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란스럽던 청춘의 시기를 지나면 삶은 어느 정도 차분해지고 제 자리를 찾게 마련이지만 그에 반하여 선명하던 자신만의 색깔은 시나브로 흐릿하게 변하여 나와 타인의 경계마저 분명치 않을 때가 많아진다. 무엇보다 개성을 중시하는 연예인이나 정치인에게 있어서는 그마저도 다르게 받아들여질지 모르지만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삶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혜택은 자신의 고집이나 성격을 모나지 않게 조금씩 변화시켜 타인과의 원만한 삶을 가능케 한다는 점일 것이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우리 부모님들이 귀히 여겼던 '누름돌'은 삶을 대하는 그들만의 철학이 그 돌 속에 고스란히 스며있었는지도 모른다. 강에서 주워 온 반들반들 잘 깎인 돌은 때로는 김칫독 수북한 김치 위에 올려져 그 무게로 숨을 죽여 김치의 맛이 돌게 하기도 하고, 돌확에 담긴 보리쌀을 쓱싹쓱싹 갈아내어 투박한 보리밥을 짓는 일등공신의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세월이 흐를수록 손때가 묻어 반질반질 윤이 나던 '누름돌'을 이제는 도시의 그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누름돌에 담긴 삶의 철학과 함께...
사람도 세월에 따라 '누름돌'처럼 둥글둥글 원만한 성격으로 변해가는 건 당연한 일, 불현듯 떠오르는 친구가 있다. 서울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지금은 양재동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운영하고 있는 친구인데 묘하게도 그는 나와 생일이 같아서 대학 시절 각별하게 지냈었다. 고등학교 동창이면서도 생일이 같다는 건 까맣게 몰랐다가 대학에 진학하고 나서야 비로소 알게 된 사실 앞에 우리는 서로 놀라워하며 매년 서로의 생일을 기꺼이 챙겼었다. 순진하기만 했던 그도 이제는 세상에 닳고 닳은 한 명의 노련한 사회인으로 변해 있다.
몇 달 전 조국 법무부 장관 기용과 함께 빚어진 현 정권과 검찰과의 갈등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전망했었다. "모든 민주주의 국가에서 비밀은 곧 권력일 수밖에 없고, 비밀을 다루는 기관은 권력도 함께 움켜쥘 수 있지. 그런데 문재인 정권은 비밀을 다루는 가장 큰 조직인 국정원을 빈 껍데기로 만든 상황에서 권력기관의 개혁을 시도하고 있으니 이게 성공할 리가 없지 않겠어? 보수정권이 국정원을 자신들의 손아귀에 쥔 채 놓지 않았던 까닭도 검찰이나 감사원, 국세청, 혹은 언론과 같은 권력기관을 자신들의 뜻대로 움직이게 만들기 위함이었던 건 잘 알 거야. 그런데 문재인 정권은 아마추어처럼 국정원을 먼저 개혁한답시고 국내 사찰을 중지한 건 큰 패착이지. 물론 평생 인권변호사로 지냈던 대통령이니 국정원을 좋게 보았을 리 없지만 권력기관 개혁의 우선순위를 거꾸로 했다는 건 국정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것 같아. 그러니 이번 개혁은 실패할 수밖에 없어."
애석하게도 그의 예상은 어느 정도 맞아 들어가는 듯하다. '가재는 게 편'이라고 사법부도 검찰의 손을 들어주는 듯하고, 언론 역시 검찰의 입장만 대대적으로 보도하고 있으니 말이다. 며칠 전 있었던 검찰총장에 대한 징계 효력정지 신청을 인용한 것도 그와 같은 맥락이었을 터, 그는 이에 대해 검찰총장의 판단이 자신의 자존심은 살릴 수 있었겠지만 정치적으로는 얻은 게 전혀 없다고 판단했다. "검찰총장이 징계를 수용했으면 국민들의 동정표가 보수 야당으로 기울고 그러면 퇴임 후 자신의 입지도 높아질 텐데 오히려 그 반대 결과가 나오는 바람에 자존심은 지켰을지 몰라도 수사권을 경찰에게 넘겨주게 생겼고, 공수처 탄생을 앞당겼고, 더 이상의 논란거리도 없애버렸으니 그로서는 사실 얻은 게 없는 셈이다." 말하자면 그는 검찰총장의 고집 때문에 보수 야당이 반격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친 셈이라고 보았다. 그로 말미암아 검찰 조직은 쪼그라들고, 언론도, 보수 야당도 트집을 잡아 물고 늘어질 거리가 없어졌다는 게 그의 평이다.
나는 지금 수전 손택의 저서 <타인의 고통>을 읽고 있다.
"지금 관직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임무가 사람들을 속이는 것이라는 사실을, 다시 말해서 사람들의 자신감을 부추기고, 슬픔을 조종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오래 전부터 심리요법의 정치, 특히 논쟁을 수반하고 허심탄회함을 장려하는 민주주의 정치를 대신해 왔던 것이다. 부디 다같이 슬퍼하자. 그러나 다같이 바보가 되지는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