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링크로스 84번지
헬렌 한프 지음, 이민아 옮김 / 궁리 / 2004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참 예쁜 책이다.  손으로 '쓱'하고 문지르면 따뜻한 온기가 손바닥 가득 전해질 것 같은.

이 책 <채링크로스 84번지>는 미국의 무명 극작가 헬렌 한프와 체링 크로스 84번지에 위치한 영국의 고서점 마크스 서점 직원들과 주고받은 편지 모음집이다.  책을 매개로 서로의 얼굴도 모른 채 오랜 세월 마음과 마음을 주고받았던 가슴 따뜻한 편지들로 기득하다.  광고를 보고 우연히 맺어진 인연.  헬렌 한프의 편지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토요문학 평론지에 실린 귀하의 광고를 보니 절판 서적을 전문으로 다룬다고 하셨더군요. 저는 "희귀 고서점"이라는 말만 봐도 기가 질리곤 하는데, "희귀" 하면 곧 값이 비쌀 것이라는 생각부터 들기 때문입니다. 저는 희귀 고서적에 취미가 있는 가난한 작가입니다.  여기서는 제가 원하는 모든 것을 아주 고가의 희귀본이나 아니면 이것저것 끄적여 놓은 반스앤드노블스의 학생판으로밖에는 구할 수가 없습니다. 제가 절박하게 구하는 책들의 목록을 동봉합니다. 목록 중 깨끗하면서 한 권당 5달러가 넘지 않는 중고 책이라면 어느 것이라도 구매 주문으로 여기고 발송해 주시겠습니까?"     (1949년 10월 5일자 편지)

 

서점의 직원들은 조금은 까다로울 수 있는 그녀의 주문 조건에 맞춰 그녀가 원하는 책들을 하나하나 찾아 보낸다.  생면부지의 고객, 게다가 런던에서 뉴욕은 지리적으로 수천 키로나 떨어져 있는 곳이 아닌가.  서점의 직원들은 그 한 명의 고객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듯 보였다.  편지가 계속되면서 그들은 고객과 직원이라는 관계를 뛰어 넘어 마치 멀리 떨어진 가족을 그리워하는 듯한 살가운 관계로 발전한다.  때로는 서로를 걱정하고, 때로는 내 일처럼 기뻐하기도 하면서.  그렇게 20년이란 긴 세월 동안 편지는 계속되었다.

구하기 힘든 책을 구하는 사람의 절실함과 그 절실함을 이해하는 서점상의 따뜻한 마음의 교감은 이들의 편지를 읽는 내내 웃음을 머금게 한다.  애써 보내준 책에 대해 "세상에 무슨 이런 사악한 신약성서가 다 있어요?" 라고 불평하는 구입자 헬렌 한프. 그 물음에 친절하게 다른 성서를 찾아보겠다고 답하는 서점상 프랭크는 성실한 태도로 그녀의 온갖 불만과 요구에 응답한다.

 

"저는 전 주인이 즐겨 읽던 대목이 이렇게 저절로 펼쳐지는 중고책이 참 좋아요. 해즐릿이 도착한 날 "나는 새 책 읽는 것이 싫다"는 구절이 펼쳐졌고, 저는 그 책을 소유했던 이름 모를 그이를 향해 "동지!"하고 외쳤답니다."

 

이 편지를 주고받을 당시의 영국은 경제 사정이 좋지 않았다.  2차 세계 대전 직후였으니  많은 이들이 국가의 배급에 의존하여 살아가는 굉장히 곤란한 지경이었고, 이 재치있는 서적 구매자는 크리스마스 선물로 건달걀과 햄 세트를 서점 직원들에게 보내는 등 따뜻한 마음을 베푼다.  그리고 그녀의 이 따뜻한 마음씨에 감동한 서점 직원들은 그녀가 요구하는 서적들을 정성껏 보내 주는 마음으로 그녀에게 보답한다. 물론 따뜻한 마음을 전하는 작은 편지도 함께 말이다.  심지어 달리 감사의 선물을 구할 수 없었던 서점 직원들은 동네 할머니가 수를 놓은 식탁보를 보내기도 한다.  이에 감동한 헬렌은 그 할머니께도 선물을 보냈다.

 
"친애하는 한프 양, 저는 마크스 서점에서 2년 가까이 도서 목록 만드는 일을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소포를 보내 주실 때마다 번번이 한몫을 나눠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매우 고맙다는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중략) 저 멀리 떨어진 곳에서 누군가가 본 적도 없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친절하고 자상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훈훈해집니다…. - 빌 험프리스 드림"  

"친애하는 한프 양, 소포에 대한 인사가 없어 혹시 뭐가 잘못된 건 아닌지 염려하고 계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아마도 우리를 감사도 모르는 패거리로 생각하셨겠지요. 사실은 제가 그동안 안쓰럽게 바닥난 재고를 채우기 위해 교양 있는 가정을 찾아 전국 곳곳을 돌아다녀야 했습니다. (중략)어떤 식으로든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어 오늘 서적 우편으로 작은 책을 한 권 부쳤습니다. 부디 한프 양 마음에 들기를 바랄 뿐입니다. 얼마 전에 엘리자베스 시대의 연애 시집을 한 권 찾아달라고 부탁하셨는데, 글쎄요, 저로서는 이것이 최선이었습니다. - 마크스 서점 프랭크 도엘 드림"

 

이 가슴 따뜻한 편지들을 읽으면서 웃음을 머금지 않을 독자는 아마 없을 것이다.  비록 가난한 무명작가로 살았지만 헬렌은 프랭크의 딸과 부인에게도 선물을 보내곤 했다.  영국을 간절히 보고 싶어 했던 헬렌이었기에 서점 직원들과 프랭크의 가족들도 그녀의 방문을 무척이나 기다렸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헬렌은 경제적 여건이 좋지 않아 끝내 방문하지 못했다.  그들은 오직 책을 매개로 서로를 걱정하고 위로하며 따뜻한 마음을 나눌 뿐이었다.  짤막한 편지들을 모은 이 책이 가치 있는 까닭은 책과 책을 둘러싼 이들의 따뜻한 마음이 그들의 글을 통해 스미듯이 전해지기 때문이다. 20여년 간이나 서로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책과 관련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이들의 글은 세월을 지난 지금에까지 많은 의미를 전한다.  이 오래된 편지 교환은 마크스 서점의 오랜 지킴이 프랭크 도엘이 사망하면서 막을 내린다.  프랭크가 죽고 그녀가 출판을 결심했을 때 성인이 된 프랭크의 딸은 흔쾌히 응한다.  또한 그의 죽음에 대한 헬렌의 애도는 영국인 친구에게 보낸 그녀의 편지에 잘 표현되어 있다.

"이 모든 책을 내게 팔았던 그 축복 받은 사람이 몇 달 전에 세상을 떠났어요. 그리고 서점 주인 마크스 씨도요. 하지만 마크스 서점은 아직 거기 있답니다. 혹 채링크로스 가 84번지를 지나가게 되거든, 내 대신 입맞춤을 보내 주겠어요? 제가 정말 큰 신세를 졌답니다."

 

인터넷이 보편화된 요즘, 허름한 거리의 작은 헌책방에서 알 굵은 돋보기 안경 넘어로 그윽한 시선을 보내주던 아주 오래전의 풍경이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꽃샘 추위를 녹여줄 따뜻한 마음이 그리운 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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