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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에서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 - 바쁜 일상에 치여 놓치고 있었던, 그러나 참으로 소중한 것들 46
정희재 지음 / 걷는나무 / 2010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좋은 책일수록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마치 어린 시절 봄소풍 자리에서 보물찾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유난히 보물찾기에 재주가 없었다. 다른 친구들이 서너 개씩 찾는 동안 나는 단 하나도 찾지 못한 채 부러운 시선으로 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곤 했었다. 그때의 기억 때문인지 책 한 쪽도 읽지 못하고 잠자리에 드는 날이면 그때 내 손에 쥐어지던 쓸쓸한 바람결이 되살아나곤 한다. 이따금 찾아오는 그 서늘한 느낌은 나로 하여금 바쁜 와중에도 손에서 책을 놓지 못하게 한다. 이 악착같음은 어데서 오는 것일까? 그때의 쓸쓸함일까, 아니면 나이를 더할수록 집요해지는 삶의 허기짐일까? 나는 그 둘을 마음속으로 응시하며 성큼 다가온 가을을 살고 있다.
도시의 가을은 전염병처럼 번지는 도시인의 조울증세와 함께 시작된다. 설움이랄까 아픔 같은 것이 왈칵 몰려오면서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도시인의 이 느닷없는 감정이 말갛게 변하여 초겨울 눈으로 내리는지도 모른다. 가을은 그렇게 한 계절을 계절로 느낄 겨를도 없이 감정의 롤러코스트를 타다가 후다닥 자취를 감추곤 한다. 어찌할 수 없는 가을이 지쳐올 때마다 나는 정희재 작가의 책을 읽는다. 버릇처럼. 다른 사람들이 인정하든 그렇지 않든 나는 정희재 작가를 거장으로 꼽는다. 내게 있어 문학 분야의 거장으로 인정되는 단 하나의 조건은 인간에 대한 애정이다. 인간을 사랑하고, 폭을 넓혀 살아 있는 모든 생명을 사랑하고, 더 나아가 지구의 모든 것들에 대한 연민이 작가의 삶에 녹아들 때, 비록 그가 쓴 글이 어쭙잖아 보여도 나는 그의 글을 사랑하게 된다. 인간에 대한, 생명에 대한 애정이 없는 사람의 글은 거짓이요, 위선일 수밖에 없다.
"도시, 서로의 곁을 내주지 않는 익명성을 편리로 인정해 주는 공간. 도시인, 익명의 공간에서 시치미를 떼며 살지만, 누군가 가끔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기를 사무치게 바라는 외로운 사람들. 그 안에 내가 있고, 당신이 있다. 끝내 버티지 못할 것 같은 예감에 새벽잠을 설친 순간을 기어이 이겨내며 우린 참 치열하게 달려왔고, 달려가고 있다. 목적지를 아는 사람도 있고, 하루하루 마음 다치지 않고 지나가기만을 바라는 이도 있으리라. 나는 이제 안다.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뎌야 하고 받아들일 수 없는 것들에 지쳐, 당신에게 눈물 차오르는 밤이 있음을." ('작가의 말' 중에서)
<도시에서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는 정희재 작가의 일기와 같은 글이다. 작가의 글을 읽으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솟을 것만 같다. 그 눈물 한방울로 인해 마음의 짐은 한결 덜어지곤 했다. 작가의 글은 스산한 도시의 한 귀퉁이에서 막막함에 가슴을 치고 있을 누군가를 향해 따스한 손길을 내미는 듯하다. 세계 각국의 도시와 히말라야 오지 마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곳을 여행하며 마음 공부를 해왔던 저자는 아무런 이유도 없이 도시의 변방으로 밀려나는 사람들과 턱없이 치솟는 배추값을 걱정하는 도시의 소시민들에게 "당신, 참 애썼다. 사느라, 살아내느라, 여기까지 오느라 애썼다. 부디 당신의 가장 행복한 시절이 아직 오지 않았기를 두 손 모아 빈다.”며 위로하고 있다. 곧 있으면 추석. 명절에도 고향에 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작가는 이 책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그러니까 뉴스에서 헬기까지 띄워 가며 보여주는 영상은 이 시대가 표준으로 장려하고픈 덕목을 널리 알리려는 의도에 다름 아니다. 이 행렬에서 벗어난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서 뭔가 중요한 것이 빠졌다고 느낀다. 이 결핍감과 박탈감이야말로 시스템이 바라는 심리적인 충격 요법이다. 표준에 속하라. 반도의 남쪽으로, 남쪽으로 향하는 차량들의 행렬은 끊어지지 않는 한민족의 전통을 상징하는 퍼포먼스다. 저처럼 혼잡과 불편을 딛고 가야할 곳, 끝끝내 지켜야 할 도리가 있는 삶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어떤 이유로든 이 도시에서 조금씩 일그러지고 빈틈을 지닌 사람들은 말이 없다. 그저 조용히 시스템의 전언을 보고 듣다가 밀린 잠을 채울 뿐." (p.90 ~ p.91)
전남 보성에서 태어나 일곱 살 때 처음오로 도시에 가 보았다는 작가는 중학교 때 부산으로 이사한 뒤로 지금까지 도시에서 살고 있다고 했다. 더 나은 삶을 꿈꾸고, 더 큰 사람이 되기 위해 도시의 삶을 선택했지만 도시에서 살아가는 과정은 언제나 고독하고 피로했다고 했다. 이 책에서 저자는 도시인으로서 자신이 겪었던 경험을 통하여 깨달은 것들을 세심한 필치로 그리고 있다. 도시인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겪었을 법한 혼자 밥 먹기, 택배 받기, 출근하기, 명절 보내기, 편의점 가기, 전화하기, 장보기 등 바쁜 도시인의 일상을 46개의 소제목으로 쓰고 있다.
도시라는 거대한 실체와 마주해 보고 듣고 느낀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살펴보는 작업을 통해 행복에 관한 근원적인 질문과 마주하길 바랐다는 작가는 이 책이 자신의 정체성과 존재 의미를 묻고 답하는 길에서 주운 작은 열매라고도 했다. 도시의 변방으로 한걸음 물러날 때마다 한 켜씩 쌓이는 죄의식은, 속절없이 달았던 '게으름'이라는 죄목의 꼬리표는 누구로부터 비롯된 것인가.
거부할 수 없는 가을이다.
이 가을, 도시의 어느 곳에서는 한 해의 수확을 기뻐하는 노랫소리가 빗소리처럼 세상을 적실지 모르겠지만 그 귀퉁이 한옆에서는 먼짓내 풀풀 나는 마른 땅에서 꺼이꺼이 울음을 참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어디에 살든, 어떤 모습으로 살든 행복을 찾는 줄기찬 노력만은 멈추지 말아 달라고 말하고 싶다. 같은 도시인으로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