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한 얼굴
제임스 설터 지음, 서창렬 옮김 / 마음산책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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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보람과 충만함은 '살아 있음'에 대한 인지와 지속성에 달려 있다. 그러나 반복되는 일상의 도돌이표는 '살아 있음'에 대한 인지를 한없이 무디게 한다. 우리의 삶은 그렇게 하나의 의무 혹은 남들과 하나 다를 것 없는 많은 삶 중 하나(one of them)로 전락하고 만다. 죽지 못해 사는 지경까지는 아니더라도 무감각한 삶의 시간들이 뭉텅뭉텅 잘려 나가는 것이다. '죽을 때 후회하는 00가지'라는 제목의 많은 책들은 그런 무감각한 삶을 살았던 대다수의 사람들이 자신의 임종 직전에 쓰게 되는 유서이자 자신의 삶에 대한 깊은 반성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나의 삶을 그렇게 살지 않겠노라' 이른 나이부터 다짐한 이들이 간혹 보인다. 설령 어떤 커다란 일을 하지 않더라도 그들의 삶은 눈에 띄게 마련이다. 남들과 다르기 때문이다. 타인의 삶이 틀렸다는 게 아니라 적어도 자신만큼은 '살아 있음'에 대한 자각을 잊지 않은 채 그와 같은 감각을 늘 새롭게 할 수단을 찾아 나선다는 건 우리 주변에 흔하디 흔한 보편적 인간의 삶과 다르다는 걸 의미한다. 인간의 육체와 영혼은 자신이 처한 환경에 쉽게 적응하고 너무나 빠른 시간 내에 삶의 자동화 시스템을 구축하는 까닭에 잠깐의 방심으로도 살아 있다는 자각은 한없이 무뎌지게 마련, 그들은 자신의 삶에서 한시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삶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살아 있음'에 대한 자각을 일깨워 줄 마땅한 수단이 그들 주변에서 점차 사라진다는 게 그들만의 고충이라면 고충. 급기야 삶의 긴장감을 유지하고 '살아 있음'에 대한 자각을 일깨워 줄 최후의 수단으로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하기에 이르는데...


<가벼운 나날들>, <위대한 한 스푼> 등으로 잘 알려진 미국의 소설가 제임스 설터의 시선이 암벽 등반가의 삶에 다다른 것도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었는지도 모른다. 제임스 설터의 소설 <고독한 얼굴>은 '실존 인물이었던 한 산악인에 대해 꼼꼼하게 조사하고 편지를 비롯한 관련 자료를 열심히 찾아 읽은 다음, 이 남성적인 등반 세계의 명암을, 명뿐 아니라 암에 대해서도 특유의 남성적인 문체로 핍진하게 그려냈다'(p.284)는 번역자의 평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실존했던 한 산악인의 삶을 그리고 있다. 삶의 긴장과 짜릿한 전율을 느끼는 수단으로써 암벽 등반보다 더 적합한 게 또 있을까.


소설은 주인공인 버넌 랜드가 캘리포니아의 어느 교회 지붕에서 게리와 함께 일을 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대학을 1년 다닌 후 그만두고 군인으로서도 성공하지 못했던 이십 대 중반의 랜드. 지붕에서 미끄러진 게리를 구하는 장면에서 독자는 랜드의 성품과 소설의 향후 전개를 어렴풋이 짐작한다. 멕시코 여자와 동거하고 있던 랜드는 그녀의 열두 살짜리 아들과 암벽등반을 떠나게 되고 정상에서 오랜 친구인 캐벗과 조우한다. 캐벗은 그에게 프랑스 샤모니에 가보라고 권한다. 랜드는 캐벗의 권유를 받아들여 겨울을 나기에 충분할 만큼의 장작을 패서 쌓아 두고는 멕시코 여자를 떠난다. 소설은 이제 프랑스의 알프스 마을 샤모니와 인근의 장엄한 봉우리들을 무대로 본격적인 등반의 세계를 보여준다.


"랜드를 변화시킨 것은 고독뿐만이 아니었다. 또 다른 깨달음도 그를 변화시켰다. 중요한 것은 존재 일부가 되는 것이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는 깨달음이었다. 그는 여전히 위험한 등반의 고통을 잘 알고 있었는데, 다른 식으로도 그걸 알게 되었다. 그것은 경의였다. 그는 기꺼이 등반에 경의를 표했다. 은밀한 기쁨이 그를 채웠다. 누구도 질투하지 않았다. 거만하지도 수줍어하지도 않았다."  (p.174)


세인의 관심이 집중되는 것을 몹시도 싫어했던 랜드는 드뤼 서벽을 악조건 속에서 친구와 함께 등반하고, 그 과정에서 얼굴을 다친 친구를 격려하여 정상에 서게 하였으며, 때로는 동행도 없이 혼자 등반을 감행하기도 하였고, 산에서 조난을 당한 이탈리아 산악인을 구하기 위해 구조대를 결성하여 그가 개척했던 드뤼 서벽을 다시 오르기도 한다. 그에게는 등반이 삶의 전부였다. 그를 산으로 이끌었던 건 어떤 산을 올랐다는 명예나 자존심 혹은 다른 어떤 산악인보다 먼저 오르겠다는 지독한 경쟁심이 아니었다. 그는 다만 등반 과정에서 느끼는 삶의 긴장과 희열로 인해 산으로부터 영영 벗어나지 못하는 처지였다.


건조하고 간결한 문체를 통해 산악인의 삶과 대자연의 침묵을 효과적으로 그려내고 있는 이 소설은 등반이라는 하나의 축과 랜드라는 인물의 개인적 서사(난잡한 성관계)라는 두 축으로 전개된다. 산을 오르지 않을 때에 그를 돌보아준 사람은 그와 사귀었던 여자들이었다. 그가 성관계를 맺었던 여자들은 루이즈, 카트린, 콜레트, 시몬, 수전 등으로 다양했고 그들 중에는 임신을 한 여자도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아버지가 될 생각이 없다며 낙태를 권하기도 하고 결국에는 그녀의 곁을 떠난다.


"랜드는 그녀를 미워하지 않았다. 그녀는 점잖고 다정했다. 넌더리가 난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그녀를 따라다니고, 둘이 쓴 비용을 그녀가 내게 하는 것에 넌더리가 났다. 그녀는 문제 삼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지,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지 상상할 수 없었다."  (p.216)


이 소설의 주인공인 랜드의 모델이었던 실존 인물은 게리 헤밍으로 알려져 있다. 알프스의 프티 드뤼 서벽에서 두 명의 독일인 등반가가 조난 상태에 빠져 있을 때, 초인적인 등반으로 가사상태에 빠진 조난자들을 구했던 게리 헤밍. 당시의 상황은 실시간으로 생중계되었고, 조난 상황 발생 후 일주일 만에 조난자들을 구조했던 그의 영웅적인 구조 등반은 '샤모니의 전설'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난잡한 성관계와 마약 과다복용, 반전사상과 사회적 부적응, 정신착란과 우울증 등으로 그는 결국 36세의 젊은 나이에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물론 이 소설의 결말과는 다르지만 말이다.


'죽음 따위는 두렵지 않다. 다만 삶의 방향을 찾지 못하는 것이 두려울 뿐이다.'라고 썼던 게리 헤밍의 글처럼 우리가 정작 두려워해야 할 것은 자신이 가고 있는 삶의 방향일지도 모른다. 자신의 삶을 시시각각 인식하며 적극적으로 살아가는 게 아니라 죽지 않은 상태를 겨우 유지하며 잉여의 삶을 붙들고 있는 듯한 현대인들에게 버넌 랜드의 감각적인 삶은 '살아 있다는 것은 과연 그런 것이로구나.' 하는 감탄과 함께 '그렇게 살아도 되나?' 하는 의문을 동시에 던져준다. 우리 모두는 지극히 윤리적인 것을 선망하는 동시에 지극히 감각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그 어디쯤에 위치하는 존재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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