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엔 코로나19의 확산으로 사람들과 만나는 것도 제한적일 수밖에 없지만 몇몇 제한된 사람들과의 만남에서도 속 터지는 경험인 아주 없는 건 아니어서 때로는 '이 사람들이 지금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동시대의 인물이 맞나?' 하는 의심이 들 때가 더러 있다. 그것은 대개 정치인에 대한 개인적 혹은 일부 지지층의 평가를 대신 전달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데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독재와 무수히 많은 반헌법적 행위에 대해 비난할라치면 그들의 주장인 즉, "누구나 자신의 인생에서 공과가 있게 마련이고 한 사람을 평가함에 있어서는 그의 공과를 함께 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일견 일리가 있는 주장인 듯 보이지만 이 말보다 더 허무맹랑한 말도 다시없을 것이다. 예컨대 나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과를 지적했을 뿐이고, 그가 정권에 있을 때 독재정치를 펼침으로써 자신은 처벌조차 받지 않았을 뿐 아니라 국민들도 그의 죄를 따져 물을 수 없었던 역사적 현실을 안타까워하는 것인데, 말하자면 공을 말하는 자리가 아니었음에도 이런 논리를 들고 나오는 것이다.

 

세상을 살면서 모든 것을 잘못한 이도, 무결점의 삶을 산 사람도 있을 수 없다. 인생은 우리의 생각보다 길기 때문이다. 공과를 함께 논한다면 수많은 사람을 학살한 히틀러나 일본의 A급 전범들, 심지어 곧 출소하는 조두순에게서도 과만 발견할 수 있는 게 아니라 공도 찾을 수 있다. 그렇다면 그들 역시 그 공에 의해서 영웅 취급을 해야 하는가 말이다. 죄는 죄대로, 공은 공대로 그때그때마다 그에 합당한 대가를 받아야 마땅한 것이다. 그러나 권력자라는 이유로, 경제적으로 부유하다는 이유로 죄에 대해 처벌을 받지 않았다면 후손들은 그에 합당한 욕을 하는 게 어찌 보면 당연한 일 아니가. 당대에 그는 자신의 공에 대한 대가를 누릴 만큼 누렸으니까 말이다.

 

‘하나의 악으로 그 선을 잊지 말고, 작은 흠으로 그 공을 덮지 마라(不以一惡忘其善. 勿以小瑕掩其功)’고 했던 당 태종 이세민의 조언은 일반인에 대한 평가나 지금 현재 살아 있는 자에 대한 평가에는 유효할지 모르나 권력자로 살았던 역사적 인물에 대한 평가에서는 적절치 않다. 이미 그는 살아생전에 공에 대한 대가를 누릴 만큼 충분히 누렸기 때문이다. 사후에는 이제 그에 대한 과가 들추어질 뿐이다. 그것이 공정한 역사가 아닌가.

 

다행스럽게도 전두환 씨나 이명박 씨에 대한 공과 과는 당사자가 살아 있을 때 진행되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도 지금 현재 진행 중에 있지만 그들 모두가 죽고 난 뒤에는 후세인들이 그들의 공과를 함께 평하게 될 것이다. 처벌받지 않은 자의 과를 사후에 논할 때 '한 사람을 평가함에 있어서는 그의 공과를 함께 보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참으로 한심하기 그지없는 논리가 아닐 수 없다. 21세기를 사는 현대인이, 그것도 대학까지 나온 사람이 그런 무식한 말을 입에 담는다는 건 부끄러운 일이다. 인생은 길고, 살다 보면 누구나 선과 악을 오갈 수밖에 없는 게 인생이다. 그러니 그런 어처구니없는 논리로 사람들을 현혹시키지 말자. 날씨가 차다. 오늘은 대입 수능일이자 세계 장애인의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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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레사 2020-12-03 18: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 꼼쥐님은 좋아요를 안 누를 수가 없네요

꼼쥐 2020-12-09 18:28   좋아요 0 | URL
테레사 님이 저의 글을 너무 좋게 봐주신 게 아닐까요?
기분 좋은 댓글 감사합니다.^^
 

'섭섭함'이란 감정은 타인에 대해 다분히 폭력적이다. 예컨대 이런 것이다. 내가 원하는 순간에 상대방이 나의 '감정회로'에 접속하지 않았다는 것인데 이것은 곧 타인의 '감정회로'를 나와 대등한 어떤 것으로 인정하지 않고 나의 '종속회로'로 만들겠다는 뜻이다. 상대방은 나의 '감정회로'에 종속된 하위 회로인 까닭에 나의 감정은 있는 그대로 언제든 상대방에게 전달될 수 있고 나는 무시로 변하는 내 기분을 상대방이 알아챘는지 그렇지 않은지 신경 쓸 필요도 없고, 내 기분을 몰라주는 상대방으로 인해 섭섭함을 느낄 이유도 없는 것이다. 말하자면 '섭섭함'이란 상대방의 '감정회로'를 내 '감정회로'에 종속시키지 못한 것에 대한 불편한 감정일 뿐이다. 그러므로 '기대에 어그러져 불만스럽거나 못마땅하다'는 뜻의 '섭섭하다'는 상대방의 입장에서 다분히 폭력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며, 나의 입장에서 무척이나 이기적인 단어일 수 있다.

 

그러나 가족이나 연인 등 친밀한 관계라고 믿어 의심하지 않는 상대방에 대해 우리는 그가 자신의 '감정회로'에 24시간 연결되어 있다고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성적으로는 그들 역시 독립된 개체라는 걸 인정하면서도 감정적으로는 그렇게 믿으려 들지 않는 것이다. 인간이라는 게 대부분 이성보다는 감정의 지배를 받을 때가 많은 까닭에 자신의 감정을 그들 중 누군가에게 단 한 번도 설명한 적 없지만 자신의 기분을 몰라주는 상대방을 향해 "그걸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 하고 되묻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연출하는 것이다.

 

날씨가 끄물끄물하고 눈이라도 한바탕 휘몰아칠 듯한 이런 날, 나는 캐럴라인 냅의 에세이 <명랑한 은둔자>를 읽고 있다. 쭈욱 계속하여 읽는 건 아니고, 읽다 말다 그렇게 소일하고 있는 것이다.

 

"일요일 아침. 창문으로 햇빛이 새어들고, 새가 노래하고, 계획도 할 일도 없는 하루가 펼쳐져 있다. 많은 사람에게는 이것이 주중 일하는 날들의 터널 끝에서 맞는 여유의 빛이자 기쁨이다. 하지만 나는 이런 날이 두렵다. 이런 날 나는 뒤숭숭한 마음으로 깬다. 막연한 갈망, 내 마음의 문을 긁어대는 이름 모를 불안, 아릿한 아픔이 느껴진다. 나는 침대에 누운 채로 천장을 응시한다. 그리고 생각한다. 외로워." ('외로움에 관하여' 중에서)

 

'섭섭함'에 대해 말하다가 왜 갑자기 뜬금없이 '외로움에 관하여'를 인용하느냐고? 글쎄, 이렇다 할 맥락은 없다. 사람들은 나처럼 이따금 변덕스럽고, "그걸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 하고 되물으면서 따지듯 싸움을 걸 때도 있고, 나의 '감정회로'에 접속한 그대의 노고에 감동할 때도 있는 것이다. 일요일은 몸보다 감정이 부산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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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문 예이기는 하지만 자신이 마치 시대의 아이콘인 양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대개 단순한 생각으로만 그치지 않고 자신이 정말 시대의 아이콘이라는 확실한 믿음 하에 행동거지며, 남을 대하는 태도며, 사소한 말투까지도 바꾸어 버린다. 어린 시절을 그와 함께 보냈던 한 친구가 길거리에서 우연히 그와 마주쳤을 때 아마도 그 친구는 돌변한 그의 태도에 말을 잃은 채 멀뚱멀뚱 넋을 놓았을는지도 모른다. 친구인 자신을 그는 아마도 자신의 부하나 똘마니쯤으로 여겼을 테니까 말이다.

 

법무부 장관과 검찰총장의 갈등이 심화되는 양상이다. 어쩌면 이것이 마지막 진검승부일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대검찰청은 법무부의 외청이고 개개의 사건에 대한 수사나 기소에 관여할 수는 없지만 예산이나 인사 등 법무부 장관의 지시를 받아야 하는 게 맞다. 검찰청법에도 법무부 장관이 검찰의 최고 지휘 감독자라고 명시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윤석열 검찰총장은 국정감사 자리에서 "일단 법리적으로 보면 검찰총장은 법무부 장관의 부하가 아니다. 만약 부하라면 검찰총장이라는 직제를 만들 필요도 없다"고 말함으로써 자신이 마치 법무부 장관의 위에 군림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오만방자하게도 말이다.

 

엊그제 추미애 법무부 장관은 윤석열 검찰총장의 판사 불법사찰 지시 등 여섯 가지 위법 행위를 들어 검찰총장에 대한 직무배제 조치를 취했다. 이에 반발한 검찰총장은 서울행정법원에 직무배제 처분을 취소해달라는 취소소송을 제기했다. 두 사람 다 각자의 위치에서 취할 수 있는 행동이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고 자신의 주장이나 의견은 언제든 개진할 수가 있으니까 말이다. 그것이 법적으로 정당하냐 그렇지 않으냐 하는 문제는 법정에서 가려지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의 언론 대부분은 윤석열 검찰총장이 마치 권력의 피해자인 양, 불법행위의 희생양인 양 민심을 호도하고 그를 감싸기 위해 진력하고 있다. 사실 윤석열 검찰총장은 대한민국 공무원을 권력 순으로 나열할 때 실세 중의 실세라고 말할 수 있을 텐데 말이다.

 

어느 조직이나 조직의 구성원들이 반드시 지켜야 할 규칙이 있게 마련이고 이를 어기면 좋든 싫든 처벌을 감수해야만 하는 게 현실이다. 조직의 원활한 운영을 위해서는 당연한 일이겠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사기업보다는 공기업이, 공기업보다는 공무원 조직이 규칙의 적용에 있어서도 훨씬 느슨할 뿐만 아니라 구성원의 업무 강도 역시 떨어지는 게 사실이다. 더구나 권력의 정점에 있는 검찰 조직은 그동안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해 오지 않았던가. 그것을 막겠다고 나서니 저항이 클 수밖에... 그러나 하나 명심해야 할 것은 공무원 조직의 구성원은 시대의 아이콘이 아니라 시대의 추종자라는 사실이다. 국민들로부터 시대의 변화에 대해 많이 듣고 그 변화에 묵묵히 적응해 가면 된다. 자신이 시대의 아이콘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는 국민 위에 군림하게 된다. 만약 자신이 시대의 아이콘이 되려 한다면 사업가가 되거나, 작가가 되거나, 종교인이 되어야만 한다. 그도 아니라면 연예인이 되거나. 공무원은 시대의 아이콘과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먼 직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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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그런 건 아니지만 토론이나 대화가 길어지다 보면 바야흐로 이야기는 본점에서 벗어나 전혀 가본 적도 없는 샛길로 흐르게 마련이다. 그럴 때 나는 이야기에도 생명이 깃들어 있구나, 생각하게 된다. 생명이 있다는 건 곧 생각이 있다는 것, 스스로의 길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도 그렇다. 생각이 있고 저마다의 길이 있지 않은가. 누구도 다른 사람과 완전히 똑같은 길을 걸을 수는 없기 때문에 그의 길은 언제나 독자적이다. 생각 역시 언제나 개별적이고 독자적이다.

 

그러므로 소설은 생명이 사라진, 말하자면 죽은 이야기에 불과하다. 시간에 따라 끝없이 변화하는 이야기와는 달리 책으로 출간된 소설은 더 이상의 변화를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죽은 이야기, 생명이 사라진 이야기, 그것은 어쩌면 역사의 기록처럼 미래의 많은 독자들에 의해  수많은 해석과 토론을 이끌면서 새로운 이야기의 소재로 쓰일지도 모른다. 살아 있는 것은 들을 수도, 볼 수도 없다. 우리는 다만 과거를 보고 듣고 느낄 뿐이다. 생명은 그렇다. 한시도 변화를 멈춘 적이 없고 시간에 따라 다만 흘러갈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군가의 생각, 누군가의 이야기를 읽을 수가 없다. 사람의 생각이나 이야기는 멈춤이 없기 때문이다.

 

더불어 '슬픔'은 말로 발화하지 않는 것이 좋다. 슬픔, 기쁨, 두려움 등 실체도 없는 온갖 감정들은 말로써 발화되는 순간 비로소 내 안에 존재하는 '어떤 것'으로 변모하여 굳어지기 때문이다. 한 번 굳어진 것은 스스로 풀어져 흩어지기 어렵다. 서서히 번져오는 슬픔의 그림자를 묵묵히 지켜보거나 내가 보았던 것을 누군가에게 자세히 설명함으로써 '슬픔'은 그렇게 흩어질 수 있으나 내게 다가오는 슬픔을 향해 '슬프다' 하고 말하는 순간 나는 그 '슬픔'을 버선발로 맞는 격이고 '슬픔'은 그대로 내 가슴에 남는다. '꺽꺽' 울음을 토할지언정 '슬프다' 소리 내어 말하지 않는 것, 그것이 어쩌면 슬픔을 이기는 또 하나의 방법일지도 모른다. 때로는 이야기가 슬픔을 낳기도 하고, 이슬을 거둬가는 햇살처럼 당신의 이야기가 나의 슬픔을 앗아가기도 한다. 말끔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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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동, 입동, 입동' 이렇게 서너 번쯤 되뇌면 어느 순간 램프의 요정 지니의 손에 이끌려 겨울 한복판으로 뚝 떨어질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현실의 오늘은 활동하기에 적당한 기온과 따뜻한 햇살, 그리고 미세먼지로 탁해진 시야, 바람에 날리는 분분한 낙엽 등으로 겨울의 느낌과는 다소 거리가 먼 풍경입니다. 우리는 이렇듯 매 순간 자신의 느낌이나 바람 또는 기대 속에서 현실을 왜곡하기도 하고, 현실을 부정하거나 스스로가 만든 상상의 세계로 달아나기도 합니다. 지긋지긋한 현실로부터 달아나듯 말이지요.

 

2,30대의 젊은 시절에는 대개 자신이 바라는 자아상을 막연하게, 혹은 추상적으로 설정하거나 이러이러한 모습이면 좋겠다는 하나의 이미지로 형상화하곤 합니다. 나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가족이나 친구 등 나와 가까웠던 사람들 중 누군가가 내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창에 비치는 석양을 바라보며 '그 사람 참 괜찮은 사람이었는데...' 하는 생각과 함께 나와 얽힌 추억 몇 가지를 자연스레 떠올릴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공공연히 밝히곤 했습니다. 삶의 최대 목적이 마치 누군가의 기억 속에 오래도록 남는 것인 양, 그런 삶이야말로 가장 가치 있는 삶인 양 떠벌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욕심이나 허황된 이미지의 추구야말로 자신의 삶을 나락으로 빠트리고 자신이 원하는 진정한 삶의 모습을 외면하도록 한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기억되기 위해서 살 게 아니라 누군가에게 잊혀지기 위해 살아갈 때 우리들 각자는 자신이 가장 원하고 바라마지 않던 삶의 모습에 가까워질 수 있음을 지금은 조금쯤 알고 있습니다. 타인의 기대와 욕망에서 멀어지려고 애쓸 게 아니라 타인에게 바라는 나의 기대를 내려놓는 일이 삶의 무게를 가볍게 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에게 나에게 바라는 기대와 욕심을 내려놓으라고 명령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타인의 눈에 나는 이런 사람으로 남았으면 좋겠다'는 나의 바람은 언제든지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한 발 더 나아가 그의 기억 속에서 잊혀지는 게 내 삶의 목적이라면 나는 더 대담하게 나의 삶을 계획할 수 있을 듯합니다. 그러나 현실에서의 우리는 그런 욕망을 생의 마지막까지 내려놓지 못합니다. 그게 나와 같은 보통 인간의 한계이자 짊어져야 할 삶의 무게가 아닐까 싶습니다. 오늘은 입동입니다. 그렇다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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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08 17: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1-09 11:20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