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력의 배신 - 습관처럼 야근하는 당신이 꼭 알아야 할 것
니시다 마사키 지음, 김세원 옮김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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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이면 나 자신도 기억하지 못하는 유년시절의 추억을 끄집어내는 바람에 당혹해 했던 적이 몇 번 있다.  그럴 때마다 '어쩌면 저렇게 세세한 것들까지 기억하고 있을까?  혹시 다른 사람과 착각한 것은 아닐까?'하는 의문이 문득문득 들곤 했다.  그렇게 내 입장은 아랑곳하지 않고 시도 때도 없이 터져나오는 이야기들을 마땅히 제지할 방법은 없어 보였다.  기분좋게 만난 자리이니 화를 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설 수도 없지 않은가.

 

그 중에서도 단골 메뉴로 등장하는 이야기가 있다.  형과 함께 자취생활을 했던 내 중,고등학교 시절의 얘기인데 얼마나 자주 들었으면 나의 성장과정을 알 길 없는 조카들도 모두 기억할 정도가 되었다.  그럼에도 그 시절의 내 얘기는 횟수를 더할수록 사그라들기는커녕 때로는 더 부풀려지고 지금도 새로운 얘기가 샘솟듯 만들어지고 있는 듯하다.

 

학창시절의 나는 지독한 완벽주의자요, 중증의 활자 중독증 환자였다.  그렇게 된 데에는 기질적 성향도 있었겠지만 무엇보다도 나를 둘러싼 환경이 주원인인 듯하다.  부끄럽게도 나의 아버지는 하루도 술을 거르는 날이 없었고, 그렇게 술에 취해 귀가하면 많지도 않은 가제도구를 부수기도 하고 가족들에게도 폭언과 손찌검을 서슴지 않았다.  나는 이런 아버지를 피해, 친구네 집을 일없이 전전하며 밤늦도록 그들의 집에서 책을 읽곤 했다.

 

인사불성이 된 아버지에게 맞지 않으려면 아버지의 눈에 띄지 않는 게 상책이었고, 악에 받쳐 바락바락 대드는 엄마의 애처로운 모습을 지켜보는 것도 고역이었다.  그 덕분에 친구들의 집에 있는 책이란 책은 모조리 다 읽게 되었다.  시골에서 자란 터라 친구들이 갖고 있는 책도 그 나이에 읽을 만한 책은 많지 않았고, 그런 연유로 나는 어른들이 읽는 어려운 책도 가리지 않고 읽어야 했다.

 

내가 자취를 하며 공부를 하던 형을 좇아 도시로 전학을 하게 된 것은 중학교 1학년 겨울방학이었다.  나는 아버지의 무자비한 폭력에서 벗어난 것이 무엇보다 기뻤고, 다른 어려움쯤이야 기꺼운 마음으로 참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그렇게 도시로 나와 처음 계획했던 일은 잠을 세 시간으로 줄이는 것이었다.  그동안 읽었던 책에서 얻은 지식을 기반으로 수면시간을 11시에서 새벽 2시까지로 한정하였다.  돌이켜보면 치기에 가까운 행동이었지만, 나는 그렇게 정해놓은 규칙을 지키기 위해 지독하게 버텼다.

 

새벽에 일어나 책상 앞에 앉으면 웃풍이 심한 자취방은 냉기가 감돌았다.  어깨에 담요를 두르지 않으면 책을 읽기 어려웠고, 졸음을 쫓기 위하여 마당 한켠에 있던 수도를 틀어 차가운 수돗물에 한참씩이나 머리를 담그곤 했다.  지금도 큰형은 그랬던 나의 모습을 떠올리며 그때는 동생인 내가 무서웠었다고 말하곤 한다.  새벽의 고요 속에서 한동안 책을 읽다가 정각 다섯 시만 되면 전기밥솥에 쌀을 앉히고 집을 나섰다.  한 시간 동안 운동을 하고 돌아오면 할 일이 많았다.  간단한 반찬을 준비하여 도시락을 싸고, 형을 깨워 아침을 먹었다.  가방을 챙기고 자전거로 등교를 하면 길었던 아침시간이 마무리되곤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그런 생활은 계속되었다.  늘 상위권을 유지했던 성적과 부러움으로 가득 찬 친구들의 시선이 보답이라면 보답이었다.  '노력과 그에 대한 보상'이라는 긍정적인 피드백은 '어떤 불가능한 일도 내가 하면 가능한 일로 바꿀 수 있다.'는 오만함으로 이어졌고, 신이 있다면 신은 항상 내 편이라는 생각도 들었었다. 

 

4년 장학생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잠깐의 회사 생활을 거친 후 창업을 했다.  단 한 번의 실패도 경험하지 않았던 나에게 사업의 실패는 뼈저린 것이었다.  실패를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없었다.  '조금 더 노력하면 되지 않을까?'하는 미련이 발목을 잡았다.  몸도 마음도 피폐해져만 가던 그때 나는 아내에게 심한 독설을 퍼붓기 일쑤였고, 산후 우울증을 앓고 있던 아내는 나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 책 <노력의 배신>은 '해로운 완벽주의자'의 전형이었던 나를 되돌아 보게 한 책이었다.  어떤 책이든 자신의 얘기를 가감없이 기록한 것이라면 읽는 내내 마음이 거북해지기 마련이다.  내가 그랬다.

 

"완벽주의자는 자신의 실력보다 높은 목표를 설정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목표를 달성하기까지 엄청난 인내가 필요하다.  그러나 지나친 인내는 화를 불러올 우려가 있다.  게다가 타인에게도 자신과 똑같은 인내와 참을성을 요구하게 되면 인간관계에 금이 갈 수도 있다."    (p.238)

 

공부와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느라 잠시의 여유도 찾을 수 없었던 나로서는 대학교 앞의 커피숍에서 노닥거리는 학생들이나 당구장에서 시간을 죽이는 학생들이 이해가 되지 않았었다.  마음속으로는 항상 '밥벌레'라고 그들을 비웃었다.  나의 아집과 독선은 결국 사업의 실패와 함께 누그러졌다.

    

삶은 누구에게나 변화의 가능성을 제공한다.  그 변화가 좋은 방향이든 그렇지 않든 우리는 멈출 수 없는 변화의 시간을 지나고 있다.  현장에서 수많은 환자들을 상담해왔다는 저자는 그간의 임상 경험과 최신 학술지식을 통해 ‘노력을 멈추는 기술’을 친절하게 설명해준다.  그리고 '해로운 완벽주의자'가 '건전한 완벽주의자'로 다시 태어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베스트 셀러 작가이자 영적 스승인 안젤름 그륀 신부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신뢰하고 숨은 가능성을 발견하고, 당신의 삶에 다른 사람들을 초대하라. 그러면 당신의 샘물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도움을 줄 것이다."라고.  내가 사업에 실패하기 전까지 나에게 했던 일련의 행동들은 어쩌면 나 자신에 대한 폭력이었을지도 모른다.  예전의 나와 같은 성향의 사람이 있다면 그들이 반드시 깨달아야 하는 것은 '나를 가혹하게 대하는 사람은 언제든 다른 사람에게도 가혹해질 수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이 사실을 늦은 나이에 실패와 시련을 통해 배웠다.  항상 되물어야 하는 것은 "누구를 위한 인내인가? 수단과 목적이 전도된 것은 아닌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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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열권을 동시에 읽어라
나루케 마코토 지음, 홍성민 옮김 / 뜨인돌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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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를 더할수록 점점 답변이 궁해지는 질문이 있다.  내 안에 경험이 하나 둘 늘어날수록, 해마다 쌓인 지식이 그 자리를 넓혀갈수록 답변은 더욱 궁색해진다.  이따금 이 질문을 떠올릴 때마다 "0"으로 수렴하는 지수함수를 생각하게 된다.  내가 지금보다 더 나이를 먹으면 종국에는 답변할 말이 전혀 떠오르지 않을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어서이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누군가에게 들려줄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누군가로부터 채근을 당하는 것도 아닌데 언젠가부터 나는 그 질문을 화두처럼 끼고 살았다.  그게 뭔고 하니 "내 생각이나 주장 중에 오롯이 내 것이라고 자신할 수 있는 것이 과연 몇 %나 될까?"하는 물음이다.  이를테면 누군가로부터 들었던 말이나 어느 책에서 읽었던 지식, 또는 사회적 통념으로서 의심도 없이 받아들였던 것들을 제외하고 오직 나만의 발견, 나만의 생각이라고 감히 자신할 수 있는 것들 말이다.  나는 이 질문 앞에서 해가 갈수록 점점 자신을 잃게 되었다.

 

어쩌면 내가 책을 읽는 여러 이유 중에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하여'도 그 중 하나가 될 수 있으리라.  그러나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나는 저자의 생각에 굴복되고 종속되기 일쑤여서 이 질문이 생각날 때마다 독서의 무용론에 빠져들곤 한다.  그렇다고 책을 멀리하는 것만이 능사냐 하면 그럴 것 같지도 않다.  오히려 기본 지식의 습득을 도외시하거나 전폐한 사람들에게서 보여지는 세뇌 현상은 죽을 때까지 그 사람의 삶을 지배하게 된다는 사실을 나는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한 사회의 엘리트로 치부되는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을 종속화함으로써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고, 다른 세력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는 데 노예화된 그들을 방패막이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렇게 살다 간 사람들의 이름을 적어도 수십 명은 말해줄 수 있다.

 

독서를 하면서 드는 이런 자괴감 또는 속절없음으로 인해 누군가에게서 그만의 주장이나 생각이라고 여겨지는 말을 듣거나 읽을 때마다 괜한 부아가 치밀고 때로는 까닭없이 거부감을 느끼기도 하며, 때로는 부러워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 책『책 열권을 동시에 읽어라』를 읽었을 때에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35세의 젊은 나이에 마이크로소프트사 일본법인의 사장으로 취임했던 저자는 비즈니스계를 통틀어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의 독서가로 알려져 있다고 한다.  그가 권하는 일명 '초병렬 독서법'은 우리가 그동안 알고 있던 독서법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저자가 말하는 '초병렬 독서법'은 책 한 권을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히 읽는 것이 아니라 이곳저곳에 쌓아두고 다양한 책을 동시에 섭렵하는 방식이다. 즉 거실과 침실, 화장실, 부엌 등 가는 곳마다 여러 권의 책을 놓아두고 동시에 읽는 것이다.  저자는 책의 선정에 있어서도 장르가 다른 책, 예를 들어 학술서적과 소설, 시집과 경제서적처럼 서로 연결고리가 거의 없는 극단적인 것들을 권한다.  저자는 또한 베스트셀러만 따라 읽는 사람은 원숭이와 같다고 말하는데 읽는 독자에 따라 기분이 안 좋을 수도 있겠다. 게다가 모든 책을 완독할 필요는 없다고도 조언한다. 즉 무조건 한 권을 끝까지 다 읽어야 한다는 쓸데없는 의무감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프랑스의 유명한 미식가 브리야 사바랭(Brillat Savarin)은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어떤 음식을 먹는지 말해 보라. 그러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맞혀보겠다.”  이 말은 책에도 적용된다. 어떤 책을 읽는지 알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 정확히 알 수 있다. 예컨대, 비즈니스 실용서만 읽는 사람은 신뢰하기 어렵다.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 같은 부자가 되는 요령을 알려 주는 책이나 성공 비법을 소개하는 책만 편식하듯 읽는 사람은 장담하건대 중산층 이하의 삶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만일 당신이 “내 취미는 독서고요, 최근에 읽은 책은 『해리포터』와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입니다.”라고 말한다면 나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당신은 구제불능이다!”라고.  다른 사람이 터득한 요령이나 성공 비법을 따라 하기나 하는 사람이 성공하기도 어렵지만, 그런 사람은 동물원의 원숭이보다 나을 게 없다. 원숭이도 인간을 곧잘 따라 하지 않는가. 남이 알려 주는 기술에 의존하는 한 적극적으로 변화에 대응해 자기만의 아이디어를 내고 획기적인 발상의 전환을 일으키는 힘은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p.6 - p.7  '프롤로그' 중에서)

 

일본인 중에는 자신만의 독서법을 주장하는 사람이 꽤 많다.  <나는 이런 책을 읽어 왔다>의 저자인 다치바나 다카시를 비롯하여 <창조적 책읽기, 다독술이 답이다>의 저자인 마쓰오카 세이고, <천천히 깊게 읽는 즐거움>을 쓴 이토 우지다카와 이 책『책 열권을 동시에 읽어라』의 저자인 나루케 마코토 등 그동안 독서법에 대하여 내가 읽었던 책도 여러 권이다.  그러나 자신의 주장을 강하게 주장하는 것이나 독특한 발상에서 볼 때 다치바나 다카시와 나루케 마코토는 서로 통하는 점이 많아 보인다. 

 

"나는 딸아이가 일류대학에 들어가는 것도, 일류기업에 입사하는 것도, 그리고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도 기대하지 않는다.  단지 '자기 머리로 생각할 줄 아는 사람'으로 성장했으면 하고 바랄 뿐이다.  책을 열심히 읽고 자기 인생을 능동적으로 개척해 나가는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다면 그 아이가 꼭 정치가나 의사와 같은 화려한 직업을 갖지 않아도 괜찮다.  좀 극단적으로 말해 테러리스트가 되면 어떠랴.  체 게바라처럼 낭만과 사상을 가진 테러리스트라면 그것도 근사한 일 아닌가(모든 혁명은 테러로부터 시작되었다!)."    (p.109 - p.110)

 

어떤 행동이나 말 또는 주장 더 나아가서는 하나의 이론에 이르기까지 자신만의 방식과 체계를 확립한다는 것은 많은 시간과 노력의 결과일 것이다.  우리는 때로 자신과 의견이 다르다 하여 괜한 트집을 잡거나 아무런 이유도 없이 비난하고 멀리 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것도 일종의 열등의식이라면 열등의식이겠다.  대한민국의 모든 국민들은 이제는 제발 그런 짓좀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나는 오히려 나와 의견이 다른, 어쩌면 대다수의 사람들과 의견이 다른 그들의 주장을 듣고 싶다.  솔직히 나는 그들이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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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에서 보내는 시간 - 영혼이 쉴 수 있는 곳을 가꾸다
헤르만 헤세 지음, 두행숙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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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나무, 풀 모두가 가을을 예감하는 기운을 머금고 있을뿐 아직 본격적인 가을의 현란하고 강렬하고 환희에 찬 색들을 펼쳐 보이지도 않았음에도 지금보다 더 아름다운 색채를 띤 적이 없는'듯한 가을이다.  나는 계절이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이맘때쯤이면 습관처럼 할머니를 떠올리곤 한다.  젊은 시절에 남편을 여의고 아들의 그늘에서 더부살이를 하셨던 나의 할머니.  내 기억 속의 할머니는 작은 체구에도 언제나 손에서 일을 놓지 않으셨던 억척스러운 분이셨다.  아버지가 가산을 탕진하고 온종일 술에 절어 살아갈 때에도 날품을 팔아 번 돈으로 손주들 용돈을 챙겨주시곤 했다.

 

언제였던가, 쫓기듯 서울로 이사를 했던 어느 날 할머니는 내게 탄식처럼 말씀하셨다.  이제는 당신이 죽어도 묻힐 땅 한 뙈기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고.  나는 그 말 속에서 할머니가 진정으로 아쉬워했던 것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내가 어렸을 적 첩첩산중의 산골에서 살았던 우리 가족은 농사일에는 도통 관심이 없었던 아버지 탓에 고만고만한 나이의 어린 형제들과 일밖에 모르셨던 어머니, 자식의 방탕을 당신 탓으로만 돌리셨던 할머니는 종일 밭에서 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고된 농사일에 지칠 법도 하였건만 할머니는 틈틈이 꽃을 가꾸셨다.  꽃씨가 귀했던 당시에도 할머니는 분꽃, 맨드라미, 봉숭아, 채송화, 코스모스, 해바라기, 해당화 등 여러 꽃씨를 잘도 구해 오셨다.  변변한 정원은 고사하고 빈터도 마땅치 않았던 시골집에서 할머니는 꽃을 심을 자리를 어쩌면 그렇게 잘도 골라내셨을까.  담장 밑, 장독대 주변, 화장실 가는 길, 그중에서도 가장 압권은 물을 길어 먹었던 실개천 옆의 샘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길 양옆으로는 코스모스가 가득했고 뒷열에는 듬성듬성 키 큰 해바라기가 심어져 있었다.

 

나는 가을 햇살이 뽀얗게 내려 앉던 그 코스모스길과 깨끗하게 비질 된 마당 한 켠에서 시들어가던 봉숭아 꽃잎을 생각하며 헤르만 헤세의 <정원에서 보내는 시간>을 읽었다.  정갈한 머릿결처럼 비질 자국이 선명한 그 길을 유년 시절의 내가 꿈결처럼 걷고 있다.  살랑거리는 코스모스 꽃잎의 리듬에 맞춰 나는 그 길에 작은 발자국을 얹고 있다.  고향을 떠나 도시로 나왔을 때 나의 할머니가 잃었던 것은 어쩌면 철마다 꽃을 피우던 그 작은 꽃밭이었는지도 모른다.  꽃을 가꾸면서 잠시 잊을 수 있던 삶의 시름과 자연 속에서의 무한한 위로를 어린 손자에게 차마 말하지 못했으리라.

 

"'작은 기쁨'을 누리는 능력은 절제하는 습관에서 나온다.  이런 능력은 원래 누구나 타고났으나 현대인들은 일상생활 속에서 많이 왜곡되고 잃어버린 채 산다.  그것은 다름 아닌 얼마간의 유쾌함, 사랑, 그리고 서정성 같은 것들이다.  이런 작은 기쁨은 이른바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진 것으로, 눈에 띄지도 않고 일상생활 속에 흔하게 흩어져 있어서 일에만 열중하는 수많은 사람의 둔한 감성으로는 거의 느끼지 못한다.  그것들은 눈에 잘 띄지도 않고, 찬사를 받지도 못하며, 돈도 들지 않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가난한 사람들조차도 가장 아름다운 기쁨은 전혀 돈이 들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p.71)

 

나의 할머니가 그랬듯 헤르만 헤세도  일생 동안 그리고 거주지를 옮길 때마다 꼭 정원을 만들고 가꾸었다고 한다.  작가이자 화가이고 한때는 포도농사로 생계를 꾸렸을 만큼 솜씨 좋은 원예가였던 헤세가 31~77세 사이에 자연에 대해 쓴 글을 모은 이 책에서 그는 간결하고도 투명한 문체로 자연을 노래하고 있다.  그에게 정원 일은 혼란과 고통에 찬 시대에 영혼의 평화를 지키는 방법이었고 작가의 영감을 자극하는 청량제였다.

 

"미국 취향으로 변한 현대인들의 음악성이란 건축을 소유하는 것 이상이 아니고, 반짝거리는 니스 칠이 된 자동차가 아름다움의 세계에 속하는 물건이 되고 말았거든.  그런 것에나 만족하고 즐기는 반쪽자리 인간에게 시험 삼아 예술수업을 한번 해보게.  꽃이 시드는 것, 장미가 밝은 잿빛으로 변하는 모습을 생생하고 감동적인 것으로, 온갖 생명과 모든 아름다움의 비밀로서 함께 체험하도록 가르쳐보게나.  그들은 아마 놀랄 것이네! "    (p.97 - p.98)

 

독자들에게 위대한 작가의 글일수록 극과 극의 평가가 내려진다는 사실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어쩌면 헤르만 헤세의 이 책 <정원에서 보내는 시간>도 그렇게 읽혀지고 또 그런 평가가 이어질지도 모른다.  작가가 깨달았던 진리의 깊이를, 작가가 누렸을 삶의 평화와 그 크기를 독자들은 감히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자연이 주는 커다란 기쁨과 환희를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사라져가는 계절의 모습을 글로, 그림으로 하나라도 더 남겨두지 못해 아쉬워했던 대문호 헤르만 헤세의 글은 손자들의 행복한 삶을 그렇게도 갈망했던 내 할머니의 모습을 닮았다.

 

나는 이 가을에 내 유년의 그때로 되돌아가 코스모스 물결이 일렁이던 그 길을 온종일 걷고 싶다.  가을 햇살이 부서지던 애기 젖살처럼 뽀얀 그 길에서 돌아가신 내 할머니와 긴 긴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밤이 떨어지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고도 싶고, 까르르 웃고도 싶다.  삶이 지나치게 빠른 도시인의 일상이 무겁게만 느껴진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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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에서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 - 바쁜 일상에 치여 놓치고 있었던, 그러나 참으로 소중한 것들 46
정희재 지음 / 걷는나무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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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책일수록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마치 어린 시절 봄소풍 자리에서 보물찾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유난히 보물찾기에 재주가 없었다.  다른 친구들이 서너 개씩 찾는 동안 나는 단 하나도 찾지 못한 채 부러운 시선으로 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곤 했었다.  그때의 기억 때문인지 책 한 쪽도 읽지 못하고 잠자리에 드는 날이면 그때 내 손에 쥐어지던 쓸쓸한 바람결이 되살아나곤 한다.  이따금 찾아오는 그 서늘한 느낌은 나로 하여금 바쁜 와중에도 손에서 책을 놓지 못하게 한다.  이 악착같음은 어데서 오는 것일까?  그때의 쓸쓸함일까, 아니면 나이를 더할수록 집요해지는 삶의 허기짐일까?  나는 그 둘을 마음속으로 응시하며 성큼 다가온 가을을 살고 있다.

 

도시의 가을은 전염병처럼 번지는 도시인의 조울증세와 함께 시작된다.  설움이랄까 아픔 같은 것이 왈칵 몰려오면서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도시인의 이 느닷없는 감정이 말갛게 변하여 초겨울 눈으로 내리는지도 모른다.  가을은 그렇게 한 계절을 계절로 느낄 겨를도 없이 감정의 롤러코스트를 타다가 후다닥 자취를 감추곤 한다.  어찌할 수 없는 가을이 지쳐올 때마다 나는 정희재 작가의 책을 읽는다.  버릇처럼.  다른 사람들이 인정하든 그렇지 않든 나는 정희재 작가를 거장으로 꼽는다.  내게 있어 문학 분야의 거장으로 인정되는 단 하나의 조건은 인간에 대한 애정이다.  인간을 사랑하고, 폭을 넓혀 살아 있는 모든 생명을 사랑하고, 더 나아가 지구의 모든 것들에 대한 연민이 작가의 삶에 녹아들 때, 비록 그가 쓴 글이 어쭙잖아 보여도 나는 그의 글을 사랑하게 된다.  인간에 대한, 생명에 대한 애정이 없는 사람의 글은 거짓이요, 위선일 수밖에 없다.

 

"도시, 서로의 곁을 내주지 않는 익명성을 편리로 인정해 주는 공간.  도시인, 익명의 공간에서 시치미를 떼며 살지만, 누군가 가끔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기를 사무치게 바라는 외로운 사람들.  그 안에 내가 있고, 당신이 있다.  끝내 버티지 못할 것 같은 예감에 새벽잠을 설친 순간을 기어이 이겨내며 우린 참 치열하게 달려왔고, 달려가고 있다.  목적지를 아는 사람도 있고, 하루하루 마음 다치지 않고 지나가기만을 바라는 이도 있으리라.  나는 이제 안다.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뎌야 하고 받아들일 수 없는 것들에 지쳐, 당신에게 눈물 차오르는 밤이 있음을."    ('작가의 말' 중에서)

 

<도시에서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는 정희재 작가의 일기와 같은 글이다.  작가의 글을 읽으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솟을 것만 같다.  그 눈물 한방울로 인해 마음의 짐은 한결 덜어지곤 했다.  작가의 글은 스산한 도시의 한 귀퉁이에서 막막함에 가슴을 치고 있을 누군가를 향해 따스한 손길을 내미는 듯하다.  세계 각국의 도시와 히말라야 오지 마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곳을 여행하며 마음 공부를 해왔던 저자는 아무런 이유도 없이 도시의 변방으로 밀려나는 사람들과 턱없이 치솟는 배추값을 걱정하는 도시의 소시민들에게 "당신, 참 애썼다.  사느라, 살아내느라, 여기까지 오느라 애썼다.  부디 당신의 가장 행복한 시절이 아직 오지 않았기를 두 손 모아 빈다.”며 위로하고 있다.  곧 있으면 추석.  명절에도 고향에 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작가는 이 책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그러니까 뉴스에서 헬기까지 띄워 가며 보여주는 영상은 이 시대가 표준으로 장려하고픈 덕목을 널리 알리려는 의도에 다름 아니다.  이 행렬에서 벗어난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서 뭔가 중요한 것이 빠졌다고 느낀다.  이 결핍감과 박탈감이야말로 시스템이 바라는 심리적인 충격 요법이다.  표준에 속하라.  반도의 남쪽으로, 남쪽으로 향하는 차량들의 행렬은 끊어지지 않는 한민족의 전통을 상징하는 퍼포먼스다.  저처럼 혼잡과 불편을 딛고 가야할 곳, 끝끝내 지켜야 할 도리가 있는 삶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어떤 이유로든 이 도시에서 조금씩 일그러지고 빈틈을 지닌 사람들은 말이 없다.  그저 조용히 시스템의 전언을 보고 듣다가 밀린 잠을 채울 뿐."    (p.90 ~ p.91)


 

전남 보성에서 태어나 일곱 살 때 처음오로 도시에 가 보았다는 작가는 중학교 때 부산으로 이사한 뒤로 지금까지 도시에서 살고 있다고 했다.  더 나은 삶을 꿈꾸고, 더 큰 사람이 되기 위해 도시의 삶을 선택했지만 도시에서 살아가는 과정은 언제나 고독하고 피로했다고 했다.  이 책에서 저자는 도시인으로서 자신이 겪었던 경험을 통하여 깨달은 것들을 세심한 필치로 그리고 있다.  도시인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겪었을 법한 혼자 밥 먹기, 택배 받기, 출근하기, 명절 보내기, 편의점 가기, 전화하기, 장보기 등 바쁜 도시인의 일상을 46개의 소제목으로 쓰고 있다.

 

도시라는 거대한 실체와 마주해 보고 듣고 느낀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살펴보는 작업을 통해 행복에 관한 근원적인 질문과 마주하길 바랐다는 작가는 이 책이 자신의 정체성과 존재 의미를 묻고 답하는 길에서 주운 작은 열매라고도 했다.  도시의 변방으로 한걸음 물러날 때마다 한 켜씩 쌓이는 죄의식은, 속절없이 달았던 '게으름'이라는 죄목의 꼬리표는 누구로부터 비롯된 것인가.

 

거부할 수 없는 가을이다.

이 가을, 도시의 어느 곳에서는 한 해의 수확을 기뻐하는 노랫소리가 빗소리처럼 세상을 적실지 모르겠지만 그 귀퉁이 한옆에서는 먼짓내 풀풀 나는 마른 땅에서 꺼이꺼이 울음을 참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어디에 살든, 어떤 모습으로 살든 행복을 찾는 줄기찬 노력만은 멈추지 말아 달라고 말하고 싶다.  같은 도시인으로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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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스트 클래스 승객은 펜을 빌리지 않는다 - 비행기 1등석 담당 스튜어디스가 발견한 3%의 성공 습관
미즈키 아키코 지음, 윤은혜 옮김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3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용기를 내어서 그대가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머지 않아 그대는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마치 동물처럼..."  프랑스의 시인이자 사상가였던 폴 발레리의 명언이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너무도 쉬운 말처럼 들린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생에 걸쳐 사는 대로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나라고 예외는 아니다.  생각하는 대로 살기란 그만큼 어렵다. 

 

당연한 일이지만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이 꿈꾸는(또는 생각하는) 대로 자신의 삶을 가꾸고 싶어 한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후불제 인생을 살 뿐, 선제적 행동은 하지 못한다.  막상 자신의 삶을 계획하려 들면 너무나 많은 난관에 부딪치기 때문이다.  가깝게는 나에 대한 정보부터 빈약하기 그지없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잘 하는지, 얼마나 잘 참고 끈기가 있는지, 타인에 대한 배려심은 어느 정도이고 어떤 가치관을 갖고 있는지 등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자기 자신에 대하여 도무지 아는 게 없는 듯 보인다.

 

나 신에 대한 정보도 이럴진대 나를 둘러싼 주변 사람들을 일일이 파악한다는 것은 꿈도 꾸기 어렵다.  그렇다면 사람에 대한 정보만 있으면 되느냐 하면 그런 것도 아니다.  내가 동원할 수 있는 물질적인 능력은 얼마나 되는지, 내 주위의 환경은 나에게 얼마나 호의적인지 등 따지고 되짚어보아야 할 것들이 셀 수 없이 많은 것이다.  이쯤에서 사람들은 터질 듯한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싼 채 GG를 선언할 것이다.  헐!  시작도 하기 전에 진을 다 뺀 셈이다.  제대로 된 전투는 치뤄보지도 못한 채 패잔병이 된 신세라니...

 

그러나 나이가 들면 이 모든 것들이 너무도 명료해진다.  젊은 날에 그토록 찾아헤매던 '성공의 법칙'들이 비로소 하나 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렷다.  그렇다면 이제 "유레카!"를 외칠 시점인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문제는 내게 남겨진 시간과 열정이 충분하지도 않을 뿐더러 인생의 후반기에 새로운 도전을 한다는 것은 너무도 무모해 보이기 때문이다.  결국 '성공의 법칙'이란 나이 든 사람들이 청년들에게 들려줄 수 있는 한탄이요, 넋두리인 셈이다.  그러나 나도 청년기에는 나이든 사람들이 들려주는 '성공의 비법'들이 결코 귀에 들어오지 않았었다.  그것은 너무도 흔하고 손수운 듯 보이기에 '비전 전수'라고 여기기는커녕 구멍이 뚫린 '개 밥그릇'쯤으로 여겼었다.

 

이 책 <퍼스트 클래스 승객은 펜을 빌리지 않는다>에서 저자는 우리가 어린 시절에 들었던 익숙한 규칙들을 '성공 습관'으로서 제시하고 있다.  '책을 많이 읽어라', '메모를 잘 해라', '다른 사람이 말할 때 끼어들지 말아라', '인사를 잘 해라', '고마움을 표시하라', '항상 자세를 똑바로 하라'와 같은 말들은 우리가 어렸을 때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던 말들이 아닌가.  16년동안 일본 항공사와 외국항공사를 넘나들며 1등실 객실을 담당했던 전직 스튜어디스인 저자는 퍼스트 클래스를 이용하는 소위 성공한 사람들의 습관을 관찰함으로써 그들의 행동에는 일정한 패턴과 공통점이 있음을 알게 되었고, 저자는 이를 '성공 습관'으로 제시하게 된 것이다.

 

"세상은 불공평한 곳입니다.  집안 형편이 부유하지 않아서, 천재가 아니라서, 외모가 부족해서, 학벌이 좋지 않아서 등의 다양한 이유로 인해 불평등은 어쩔 수 없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비록 이런 한계가 있더라도 항상 남의 입장을 고려하고 배려하는 노력을 멈추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저는 성공한 사람들에게 배웠습니다.  상대방과의 거리와 자신의 위치를 생각하면서 같은 눈높이에서 커뮤니케이션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퍼스트클래스 사람들의 작은 습관이 만들어내는 진정한 매너입니다."    (p.10 '프롤로그' 중)

 

사람이든 물건이든 희귀한 것이 대접을 받는 법이다.  어린 시절부터 누구나 한번쯤 들어 보았을 이런 원칙들을 나와 같은 보통의 사람들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거나, 마지못해 건성건성 하는 시늉만 했을 것이다.  정성을 다하여 세심하고 철저하게, 또는 몸에 배이도록 꾸준히 실천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는 것이다.  결국 사람에게도 경제학에서 말하는 '희소성의 원칙'이 통하는 셈이다.

 

사람에 따라 '성공'에 대한 정의는 제각각이겠지만 '성공은 자신이 꿈꾸었던 삶을 사는 것'이라고 정의한다면 성공을 이루는 보편적 법칙은 의외로 간단하다는 사실을 누구나 잘 알고 있다.  상대방이 감동할 정도로 정성을 다하고, 원칙에서 어긋나는 행동을 하지 않는 사람은 분명 대부분의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을 터이고 '성공'은 덤으로 따라붙을 것이다.  우리는 다만 사소하고 작은 원칙들을 하찮은 것으로만 치부할 뿐 성공을 부르는 비법으로 인식하지는 않는다.  그 작은 원칙이 내 몸에 습관처럼 배이게 하려면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사실도 나이가 한참 든 후에나 깨닫게 된다.  '성공'은 결국 작은 것을 소중히 하는 자세, 오랜 세월을 지속하는 꾸준함에서 비롯되는지도 모른다.

 

나는 어려서 청개구리 영신이 들었었는지 그 소중한 원칙들을 소 닭보듯 지나쳤었다.  소중한 것을 소중한 것으로 인식하게 되었을 때는 이미 시간이 한참이나 흐른 뒤였다.  적당한 시기에 그에 걸맞는 적당한 깨달음을 얻지 못하면 인생은 결국 후회를 안고 '살아내야' 하는 고행길이 되고 만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이 아직 사회 생활을 경험하지 않은 어린 독자였으면 좋겠다.  나는 이 책을 읽을 어린 후배들에게 삶에는 분명 때가 있음을 말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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