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한 얼굴
제임스 설터 지음, 서창렬 옮김 / 마음산책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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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보람과 충만함은 '살아 있음'에 대한 인지와 지속성에 달려 있다. 그러나 반복되는 일상의 도돌이표는 '살아 있음'에 대한 인지를 한없이 무디게 한다. 우리의 삶은 그렇게 하나의 의무 혹은 남들과 하나 다를 것 없는 많은 삶 중 하나(one of them)로 전락하고 만다. 죽지 못해 사는 지경까지는 아니더라도 무감각한 삶의 시간들이 뭉텅뭉텅 잘려 나가는 것이다. '죽을 때 후회하는 00가지'라는 제목의 많은 책들은 그런 무감각한 삶을 살았던 대다수의 사람들이 자신의 임종 직전에 쓰게 되는 유서이자 자신의 삶에 대한 깊은 반성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나의 삶을 그렇게 살지 않겠노라' 이른 나이부터 다짐한 이들이 간혹 보인다. 설령 어떤 커다란 일을 하지 않더라도 그들의 삶은 눈에 띄게 마련이다. 남들과 다르기 때문이다. 타인의 삶이 틀렸다는 게 아니라 적어도 자신만큼은 '살아 있음'에 대한 자각을 잊지 않은 채 그와 같은 감각을 늘 새롭게 할 수단을 찾아 나선다는 건 우리 주변에 흔하디 흔한 보편적 인간의 삶과 다르다는 걸 의미한다. 인간의 육체와 영혼은 자신이 처한 환경에 쉽게 적응하고 너무나 빠른 시간 내에 삶의 자동화 시스템을 구축하는 까닭에 잠깐의 방심으로도 살아 있다는 자각은 한없이 무뎌지게 마련, 그들은 자신의 삶에서 한시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삶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살아 있음'에 대한 자각을 일깨워 줄 마땅한 수단이 그들 주변에서 점차 사라진다는 게 그들만의 고충이라면 고충. 급기야 삶의 긴장감을 유지하고 '살아 있음'에 대한 자각을 일깨워 줄 최후의 수단으로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하기에 이르는데...


<가벼운 나날들>, <위대한 한 스푼> 등으로 잘 알려진 미국의 소설가 제임스 설터의 시선이 암벽 등반가의 삶에 다다른 것도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었는지도 모른다. 제임스 설터의 소설 <고독한 얼굴>은 '실존 인물이었던 한 산악인에 대해 꼼꼼하게 조사하고 편지를 비롯한 관련 자료를 열심히 찾아 읽은 다음, 이 남성적인 등반 세계의 명암을, 명뿐 아니라 암에 대해서도 특유의 남성적인 문체로 핍진하게 그려냈다'(p.284)는 번역자의 평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실존했던 한 산악인의 삶을 그리고 있다. 삶의 긴장과 짜릿한 전율을 느끼는 수단으로써 암벽 등반보다 더 적합한 게 또 있을까.


소설은 주인공인 버넌 랜드가 캘리포니아의 어느 교회 지붕에서 게리와 함께 일을 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대학을 1년 다닌 후 그만두고 군인으로서도 성공하지 못했던 이십 대 중반의 랜드. 지붕에서 미끄러진 게리를 구하는 장면에서 독자는 랜드의 성품과 소설의 향후 전개를 어렴풋이 짐작한다. 멕시코 여자와 동거하고 있던 랜드는 그녀의 열두 살짜리 아들과 암벽등반을 떠나게 되고 정상에서 오랜 친구인 캐벗과 조우한다. 캐벗은 그에게 프랑스 샤모니에 가보라고 권한다. 랜드는 캐벗의 권유를 받아들여 겨울을 나기에 충분할 만큼의 장작을 패서 쌓아 두고는 멕시코 여자를 떠난다. 소설은 이제 프랑스의 알프스 마을 샤모니와 인근의 장엄한 봉우리들을 무대로 본격적인 등반의 세계를 보여준다.


"랜드를 변화시킨 것은 고독뿐만이 아니었다. 또 다른 깨달음도 그를 변화시켰다. 중요한 것은 존재 일부가 되는 것이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는 깨달음이었다. 그는 여전히 위험한 등반의 고통을 잘 알고 있었는데, 다른 식으로도 그걸 알게 되었다. 그것은 경의였다. 그는 기꺼이 등반에 경의를 표했다. 은밀한 기쁨이 그를 채웠다. 누구도 질투하지 않았다. 거만하지도 수줍어하지도 않았다."  (p.174)


세인의 관심이 집중되는 것을 몹시도 싫어했던 랜드는 드뤼 서벽을 악조건 속에서 친구와 함께 등반하고, 그 과정에서 얼굴을 다친 친구를 격려하여 정상에 서게 하였으며, 때로는 동행도 없이 혼자 등반을 감행하기도 하였고, 산에서 조난을 당한 이탈리아 산악인을 구하기 위해 구조대를 결성하여 그가 개척했던 드뤼 서벽을 다시 오르기도 한다. 그에게는 등반이 삶의 전부였다. 그를 산으로 이끌었던 건 어떤 산을 올랐다는 명예나 자존심 혹은 다른 어떤 산악인보다 먼저 오르겠다는 지독한 경쟁심이 아니었다. 그는 다만 등반 과정에서 느끼는 삶의 긴장과 희열로 인해 산으로부터 영영 벗어나지 못하는 처지였다.


건조하고 간결한 문체를 통해 산악인의 삶과 대자연의 침묵을 효과적으로 그려내고 있는 이 소설은 등반이라는 하나의 축과 랜드라는 인물의 개인적 서사(난잡한 성관계)라는 두 축으로 전개된다. 산을 오르지 않을 때에 그를 돌보아준 사람은 그와 사귀었던 여자들이었다. 그가 성관계를 맺었던 여자들은 루이즈, 카트린, 콜레트, 시몬, 수전 등으로 다양했고 그들 중에는 임신을 한 여자도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아버지가 될 생각이 없다며 낙태를 권하기도 하고 결국에는 그녀의 곁을 떠난다.


"랜드는 그녀를 미워하지 않았다. 그녀는 점잖고 다정했다. 넌더리가 난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그녀를 따라다니고, 둘이 쓴 비용을 그녀가 내게 하는 것에 넌더리가 났다. 그녀는 문제 삼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지,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지 상상할 수 없었다."  (p.216)


이 소설의 주인공인 랜드의 모델이었던 실존 인물은 게리 헤밍으로 알려져 있다. 알프스의 프티 드뤼 서벽에서 두 명의 독일인 등반가가 조난 상태에 빠져 있을 때, 초인적인 등반으로 가사상태에 빠진 조난자들을 구했던 게리 헤밍. 당시의 상황은 실시간으로 생중계되었고, 조난 상황 발생 후 일주일 만에 조난자들을 구조했던 그의 영웅적인 구조 등반은 '샤모니의 전설'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난잡한 성관계와 마약 과다복용, 반전사상과 사회적 부적응, 정신착란과 우울증 등으로 그는 결국 36세의 젊은 나이에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물론 이 소설의 결말과는 다르지만 말이다.


'죽음 따위는 두렵지 않다. 다만 삶의 방향을 찾지 못하는 것이 두려울 뿐이다.'라고 썼던 게리 헤밍의 글처럼 우리가 정작 두려워해야 할 것은 자신이 가고 있는 삶의 방향일지도 모른다. 자신의 삶을 시시각각 인식하며 적극적으로 살아가는 게 아니라 죽지 않은 상태를 겨우 유지하며 잉여의 삶을 붙들고 있는 듯한 현대인들에게 버넌 랜드의 감각적인 삶은 '살아 있다는 것은 과연 그런 것이로구나.' 하는 감탄과 함께 '그렇게 살아도 되나?' 하는 의문을 동시에 던져준다. 우리 모두는 지극히 윤리적인 것을 선망하는 동시에 지극히 감각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그 어디쯤에 위치하는 존재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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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픔이 길이 되려면 - 정의로운 건강을 찾아 질병의 사회적 책임을 묻다
김승섭 지음 / 동아시아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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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에 아버지의 기일이 있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나는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어제 일처럼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어렸을 때는 그렇게 밉고 싫었던 사람인데 당신의 모든 것을 간병인에게 맡긴 채 하물며 눈을 뜨는 것조차 힘에 겨워 내내 숨을 몰아 쉬던 나의 아버지. 삶은 그렇게 쉽게 허물어지는 것임을 푸르렀던 당신의 청춘 시절에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이어가자면 이랬다. 물려받은 땅과 재산을 이래저래 모두 탕진한 아버지는 가족들을 이끌고 강원도 산골짜기의 탄광지대로 이사를 했고, 그때부터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형들과 누나들은 직장과 학업을 핑계로 도시로 나가 살았고, 할머니는 지인의 농사를 도우며 1년의 반 이상을 떨어져 살았으며, 집에는 나와 어린 여동생 그리고 엄마와 아버지만 남았었다. 돈이 되는 일이라면 몸을 사리지 않았던 엄마와는 달리 아버지는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언제나 술에 취해 있었고, 그때마다 몇 명 남지도 않은 가족들에 대한 폭력이 이어지기 일쑤였다. 아버지를 피해 달아났던 나와 여동생은 아버지가 잠들 때까지 마을 아곳저곳을 배회하며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이런 생활에 신물이 났던 나는 아버지로부터 벗어날 수만 있다면 어떤 일이든 할 수 있겠다는 생각마저 들었고, 결국 나는 중2 겨울 방학과 함께 형과 누나들이 있는 도시로 전학을 하게 되었다.


아버지를 누구보다도 증오했던 내가 아버지를 조금이나마 이해하려 노력했던 계기는 아버지가 6.25 참전 용사 국가유공자로 등록하였을 때였다. 부자간의 대화라고는 딱히 없이 살았던 까닭에 아버지가 살아온 삶의 궤적을 전혀 알지 못했던 나로서는 20대 초반의 아버지가 낙동강 전투에 참전했었다는 사실이 그저 놀랍기만 했다. 그리고 그 치열했던 전쟁터에서 아버지가 겪었을 충격과 공포가 아버지를 결국 알코올 중독에 이르게 했고, 술을 통해서도 지울 수 없었던 그날의 기억으로 인해 폭력적인 사람으로 변했던 것은 아닐까 어렴풋이 짐작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국가유공자라는 허울뿐인 명예가 우리 가족의 비극을 얼마나 보상할 수 있을까.


나는 김승섭 교수의 저작 <아픔이 길이 되려면>을 읽는 내내 국가의 역할에 대해 생각했다. 책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었다. 2017년 5월 24일 육군보통군사법원은 사적 공간에서 업무와 관련 없는 합의된 상대와 맺은 A대위의 동성 간 성관계에 대해 유죄를 선고했고, 이를 규탄하는 긴급 집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 참석한 <아픔이 길이 되려면>의 저자 김승섭 교수는 집회 참가자들을 향한 자신의 연설 말미에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끝을 맺는다.


"혐오의 비가 쏟아지는데, 이 비를 멈추게 할 길이 지금은 보이지 않아요. 기득권의 한 사람으로서 미안합니다. 제가 공부를 하면서 또 신영복 선생님의 책을 읽으면서 작게라도 배운 게 있다면, 쏟아지는 비를 멈추게 할 수 없을 때는 함께 비를 맞아야 한다는 거였어요. 피하지 않고 함께 있을게요. 감사합니다."  (p.219)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나의 아버지는 전쟁으로 인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앓았던 게 아닌가 싶다. 그때의 참혹했던 기억은 알코올 중독으로, 그리고 알코올성 치매로 이어지면서 당신을 괴롭혔을 테고, 벗어날 수 없는 불안과 공포는 가족에 대한 가혹한 폭력으로 변질되었던 게 아니었을까. 그러나 이를 책임져야 할 국가는 참으로 멀기만 했고 대상을 특정할 수 없는 아버지의 화와 분노는 오롯이 내 가족들에게 지워진 천형처럼 여겨졌었다.


"한국사회에는 그동안 여러 참사가 있었습니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사고,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1999년 씨랜드 화재 참사, 2003년 대구지하철 화재 참사, 그리고 2014년 세월호 참사까지요. 저는 세월호 생존 학생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기 전, 한국에서 발생했던 여러 참사들에서 살아남은 이들에 대한 기록을 찾아봤습니다. 그런데 놀라울 만큼 기록이라 할 만한 게 없었어요. 간혹 발견되는 신문기사 말고는 참사로부터 살아남은 이들이 감당해야 했던 시간에 대해 알 길이 없었습니다. 아픔이 기록되지 않았으니 대책이 있을 리도 없었겠지요."  (p.166)


혹자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6.25 전쟁에 참가했던 사람들이 그렇게나 많은데 왜 당신의 아버지만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시달려야 했으며 그것도 아무런 죄가 없는 가족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질병을 노출시켰느냐고 말이다. 그러나 나로서도 알 길이 없다. 다만, 어머니를 비롯한 가족 전체가 아버지를 증오했으며, 돌아가신 지 10여 년이 흐른 지금도 가족들의 증오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채 애써 애증의 그림자로 조금씩 변모하고 있음에 안도하고 있다고.


"질병의 사회적 원인은 모든 인간에게 동일하게 분포되어 있지 않습니다. 더 약한 사람들이 더 위험한 환경에서 살아가고 그래서 더 자주 아픕니다. 고용불안에 시달리는 비정규직 노동자가, 소득이 없는 노인이, 차별에 노출된 결혼이주여성과 성소수자가 더 일찍 죽습니다."  (p.7 '들어가며' 중에서)


추분도 지난 계절은 이제 제법 가을빛을 띠고 있다. 아버지의 기일 즈음에 읽었던 김승섭 교수의 <아픔이 길이 되려면>. 어쩌면 그 책으로 인해 나는 우리 가족이 떠안아야만 했던 비극의 실체를 어렴풋이 짐작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까이 있어야 할 국가는 너무나 멀리 있었고, 개인의 비극은 개인에게서 그치지 않고 가족 구성원 모두에게 무심한 상처와 그늘을 남기고 말았다. 아픔은 여전히 길이 되지 못한 채 갈팡질팡 혼돈의 세계에서 머무르고 있는 것이다. 기록하고 반성하지 않는 아픔은 그 아픔이 누군가에게 전가되고 확대될 뿐이라는 사실을 나는 이 가을에 책을 통하여 다시금 확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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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파도는 다시 오지 않아 - 오늘 치는 파도는 내가 인생에서 만날 수 있는 딱 한 번의 파도니까
김은정 지음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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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대하는 태도는 자신이 현재 근무하고 있는 현재의 직업이 아닌 전혀 다른 곳에서 드러나곤 한다. 예컨대 운동선수가 우연히 했던 짧은 인터뷰에서, 사업가가 취미로 그린 한 장의 그림에서, 혹은 정치인이 쓴 몇 줄의 일기 등에서 예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던 한 사람의 솔직한 인생관을 확연히 깨닫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아무리 감추고 포장하려 해도 하루 24시간, 1년 365일 동안 한순간도 긴장을 풀지 않은 채 살아갈 수는 없는 법, '설마' 하는 짧은 순간에 그 사람의 진면목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마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한 사람의 전부를 대변한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가끔 사는 것이 고되게 느껴진다. 그럴 때 추천하고 싶은 것이 무언가를 좋아하는 일이다. 어떤 것을 열렬히 좋아해 본 사람의 인생은 이전의 인생과는 달라진다고 믿는다. 애호하는 사람에게만 열리는 세계가 있다. 무언가를 좋아함으로써 새롭게 보이는 세상, 세밀한 결을 손으로 천천히 살펴야만 비로소 보이는 작은 세계가 있다. 내게는 그것이 그림이었지만, 당신에게는 그것이 음식일 수도, 재즈일 수도, 어쩌면 연극이거나 테니스일 수도 있다. 좋아하는 것에 한껏 마음을 내어 주는 일, 그 일은 당신을 더 먼 세계로 데려가 줄 것이다."  (p.235~p.236)


홍콩에서 라이센스 캐릭터 비즈니스를 30년간 이어오며 작가로, 사업가로, 아트 콜렉터로, 혹은 콘텐츠 크리에이터로 1인 다역의 바쁜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는 김은정 작가의 에세이 <같은 파도는 다시 오지 않아>는 230여 쪽의 그닥 두껍지 않은 분량의 책이다. 나는 추석 명절 연휴가 시작되기도 전 어느 날 쫓기는 듯 후루룩 읽어놓고도 짧은 리뷰를 쓰는 데 애를 먹었다. 어떤 식으로 서두를 시작해야 할지, 어떤 내용으로 작가의 인생과 나의 경험을 한 데 엮어 이야기를 풀어나가야 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렇게 차일피일 시간만 보내고 난 지금, 겨우 컴퓨터 자판 앞에 앉아 글을 쓰려니 생각은 중구난방 사방으로 흩어질 뿐 한 곳으로 모이지 않는다.


"사람들은 언제나 시간이 없다고, 삶이 너무 짧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막상 그들이 살아가는 걸 보면 진정 인생이 한 번뿐임을 알고 있는 사람 같지 않다. 일 년 뒤면 기억도 하지 못할 일 때문에 소중한 지금을 허비하고, 마치 영원히 삶이 계속될 것처럼 시간을 낭비한다."  (p.85)


'즐기는 사람은 더 오래, 더 멀리까지 갈 수 있다', '지붕은 해가 맑을 때 수리하는 거야', '천천히 뛰어들고 천천히 떠오르기', '삶에서 모든 걸 가지고 태어나는 사람은 없다', '무언가를 좋아함으로써 비로소 보이는 작은 세계'의 각 장의 소제목에서 읽히는 것처럼 이 책은 작가의 삶 전반을 다루는 자전적 에세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KBS 기자였던 부친과 임대업을 하던 모친 덕분에 어렵지 않은 가정 형편에서 자랐던 작가는 어머니의 잘못된 빚보증으로 인해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지는 경험을 했다고 한다. 고등학교 시절이었다. 결국 작가는 장학금을 주는 대학에 진학할 수밖에 없었고, 엄격하고 보수적인 집안 분위기에서 벗어나고자 대학 졸업과 동시에 해외에서 일할 수 있는 회사에 취직하여 같은 직장의 남편을 만나 결혼하였다고 한다.


삶에서 주어지는 깨달음은 대부분이 후불제인 까닭에 시간과 노력을 통한 경험이 투입되지 않는다면 절대로 알 수 없는 것들이 많다. 작가가 이 책에서 독자들에게 말하고자 하는 바도 크게 다르지 않을 터, 자신이 경험했던 많은 일들을 통하여 그때마다 스스로 깨우쳤던 많은 가르침과 조언들을 작가 자신에게만 남겨두고 싶지는 않았던 듯하다. 책을 읽는 독자들이 자신의 어깨를 딛고 서 더 멀리 내다볼 수 있기를 간절히 희망하고 있다.


"산소통의 4/5 정도를 쓰면 쓰면 다시 물 위로 올라오기 시작해야 한다. 올라가는 데도 산소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내가 너무 올라가기 위한 산소를 남겨 두지 않는 다이버처럼 사리 않았나 생각했다. 돌아갈 힘을 남겨 두지 않고 너무 열심히 일하지 않았나. 그래서 너무 지쳐 버리지 않았나. 어쩌면 이렇게 다쳐 버린 것도 그런 맥락에서 벌어진 일이 아닐까 싶었다."  (p.140)


연휴 뒤의 한 주는 유난히 길게 느껴진다. 하루하루가 어찌나 길고 고단하게 느껴지던지 퇴근과 동시에 풀썩 다리가 꺾이곤 했다. 휴식이 없는 삶은 이쯤에서 삶을 마감하겠다는 뜻과 진배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극단으로 치닫지 않는 적당한 노동과 노동의 피로를 풀어줄 적정 시간의 휴식을 반드시 확보할 필요가 있다. 핑계 같지만 진작 읽었던 이 책의 리뷰를 이제야 마감하는 것도 그동안 내가 너무 지쳐있었기 때문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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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알기 위해서 쓴다 정희진의 글쓰기 2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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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에 대한 비판은 그 출발점에 따라 간절함이나 논리의 구체성이 달라진다. 아니, 달라질 수밖에 없다. 자신이 속한 사회와 작금의 세대를 비판하기 위해서는 주체의 자기 객체화 과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사회 구성원으로 존재하는 자신을 타자화 하기 위해서는 스스로에 대한 분별과 객관화 작업이 필수적으로 선행되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물론 자신이 스스로를 평가하고 객관적으로 이해한다는 게 논리적으로 불가능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사회 구성원의 비판과 문제의식이 없다면 사회를 지배하고 이끄는 정치인과 소수 엘리트 계층의 자각과 반성은 영영 없을지도 모른다.


정희진 작가의 <나를 알기 위해서 쓴다>는 여성학 연구자인 작가가 자신이 읽었던 책을 통해 스스로의 정체성을 정립하기 위한 노력과 애씀의 흔적들을 보여주는 책이다. 그것은 자신의 말과 글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차원이자 학자로서의 보편적 당위성을 지키는 분투의 과정이기도 하다. 약자로서 여성의 입장을 좀 봐 달라는 식의 구걸의 언어가 아니라 이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동지이자 동등한 지위의 구성원으로서 살아가고자 하는 평등의 언어를 희망하고 있다.


"극복, 사랑, 혐오......, 목적이 무엇이든 상대를 알기 위해 "벼랑까지 걸어간" 적이 있는가. 나는 한국 사회에서 학문이 발전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가 '주류 의식'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약자만이 지닐 수 있는, 자신에 대한 의문 속으로 뛰어들 수 있는 인식론적 특권, 끝을 보고야 마는 것은 최고의 저항이다. 자신을 해명하기 위해 끝을 보려는 이들은 비교나 절충하는 방식으로 살지 않는다. 끝을 보고야 만 사람의 씁쓸함. 진실은 달콤하지 않다."  (p.39~p.40)


스스로에 대한 어정쩡한 타협이나 적당한 선에서의 물러섬을 극도로 싫어하는 이의 특징은 결과론적인 외로움에 직면한다는 점이다. 게으름에 천착하는 보편적 인간상에 대한 경멸이나 기피로부터 자신을 이끌어내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자신이 경멸하는 다수의 편에 서서 그들과 화해하고 그들의 습성을 십분 이해하노라, 마음에도 없는 말로 그들을 다독인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끝을 보고야 만 사람의 씁쓸함'을 곱씹을망정 게으름을 금과옥조로 여기는 보편적 인간의 대열에 서기는 죽기보다 싫은 것이다.


1장 '몸에서 글이 나온다', 2장 '우리는 타인을 위해 산다', 3장 '내게 '여성'은 고통이자 자원이다'를 통해 작가가 읽고 정리했던 60여 편의 작품에 대한 자신의 느낌이나 주장을 리뷰 형식으로 피력한 책 <나를 알기 위해서 쓴다>는 작가의 주관적 견해임에도 불구하고 읽는 이로 하여금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지게 할 만큼의 완벽한 논리 구조를 갖추고 있다. 물론 독자의 성향이나 이념적 기울기에 따라 호불호가 크게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글은 아는 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아는 것을 버리는 과정이다. 앎이란, 지식의 습득이 아니라 지식을 다르게 배치하는 것이다. 지식이 자료에 불과함을 증명하는 일이다. 그래서 진보(進/步)의 방식은 계속 걷기고, 보수(保/守)의 도구는 과거를 지키는 익숙함(진부함)이다. 쉬운 말은 지배자, 사기꾼, 게으른 이들의 언어다. 한국 사회처럼 스트레스가 많은 곳에서는 선호될 수밖에 없다. 생각은 엄청난 노동이기 때문이다."  (p.165)


삶의 범주는 대개 세 가지로 분류된다고 나는 믿는다. 자신의 삶을 목표로 하는 어떤 지향점을 향해 채찍질하고 이끄는 극기의 삶, 사회적 관습이나 사회 구성원의 시선으로부터의 해방 또는 자유를 추구하는 풀어짐의 삶, 모든 사회 구성원과의 관계를 끊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생존을 유지하는 도피 혹은 은둔의 삶이 그것이다. 인간은 대개 상황에 따라 세 유형을 번갈아가며 살아가게 마련이지만, 하나의 유형을 선택하고 그 방식을 극단적으로 고수하는 사람도 더러 있다. 그러나 풀어짐의 삶을 선택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그들 곁에 조력자가 반드시 존재한다는 점이다. 예컨대 현대인의 삶에 필요한 제반 지식을 팽개친 채 오직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에만 몰두하는 영화감독이나 우주 연구에 매진하는 천체 물리학자 혹은 카사노바처럼 본능과 감정에 충실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곁에서 그들의 생존을 돌볼 조력자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이 어떤 삶을 선택하든 필연적으로 후회와 번민을 안게 된다.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삶을 끝없이 곁눈질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남의 떡이 더 커 보이는 것이다.


"홍준표의 '돼지 흥분제 사건'으로 나는 두 가지 진리를 다시 확인했다. 국가 안보를 내세워 표를 얻으려는 사람, 정확히 말하면 국민 안전을 대국민 협박용으로 이용하는 사람이 제일 무섭다는 사실과 이 땅에서 오래 살려면 웬만한 일에는 놀라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p.242)


추석이 코앞이다. 그러나 태풍 '힌남노'의 위력 앞에 속수무책으로 당한 사람들은 명절이 그저 즐겁지만은 않을 터, 이런 일을 겪을 때마다 인간도 하나의 동물 종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그럼에도 우리는 '만물의 영장'이라는 허울뿐인 명예를 놓으려 하지 않는다. 자연 앞에서 인간의 삶도 죽음도 하나의 자연 현상에 불과할 뿐 특별할 게 없지 않은가. 정희진의 책을 몇 권 더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그것이 추석 전에 있었던 하나의 사건이라면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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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죽음 - 살아가면서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것에 대하여
장 아메리 지음, 김희상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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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조리한 삶을 가장 단순하게 정리하는 방법은 죽음이다. 죽음 이외에 달리 어떤 방법이 존재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부조리한 삶을 외면하지 않은 채 끝까지 살아가도록 부추기는 건 신이 인간의 내면에 심어 놓은 죽음에 대한 공포 혹은 두려움이다. 말하자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부조리한 삶을 지속하도록 하는 신의 마지막 안배인 셈이다. 그러나 이러한 신의 안배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이를 단박에 비틀어버리는 인간이 있게 마련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사르트르가 했던 "비틀어버림, 그게 죽음이다(Le faux, c'est mort)."라는 말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나는 사람들에게, 자 이제 떼를 지어 나가 목숨을 끊어라, 그러면 여러분의 정신에 명예 훈장이 드리워질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게 아니지 않은가. 그럴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다. 그렇게 멍청하게 군다면, 침묵하겠다. 내가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그 위에서 움직여야만 하는 습지대, 짙은 안개가 드리워진 습지대로부터 그저 몇 가지 소소한 자료와 그저 그런 이야기들 그 이상의 것을 환하게 밝혀내기 위한 준비 작업일 따름이다."  (p.64)


장 아메리의 <자유죽음>을 읽는 독자라면 의당 '자연사'와 자유죽음(혹은 자살)' 사이에서의 윤리의식은 존재하는가? 하는 문제와 그렇다면 자연사는 도덕적으로 옳고 자유죽음은 그렇지 않다는 생각은 과연 옳은가? 하는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이렇게 따져 들어가다 보면 그렇다면 자연사란 무엇인가? 에 이르게 된다. 예컨대 20대의 젊은 나이에 교통사고로 사망하거나 40대의 젊은 가장이 자연재해로 사망하거나 50대에 심장마비로 사망한 사람은 모두 자연사인가? 그렇다면 살 만큼 살았다고 생각하는 60대의 누군가가 스스로의 결정(주관적인 결정)에 의해 자유죽음을 선택하였다면 그는 천벌을 받아 마땅한 사람이라며 손가락질을 받아 마땅하고 그보다 젊은 나이에 사망한 많은 사람들에 대해서는 안타까워하며 애도를 표해야 하는가? 아메리는 이처럼 비논리적인 관습에 의문을 표한다. 어쩌면 우리는 사회로부터 습득한 죽음의 윤리에 의해 스스로의 생각을 말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 죽음은 확실히 우발적인 사건이다. 그러나 자유죽음이라는 특수 경우에도 그럴까? 자유죽음으로 나는 나 자신을 다른 사람에게서 떼어낸다고 믿는다. 내 체험의 공간 안에서 자유죽음은 우발적이지 않다. 이른바 '자연죽음'이라는 것과는 정반대인 것이 자유죽음이다. 프로젝트로서의 자유죽음은 분명 자유에 따른 선택이다. 그러나 자유죽음으로 자유에 이르지 못한다는 측면에서 볼 때, 결과적으로 자유죽음은 새로운 우발적 사건일 뿐이다. 의도된 것이었으나 우발적으로 끝나고 만다는 점에서 자유죽음은 완전히 앞뒤가 바뀐 것이다. 그래도 인생은 살 만한 것이라고 자신에게 끊임없이 타이르던 거짓말에 비해 유일하게 진솔한 게 자유죽음이다. 다른 것처럼 주장했으나 결국은 다를 바가 없다는 점에서."  (p.254~p.255)


자유죽음은 아메리의 판단처럼 자유에 따른 선택이 분명하지만 자유죽음의 과정은 충동자살이나 동반자살과는 구별된다고 믿는다. 자유죽음에 이르기까지 나름의 합리적인 판단과 용기가 필요했을 터, 그 실행과 성공은 별개로 치더라도 우리는 그들의 고민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공허한 말이지만 심리학에서는 자살의 원인에 대해서 '나르시시즘의 위기' 혹은 '성장 과정의 결손' 때문이라고 본다. 그러나 '죽는 것만 못한 삶'을 꾸역꾸역 살아간다는 것, 존엄을 포기하면서 삶을 이어간다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이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한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내재된 지나친 편견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유죽음을 선택한 이의 결과는 그가 의도한 대로 귀결되지 않는다. 예컨대 현재의 삶이 고통스러워 삶의 안식과 평안을 원하는 이가 자유죽음을 선택하였다고 할지라도 그가 얻는 것은 평안한 삶이 아니라 '아무것도 없음'의 상태로 전환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자유죽음을 선택한 결과는 공허하기 짝이 없다. 아메리는 이 책에서 자살자는 '인생은 살 만한 것이라고 최면을 거는 거짓말'에 속지 않고 근원적인 진정성을 온전히 살아내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의 주장은 일견 옳다. 그러나 공허한 결과에 대해 아메리 자신도 동의하지 않는다. 합리적인 판단에 의해 자유죽음을 선택한 사람이라면 눈앞의 현실에서 직면하는 문제는 아무것도 아닌 게 된다. 언제든 자신은 자유죽음을 실행에 옮길 수 있기 때문이다.


"삶이 탄생의 순간부터 죽어감이었던 것처럼, 죽기로 각오한 당당함은 삶의 길을 열어준다."  (p.264)


아우슈비츠 생환자였던 장 아메리는 1976년 이 책이 출간되고 2년 뒤 자살로 자신의 삶을 마감했다. 책의 출간과 함께 자살 옹호론자라는 오명과 자살을 부추긴다는 오해를 불러일으켰지만 아메리 역시 자유죽음의 무의미성과 당당한 삶의 길로 나설 것을 적극 지지했던 한 사람으로서 그는 다만 자유죽음에 대한 편견과 그들에 대한 낙인찍기를 멈추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 했는지도 모른다. '합리적'이라는 말도 삶에서나 통용되는 말이지 실제로 자유죽음에 성공한 이의 경우에는 전혀 의미가 없는, 이쪽 세상의 말이자 의미임을 절감하게 된다. 자유죽음을 실행에 옮긴 이의 한 걸음 한 걸음을 '합리적'이라고 한들 도대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합리적'이란 말은 살아 있는 자들의 무의미한 담론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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