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의 풍경이 내 주변으로부터 아주 조심스럽게 물러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이를테면 그것은 자신을 지배하는 폭군의 심기를 어떻게든 거스르지 않으려 노력하는 궁중 내시의 조심스러운 발걸음을 연상케 한다. 그럴 때면 한순간 폭군으로 변한 내가 물러나는 풍경을 향해 "멈춰!" 하고 말도 안 되는 명령을 내린다 해도 물러나던 풍경들은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 붙박이로 멈춰 설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그런 날은 대개 하루가 유난히 길게 느껴졌었고, 마음은 내내 편치 않았으며, 시기도 가늠할 수 없는 어느 한순간의 행복했던 추억이 아이가 읽던 어느 그림책의 화려한 색상처럼 선명했으며, 완벽한 절망이 내 주변을 가시나무 울타리처럼 둘러싸고 있는 듯했다.
"Merry Christmas!"라는 카톡 인사가 온종일 서로의 휴대폰을 오갔던 성탄절 당일의 무표정한 하루, 나른한 겨울 햇살이 온 거실을 장악했으며, 앉은뱅이책상 위에 덩그러니 놓인 한 권의 책과 치우지 않은 커피잔과 휴일의 무료함이 담긴 접시 위의 과자 부스러기와 말라붙은 귤껍질과 침묵이 병풍처럼 펼쳐진 공간으로 길게 이어지던 캐럴 몇 줄기. 나는 간간이 잠에 빠져들었고, 마땅히 할 일을 찾지 못해 커피를 마셨으며, 독서를 방해하는 카톡 알림음을 핑계로 다시 또 잠에 빠져들었고, 그렇게 비몽사몽의 시간을 오가는 동안 햇살이 홀로 거실을 지켰다.
햇살이 물러간 거실에도 어둠이 내리고 있다. 온종일 햇살이 놀다 간 거실에서 김애란의 산문집 <잊기 좋은 이름>을 읽고 있다.
"오래된 것들은 대부분 작아지고 작아져 암흑 속으로 사라지는데 유독 옛날이야기를 떠올리면 왜 빛이 연상되는지 모르겠다. 오랜 이야기 속 어떤 불빛이 불현듯 서사의 온도를 바꿀 때, 누군가의 얼굴을 낯설게 비출 때 내 몸에 인 긴장이 감광필름처럼 남은 탓인지 모르겠다. 혹은 이야기가 태어난 자리에 빛光이, 불火이 있는 자리에 입과 귀가 늘 있어왔기 때문인지도." ('빛과 빚' 중에서)
낮에 왔던 햇살이 어둠을 향해 달려가듯이 오늘을 사는 사람들은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어둠과 함께 삶의 허기가 밀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