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쉿, 조용히! - 풋내기 사서의 좌충우돌 도서관 일기
스콧 더글러스 지음, 박수연 옮김 / 부키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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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그제 저녁에 담배를 사러 집 근처의 슈퍼에 들렀었다.  카운터에는 나이 지긋한 할머니 한 분이 앉아 있었고, 가게 안은 손님이 없고 한산한 편이었다.  그때 마침 반팔 티셔츠를 입은 체격 건장한 청년이 양손에 짜파게티와 라면을 한보따리 들고는 물건값을 계산하기 위해 카운터로 다가오고 있었는데, 그 모습을 본 할머니 왈, "아이고, 반소매에 춥지 않아요?" 하자 청년은 "아니, 괜찮은데요?" 했다.  할머니는 그래도 못 믿겠다는 듯, "추울텐데..."하면서 혀를 끌끌 찼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청년이 추운 게 아니라 할머니가 추웠던 것이다.  내가 보기에도 청년은 추위라곤 전혀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날씨도 워낙 포근했지만 말이다.  우리는 가끔(자주라고 할 수도 있지만) 자신의 생각과 다른 사람의 생각이 같을 것이라는 착각 속에서 산다.  이 책 <쉿, 조용히!>를 읽으면 누구라도 확실히 깨달을 수 있다.  도서관 사무 보조원으로 들어가 학비가 공짜라는 이유로 대학원에 진학하여 석사학위를 받고 정식으로 도서관 사서 생활을 시작한 스콧 더글러스의 평범하지만 전혀 평범하지 않게 기록된 도서관 생활기이다.  위트가 넘치는 그의 필체로 인해 독자들은 개그 콘서트의 '본방 사수'를 까먹을 정도다.

 

"이디스는 입안 가득 음식을 우물거리며 물었다.  "그 핑콩인지 뭔지가 신인작가야?"  나는 태연한 척하려고 애썼다.  그녀는 필경 나를 놀리고 있는 것이리라.  나를 놀려야만 했을 테니까.  그녀는 핀천이 누구인지 당연히 알 것이다.  나는 그녀의 놀림에 속아 넘어가 주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핀천은 제가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책을 썼어요."  그녀는 내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며 내가 몇 살이나 되었을까 가늠해 보는 듯했다.  그러더니 도도하게 선언했다.  "난 책은 잘 안 읽는 편이야.  읽을 시간도 없고."  "사서인데도요?"  무례하게 들릴 수 있는 질문이었지만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었다."    (p.16)  

 

내가 자주 가는 도서관에도 이런 해괴한 일은 수도 없이 일어난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을 위해 도서관을 소개하자면 이렇다. 1층에는 아동.모자 열람실과 강당, 문화사랑방과 방제실 및 매점이 있다.  문화 사랑방이 뭐하는 데냐고?  그곳에서는 주로 유치원생들이 그린 비대칭의 그림이 전시되거나 동네 아줌마들의 짧은 연애편지(아줌마들은 그걸 시라고 박박 우기지만)가 벽에 걸리고 아주 가끔은 집에 들어가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하는 아저씨들이 자신들이 찍은 사진 몇 장을 벽에 걸어놓고는 하루 종일 음담패설을 하기도 하는 다용도실이다.  나는 처음에 방제실을 방조실로 잘못 읽었었다.(왜냐하면 그곳에는 청원경찰이 두 명이나 있는데 아이들이 심한 장난을 쳐도 그냥 방조하기 때문이다)  아동.모자 열람실은 아무리 찾아도 아비부(父)자를 찾을 수 없어서 단 한번도 들어가 보지 못했으므로 설명이 곤란하다. 

 

2층에는 종합자료 열람실과 장애인 열람실 및 정기 간행물실, 보관서고가 있다.  종합자료 열람실은 내가 가장 자주 이용하는 공간이다.  잠이 부족한 사람들은 가끔 서가 뒤에 놓인 소파에 누워 잠을 청하기도 한다.  이런 사람들은 그나마 양심이 있는 사람들이고 학생들은 책상에 엎드려 보란 듯이 잠을 자기도 한다.  3층에는 관장실과 정보자료실, 문화교실(주로 아줌마들 몇몇이 모여 독서토론이나 취미생활이라는 명목으로 공공연히 남편의 험담을 늘어놓는 공간), 휴게실(자판기 4대가 대부분의 공간을 차지하고 있고 사람들은 그 부속품쯤으로 보인다) 및 관리과가 있다.  정보 자료실에는 컴퓨터가 50여대 있고 입구의 안내 데스크에는 30분 간격으로 음식물 반입과 가방 소지를 제재하는 표독스러운 아줌마가 한 명 있다.  요즘은 머리를 노랗게 염색까지 한 탓에 더욱 눈에 띈다.(그럼에도 전혀 패셔니스타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도서관 사서라는 직업에 무작정 뛰어들었던 저자는 그동안 자신이 갖고 있던 도서관에 대한, 그리고 그곳에서 근무하는 사서에 대한 편견이 무척이나 잘못된 것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사서는 책에 대한 많은 지식으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사서로서의 경험으로 일하게 된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대부분의 직업이 그렇듯 한 사람이 직업인으로서 유능하냐 그렇지 못하냐의 기준은 얼마나 많은 사전지식이 있었느냐가 아니라 그 직업에 대한 자긍심과 경험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저자는 서서히 깨닫게 된다.  이것은 마치 우리의 삶이 성숙해가는 과정과도 비슷하다.

 

이 책에는 도서관에서 저자가 겪은 여러 에피소드가 담겨 있다.  '설마 그런 일까지?'라고 생각했다면 제대로 맞춘 것이다.  설마가 사람 잡을 테니까.  물론 이 책이 씌어졌을 때와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도서관은 많은 차이가 있겠지만 말이다.  도서관 사서라는 직업에 대해 원론적인 입장이었던 저자는 때때로 자신의 직업에 회의적인 생각을 하기도 하지만 도서관이 지역사회에 정보를 전달하고자 하는 목적만으로 설립되고 운영되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면 답은 명확해진다.  그런 추상적이고 원론적인 목적은 현실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어느 날 그들은 십대 열람실에서 '어떤 놈을 머리통을 박살내서 죽이자'는 내용의 랩 음악을 듣고 있었다.  나는 음악을 끄라고 말했다.  그들은 나에게 "네 털투성이 거시기나 핥아." 라고 말했다.  나는 그들에게 나가라고 했다.  그들은 나에게 말하기를 내가 "거기나 빠는 병신 같은 호모 새끼이고 못생긴 여자친구가" 있다고 했다."    (p.301) 

 

내가 보기에도 도서관은 아이들이 엄마의 잔소리를 피해 숨어들 수 있는 몇 안 되는 공간이며, 막 이성에 눈 뜬 아이들이 어른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교제할 수 있는 공간이며, 그보다 더 어린 아이들에게는 장난감총을 들고 마음껏 뛰어다닐 수 있는 자유로운 공간이 되기도 한다.  또한 집에서는 절대 볼 수 없는 아프리카 TV의 게임 중계를 마음껏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사서가 감독을 하지만 사서의 눈을 피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나 마찬가지다)   어떤 날은 도서관 주변의 으슥한 곳에 놓인 벤치에서는 19금의 낯 뜨거운 장면을 목격할 때도 있다.  아마도 용돈이 부족한 대학생이 머리를 짜내어 생각한 데이트 장소였을지도 모르는 일이기에 못 본 척 넘어가곤 한다. 

 

비록 우리는 도서관을 집을 오가는 길에 보이는 특별하지 않은 콘크리트 덩어리쯤으로 생각하곤 하지만 그 속에서의 현실을 단 하루만이라도 꼼꼼이 관찰한다면 우리가 애초에 생각했던 것과는 많이 다르다는 것을 단박에 알게 될 것이다.  때로는 재수를 하는 아이들이 휴게실에서 홀로 앉아 찬밥 덩어리를 먹는 서글픈 현실과 마주하기도 하고, 취업 준비생의 누렇게 뜬 얼굴과도 대면할 때가 있다.  도서관 사서는 그런 다양한 삶을 이해하고 배려하지 못한다면 결코 참아내기 어려운 직업이다.  그저 책이나 빌려주고 서가에 책을 정리하면서 남는 시간에는 시시껄렁한 잡담을 하거나 안내 데스크에 편하게 앉아 자신이 보고 싶었던 책을 마음껏 읽으면서 월급만 꼬박꼬박 챙기는 사람들이 아님을 저자는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우리의 고정관념이 때로는 상대방을 아프게 할 때가 있다.  책은 우리의 고정관념을 깨트리는 중요한 도구이다.  그 다양한 도구가 도서관에 있다.  새봄에는 도서관 출입이 잦을 듯하다.(어쩌면 부족한 잠을 보충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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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사적인, 긴 만남 - 시인 마종기, 가수 루시드폴이 2년간 주고받은 교감의 기록
마종기.루시드폴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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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집에 깊이 끌리는 이유가 뭘까? 하는 궁금증이 조금의 시간적 여유가 있을 때마다 이방인처럼 낯선 얼굴로 찾아오곤 한다.  그 생각은 집요한 구석이 있어서 옷에 묻은 먼지처럼 툭툭 턴다고 쉽게 사라지는 게 아니었다.  생각도 결국 나에게 속하는 것인데 정작 자신이 만들고도 만든 까닭을 모르니 답답한 일이다.  추측컨대 내가 서간집을 좋아하는 이유는 내 성향의 문제인 듯하다.  드라마보다는 다큐멘터리를, 스포츠 중계보다는 동물의 왕국을 더 좋아하는 이상한 습성 말이다.

 

지난 설 명절에 교수를 하는 손윗동서를 만나 이야기를 하는 와중에 그분도 나와 비슷한 습성이 있음을 우연히 알게 되었다.  그 유명한 개그 콘서트를 보고도 뭐가 웃기다는 건지, 또는 적당히 웃으려고 해도 어느 부분에서 웃어야 하는 건지 자신으로서는 도무지 알 수 없다는 거였다.  영국에서 교수 생활을 하다 한국에 막 돌아왔을 때는 더했었단다.  그래서 TV는 숫제 보지를 않는다고 했다.  그리고 나이가 들면서 동물의 왕국과 같은 자연 다큐멘터리가 점점 더 재밌어진다고도 했다.  우연의 일치이겠지만 나도 별반 다르지 않기에 "그럼 시간이 날 때 뭐하세요?" 했더니, 돌아오는 대답인즉슨 "그냥 책 봐."였다.  '이런, 염병할!  책이라니...' 나는 그 말을 하마터면 입 밖으로 소리내어 말할 뻔했다.

 

하도 거짓이 난무하는 세상인지라 사실의 기록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가 보다.  그것이 비록 사실과 같은 허구인지, 또는 거짓과 같은 사실인지 그 경계의 구분이 애매하지만 말이다.  최근에도 나는 <채링크로스 84번지>라는 오래된 서간집을 읽었었다.  그뿐인가.  반고흐의 편지를 모은 <영혼의 편지>며 정약용의 편지를 모은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등 서간집이라면 왠지 모르게 끌린다.

 

아무튼 서간집을 좋아하는 내가 또 서간집을 골라 읽었다.  여기에는 현대인의 엿보기 심리인 관음증적 증세가 한몫하는지도 모르겠다.  이 책 <아주 사적인, 긴 만남>이 특별히 눈에 띄었던 이유는 마종기 시인과 루시드폴이 공통적으로 유목민의 삶을 살면서 쓴 편지라는 것이었다.  내가 외국에서 떠돌이처럼 살았던 짧았던 시간이 생각났었다.  어느 곳에선들 자신의 몸을 편안히 누일 집 한 채 없을까마는 영혼은 언제나 불안과 외로움 속에서 떨게 되는 것이 외국에서의 삶이다.  그래서인지 모든 게 부질없어 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외로움을 피해 계획에도 없던 여행을 떠나기도 하고, 며칠씩 방에 갖혀 죽은 듯 살아보기도 하고...

 

"그리고 다시 호텔로 돌아왔을 때, 문득 혼자라는 사실이 사무치게 다가왔습니다.  이미 고국에서 긴 여행을 떠나 '혼자'인 내가, 지금 왜 다시 '혼자' 여행을 왔는지 자문하니 몸서리치게 외롭더군요.  그리고 다음 날, 그 커다란 성당을 찾아 한쪽 구석에 고개를 숙이고 앉아 한참을 기도하고 고백했지요.  외롭고 또 외롭다고.  그러니 나를 도와주시면 좋겠다고.  그렇게 하루를 더 지내고 파티마를 떠나 다시 리스본을 지나 신트라sintra로 가서 혼자 밤하늘을 바라보다가 태어나서 처음 선명하게 별똥별을 보았습니다.  여행의 끝에 참으로 많이 위로받는 기분이었어요."    (p.145-p.146)

 

생명공학을 연구하는 과학자인 동시에 싱어송라이터로서, 의사이자 시인으로서의 그들은 남들이 알 수 없는 연계가 있는 듯 보였다.  나도 그랬다.  대학 시절 나는 천상병 시인을 무척이나 좋아했었다.  서울대 상과대학을 중퇴한 천상병 시인의 시는 알 수 없는 이끌림으로 나를 사로잡았다.  경제학을 전공하던 나는 당시만 해도 천상병 시인의 이력을 알지 못했었다.  그럼에도 나는 무작정 천상병 시인의 작품만 읽었다.  세상에 시인은 오직 천상병 시인만 존재하는 것처럼.  오죽하면 나는 지인으로부터 천상병 시인의 시집을 생일 선물로 받기도 했다.

 

"윤석군이 귀국을 하면 그간에 공부한 과학자로서의 길을 포기하지 말고 그 전문직을 버리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과학과 예술의 두 가지 길을 병행시키는 것은 지난한 일이기는 하지만 한평생을 걸어볼 만한 모험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둘은 서로 묘한 보완 작용을 할 것입니다.  내가 만일 의사가 되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시인의 길을 오래전에 포기했을 것입니다.  나는 편한 것을 좋아하고 재미있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런 인간에게 고난과 인내를 끊임없이 요구하는 시인의 삶이란 당치 않은 것이지요.  내가 만약 시인이 아니었다면 나같이 감정적이고 선병질적으로 외로움을 감당하지 못하는 몸으로 외국의 의사 생활을 이겨내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p.169)  

 

36년이라는 나이차에도 불구하고 노시인과 젊은 음악인은 서로의 삶을 깊이 이해하고 있는 듯 보였다.  우리는 가끔 가장 이질적이라고 느꼈던 대상에서 아주 비슷한 동질감을 발견하곤 한다.  서로가 서로를 향해 한발 다가서지 않으면 그 거리는 세상 어느 것보다 멀게 느껴지지만 조용히 손만 뻗어도 다른 사람의 체온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는 것이 인간이기도 하다.  노시인은 젊은 예술가를 통하여 자신의 지난 추억을 떠올리고 젊은 예술가는 노시인을 통하여 자신의 미래를 그려보는 일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타자로서의 서로를 깊이 사랑하고 위로하는 일일 것이다.  어쩌면 삶의 풍요라는 것도 그곳에서 비롯되는지도 모른다.

 

"선생님의 친구분들에 대한 이야기는 넋두리도, 빛바랜 이야기도 아닙니다.  선생님의 시를 읽으면서 저는 한 번도, 그 속에서 말씀하시는 죽음, 삶, 친구들, 고향, 부모님, 어린 시절, 이런 소재나 시어들이 나이 든 사람의 넋두리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나이가 어떠하든, 어떤 경험을 하고 산 세대의 사람이든,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들을 해주시는 능력을 선생님은 지니고 계시지요.  선생님의 친구분들과 동료 문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한편으로는 조금 외로워졌습니다.  선생님의 문학 이력에 전혀 비할 바는 못 되지만 저는 처음 음악을 시작할 무렵부터 늘 혼자였고, 영향을 주고받을 동료들이 주변에 없었지요.  좋게 본다면 본의 아니게 음악이 독특해졌을지 모르지만 그런 만큼, 음악적으로 많이 성장하지 못했던 건 아닌지 돌아봅니다."    (p.181)

 

그들의 편지는 2009년 3월에서 멈춘다.  2007년 8월에 시작하여 2년여의 기간 동안 54통의 편지가 오갔고 2009년 4월 13일에 있었던 고국에서의 만남.  나는 그 이후의 그들의 삶도, 인연의 이어짐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내가 자신할 수 있는 것은 노시인에게도, 젊은 예술가에게도 자신을 생각해주는 사람이 생겼다는 편안함이 생을 다할 때까지 마음 한켠에 머물 것이라는 사실이다.  누군가 진심으로 나를 생각해준다는 사실만으로도 삶은 얼마나 가치있는 것인가.  비록 서로의 주소를 모른다 해도, 죽는 날이 서로 다르다 해도 마음이 향하는 길엔 주소가 필요치 않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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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성이 부르는 소리 - 잭 런던의 클론다이크 소설 잭 런던 걸작선 7
잭 런던 지음, 곽영미 옮김 / 지식의풍경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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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을 거슬러 올라가면 원시 지구와 대면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어리석은 것이겠지요?

잭 런던의 소설 <야성이 부르는 소리>를 읽고 있노라면 금방이라도 세월의 장벽을 훌쩍 뛰어 넘을 것만 같은 착각에 빠지곤 합니다.  팔과 다리에 북실거리는 털이 돋고 머리는 앞으로 쭉 내민 채 엉거주춤한 자세로 걷고 있는 나를 만날 것만 같은 착각 말이죠.  밤이면 작은 모닥불을 피우고 예민한 귀를 숲을 향해 열어 놓은 채 잠이 들 것입니다.  어쩌면 제 곁에는 '벅'과 같이 듬직한 개 한 마리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이 책을 처음 읽었던 것은 아마 국민학교 시절이었던 것 같아요.  그때 읽었던 책의 제목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이 책을 원작으로 한 만화였던 듯합니다.  그래서인지 어느 날 어머니께서 개 한 마리를 사오셨을 때, 그 개의 이름도 '바크'라고 지었답니다.  만화에서는 주인공 개의 이름이 ;벅'이 아닌 '바크'였거든요.  그 책에 얼마나 빠져 있었던지 언젠가 꼭 다시 읽어보겠노라 다짐도 했었습니다.  그렇게 미루고 미루다 한참의 세월이 흐른 지금에서야 그 약속을 지킨 셈이 되었습니다.

 

소설은 주인공 '벅'이 산타클라라 계곡의 밀러 판사 저택에서 정원사 조수로 일하던 '매뉴얼'에 의해 유괴되어 썰매견으로 팔려가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사람의 운명도 그렇듯 변화는 언제나 급작스럽고 느닷없는 것인가 봅니다.  '벅'은 나락으로 떨어진 자신의 삶을 부정하며 분노합니다.  사람들도 그렇지요?  왜 하필 나냐고 묻고 되묻고 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잔인한 인간들은 '벅'의 심정을 헤아리지 못합니다.  오히려 몽둥이로 흠씬 두들겨 팰 뿐이지요.  '벅'은 자신의 행동이 부질없음을 깨닫습니다.  피도 눈물도 없는 적자생존의 세계로 들어왔음을 절감하는 것이죠.  그가 살았던 남부의 도덕적이고 평온한 삶은 이제 더이상 존재하지 않고 그 혹독한 환경에서 사느냐 죽느냐의 절박함만 남았을 뿐입니다.  책에서는 '몽둥이와 엄니의 법칙'이라고 표현합니다.

 

북부에서 '벅'의 첫주인은 캐나다 정부의 우편배달 업무를 하는 페로와 프랑수아였습니다.  우편 배달 썰매를 끄는 일은 언제나 시간에 쫓기는 일이었죠.  여러 마리의 개가 협동을 하여 썰매를 끄는 까닭에 서열이 정해지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순식간에 죽음으로 내몰릴 수 있음을 영민한 '벅'은 재빨리 깨닫습니다.  그와 함께 썰매를 끄는 동료개들로부터 썰매를 끄는 요령과 부족한 끼니를 해결하는 방법, 븍쪽의 추위 속에서 안전하게 잠자는 요령 등을 빠르게 배워나갑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썰매견의 일인자였던 '스피츠'를 통하여 최고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절감하게 됩니다.  '벅'은 결국 교활하고 비열하기까지 한 '스피츠'를 누르고 썰매견의 선두에 서게 됩니다.

 

"북극의 오로라가 머리 위로 차갑게 타오르거나 별들이 추운 하늘에서 춤을 출 때, 그리고 대지가 하얀 눈의 음침한 장막에 덮여 꽁꽁 얼어 있을 때, 허스키들이 불렀던 이 노래는 삶에 대한 도전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노래는 길게 꼬리를 끄는 울부짖음과 흐느낌이 섞인 단조의 가락이었는데, 도전이라기보다 삶에 대한 탄원이자 생존의 고달픔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태곳적부터 내려온 옛노래 - 노래로 슬픔을 표시했던 원시 시대의 최초의 노래 중 하나 - 였다.  그 노래 속에는 무수한 조상들의 슬픔이 깃들여 있었고, 그 슬픔은 이상하게 벅을 흥분시켰다.  벅이 울부짖고 흐느낄 때, 그것은 그의 야생의 조상들이 겪은 삶의 고통과 같은 고통에서 나오는 소리였으며, 야생의 조상들이 느낀 추위와 어둠에 대한 공포와 신비에서 나오는 소리였다.  또한 벅이 밤 노래에 흥분하는 것은 그가 벽난로와 지붕이 있는 문명의 품을 떠나 거침없이 울부짖는 태곳적의 야생의 개로 완전히 되돌아갔음을 의미했다."    (p.63 - p.64) 

 

무리한 일정에 혹사를 당한 '벅'과 동료개들은 휴식을 취할 틈도 없이 두 번째 주인을 맞게 됩니다.  여행 중에 있던 부부와 여자의 남동생이 새주인이 된 것이죠.  썰매에 대해서도, 썰매견에 대해서도, 야생에서의 삶에 관해서도 전혀 아는 바가 없었던 새주인은 체력이 소진된 썰매견들을 죽음으로 내몰게 됩니다.  '벅'은 죽음을 각오하고 주인의 명령을 거부하합니다.  '벅'을 향해 채찍과 몽둥이가 날아듭니다.  그때 마침 구원의 손길이 다가옵니다.   '벅'의 처참한 모습과 주인의 야만성으로부터 '벅'의 목숨을 구한 것은 손턴이었습니다.

 

'벅'의 새주인이 된 손턴은 이상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벅'을 친자식처럼 사랑했습니다.  동상에 걸린 발을 치료하며 도슨으로 갈 뗏목을 기다리는 손턴과 벅은 달콤한 휴식을 즐겼고, 개들을 구속하지 않았던 손턴 덕분에 벅은 야생의 소리를 좇아 숲으로 돌아다닙니다.  손턴을 열렬히 사랑하면서도 숭배에 가까운 사랑으로 일관했던 벅은 어느날 숲에서 이동하는 '무스'의 무리를 만납니다.  '벅'이 덩치가 큰 수컷 무스를 잡는 동안 이하트족 인디언들이 손턴 일행을 살해합니다.  '벅'에게는 짧았던 행복이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죠.  언제나 그렇듯 행복은 순간적으로 지나갑니다.

 

신뢰하고 숭배하던 주인이 살해되자 이제 '벅'에게는 인간 세상과의 인연이 모두 끊어진 셈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게 된 것이죠.  '벅'은 결국 야생의 부름에 응답하는 삶을 선택합니다.  그리고 늑대의 무리, 길들여지지 않은 원시의 세계로 돌아갑니다.

 

급속한 문명의 발달은 인간에게도, 개에게도 태곳적 원시 세계에 대한 향수를 불러 일으키나 봅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21세기를 사는 현대인들은 그 미약하게 들려오던 소리마저도 듣지 못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나는 기껏해야 내가 국민학교를 다니던 멀지 않았던 과거를 기억할 뿐입니다.  우리의 조상, 그 조상의 조상들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언젠가 우리가 이 책의 주인공 '벅'처럼 문명과의 인연을 모두 잃고 말았을 때, 그때는 먼 야성의 소리를 가깝게 들을 수 있을까요?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야성이 부르는 소리>에는 총 세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위에 적은 표제작과 알래스카에서 오랜 시간 살아온 노인의 말을 무시하고 혼자 길을 떠났던 한 남자가 극한의 추위와 사투를 벌이며 생존을 위해 온갖 몸부림을 치지만 결국 자연의 거대한 힘 앞에서 맥없이 스러지고 마는 이야기를 다룬 <불을 피우기 위하여>, 그리고 자신의 약혼녀를 백인에게 빼앗기자 그를 추적하여 결국 그 백인을 죽이지만 여인은 그를 따라오지 않는다는 내용의 <북쪽 땅의 오디세이아>가 그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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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카밧진의 마음챙김 명상 - 당신이 어디에 가든 당신은 그곳에 있다
존 카밧진 지음, 김언조.고명선 옮김 / 물푸레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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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3시!

초저녁에 잠이 들었던 탓인지 악몽을 꾸었던 것도, 어떤 큰 소리에 놀란 것도 아닌데 이른 시각에 잠이 깼다.  시계를 확인하고 다시금 잠을 청해보지만 한번 달아난 잠은 그예 찾아오지 않았다.  몇 번을 뒤척이다가 결국엔 불을 켜고 일어났다.  잠은 이미 멀찍이 달아났고 이 느닷없음에 멀뚱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거실의 시계는 마치 처음인 양 뒤뚱뒤뚱 서툰 발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이 새벽에 누군가 세차를 하는지 고압 세차기 소리가 요란하다.  세차장 옆으로 굽이 도는 도로가 있다.  새벽의 텅 빈 도로를 이따금씩 굉음을 내며 질주하는 차량들.  도시의 밤은 누군가에 의해 언제나 깨어있다.  새벽의 적막이 삶의 무게처럼 어깨를 짓누른다.  그 고요 속에서 잠시 호흡을 고르고 나는 깊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나고 드는 숨소리만 적막 속에 던져지고 있었다.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이었나.  우연한 기회에 참선을 배운 적이 있었다.  정암사의 뒷산을 오르면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셨다는 수마노탑이 보인다.  그 길을 뒤로하고 가파른 산길을 따라 1시간 반쯤 오르면 산의 능선이다.  산이 높아 큰 나무도 보이지 않는 수풀만 무성한 평지의 바로 아래쪽에 작은 암자가 하나 있다.  나는 과일과 음식으로 가득 채워진 바랑을 메고 그 암자까지 스님과 동행했었다.  암자에 이르러 그때 스님이 끓여주었던 소면을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큰 솥에 물을 펄펄 끓인 후 족히 7,8인분은 되어 보이는 국수 한 다발을 통째로 넣은 것까지는 좋았는데 정작 국수를 먹을 사람은 나와 다른 한 사람뿐이었다.  스님은 그때 막 단식을 끝낸 후였다. 곁에 자리를 잡고 앉아 많이 먹으라는 응원 겸 반협박의 말씀.  가뜩이나 사찰 음식은 남기는 법이 없지 않은가?  그 많은 국수를 찬도 없이 꾸역꾸역 밀어 넣는 데는 성공했는데 바닥에 흘린 국수 몇 올은 차마 주워 먹을 수 없었다.  스님은 다 비운 솥을 치우며 바닥의 국수도 싫은 내색도 없이 주워 드셨다.

 

아주 맑에는 날에는 동해 바다가 보인다는 태백산맥의 능선 어드메쯤의 그곳에서 나는 스님과 보름을 묵었다.  스님은 내게 무료한 시간을 그냥 흘려보내지 말고 참선이나 배워보라며 권했고 바람소리와 새소리뿐인 그곳에서 나는 결가부좌를 틀었었다.  사람의 생각은 의식하는 순간 수천,수만 가지의 생각으로 바뀐다.  도시의 소음이 배제된 고요가 더해지면 그 빛깔은 더욱 선명해진다.  나는 달아나는 생각들을 뒤쫓느라 진땀을 뺐고 내가 죽고 시간만 살아 펄펄 뛰던 그때의 기억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의사인 동시에 마음챙김(mindfullness)에 근거한 스트레스 완화 명상 프로그램을 개발한 명상 전문가 존 카밧진의 <마음챙김 명상>을 읽었다.  사실 이 책은 명상 서적으로 분류하기도 좀 애매한 구석이 있다.  왜 명상을 해야 하는지, 어떤 마음가짐으로 또는 어떤 자세로 명상을 대해야 하는지에 대한 일반적이고도 보편적인 명상 입문서 내지는 삶의 지침서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참선에 대해서도 초보적인 지식만 습득한 내가 이런 평가를 하는 것은 조금 건방져 보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명상'이라는 말이 책의 제목으로 들어감으로써 우리가 갖게 되는 어떤 선입견, 가령 어렵다거나 종교적이라거나 나와는 거리가 멀다거나 하는 생각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이와 같은 명상 입문서가 유용하다 하겠다.

 

나는 가끔 내 주위의 사람들이 벼랑 위에 서 있는 사람처럼 아슬아슬해 보인다고 느낀다.  좁은 칼날 위에 서서 불안감에 이쪽으로도 저쪽으로도 마음 편히 기울지 못하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시퍼런 칼날 위에 선 경계인', 그것이 현대인에 대한 정확한 표현일지도 모른다.  그런 상태에서는 항우장사라도 정신병자가 되지 않을 도리가 없다.  명상이 필요한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  고질적인 불안감에서 벗어나 지금 사는 순간에 자신의 마음을 편히 내려놓을 수만 있다면 삶은 곧 축복이고 감사의 마음으로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가야 할 진실한 길을 찾기 위해서는 '지금 이 순간'에 더 많은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지금의 순간은 우리가 그 안에서 살고, 성장하고, 느끼고, 변화하기 위한 유일한 시간이다.  우리는 과거와 미래라는 괴물의 믿을 수 없을 만큼 강력한 흡인력과 맞서기 위해, 또한 우리의 실제 삶 대신에 과거와 미래가 우리에게 제공하는 공상의 세계에 맞서기 위해 더 많이 경계하고 깨어 있을 필요가 있을 것이다."    (16쪽)

 

저자의 명상법은 분명 불교의 참선과는 많은 면에서 다르다.  자신의 마음을 '화두'라는 틀 안에 가두고 무아의 경지에 도달하고자 하는 불교식 명상에 반하여 마음챙김 명상은 시시각각 변하는 마음의 움직임을 그저 인식할 뿐 제지하거나 가두려 하지 않는다.  그것은 일종의 '살아 있음'에 대한 자기 확신, '지금 이 순간'에 대한 명징한 인식을 중요시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월든>의 저자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나 <풀잎>으로 유명한 미국의 시인 월트 휘트먼을 자주 언급한다.  어쩌면 이 두 사람은 자신의 삶을, 자신이 살았던 순간들을 수도자가 아닌 일반인으로서 가장 분명하게 인식했던 사람이기도 하거니와 평생을 두고 그렇게 살고자 노력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사는 시간과 내가 느끼는 생각의 일치,  지금 존재하는 이 순간과 내가 하는 행위의 일치는 불일치와 부조화에서 오는 모든 불안과 삶의 부정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줄 것이다.  명상은 그 자체로 빛난다.  어떤 경지에 이르고자 하는 목표나 과업이 아닌 생활 그 자체에서 말이다.

 

"미음챙김의 과업은 우리가 처한 모든 순간에 생명력과 활기가 넘치는 깨어 있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깨어 있는 상태에서는 모든 것이 영감을 불러일으킨다.  어떤 것도 영의 영역으로부터 제외되지 않는다."    (3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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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링크로스 84번지
헬렌 한프 지음, 이민아 옮김 / 궁리 / 2004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참 예쁜 책이다.  손으로 '쓱'하고 문지르면 따뜻한 온기가 손바닥 가득 전해질 것 같은.

이 책 <채링크로스 84번지>는 미국의 무명 극작가 헬렌 한프와 체링 크로스 84번지에 위치한 영국의 고서점 마크스 서점 직원들과 주고받은 편지 모음집이다.  책을 매개로 서로의 얼굴도 모른 채 오랜 세월 마음과 마음을 주고받았던 가슴 따뜻한 편지들로 기득하다.  광고를 보고 우연히 맺어진 인연.  헬렌 한프의 편지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토요문학 평론지에 실린 귀하의 광고를 보니 절판 서적을 전문으로 다룬다고 하셨더군요. 저는 "희귀 고서점"이라는 말만 봐도 기가 질리곤 하는데, "희귀" 하면 곧 값이 비쌀 것이라는 생각부터 들기 때문입니다. 저는 희귀 고서적에 취미가 있는 가난한 작가입니다.  여기서는 제가 원하는 모든 것을 아주 고가의 희귀본이나 아니면 이것저것 끄적여 놓은 반스앤드노블스의 학생판으로밖에는 구할 수가 없습니다. 제가 절박하게 구하는 책들의 목록을 동봉합니다. 목록 중 깨끗하면서 한 권당 5달러가 넘지 않는 중고 책이라면 어느 것이라도 구매 주문으로 여기고 발송해 주시겠습니까?"     (1949년 10월 5일자 편지)

 

서점의 직원들은 조금은 까다로울 수 있는 그녀의 주문 조건에 맞춰 그녀가 원하는 책들을 하나하나 찾아 보낸다.  생면부지의 고객, 게다가 런던에서 뉴욕은 지리적으로 수천 키로나 떨어져 있는 곳이 아닌가.  서점의 직원들은 그 한 명의 고객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듯 보였다.  편지가 계속되면서 그들은 고객과 직원이라는 관계를 뛰어 넘어 마치 멀리 떨어진 가족을 그리워하는 듯한 살가운 관계로 발전한다.  때로는 서로를 걱정하고, 때로는 내 일처럼 기뻐하기도 하면서.  그렇게 20년이란 긴 세월 동안 편지는 계속되었다.

구하기 힘든 책을 구하는 사람의 절실함과 그 절실함을 이해하는 서점상의 따뜻한 마음의 교감은 이들의 편지를 읽는 내내 웃음을 머금게 한다.  애써 보내준 책에 대해 "세상에 무슨 이런 사악한 신약성서가 다 있어요?" 라고 불평하는 구입자 헬렌 한프. 그 물음에 친절하게 다른 성서를 찾아보겠다고 답하는 서점상 프랭크는 성실한 태도로 그녀의 온갖 불만과 요구에 응답한다.

 

"저는 전 주인이 즐겨 읽던 대목이 이렇게 저절로 펼쳐지는 중고책이 참 좋아요. 해즐릿이 도착한 날 "나는 새 책 읽는 것이 싫다"는 구절이 펼쳐졌고, 저는 그 책을 소유했던 이름 모를 그이를 향해 "동지!"하고 외쳤답니다."

 

이 편지를 주고받을 당시의 영국은 경제 사정이 좋지 않았다.  2차 세계 대전 직후였으니  많은 이들이 국가의 배급에 의존하여 살아가는 굉장히 곤란한 지경이었고, 이 재치있는 서적 구매자는 크리스마스 선물로 건달걀과 햄 세트를 서점 직원들에게 보내는 등 따뜻한 마음을 베푼다.  그리고 그녀의 이 따뜻한 마음씨에 감동한 서점 직원들은 그녀가 요구하는 서적들을 정성껏 보내 주는 마음으로 그녀에게 보답한다. 물론 따뜻한 마음을 전하는 작은 편지도 함께 말이다.  심지어 달리 감사의 선물을 구할 수 없었던 서점 직원들은 동네 할머니가 수를 놓은 식탁보를 보내기도 한다.  이에 감동한 헬렌은 그 할머니께도 선물을 보냈다.

 
"친애하는 한프 양, 저는 마크스 서점에서 2년 가까이 도서 목록 만드는 일을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소포를 보내 주실 때마다 번번이 한몫을 나눠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매우 고맙다는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중략) 저 멀리 떨어진 곳에서 누군가가 본 적도 없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친절하고 자상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훈훈해집니다…. - 빌 험프리스 드림"  

"친애하는 한프 양, 소포에 대한 인사가 없어 혹시 뭐가 잘못된 건 아닌지 염려하고 계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아마도 우리를 감사도 모르는 패거리로 생각하셨겠지요. 사실은 제가 그동안 안쓰럽게 바닥난 재고를 채우기 위해 교양 있는 가정을 찾아 전국 곳곳을 돌아다녀야 했습니다. (중략)어떤 식으로든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어 오늘 서적 우편으로 작은 책을 한 권 부쳤습니다. 부디 한프 양 마음에 들기를 바랄 뿐입니다. 얼마 전에 엘리자베스 시대의 연애 시집을 한 권 찾아달라고 부탁하셨는데, 글쎄요, 저로서는 이것이 최선이었습니다. - 마크스 서점 프랭크 도엘 드림"

 

이 가슴 따뜻한 편지들을 읽으면서 웃음을 머금지 않을 독자는 아마 없을 것이다.  비록 가난한 무명작가로 살았지만 헬렌은 프랭크의 딸과 부인에게도 선물을 보내곤 했다.  영국을 간절히 보고 싶어 했던 헬렌이었기에 서점 직원들과 프랭크의 가족들도 그녀의 방문을 무척이나 기다렸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헬렌은 경제적 여건이 좋지 않아 끝내 방문하지 못했다.  그들은 오직 책을 매개로 서로를 걱정하고 위로하며 따뜻한 마음을 나눌 뿐이었다.  짤막한 편지들을 모은 이 책이 가치 있는 까닭은 책과 책을 둘러싼 이들의 따뜻한 마음이 그들의 글을 통해 스미듯이 전해지기 때문이다. 20여년 간이나 서로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책과 관련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이들의 글은 세월을 지난 지금에까지 많은 의미를 전한다.  이 오래된 편지 교환은 마크스 서점의 오랜 지킴이 프랭크 도엘이 사망하면서 막을 내린다.  프랭크가 죽고 그녀가 출판을 결심했을 때 성인이 된 프랭크의 딸은 흔쾌히 응한다.  또한 그의 죽음에 대한 헬렌의 애도는 영국인 친구에게 보낸 그녀의 편지에 잘 표현되어 있다.

"이 모든 책을 내게 팔았던 그 축복 받은 사람이 몇 달 전에 세상을 떠났어요. 그리고 서점 주인 마크스 씨도요. 하지만 마크스 서점은 아직 거기 있답니다. 혹 채링크로스 가 84번지를 지나가게 되거든, 내 대신 입맞춤을 보내 주겠어요? 제가 정말 큰 신세를 졌답니다."

 

인터넷이 보편화된 요즘, 허름한 거리의 작은 헌책방에서 알 굵은 돋보기 안경 넘어로 그윽한 시선을 보내주던 아주 오래전의 풍경이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꽃샘 추위를 녹여줄 따뜻한 마음이 그리운 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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