠러들어 무(無)로 변해버리는 느낌이었다."  (p.238)


자신의 의용군 체험담과 아울러 스페인 공산당에 대한 고발을 담은 <카탈로니아 찬가>는 조지 오웰의 이력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소련이 연합국의 일원이었던 관계로 소련에 대한 비판을 쉬쉬하는 분위기였지만 오웰은 "서양의 사회주의 운동에 소련의 신화가 끼친 부정적 영향"에 맞서 싸우려 노력했다는 점이다. 조지 오웰은 자신이 왜 의용군에 입대해 싸웠는지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무엇을 위해 싸우느냐고 묻는다면 '공동의 품위를 위해서'라고 대답했을 것이다."라고. 어쩌면 우리는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인 '공동의 품위'를 너무 등한시하며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법은 만인에게 평등하지 않고 만 명에게만 평등하다.'고 비꼬았던 고 노회찬 의원의 말이 지금도 생생하다.


"이상한 일이지만, 그 경험 전체를 통해 인간의 품위에 대한 나의 믿음은 약해지기는커녕 오히려 강해졌다. 내가 한 이야기가 사람들을 오도하지 않기 바란다.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누구도 완벽하게 진실하지도 않고 또 진실할 수도 없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본 것 외에는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확신하기 힘들며, 모두가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당파적인 입장에서 글을 쓰게 된다."  (p.294)


조지 오웰을 떠올릴 때마다 나는 언제나 김훈 작가를 생각하곤 한다. 두 사람 모두 저널리스트로서 문단 활동을 시작했다는 점에서 글의 논리성이나 문장의 적확성을 따지는 면에서 무척이나 닮아 있다. 다만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의 맹점이나 허점을 적극적으로 비판하고자 했던 조지 오웰에 비해 김훈 작가는 너무나 나약한 측면이 있는 건 사실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민간인 학살, 윤석열 정권의 민주주의 파괴 등 우리가 직면한 위기를 가장 먼저 감지하여야 하는 이가 모든 예술가라면 이에 가장 선봉에 서서 저항해야 할 사람들 역시 바로 그들일 것이다. 문학이, 그림이, 음악이 지구인의 아픔을 보듬지 않는다면 그것은 다만 헛된 노력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 정도의 작품은 감정이 없는 인공지능에 맡겨도 충분할 테니까 말이다. 우리가 예술을 감상하는 까닭은 서로의 가슴으로 흐르는 감정을 공유할 수 있기 때문일 터 그것이 없다면 예술은 무슨 소용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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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롭지만 힘껏 인생을 건너자, 하루키 월드
장석주 지음 / 달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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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기억이 의식과 무의식으로 나뉜다면 의식 또한 타인에게 언제든 밝힐 수 있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으로 나눌 수 있겠다. 굳이 명명하자면 '백색 의식'과 '흑색 의식'쯤으로 말할 수 있으려나. 그것이 어떻게 이름 붙여지든 간에 '흑색 의식'은 내 기억은 또렷하지만 타인에게 밝힐 수 없거나 밝힐 필요가 없는 것들, 이를테면 타인에게 밝혔을 때 나나 다른 어느 누구에게도 실익이 없는 것들은 우리의 삶에서 생각보다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이것은 마치 우주의 구성 물질로 추정되지만 아직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이른바 암흑 물질의 존재와 크게 닮아 있다. 나의 의식에서도 그러한 기억들은 꽤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불필요한 것들이니 차라리 무의식의 영역으로 자리 이동을 했으면 싶지만 그게 어디 내 뜻대로 쉽게 옮겨 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인간이란 입이 방정인 경우가 많은지라 의식의 세계에서 떠도는 기억들은 언젠가 실익도 없이 누군가에게 떠벌려지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이 수시로 들게 마련이고.


"하루키 소설은 우리 안의 노스탤지어를 자극한다. 노스탤지어는 기억의 내밀한 삶에 가닿으려는 불가능한 욕망이고, 혹은 욕망이 품은 욕망의 불가능함이다. 노스탤지어는 잃어버린 것을 향한 오마주이다. 따라서 그것은 감미로운 슬픔을 동반한다. 노스탤지어는 가리키는 최종 목적지가 과거 - 미래이고, 예전에는 있었지만 지금은 없는 장소이다. 사라진 시간과 없는 장소에 가닿으려는 불가능으로 부풀어오른 욕망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늘 좌절의 슬픔으로 귀결되는 것이다."  (p.54)


시인이자 장서가로 잘 알려진 장석주 작가의 책 <외롭지만 힘껏 인생을 건너자, 하루키 월드>는 꽤나 매력적이다. 물론 하루키의 책에 관심이 없거나 하루키가 쓴 어떤 소설이나 에세이도 읽어본 적이 없는 사람에게는 이 책 역시 따분하기 짝이 없는 그런 책일 수밖에 없겠지만 말이다. 이상하게도 일본뿐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하루키에 대한 평은 극과 극으로 나뉜다. 하루키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종종 하루키 소설의 선정성이나 가벼움 등을 들어 공격하곤 한다. 반면에 하루키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소설의 내면에 깔린 독자적인 세계, 즉 '하루키 월드'에 대해 열광한다. 양자 사이의 접점은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하루키의 작중인물이 보여주는 비사회성은 의미심장하다. 그들은 사회에 편입되지 못한 채 혹은 편입되기를 거부하며 바깥으로 미끄러지며 익명으로 떠돈다. 그들은 메마르고 사악한 현대사회를 떠도는 익명의 표류자다. 고도자본주의 세계는 잃어버린 낙원의 대체물이다. 그것은 매혹이자 혐오의 세계다. 어느 날 예기치 않게 평범한 일상성의 바깥으로 한걸음 내딛는 그들은 이내 엄청난 수상한 사건 속으로 빠져들어간다. 그때 펼쳐지는 비현실적 모험의 연쇄는 진정한 '나'를 찾아가는 회귀의 여정이다. 하루키의 소설을 읽는 일은 바로 자아로의 회귀의 여정을 되짚어보는 일이다."  (p.131)


나는 딱히 읽고 싶은 책이 없거나 독서 권태기에 접어들 때마다 하루키의 책을 읽곤 한다. 하루키의 책이 좋은 이유는 여러 가지로 많지만 그중 하나는 아무 생각 없이 책에 빠져들 수 있다는 점이다. '레드썬' 하고 외치면 금세 최면에 빠져드는 것처럼 말이다. 장석주 시인은 '봄날 햇볕 아래서 무릎 위에 책을 올려놓고 읽으면 행복해질 작가를 꼽자면 나는 망설이지 않고 하루키를 꼽겠다.'고 한다. '하루키 소설을 맛있는 빵을 조금씩 떼어먹듯 읽었다'는 시인의 심정을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아무리 뛰어난 작가라도 마음만 먹는다고 뚝딱 내놓을 수 있는 게 소설이 아니다 보니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은 언제나 목을 빼고 기다리게 되는 법이다. '테드 창'이 그렇고 앤드루 포터'가 그렇다. 너무 아쉬워서 아껴가며 읽다 보면 때로는 감질이 나서 참지 못하고 후루룩 다 읽어버리는 경우도 있지만 그럼에도 다음 작품에 목이 마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소설에 맛이 있다면 하루키 소설은 봄날 햇빛의 맛이다. 그것은 상큼하고, 아릿하고, 슬프고, 허무하고, 웃음을 짓게 하는 복잡한 맛이다. 반쯤 감은 눈의 속눈썹에 엉기는 햇빛 알갱이의 찬란함! 하루키 소설의 인상은 그런 것이다. 그의 소설엔 살아 있음이 주는 기쁨과 상실로 빚어진 비애, 그리고 적당량의 멜랑콜리가 버무려져 있다. 그것은 밝되 슬프게 빛난다."  (246)


1979년에 쓴 무라카미 하루키의 첫 소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에 나오는 한 구절 "모든 건 스쳐지나간다. 누구도 그걸 붙잡을 수는 없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를 가만가만 되뇌다 보면 저 너른 벌판을 건너온 바람이 나의 빈 가슴속을 통과하여 영원의 품으로 안길 것 같은 느낌이 들곤 한다. 살면서 용서하지 못할 것도, 굳이 내려놓지 못할 욕심도 하루키의 책을 읽는 이 순간에는 존재하지 않을 것만 같다. 사는 게 별것 아니라는 생각이 무작정 들었던 것도 하루키 소설 덕분이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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껑충하게 큰 개망초의 여린 꽃대가 바람에 흔들린다. 바람에 몸을 맡기고 춤을 추듯 흔들릴 때마다 누군가를 애타게 부르는 듯 서글픈 마음이 북받친다. 고향, 어머니, 소식도 없는 어릴 적 친구... 바람은 그렇게 꽃대 무성한 개망초의 군락에서 장난꾸러기 어린애처럼 한참을 머물다가 가겠노라는 인사도 없이 조용히 스러지곤 했다. 비가 예보된 하늘에는 서서히 먹구름이 몰려들고 산책을 나온 사람들은 서둘러 비를 피하려는 듯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습기를 머금은 끈적끈적한 바람이 온몸을 훑고 지나간다. 어제보다는 한결 낮아진 기온.


조지 오웰이 쓴 <카탈로니아 찬가>를 다시 읽고 있다. 조지 오웰은 사실 소설보다는 신문기사와 논평에 더 특화된 인물인 듯 생각되지만 <동물 농장>이나 <카탈루니아 찬가>에서 보이는 그의 문학적 재능 역시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물론 조지 오웰을 좋아하는 독자 중에는 나와 반대되는 생각을 가진 사람도 많겠지만 말이다. 둘러치든 메치든 조지 오웰의 탁월한 글솜씨가 나와 같은 사람의 평가에 의해 달라지는 건 전혀 없겠지만, 아무튼.


내가 <카탈루니아 찬가>를 다시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유엔 국제사법재판소(ICJ)가 24일 이스라엘에 가자지구 최남단 라파 공격을 즉각 중단하라고 명령하고 가자지구에 대한 대규모 인도적 지원이 가능하도록 이집트와 통하는 라파 검문소를 개방하는 한편 현장 상황 조사를 위한 제한 없는 접근권을 보장하라고 요구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의 공격은 멈추지 않고 있다. 25일 가자지구 북부 자발리야 인근의 대피소가 드론 공격을 받아 어린이를 포함해 최소 10명이 숨졌다는 CNN 방송의 보도도 있었다. 이스라엘의 이러한 잔인성은 히틀러를 능가하면 능가했지 결코 뒤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국제 사회는 이스라엘에 대한 제재를 가하지 않고 있다. 팔레스타인을 국가로 인정하겠다는 몇몇 나라가 등장했을 뿐이다. 노르웨이, 아일랜드, 스페인이 그들 국가이다. 이스라엘이 지금까지 3만 명이 넘는 팔레스타인 민간인을 학살했음에도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고 있는 이 현실에 대해 미국의 대학생과 유럽의 시민들이 시위를 하고 있을 뿐이다.


"일본의 지진? 중국의 기근? 멕시코의 혁명? 걱정 말라. 내일 아침이면 현관에 우유가 놓여 있을 것이고, 금요일에는 <뉴 스테이츠먼>이 나올 것이다. 산업 도시는 멀었다. 연기와 궁핍의 얼룩은 지구 표면의 완만한 곡선에 감추어져 있었다. 이곳은 내가 어린 시절 알던 영국 그대로였다. 철로 때문에 파헤친 곳은 야생화로 덮여 있다. 외진 풀밭에서는 윤택한 빛을 발하는 준마들이 풀을 뜯으며 생각에 잠겨 있다. 천천히 흐르는 냇가에는 버드나무들이 우거져 있다. 느릅나무의 녹색 가슴, 오두막 정원의 참제비고깔, 이윽고 런던 외곽의 드넓고 평화로운 광야, 진창 같은 강물 위의 짐배, 낯익은 거리, 크리켓 시합과 왕족의 결혼을 알리는 포스터, 크리켓 투수 모자를 쓴 남자들, 트라팔가 광장의 비둘기, 빨간 버스, 파란 제복의 경찰관. 모두가 영국의 깊고 깊은 잠을 자고 있다. 나는 때때로 우리가 폭탄의 굉음 때문에 화들짝 놀라기 전에는 결코 그 잠에서 깨어나지 못할 것 같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카탈로니아 찬가' 중에서)


껑충하게 큰 개망초의 여린 꽃대가 여전히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예술은 정치와 무관해야 한다는 견해 자체도 하나의 정치적 태도'라고 썼던 조지 오웰의 판단은 현대의 작가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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