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쉿, 조용히! - 풋내기 사서의 좌충우돌 도서관 일기
스콧 더글러스 지음, 박수연 옮김 / 부키 / 2009년 6월
평점 :
절판
그제 저녁에 담배를 사러 집 근처의 슈퍼에 들렀었다. 카운터에는 나이 지긋한 할머니 한 분이 앉아 있었고, 가게 안은 손님이 없고 한산한 편이었다. 그때 마침 반팔 티셔츠를 입은 체격 건장한 청년이 양손에 짜파게티와 라면을 한보따리 들고는 물건값을 계산하기 위해 카운터로 다가오고 있었는데, 그 모습을 본 할머니 왈, "아이고, 반소매에 춥지 않아요?" 하자 청년은 "아니, 괜찮은데요?" 했다. 할머니는 그래도 못 믿겠다는 듯, "추울텐데..."하면서 혀를 끌끌 찼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청년이 추운 게 아니라 할머니가 추웠던 것이다. 내가 보기에도 청년은 추위라곤 전혀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날씨도 워낙 포근했지만 말이다. 우리는 가끔(자주라고 할 수도 있지만) 자신의 생각과 다른 사람의 생각이 같을 것이라는 착각 속에서 산다. 이 책 <쉿, 조용히!>를 읽으면 누구라도 확실히 깨달을 수 있다. 도서관 사무 보조원으로 들어가 학비가 공짜라는 이유로 대학원에 진학하여 석사학위를 받고 정식으로 도서관 사서 생활을 시작한 스콧 더글러스의 평범하지만 전혀 평범하지 않게 기록된 도서관 생활기이다. 위트가 넘치는 그의 필체로 인해 독자들은 개그 콘서트의 '본방 사수'를 까먹을 정도다.
"이디스는 입안 가득 음식을 우물거리며 물었다. "그 핑콩인지 뭔지가 신인작가야?" 나는 태연한 척하려고 애썼다. 그녀는 필경 나를 놀리고 있는 것이리라. 나를 놀려야만 했을 테니까. 그녀는 핀천이 누구인지 당연히 알 것이다. 나는 그녀의 놀림에 속아 넘어가 주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핀천은 제가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책을 썼어요." 그녀는 내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며 내가 몇 살이나 되었을까 가늠해 보는 듯했다. 그러더니 도도하게 선언했다. "난 책은 잘 안 읽는 편이야. 읽을 시간도 없고." "사서인데도요?" 무례하게 들릴 수 있는 질문이었지만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었다." (p.16)
내가 자주 가는 도서관에도 이런 해괴한 일은 수도 없이 일어난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을 위해 도서관을 소개하자면 이렇다. 1층에는 아동.모자 열람실과 강당, 문화사랑방과 방제실 및 매점이 있다. 문화 사랑방이 뭐하는 데냐고? 그곳에서는 주로 유치원생들이 그린 비대칭의 그림이 전시되거나 동네 아줌마들의 짧은 연애편지(아줌마들은 그걸 시라고 박박 우기지만)가 벽에 걸리고 아주 가끔은 집에 들어가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하는 아저씨들이 자신들이 찍은 사진 몇 장을 벽에 걸어놓고는 하루 종일 음담패설을 하기도 하는 다용도실이다. 나는 처음에 방제실을 방조실로 잘못 읽었었다.(왜냐하면 그곳에는 청원경찰이 두 명이나 있는데 아이들이 심한 장난을 쳐도 그냥 방조하기 때문이다) 아동.모자 열람실은 아무리 찾아도 아비부(父)자를 찾을 수 없어서 단 한번도 들어가 보지 못했으므로 설명이 곤란하다.
2층에는 종합자료 열람실과 장애인 열람실 및 정기 간행물실, 보관서고가 있다. 종합자료 열람실은 내가 가장 자주 이용하는 공간이다. 잠이 부족한 사람들은 가끔 서가 뒤에 놓인 소파에 누워 잠을 청하기도 한다. 이런 사람들은 그나마 양심이 있는 사람들이고 학생들은 책상에 엎드려 보란 듯이 잠을 자기도 한다. 3층에는 관장실과 정보자료실, 문화교실(주로 아줌마들 몇몇이 모여 독서토론이나 취미생활이라는 명목으로 공공연히 남편의 험담을 늘어놓는 공간), 휴게실(자판기 4대가 대부분의 공간을 차지하고 있고 사람들은 그 부속품쯤으로 보인다) 및 관리과가 있다. 정보 자료실에는 컴퓨터가 50여대 있고 입구의 안내 데스크에는 30분 간격으로 음식물 반입과 가방 소지를 제재하는 표독스러운 아줌마가 한 명 있다. 요즘은 머리를 노랗게 염색까지 한 탓에 더욱 눈에 띈다.(그럼에도 전혀 패셔니스타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도서관 사서라는 직업에 무작정 뛰어들었던 저자는 그동안 자신이 갖고 있던 도서관에 대한, 그리고 그곳에서 근무하는 사서에 대한 편견이 무척이나 잘못된 것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사서는 책에 대한 많은 지식으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사서로서의 경험으로 일하게 된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대부분의 직업이 그렇듯 한 사람이 직업인으로서 유능하냐 그렇지 못하냐의 기준은 얼마나 많은 사전지식이 있었느냐가 아니라 그 직업에 대한 자긍심과 경험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저자는 서서히 깨닫게 된다. 이것은 마치 우리의 삶이 성숙해가는 과정과도 비슷하다.
이 책에는 도서관에서 저자가 겪은 여러 에피소드가 담겨 있다. '설마 그런 일까지?'라고 생각했다면 제대로 맞춘 것이다. 설마가 사람 잡을 테니까. 물론 이 책이 씌어졌을 때와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도서관은 많은 차이가 있겠지만 말이다. 도서관 사서라는 직업에 대해 원론적인 입장이었던 저자는 때때로 자신의 직업에 회의적인 생각을 하기도 하지만 도서관이 지역사회에 정보를 전달하고자 하는 목적만으로 설립되고 운영되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면 답은 명확해진다. 그런 추상적이고 원론적인 목적은 현실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어느 날 그들은 십대 열람실에서 '어떤 놈을 머리통을 박살내서 죽이자'는 내용의 랩 음악을 듣고 있었다. 나는 음악을 끄라고 말했다. 그들은 나에게 "네 털투성이 거시기나 핥아." 라고 말했다. 나는 그들에게 나가라고 했다. 그들은 나에게 말하기를 내가 "거기나 빠는 병신 같은 호모 새끼이고 못생긴 여자친구가" 있다고 했다." (p.301)
내가 보기에도 도서관은 아이들이 엄마의 잔소리를 피해 숨어들 수 있는 몇 안 되는 공간이며, 막 이성에 눈 뜬 아이들이 어른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교제할 수 있는 공간이며, 그보다 더 어린 아이들에게는 장난감총을 들고 마음껏 뛰어다닐 수 있는 자유로운 공간이 되기도 한다. 또한 집에서는 절대 볼 수 없는 아프리카 TV의 게임 중계를 마음껏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사서가 감독을 하지만 사서의 눈을 피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나 마찬가지다) 어떤 날은 도서관 주변의 으슥한 곳에 놓인 벤치에서는 19금의 낯 뜨거운 장면을 목격할 때도 있다. 아마도 용돈이 부족한 대학생이 머리를 짜내어 생각한 데이트 장소였을지도 모르는 일이기에 못 본 척 넘어가곤 한다.
비록 우리는 도서관을 집을 오가는 길에 보이는 특별하지 않은 콘크리트 덩어리쯤으로 생각하곤 하지만 그 속에서의 현실을 단 하루만이라도 꼼꼼이 관찰한다면 우리가 애초에 생각했던 것과는 많이 다르다는 것을 단박에 알게 될 것이다. 때로는 재수를 하는 아이들이 휴게실에서 홀로 앉아 찬밥 덩어리를 먹는 서글픈 현실과 마주하기도 하고, 취업 준비생의 누렇게 뜬 얼굴과도 대면할 때가 있다. 도서관 사서는 그런 다양한 삶을 이해하고 배려하지 못한다면 결코 참아내기 어려운 직업이다. 그저 책이나 빌려주고 서가에 책을 정리하면서 남는 시간에는 시시껄렁한 잡담을 하거나 안내 데스크에 편하게 앉아 자신이 보고 싶었던 책을 마음껏 읽으면서 월급만 꼬박꼬박 챙기는 사람들이 아님을 저자는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우리의 고정관념이 때로는 상대방을 아프게 할 때가 있다. 책은 우리의 고정관념을 깨트리는 중요한 도구이다. 그 다양한 도구가 도서관에 있다. 새봄에는 도서관 출입이 잦을 듯하다.(어쩌면 부족한 잠을 보충하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