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말을 먼저 읽은 소설은 대개 싱겁기 짝이 없는 이야기로 인식되는 것처럼 죽음이라는 결말을 염두에 두고 사람들의 행동 하나하나를 살펴보면 '저 사람이 정말 제정신이가?' 하는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물론 나라고 예외일 리 없다. 잘난 사람이건 그렇지 못한 사람이건 죽음을 전제로 한 인간은 모두 오십 보 백 보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매 순간 죽음을 생각하며 행동한다면 인간의 삶은 무기력해지고 시들시들 메말라가겠지만 말이다.

 

우리나라 사법부의 중요한 판결이 하나 있었다. 고(故) 배춘희 할머니 등 위안부 피해자 12명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원고들에게 1인당 1억 원을 지급하라"고 한 원고 승소 판결이었다. 2013년 8월, 고 배춘희 할머니를 포함한 피해자 12명이 법원에 1인당 1억 원의 위자료 청구 '조정신청'을 낸 지 7년 5개월 만의 일이다. 그동안 일본 정부는 조정신청서 수령도 거부했음은 물론 조정기일에도 참석하지 않았던 까닭에 2016년 1월 법원의 정식 손해배상 청구소송으로 전환되었다. 일본 정부는 4번의 변론 기일에도 참석하지 않았고, 박근혜 정부의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가 이 소송을 지연시키면서 '기각'이나 '각하' 쪽으로 몰고 가려는 개입 정황이 나오기도 했다.

 

비록 늦기는 했으나 사법부의 이와 같은 판결에 국민들은 대체로 수긍하는 분위기이다. 물론 지금도 일본의 입장을 편들면서 우리나라 사법부를 비난하는 사람도 드물게 존재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이런 댓글은 너무하지 않은가. "꼴랑 1인당 1억원 받으려고 100억 포기하고 이짓거리 했냐? 우리나라에서 판결했다고 1억을 주지도 않을 것이고 일본에서 배상의무 없다고 판결하면 우리도 따를거 아니잖아. 헛짓거리 그만하고 외교적으로 풀어라 그럴 능력 없으면 위안부 팔이 하지말아라 똑같은 수법도 여러번 써먹으면 식상해서 다 돌아선다. 이미 너희들은 쑈는 국민들이 다 눈치챘거든." 모르긴 몰라도 이 댓글을 쓴 사람도 길어야 몇십 년 이내에 이 세상 사람이 아닐 터인데 그렇게 살아 뭘 하려는 것인지... 댓글놀이도 정도껏 해야 정신건강에 좋다. 호환 마마보다 더 무서운 게 sns라고 하지 않던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무작정 앞만 보고 달려가는 막무가내의 삶을 나는 미련하다거나 대책 없다거나 바보 같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어느 순간 삶은 백지처럼 하얗게 변하고 마는 것, 그러자면 호흡이 멈춰질 정도의 숨 가쁨이 있어야 하지 않겠나. 세월도 잊고, 검질기게 따라붙는 운명도 잊고, 주변 사람들의 시선도 모두 잊은 채, 숨이 멎지 않을 정도로 한껏 달려 보는 것. 그렇게 나의 속도를 가늠해 본다는 건 인생의 어느 시점을 통과하는 통과의례와도 같은 것. 그것이 꼭 밥벌이에 국한되라는 법은 없다. 연애도 좋고, 취미도 좋고, 남들이 거들떠도 보지 않는 멈춤이어도 좋다. 뜬금없이 멈춤이라니? 하고 의문을 표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멈춤'이란 말하자면 '치열한 멈춤'이란 자신의 의지가 개입되지 않으면 절대로 가능하지 않은 일, 어쩌면 우리들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게 '멈춤'인지도 모르겠다.

 

습관처럼 새해를 맞고, 뒤질세라 남들 다 하는 신년 계획을 세우고, 출처도 떠오르지 않는 여러 책들의 토막 상식을 모아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라'거나 '애쓰지 말고 편안하게' 그리고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고 하면서 삼 일도 되기 전에 이른 포기를 하는, 의지박약의 자신의 모습에 하루쯤 좌절하는, 그리고 한 달이 지나기 전에 언제 그랬냐는 듯 그날이 그날 같은 날들을 살아가는 게 우리들 '일 년 살이'가 아닐까. 세상은 쉼 없이 나이 들어가는데 눈밭의 푸른 소나무처럼 나만 홀로 그대로일 거라는 착각 속에, 후회와 반성은 연말연시에나 하는 연례행사쯤으로 생각하는 쉽디쉬운 사고방식.

 

시무식이 있었던 1월 4일의 아침, 사람들의 얼굴에는 희망보다 공포와 두려움이, 기쁨보다 인내의 질긴 그늘이, 우리 주변을 감싸는 무거운 침묵이 차례로 호명되었다. 숨이 멎지 않을 정도로 한껏 달려볼 이유도, 모든 걸 놓아버리고 치열하게 멈춰볼 의지도 우리 곁에선 발견되지 않았다. 너무도 쉬웠던 2021년의 시무식은 그렇게 끝났고, 각자의 업무는 힘겹게 시작되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인간의 뜻과 신의 뜻이 언제나 일치하는 것은 아니어서 속 좁은 인간은 툴툴대며 불만을 토로하게 마련이지만 그렇다고 하여 신의 뜻이 언제나 옳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래서인지 "하나님 까불면 죽어."라고 협박하거나 왜 하나님만 있고 둘님은 없느냐고 말도 되지 않는 의문을 제기함으로써 인간의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신의 의지를 우회적으로 비판하는 인간(같지도 않은)들도 존재하기는 하지만 불만이 쌓이던 시기를 한참 지나쳐 그 시절을 돌이켜보면 신의 뜻이 과연 옳았구나, 저절로 머리가 끄덕여지는 경우가 종종 있을 듯싶다.

 

지금과 같은 연말연시가 되면 융통성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없는 시간의 엄격성 앞에 무력감을 느끼곤 한다. 연초가 지나고 그날이 그날 같은 날들이 흐르다 보면 세월의 흐름에 마냥 둔감해진 나는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내기에 바쁜, 남들과 하나 다를 게 없는, 맹목적 시간 소비자의 한 사람으로 돌변하게 마련이지만 유독 한 해를 마감 짓고 시작하는 연말연시만 되면 훌쩍 흘러버린 세월을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2021년 신축년의 새해 벽두부터 동장군의 위세가 무섭다. 날씨가 따뜻했다고 할지라도 코로나의 확산세가 무서워 집 밖을 벗어난다는 게 쉽지 않았겠지만 말이다. 그러다 보니 지난 드라마를 몰아서 보고 있다. <특수사건 전담반 TEN 시즌1>을 보다가 마음에 드는 대사가 있어 옮겨 적어 본다.

 

"비밀이 권력이 되려면 뭐가 필요한 지 알아? 침묵! 어떤 경우에도 공개되지 않을 것이라는 신뢰, 그것이 비밀을 공유하는 사람들 사이에 존재해야 돼! 그래야 그 신뢰를 바탕으로 권력을 만들 수가 있지."

 

2021년에는 공수처의 출범과 함께 권력구조의 개편이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마키아벨리가 주장했던 것처럼 현실에서 환영받을 개혁이란 없고 권력의 교체만 있을 뿐이다. 법적으로 지난해 7월에 출범했어야 할 공수처가 소위 협치라는 명목 하에 미적대다가 해를 넘기고 만 것이다. 마키아벨리가 주장했던 것처럼 명목상으로 인민을 사랑과 자비로 다스리는 것보다 조금 가혹하고 무자비하더라도 고통의 시간을 짧게 하는 것이 중요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왕국을 획득하는 데는 노력이 많이 들지만 유지하는 데에는 그보다 조금 든다. 새로운 체제를 앞장서서 도입하는 것만큼 실행이 어렵고 성공이 의심스럽고 처리가 위험한 일도 없다. 신질서의 도입자들은 구체제 하에서 이익을 얻던 사람 모두를 적으로 만들게 되고, 신체제에서 이익을 얻게 될 모든 사람들은 단지 미온적인 지지자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구체제에서 이익을 얻던 법조계와 보수 야당, 언론 모두가 하나가 되어 개혁을 반대하는 이유도 그런 까닭이다. 신체제에서 이익을 보게 될 국민 대다수는 다만 미온적인 지지자로 남을 뿐이다. 개혁을 함에 있어서 미적미적 시간을 끄는 게 이렇게 위험한 일임을 현 정부와 여당은 뼈저리게 느꼈을 것이다.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않겠다는 발상은 너무나도 위험한 생각이며 권력을 내주어도 좋다는 것과 진배없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의 몫으로 전가된다. 이런 와중에 여당의 당대표는 감옥에 간 두 전직 대통령의 사면을 말하고 있다. 태극기부대를 제외한 국민 중 어떤 이가 그에게 그런 권한을 주었는가, 따져 묻고 싶은 심정이다. 그것이 과연 우리 후손에게 공정과 정의를 말할 수 있는 선조의 자세인가. 노망이 들지 않고서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소란스럽던 청춘의 시기를 지나면 삶은 어느 정도 차분해지고 제 자리를 찾게 마련이지만 그에 반하여 선명하던 자신만의 색깔은 시나브로 흐릿하게 변하여 나와 타인의 경계마저 분명치 않을 때가 많아진다. 무엇보다 개성을 중시하는 연예인이나 정치인에게 있어서는 그마저도 다르게 받아들여질지 모르지만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삶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혜택은 자신의 고집이나 성격을 모나지 않게 조금씩 변화시켜 타인과의 원만한 삶을 가능케 한다는 점일 것이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우리 부모님들이 귀히 여겼던 '누름돌'은 삶을 대하는 그들만의 철학이 그 돌 속에 고스란히 스며있었는지도 모른다. 강에서 주워 온 반들반들 잘 깎인 돌은 때로는 김칫독 수북한 김치 위에 올려져 그 무게로 숨을 죽여 김치의 맛이 돌게 하기도 하고, 돌확에 담긴 보리쌀을 쓱싹쓱싹 갈아내어 투박한 보리밥을 짓는 일등공신의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세월이 흐를수록 손때가 묻어 반질반질 윤이 나던 '누름돌'을 이제는 도시의 그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누름돌에 담긴 삶의 철학과 함께...

 

사람도 세월에 따라 '누름돌'처럼 둥글둥글 원만한 성격으로 변해가는 건 당연한 일, 불현듯 떠오르는 친구가 있다. 서울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지금은 양재동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운영하고 있는 친구인데 묘하게도 그는 나와 생일이 같아서 대학 시절 각별하게 지냈었다. 고등학교 동창이면서도 생일이 같다는 건 까맣게 몰랐다가 대학에 진학하고 나서야 비로소 알게 된 사실 앞에 우리는 서로 놀라워하며 매년 서로의 생일을 기꺼이 챙겼었다. 순진하기만 했던 그도 이제는 세상에 닳고 닳은 한 명의 노련한 사회인으로 변해 있다.

 

몇 달 전 조국 법무부 장관 기용과 함께 빚어진 현 정권과 검찰과의 갈등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전망했었다. "모든 민주주의 국가에서 비밀은 곧 권력일 수밖에 없고, 비밀을 다루는 기관은 권력도 함께 움켜쥘 수 있지. 그런데 문재인 정권은 비밀을 다루는 가장 큰 조직인 국정원을 빈 껍데기로 만든 상황에서 권력기관의 개혁을 시도하고 있으니 이게 성공할 리가 없지 않겠어? 보수정권이 국정원을 자신들의 손아귀에 쥔 채 놓지 않았던 까닭도 검찰이나 감사원, 국세청, 혹은 언론과 같은 권력기관을 자신들의 뜻대로 움직이게 만들기 위함이었던 건 잘 알 거야. 그런데 문재인 정권은 아마추어처럼 국정원을 먼저 개혁한답시고 국내 사찰을 중지한 건 큰 패착이지. 물론 평생 인권변호사로 지냈던 대통령이니 국정원을 좋게 보았을 리 없지만 권력기관 개혁의 우선순위를 거꾸로 했다는 건 국정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것 같아. 그러니 이번 개혁은 실패할 수밖에 없어."

 

애석하게도 그의 예상은 어느 정도 맞아 들어가는 듯하다. '가재는 게 편'이라고 사법부도 검찰의 손을 들어주는 듯하고, 언론 역시 검찰의 입장만 대대적으로 보도하고 있으니 말이다. 며칠 전 있었던 검찰총장에 대한 징계 효력정지 신청을 인용한 것도 그와 같은 맥락이었을 터, 그는 이에 대해 검찰총장의 판단이 자신의 자존심은 살릴 수 있었겠지만 정치적으로는 얻은 게 전혀 없다고 판단했다. "검찰총장이 징계를 수용했으면 국민들의 동정표가 보수 야당으로 기울고 그러면 퇴임 후 자신의 입지도 높아질 텐데 오히려 그 반대 결과가 나오는 바람에 자존심은 지켰을지 몰라도 수사권을 경찰에게 넘겨주게 생겼고, 공수처 탄생을 앞당겼고, 더 이상의 논란거리도 없애버렸으니 그로서는 사실 얻은 게 없는 셈이다." 말하자면 그는 검찰총장의 고집 때문에 보수 야당이 반격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친 셈이라고 보았다. 그로 말미암아 검찰 조직은 쪼그라들고, 언론도, 보수 야당도 트집을 잡아 물고 늘어질 거리가 없어졌다는 게 그의 평이다.

 

나는 지금 수전 손택의 저서 <타인의 고통>을 읽고 있다.

"지금 관직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임무가 사람들을 속이는 것이라는 사실을, 다시 말해서 사람들의 자신감을 부추기고, 슬픔을 조종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오래 전부터 심리요법의 정치, 특히 논쟁을 수반하고 허심탄회함을 장려하는 민주주의 정치를 대신해 왔던 것이다. 부디 다같이 슬퍼하자. 그러나 다같이 바보가 되지는 말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하루의 풍경이 내 주변으로부터 아주 조심스럽게 물러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이를테면 그것은 자신을 지배하는 폭군의 심기를 어떻게든 거스르지 않으려 노력하는 궁중 내시의 조심스러운 발걸음을 연상케 한다. 그럴 때면 한순간 폭군으로 변한 내가 물러나는 풍경을 향해 "멈춰!" 하고 말도 안 되는 명령을 내린다 해도 물러나던 풍경들은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 붙박이로 멈춰 설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그런 날은 대개 하루가 유난히 길게 느껴졌었고, 마음은 내내 편치 않았으며, 시기도 가늠할 수 없는 어느 한순간의 행복했던 추억이 아이가 읽던 어느 그림책의 화려한 색상처럼 선명했으며, 완벽한 절망이 내 주변을 가시나무 울타리처럼 둘러싸고 있는 듯했다.

 

"Merry Christmas!"라는 카톡 인사가 온종일 서로의 휴대폰을 오갔던 성탄절 당일의 무표정한 하루, 나른한 겨울 햇살이 온 거실을 장악했으며, 앉은뱅이책상 위에 덩그러니 놓인 한 권의 책과 치우지 않은 커피잔과 휴일의 무료함이 담긴 접시 위의 과자 부스러기와 말라붙은 귤껍질과 침묵이 병풍처럼 펼쳐진 공간으로 길게 이어지던 캐럴 몇 줄기. 나는 간간이 잠에 빠져들었고, 마땅히 할 일을 찾지 못해 커피를 마셨으며, 독서를 방해하는 카톡 알림음을 핑계로 다시 또 잠에 빠져들었고, 그렇게 비몽사몽의 시간을 오가는 동안 햇살이 홀로 거실을 지켰다.

 

햇살이 물러간 거실에도 어둠이 내리고 있다. 온종일 햇살이 놀다 간 거실에서 김애란의 산문집 <잊기 좋은 이름>을 읽고 있다.

 

"오래된 것들은 대부분 작아지고 작아져 암흑 속으로 사라지는데 유독 옛날이야기를 떠올리면 왜 빛이 연상되는지 모르겠다. 오랜 이야기 속 어떤 불빛이 불현듯 서사의 온도를 바꿀 때, 누군가의 얼굴을 낯설게 비출 때 내 몸에 인 긴장이 감광필름처럼 남은 탓인지 모르겠다. 혹은 이야기가 태어난 자리에 빛光이, 불火이 있는 자리에 입과 귀가 늘 있어왔기 때문인지도." ('빛과 빚' 중에서)

 

낮에 왔던 햇살이 어둠을 향해 달려가듯이 오늘을 사는 사람들은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어둠과 함께 삶의 허기가 밀려온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