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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성이 부르는 소리 - 잭 런던의 클론다이크 소설 ㅣ 잭 런던 걸작선 7
잭 런던 지음, 곽영미 옮김 / 지식의풍경 / 2002년 7월
평점 :
문명을 거슬러 올라가면 원시 지구와 대면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어리석은 것이겠지요?
잭 런던의 소설 <야성이 부르는 소리>를 읽고 있노라면 금방이라도 세월의 장벽을 훌쩍 뛰어 넘을 것만 같은 착각에 빠지곤 합니다. 팔과 다리에 북실거리는 털이 돋고 머리는 앞으로 쭉 내민 채 엉거주춤한 자세로 걷고 있는 나를 만날 것만 같은 착각 말이죠. 밤이면 작은 모닥불을 피우고 예민한 귀를 숲을 향해 열어 놓은 채 잠이 들 것입니다. 어쩌면 제 곁에는 '벅'과 같이 듬직한 개 한 마리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이 책을 처음 읽었던 것은 아마 국민학교 시절이었던 것 같아요. 그때 읽었던 책의 제목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이 책을 원작으로 한 만화였던 듯합니다. 그래서인지 어느 날 어머니께서 개 한 마리를 사오셨을 때, 그 개의 이름도 '바크'라고 지었답니다. 만화에서는 주인공 개의 이름이 ;벅'이 아닌 '바크'였거든요. 그 책에 얼마나 빠져 있었던지 언젠가 꼭 다시 읽어보겠노라 다짐도 했었습니다. 그렇게 미루고 미루다 한참의 세월이 흐른 지금에서야 그 약속을 지킨 셈이 되었습니다.
소설은 주인공 '벅'이 산타클라라 계곡의 밀러 판사 저택에서 정원사 조수로 일하던 '매뉴얼'에 의해 유괴되어 썰매견으로 팔려가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사람의 운명도 그렇듯 변화는 언제나 급작스럽고 느닷없는 것인가 봅니다. '벅'은 나락으로 떨어진 자신의 삶을 부정하며 분노합니다. 사람들도 그렇지요? 왜 하필 나냐고 묻고 되묻고 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잔인한 인간들은 '벅'의 심정을 헤아리지 못합니다. 오히려 몽둥이로 흠씬 두들겨 팰 뿐이지요. '벅'은 자신의 행동이 부질없음을 깨닫습니다. 피도 눈물도 없는 적자생존의 세계로 들어왔음을 절감하는 것이죠. 그가 살았던 남부의 도덕적이고 평온한 삶은 이제 더이상 존재하지 않고 그 혹독한 환경에서 사느냐 죽느냐의 절박함만 남았을 뿐입니다. 책에서는 '몽둥이와 엄니의 법칙'이라고 표현합니다.
북부에서 '벅'의 첫주인은 캐나다 정부의 우편배달 업무를 하는 페로와 프랑수아였습니다. 우편 배달 썰매를 끄는 일은 언제나 시간에 쫓기는 일이었죠. 여러 마리의 개가 협동을 하여 썰매를 끄는 까닭에 서열이 정해지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순식간에 죽음으로 내몰릴 수 있음을 영민한 '벅'은 재빨리 깨닫습니다. 그와 함께 썰매를 끄는 동료개들로부터 썰매를 끄는 요령과 부족한 끼니를 해결하는 방법, 븍쪽의 추위 속에서 안전하게 잠자는 요령 등을 빠르게 배워나갑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썰매견의 일인자였던 '스피츠'를 통하여 최고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절감하게 됩니다. '벅'은 결국 교활하고 비열하기까지 한 '스피츠'를 누르고 썰매견의 선두에 서게 됩니다.
"북극의 오로라가 머리 위로 차갑게 타오르거나 별들이 추운 하늘에서 춤을 출 때, 그리고 대지가 하얀 눈의 음침한 장막에 덮여 꽁꽁 얼어 있을 때, 허스키들이 불렀던 이 노래는 삶에 대한 도전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노래는 길게 꼬리를 끄는 울부짖음과 흐느낌이 섞인 단조의 가락이었는데, 도전이라기보다 삶에 대한 탄원이자 생존의 고달픔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태곳적부터 내려온 옛노래 - 노래로 슬픔을 표시했던 원시 시대의 최초의 노래 중 하나 - 였다. 그 노래 속에는 무수한 조상들의 슬픔이 깃들여 있었고, 그 슬픔은 이상하게 벅을 흥분시켰다. 벅이 울부짖고 흐느낄 때, 그것은 그의 야생의 조상들이 겪은 삶의 고통과 같은 고통에서 나오는 소리였으며, 야생의 조상들이 느낀 추위와 어둠에 대한 공포와 신비에서 나오는 소리였다. 또한 벅이 밤 노래에 흥분하는 것은 그가 벽난로와 지붕이 있는 문명의 품을 떠나 거침없이 울부짖는 태곳적의 야생의 개로 완전히 되돌아갔음을 의미했다." (p.63 - p.64)
무리한 일정에 혹사를 당한 '벅'과 동료개들은 휴식을 취할 틈도 없이 두 번째 주인을 맞게 됩니다. 여행 중에 있던 부부와 여자의 남동생이 새주인이 된 것이죠. 썰매에 대해서도, 썰매견에 대해서도, 야생에서의 삶에 관해서도 전혀 아는 바가 없었던 새주인은 체력이 소진된 썰매견들을 죽음으로 내몰게 됩니다. '벅'은 죽음을 각오하고 주인의 명령을 거부하합니다. '벅'을 향해 채찍과 몽둥이가 날아듭니다. 그때 마침 구원의 손길이 다가옵니다. '벅'의 처참한 모습과 주인의 야만성으로부터 '벅'의 목숨을 구한 것은 손턴이었습니다.
'벅'의 새주인이 된 손턴은 이상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벅'을 친자식처럼 사랑했습니다. 동상에 걸린 발을 치료하며 도슨으로 갈 뗏목을 기다리는 손턴과 벅은 달콤한 휴식을 즐겼고, 개들을 구속하지 않았던 손턴 덕분에 벅은 야생의 소리를 좇아 숲으로 돌아다닙니다. 손턴을 열렬히 사랑하면서도 숭배에 가까운 사랑으로 일관했던 벅은 어느날 숲에서 이동하는 '무스'의 무리를 만납니다. '벅'이 덩치가 큰 수컷 무스를 잡는 동안 이하트족 인디언들이 손턴 일행을 살해합니다. '벅'에게는 짧았던 행복이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죠. 언제나 그렇듯 행복은 순간적으로 지나갑니다.
신뢰하고 숭배하던 주인이 살해되자 이제 '벅'에게는 인간 세상과의 인연이 모두 끊어진 셈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게 된 것이죠. '벅'은 결국 야생의 부름에 응답하는 삶을 선택합니다. 그리고 늑대의 무리, 길들여지지 않은 원시의 세계로 돌아갑니다.
급속한 문명의 발달은 인간에게도, 개에게도 태곳적 원시 세계에 대한 향수를 불러 일으키나 봅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21세기를 사는 현대인들은 그 미약하게 들려오던 소리마저도 듣지 못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나는 기껏해야 내가 국민학교를 다니던 멀지 않았던 과거를 기억할 뿐입니다. 우리의 조상, 그 조상의 조상들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언젠가 우리가 이 책의 주인공 '벅'처럼 문명과의 인연을 모두 잃고 말았을 때, 그때는 먼 야성의 소리를 가깝게 들을 수 있을까요?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야성이 부르는 소리>에는 총 세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위에 적은 표제작과 알래스카에서 오랜 시간 살아온 노인의 말을 무시하고 혼자 길을 떠났던 한 남자가 극한의 추위와 사투를 벌이며 생존을 위해 온갖 몸부림을 치지만 결국 자연의 거대한 힘 앞에서 맥없이 스러지고 마는 이야기를 다룬 <불을 피우기 위하여>, 그리고 자신의 약혼녀를 백인에게 빼앗기자 그를 추적하여 결국 그 백인을 죽이지만 여인은 그를 따라오지 않는다는 내용의 <북쪽 땅의 오디세이아>가 그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