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그런 건 아니지만 토론이나 대화가 길어지다 보면 바야흐로 이야기는 본점에서 벗어나 전혀 가본 적도 없는 샛길로 흐르게 마련이다. 그럴 때 나는 이야기에도 생명이 깃들어 있구나, 생각하게 된다. 생명이 있다는 건 곧 생각이 있다는 것, 스스로의 길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도 그렇다. 생각이 있고 저마다의 길이 있지 않은가. 누구도 다른 사람과 완전히 똑같은 길을 걸을 수는 없기 때문에 그의 길은 언제나 독자적이다. 생각 역시 언제나 개별적이고 독자적이다.

 

그러므로 소설은 생명이 사라진, 말하자면 죽은 이야기에 불과하다. 시간에 따라 끝없이 변화하는 이야기와는 달리 책으로 출간된 소설은 더 이상의 변화를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죽은 이야기, 생명이 사라진 이야기, 그것은 어쩌면 역사의 기록처럼 미래의 많은 독자들에 의해  수많은 해석과 토론을 이끌면서 새로운 이야기의 소재로 쓰일지도 모른다. 살아 있는 것은 들을 수도, 볼 수도 없다. 우리는 다만 과거를 보고 듣고 느낄 뿐이다. 생명은 그렇다. 한시도 변화를 멈춘 적이 없고 시간에 따라 다만 흘러갈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군가의 생각, 누군가의 이야기를 읽을 수가 없다. 사람의 생각이나 이야기는 멈춤이 없기 때문이다.

 

더불어 '슬픔'은 말로 발화하지 않는 것이 좋다. 슬픔, 기쁨, 두려움 등 실체도 없는 온갖 감정들은 말로써 발화되는 순간 비로소 내 안에 존재하는 '어떤 것'으로 변모하여 굳어지기 때문이다. 한 번 굳어진 것은 스스로 풀어져 흩어지기 어렵다. 서서히 번져오는 슬픔의 그림자를 묵묵히 지켜보거나 내가 보았던 것을 누군가에게 자세히 설명함으로써 '슬픔'은 그렇게 흩어질 수 있으나 내게 다가오는 슬픔을 향해 '슬프다' 하고 말하는 순간 나는 그 '슬픔'을 버선발로 맞는 격이고 '슬픔'은 그대로 내 가슴에 남는다. '꺽꺽' 울음을 토할지언정 '슬프다' 소리 내어 말하지 않는 것, 그것이 어쩌면 슬픔을 이기는 또 하나의 방법일지도 모른다. 때로는 이야기가 슬픔을 낳기도 하고, 이슬을 거둬가는 햇살처럼 당신의 이야기가 나의 슬픔을 앗아가기도 한다. 말끔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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