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생각하는 '겸손'이 과연 미덕이기만 할까? 하는 생각을 할 때가 더러 있습니다. 그렇다고 겸손하지 말라고 말한다거나 겸손의 미덕을 마구 흠집 내려는 건 아닙니다. 오히려 나는 요즘 젊은이들이 좀 더 겸손해졌으면 하고 바라기도 하고 자신을 표현함에 있어 과장된 몸짓이나 부풀려진 말로 떠벌리는 걸 몹시도 싫어하는, 이른바 '꼰대' 기질이 다분한 그런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작금의 '겸손'은 과거 우리의 선조들이 귀히 여기던 그런 느낌의 '겸손'과는 상당히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그럴 만도 하겠지요. 많은 세월이 흘렀으니까요. 우리가 생각하는 겸손의 개념도 달라져 있고 그 방법이나 뜻조차 많이 왜곡되고 변질되었다는 것을 현실에서 번번이 느끼곤 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 민족과 서구 사회 구성원을 가름하는 가장 큰 차이점은 지나친 '겸손'에서 비롯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물론 육체적, 정신문화적 차이 등 다양한 구분이 가능하겠습니다만 오늘 말하려고 한 주제는 '겸손'에 국한된 까닭에 다른 것들은 가급적 들먹이지 않을 생각입니다. 그리고 우리 사회의 공동체적 단합은 겸손을 바탕으로 한 타인에 대한 배려에서 비롯되었다는 걸 잘 알고 있는 까닭에 겸손의 미덕을 깎아내릴 의도 또한 전혀 없다는 걸 말하고 싶습니다.

 

그럼에도 겸손의 문제점을 한 번쯤 짚고 넘어가야겠다고 생각했던 건 어느 날 갑자기 들었던 생각은 아닙니다. 말하자면 나는 오래전부터 이것에 대해 생각해 왔고, 우리 사회의 몇몇 구성원들이 겸손이라는 명목으로 자신을 숨기고, 자신에게 가장 유리한 방면으로 여론을 형성해 왔다는 사실에 분개했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공동체를 생각하고 타인에 대한 배려 차원에서 존재하던 '겸손'이 작금에 이르러서는 자신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숨겨진 무기로 사용된다는 점입니다. '겸손'을 가장한 사기인 셈이지요.

 

그 대표적인 사례가 종부세의 문제입니다. 종부세는 주택 및 토지의 공시 가격을 인별로 합산한 결과, 합계액이 과세기준금액을 초과하는 경우 그 초과분에 대하여 과세되는 세금인 까닭에 토지 및 주택의 공시 가격이 크게 오를 경우 납세 대상과 금액이 상승하는 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각자가 납부해야 할 세액은 상황에 따라 다르고 납부자에게 실제로 고지되는 납부 세액은 그렇게 높지 않은 게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언론에서는 '세금 폭탄'이라는 둥 강남에서 1주택을 소유한 은퇴자는 집을 팔아 세금을 내야 하느냐는 둥 엄살을 떨곤 합니다. 이건 숫제 '겸손'이나 엄살이 아니라 세금을 내지 않겠다는 엄포 또는 사기에 가까운 행태인 것입니다. 9억을 초과하는 1가구 1주택을 소유자들의 평균 자산 총액이 3억 5천만 원정도에 이르니 말입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언제부턴가 자신의 재산을 혹은 부의 정도를 최대한 낮추어 말하는 경향이 있어 왔습니다. 예컨대 '친구 00에게 비하면 나는 거지나 다름없다'는 둥 '나는 겨우 입에 풀칠할 정도'라는 둥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우리 주변에는 '생활보호대상자'만 득실거리는 듯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실상은 상상 이상의 재산을 소유하고 있고, 그들의 자산은 대대로 대물림되는 실정입니다. 국민들 전체가 그들의 죽는소리를 액면 그대로 믿게 된 데는 그들의 홍보 수단으로 전락한 언론의 역할이 한몫한 까닭입니다. 언론 종사자 역시 그들과 같은 자산가의 후손이거나 억대 자산가 중 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기를 쳐 왔는지 우리나라의 최고 자산가 중 1인인 이재용 부회장이 그에게 부과된 상속세를 납부하지 못할까 봐 걱정하는 지경에 이르렀을까요. 1년 연봉 7천만 원도 못 받는 사람들이 배당금만 7천억 원 이상을 받는 이재용 부회장을 걱정한다는 게 말이나 되는지요.

 

서구 사회는 개인주의 사회로 대표되는 사회입니다. 말하자면 약육강식의 동물 세계나 다름없지요. 그러므로 자신의 부나 권력을 최대한 부풀려 내보여야 하고 자신의 약점은 드러내지 않는 게 관습처럼 이어져 왔습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타인의 입장을 고려해서 자신의 부나 권력을 가급적 낮춰왔던 게 사실입니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겸손의 미덕이 공동체의 결속을 다지는 데 큰 역할을 해 왔던 셈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미덕이 변질되어 자신의 이익을 지키는 데 이용된다면 사회 구성원들 간의 단합은 기대하기 힘듭니다. 언론에서도 이제 '당신은 얼마나 가난하냐?'고 물을 게 아니라 '당신은 대한민국의 몇 번째 부자냐?'고 물어야 할 듯합니다. 그리고 그 물음에 당당하게 답할 때가 되었습니다. 자본주의 국가에서 공정과 정의는 과세의 형평에서 비롯되는 것이지 법과 도덕의 준수와 같은 절차적 정의에 기대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민주주의가 발달할수록, 기술이 발달할수록 투명해지고 자연스레 지켜지는 것입니다. 누군가 데모를 한다고, 검찰이 대대적으로 조사를 한다고 나아지는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과세의 형평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앞장서서 나아가 문제를 지적하고 끝까지 싸워야 한다는 게 내 생각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숫자에 약하고 세법 또한 복잡하기에 깊게 들여다보지 않으려 합니다. 그런 약점을 이용하여 언론을 이용한 우민 정치가 쉬워지는 것이겠지요. 쓰다 보니 두서없이 말만 길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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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는 요즘 시원하고 달착지근한 향기의 아카시아 꽃이 한창이다. 지난 주말에는 짙은 황사와 미세먼지로, 이번 주초에는 때 아닌 비로 변덕스럽고 요상한 기분의 며칠을 보냈지만 흐렸던 날씨도 개고 푸른 하늘이 드러나자마자 다시 또 때 이른 무더위가 찾아온 듯했다. 생각해 보면 우리도 어찌할 수 없는 게 날씨인데 날씨에 따라 일희일비하는 꼴이라니... 만물의 영장이라는 이름도 허울뿐 인간은 한낱 연약한 동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오늘 한낮의 햇살은 뜨거웠다. 반소매 옷을 입고도 더위를 느꼈을 정도로 한낮 더위는 매서웠다. 이러다 어쩌면 불쑥 장마가 찾아오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때 이른 더위에 다들 불안해하는 눈치였다. 이러다 말겠지, 하는 기대 심리도 없지는 않았지만 지구 온난화와 이에 따른 기상이변이 한반도만 비껴갈 리도 없는 까닭에 내심 불안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침저녁으로는 여전히 선선한 날씨가 이어지고 있다는 점일 게다.

 

인터넷 뉴스를 보니 가자지구에 대한 이스라엘의 무자비한 폭격이 다시 또 시작된 모양이다. 현대 인류에게 있어 가장 잔인하고 무자비한 인간을 꼽으라면 아마도 이스라엘의 정치인이 아닐까 싶다. 달아날 곳도 없고 방어 수단도 없는 팔레스타인 주민들을 향해 대대적인 무력 진압을 시행하는 것도 모자라 민간인을 향한 폭격과 살상 행위를 눈도 깜짝하지 않은 채 해치우는 걸 보면 저들도 과연 인간의 양심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 도무지 가늠이 되지 않는 것이다. 스티븐 핑커 교수가 쓴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온다.

 

"독서의 폭발적 성장은 독자로 하여금 자신만의 편협한 관점에서 벗어나는 습관을 갖게 만듦으로써 인도주의 혁명에 기여했을 것이다. 정보와 사람의 유입이 지니는 힘은 일찍이 정치적, 종교적 폭군에게 효과가 없었던 적이 없다. 폭군들이 말과 글과 조직을 억압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민주 국가들이 권리 장전에서 그 통로를 보호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도시와 문해력이 성장하기 전에는 해방적인 사상이 생겨나고 통합되기가 어려웠다. 그러므로 17~18세기에 성장한 세계주의는 인도주의 혁명에 부분적으로 기여했다고 할 만하다."

 

스티븐 핑커 교수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이스라엘의 정치인들은 독서를 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이스라엘 국민들은 독서를 일절 하지 않는 야만의 종족을 지도자로 뽑았다는 것인데 이 또한 사실일지도 모르겠다. 독서도 하지 않는 천박한 인간들이 이스라엘의 정치인임을 21세기의 우리가 똑똑히 목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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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아흔아홉 석의 쌀을 가진 부자가 백 석을 채우기 위해 한 석 가진 가난한 자의 재물을 탐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인간의 탐욕이란 끝이 없기 때문이다. 한 발 더 나아가서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그것마저 능력으로 간주하여 어떻게든 백 석을 채운 이의 능력을 추앙하는 경우가 더러 있는 것이다. 피도 눈물도 없는 게 자본주의 체제라지만 그런 비정함마저 개인의 능력으로 인정하고 부러워한다는 건 때론 소름이 돋을 정도로 혐오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겠지만 김어준의 뉴스공장에 대한 보수 언론과 야당의 집요한 공격이 계속되는 걸 보면서 옛말 그른 게 없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우리나라 언론 지형은 대개 보수가 7, 진보가 3의 비율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해지곤 한다. 그러나 이것도 좋게 봐주어서 그렇다는 얘기다. 진보 언론이라는 한겨레나 경향 등도 진보라고 말할 수 있는 칼럼이나 기사는 극히 드물고 이따금 선보이는 진보 기사로 인해 진보 언론이라는 타이틀이 매겨지고 있기 때문에 실상은 보수 언론이 8 또는 9에 이르고 진보 언론은 1이나 2쯤 되는 게 현실이다. 텔레비전이나 라디오는 또 달라서 이보다 훨씬 심각하다. 말하자면 한국의 언론 지형은 보수 일색이라고 봐도 된다. 불행하게도 말이다.


그와 같은 상황에서 김어준이라는 방송인은 어쩌면 눈엣가시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그가 진행하는 뉴스공장이 2018년부터 3년 넘게 라디오 청취율 1위를 이어오고 있으니 만석꾼의 시각에서 배가 아파도 여간 배가 아픈 게 아닐 것이다. 그 마음은 나도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흔히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고 하듯이 우리 미래 세대를 위해서라도 좌와 우가 균형점을 찾아야 하지 않겠는가. 적어도 오른쪽 날개가 기형적으로 커서 바닥에서 조금도 뜨지 못하는 상황은 만들지 말았어야 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나는 사실 라디오를 듣지도 않고, 김어준의 뉴스공장이 방송되는 아침 7시부터 9시까지는 나에게 가장 바쁜 시간인지라 한가하게 방송을 들을 엄두조차 나지 않지만 김어준 씨는 적어도 TV조선이나 채널A처럼 노회찬 전 의원의 죽음을 생중계하거나 검찰과 한통속이 되어 애먼 사람을 협박하는 등의 천인공노할 짓은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TV조선이나 채널A의 종편 승인 취소를 의결하지 않는 것처럼 누군가가 보기에 눈엣가시처럼 보기 싫더라도 그냥 아무 말 말고 지켜보는 게 도리가 아닐까 싶다. 미얀마의 군부 독재를 옹호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우리는 적어도 성숙한 시민의식을 가진 대한민국의 일원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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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도 가기 전에 벌써부터 이렇게 더우니 올여름은 또 얼마나 더울까 하고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다. 물론 기상예보나 일반인들의 추측이 다 맞을 리는 없겠지만 말이다. 게다가 최근의 날씨는 어찌나 변화무쌍하던지 전문가들조차 예측에 애를 먹지 않던가. 작년 여름만 하더라도 54일간의 역대 최장 기간 장마가 이어질 줄 누가 알았겠나. 올해 역시 작년과 같은 긴 장마가 올 수도 있고, 예상치도 못했던 서늘한 여름을 맞을 수도 있으니...

 

코로나19 확진자가 증가하면서 식당 출입이 여간 조심스러운 게 아니다. 옆 테이블의 사람들이 식사를 하면서 대화가 길어질라치면 은근히 신경 쓰이기도 하고, 젊은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오면 괜스레 겁이 나기도 한다. 확진자가 증가하는 바람에 혹시 주변에 있는 어떤 이가 무증상 감염자는 아닌지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잠잠해질 때까지 다들 약속을 미룬 채 집에서만 머무르면 좋으련만 사람들의 마음이 어디 내 맘처럼 같기만 할까.

 

프랑스의 저널리스트이자 시나리오 작가였던 프랑수아즈 지루가 쓴 <루 살로메>를 읽고 있다. 당대의 유명했던 세 남자, 프리드리히 니체, 라이너 마리아 릴케,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지적 유희를 벌였던 여인 루 안드레아스 살로메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호기심은 지금도 여전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루 살로메에게 지적 충족감을 안겨줄 만한 당대의 지식인들이 다만 남성이었을 뿐 그녀가 성적으로 문란하거나 외설스러운 행동을 하지는 않았던 듯하다. 루 살로메는 어쩌면 시대를 앞서 간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였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이렇게 썼다. "아무리 자연스럽게 사랑을 드러내고 가장 숭고한 형태로 사랑을 보여준다고 해도 사랑의 삶은 불성실한 원칙에 기초를 두고 있다." 그리고 그녀는 결정적으로 가공의 인물을 창조하기보다는 차라리 훨씬 더 생생한 살아 있는 인간의 문제를 탐색하는 것이 더 낫다고 확신했다. 특히 성적 충동, 그리도 강렬한 그 힘에 대해서."  (p.121)

 

우리는 종종 겪어보지도 못한 한 인간에 대해 지나친 관심이나 불합리한 억측을 일삼고, 아주 작은 일을 부풀려 사람들의 관심을 유도하기도 한다. 그와 같은 입방정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놀아났던가. 날씨가 더워지고 코로나의 맹위가 거세지면 짜증이나 화를 내는 일도 점점 많아질 터, 그럴 때일수록 행동거지보다 입조심부터 하는 게 순서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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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은 내내 어두웠다. 이따금 비가 내렸고, 바람이 건듯 불었다. 세월의 흐름 앞에서 기억의 덧없음을 절절히 확인하게 되는 것처럼 속절없는 바람과 분분한 낙화를 보며 '한 계절이 또 이렇게 흘러가는구나' 하는 쓸쓸한 감회에 젖었었다. 오늘은 세월호 참사 7주기. 생때같은 아이들이 영문도 모른 채 처참하게 죽어갔던 그 날의 기억들이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날. 기억은 덧없고 슬픔은 야멸차게 가슴을 후비는데 흔들리듯 비가 내렸다.

 

가끔 뒤돌아보면 인간은 다른 이의 죽음 앞에서 얼마나 냉정하며 더없이 잔인할 수 있는지... 짐승들도 제 무리 중 하나가 죽으면 제 일인 양 슬퍼하는데 하물며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이 다른 이의 죽음을 아파할 줄 모른다는 건 스스로 인간이기를 포기했다는 것. 인간 같지 않은 인간이 마치 인간인 양 행세를 했던, 인간 탈을 쓴 짐승들의 광란의 몸짓을 우리는 얼마나 많이 보아왔던가. 자식을 잃은 부모가 식음을 전폐한 채 누워 있는 현장에서 폭식투쟁을 하던 놈들, 세월호 참사가 단지 하나의 교통사고일 뿐이라며 의미를 축소하려 들었던 어느 정치꾼, 세월호 참사를 언제까지 우려 먹을 거냐며 따지고 들던 미련한 짐승들...

 

벌써 7년이다. 기억은 이렇게 생생한데...

 

제시 버튼의 소설 <컨페션(The Confession)>을 읽었다. 두 권의 소설만 남기고 잠적한 희대의 소설가 '콘스턴스 홀든'이 실종된 로즈의 어머니와 연인 사이였고, 심지어 어머니를 마지막으로 목격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아버지로부터 들은 로즈는 삼십 년 전 그날의 진상에 대해 듣기 위해 신분을 속인 채 콘스턴스에게 접근하는데... 소설은 줄곧 로즈의 어머니인 엘리스와 로즈의 이야기가 교차되며 진실의 소실점을 향해 나아간다. 고백, 자백, 혹은 고해성사의 의미가 있는 이 소설의 제목이 세월호 참사 7주기인 오늘 내 가슴에 무겁게 다가온다. 우리는 세월호 침몰의 원인을 7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모르고 있다. 소설처럼 누군가의 자백이 필요한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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