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주의자
에드워드 윌슨 지음, 이병훈 옮김 / 사이언스북스 / 199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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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하버드는 버트 휠도블러를 교수로 초빙하였고 그는 그 초빙을 수락하였다. 에드먼드 윌슨과의 본격적인 개미연구가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그는 1989년 고국 독일의 바바리아의 부르츠부르 대학에서 사회성 곤충을 연구하기 위한 특별과를 창설하도록 요청받았다.    

그는 하버드를 떠나는 문제를 두고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자 우리는 개미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담은 책을 하나 쓰기로 하였다. 우리가 이 일을 하면서 스스로 의문을 던졌다. 어째서 역사상 그 누구도 개미에 관한 책을 내려고 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그런 규모의 일이라면 굉장한 노력과 시간이 들겠지. 그러나 이 얼마나 한번 해볼만 한 일인가! 체구가 작은 세계 헤비급 권투 챔피언 플로이드 패터슨이 한 때 비범한 것을 성취하기 위해 말한 것처럼 바로 불가능에 도전한다는 것 말이야. 결국 그 결과로 나온 것이 1990년 하버드 출판부에서 나온 <개미들>이었다. 2단 조판을 하여 732쪽 에 이르는 이 책에는 수 백개의 그림과 천연색 도판, 그리고 삼천개의 문헌 소개가 들어 있다. 이 책의 무게는 대작에 대한 나의 기준을 채우고 남을 만큼 7.5파운드나 나갔으며 3층 높이의 건물에서 떨어뜨리면 사람도 충분히 죽일 수 있을 정도였다(305~306p)  

일반인인 우리들에게는 낯설지만 세계지성사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에드먼드 윌슨의 <개미들>의 탄생배경은 이렇다. 1991년 과학책으로는 다섯번째로 플리처상을 받았고 윌슨과 휠도블러에게계 최고의 개미연구의 권위자란 난공불락의 수식어가 붙게 되었다.  에드먼드 윌슨, 개미연구의 세계적인 권위자, 사회생물학의 창시자 그리고 환경운동가라고 그를 정의하기에 그의 학문적 업적은 엄청나게 크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하다.

리처드 도킨스와 함께 진화생물학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지적통합자 에드먼드 윌슨은 1929년 미국 앨라배마주 버킹검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그의 부모는 심한 불화를 겪고 있었고 그 결과 그는 잠시 위탁가정에 맡겨져 있었다. 결코 유복하지도 행복하지도 않은 그의 유년시절이 그의 미래를 결정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불행한 가정에 대한 은신처는 자연이었고 바다였다. 그리고 그가 어떤 종류의 자연연구가가 될것인가에 대해 결정지은 것도 그의 유년시절이었다. 어느 날,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파라다이스 해변에서 피라미로 미끼를 써서 낚시를 하다가 핀피시를 낚아올렸다.  핀피시는 등지느러미를 따라 곧바르게 서는 10개의 바늘과 같은 가시들을 가지고 있었는데, 핀피시를 낚다가 그의 얼굴을 덮혀 그의 오른 쪽 눈 동공을 찔렀다. 그 사건으로 그는 오른쪽 눈 시력을 잃었으며 성장하면서 고주파 소리를 들을 수 없는 청력까지 문제가 생기자 시력과 청력이 나쁜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자연연구가의 길은 곤충밖에 없었다. 그는 청소년 시절 내내 주변에 살고 있는 생물과 곤충에 빠져들었고 학교 성적은 낙제하지 않을 정도로 유지하였지만,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서 그의 성적은 터무니 없이 모자랐다. 후에 자연연구를 계속 하기 위하여 대학에 들어가기로 결심하고 학교 공부에 매진하였지만 그가 처음 지망한 명문사립대인 밴터빌트대학교의 장학생이 될 수는 없었다. 그를 구해준 것은 모든 고등학생에게 개방된 앨러배마 대학이었다. 그는 앨러버마 대학에서 관찰만 했던 청소년 시절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의 깊은 자연탐색은 계속 되었고 놀라운 성과(논문)을 계속해서 내었다. 그의 놀라운 자연 탐색과 결과물(논문)은 윌리엄 브라운의 도움으로 하버드에서 박사과정을 밟을 수 있게 되었다. 하버드의 재정적 도움으로 그는 좀 더 넓은 세계(열대지방같은)로의 탐사가 시작되었고 생물학의 기초와 사유 그리고 통합을 이루며 그의 학문적 성취도 인정되어 젊은 나이(29세)에 그는 하버드 교수의 자리까지 거머쥐게 된다. 하버드 교수 시절, 그의 자연적 관찰과 생물학적 통합은 계속 되었는데, DNA의 구조를 밝혀내 노벨상을 받은 왓슨의 분자생물학에 의해 그의 집단 생물학은 후진 것으로 간주되었다. 왓슨과의 불편한 관계속에서, 타고난 종합가인 그는 하나의 통일적 이론을 완성하게 되는데(311p), 오랜 동안 지속된 그의 자연 탐사와 관찰 그리고 이론적 통합이 이루어 낸 책이 사회생물학이었다. 사회생물학은 인간행동이 유전자에 의해 결정될 수 있다는 근거를 토대로 자연의 모든 생물 심지어 인간까지도 포함했기 때문에 그는 논쟁과 공격대상이 되었다. 왜냐하면 그의 사회생물학은 자칫 우생학의 빌미를 마련해 나치와 같은 인종차별의 역사적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급진적인 진보세력과 좌파 지식인들(예를 들어 스티븐 제이 굴드와 특히나 르윈틴)의 공격을 받을 정도로 그의 사회생물학은 70년대를 뒤흔든 과학책이 되었다.  

이 책은 한 명의 자연연구가가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그리고 정치적이든 대중적이든 오프한 채, 한 눈 팔지 않고 꿋꿋하게 걸어 자신의 영역을 구축한 길을 천천히 독자들에게 안내하는 회고담이다. 그의 문장 하나하나 스며든 진솔함과 솔직함은 독자인 나에게 마음이 움직이다라는 감동의 의미를 다시 되새기게 할 정도로 울림이 컸는데, 그의 깊은 사유의 문장이 젠체하지 않고 오만하지 않아서 더 그랬던 것 같다. 불행한 어린시절,  자연연구라는 안식처에서 시작된 그가 진화생물학이라는 자연 탐험가의 마지막 은신처(206p)에 이륙하기까지 이룩한 학문적 이론과 그 이론을 위해 수모와 논쟁까지도 마다하지 않았던 그의 인생은 돌탑처럼 투박했으며 묵직하다. 그에 따르면 과학자들은 두 범주로 나누어진다. 인생에 성공하기 위하여 과학을 하는 사람과 과학을 하기 위해 성공적인 인생을 이끄는 사람이다. 윌슨은 후자에 속하는데, 소년 시절의 꿈이 할아버지가 된 지금까지도 이어져  거대한 학문적 물줄기를 지켜보는 것은 독자의 입장에서는 큰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특히나 그의 단순하면서도 사려 깊은 글은 다음과 같은 글에서 잘 나타나는데, 그의 글은 자신이 살아온 인생의 모습을 비추는 거울 같기도 하다. 그리고 이러한 사유나 사물의 통찰력은 그의 자서전 곳곳에 마주할 수 있었다.

나는 야망과 불안으로 가득찼었고 강한 사회적 양심을 소유하지 못했다. 20년 후 구시대적인 남부는 끝났다.  인종차별을 깨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시민운동가들은 내가 좋아하는 것, 즉 오직 한 마음으로 도덕률에 진실하고 육체적으로 용감하며 인내하는 영웅이었다. 그 때의 경험으로 인해 내가 사회적으로 물려받은 유산을 이러한 면에서 충분히 새롭게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무렵 나는 앨라매바를 떠났다.세상은 변했다 나도 변했다. 그러나 내가 소년 시절이나 쳥년 시절에 진보적 성향의 자유주의가였다고 주장할 수 없으며, 어떤 선견지명이나 용기를 가졌던 사람도 분명히 아니다. 어쨌든 나를 과학으로 이끈 인생 궤도는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자연연구가의 길을 딸 이런 상활을 그래도 지나쳤으며, 이제 와서 자존심 강하고 고통받은 문화에 대해 겉만 번지르르한 사화의 말을 전할 만큼 오만하거나 위선적이고 싶지는 않다. 

 에드먼드 윌슨의 대한 나의 우연한 스침은 장대익 교수가 에드먼드 윌슨과의 인터뷰을 프레시안에 기고한 글에서부터 거슬러 올라간다.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80622004959&Section=04 그 땐 에드먼드 윌슨에 대해 잘 몰랐고 관심도 거의 없어 그의 작품을 검색해보지도 않았다. 그러다가 리처드 도킨스의 글을 읽고 있으면서, 그와 이론적 궤를 같이하는 에드먼드 윌슨의 글은 좀 더 쉬울까 싶어서 찾아 읽게 된 것이었다. 두 사람모두 다 기본적으로 과학적 접근을 바탕으로 이론을 내 세우지만, 도킨스의 글이 찔러도 피 한방울 나올 것 같지 않을 정도로 딱딱한(도킨스의 글이 너무 어렵고 딱딱해 어떨 땐 그는 코미디프로를 보고 웃을까 싶은 생각이 들더라는)데 반해, 윌슨의 글은 어떤 면에서는 인간적이고 따스함이 풍겨 휠씬 더 접근이 용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그의 이론을 이해하냐면.....큭, 전혀 아니다. 둘다 어렵긴 매 한가지다.  

하지만 난 그들이 과학의 실제적인 접근법을 이용하여 어떤 문제에 대해 추론하고 검증하고 이론을 도출시키는 것이 철학책을 읽는 것보다 더 맘에 든다. 이런 일류 지성인들의 글을 읽으면서 좌절하는 것이 있다면, 나의 지식망에 대한 헐거움일 것이다. 그들의 지식망은 너무나 탄탄하고 빽빽하고 촘촘해서 그들의 지식세계와 이론을 들여다보고 이해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다. 오기로 그들에게 질질 끌려다녀도 얻은 것은 한 줌의 용어와 알아들을 수 있는 문장의 동사뿐.  그들의 전체적인 이론은 머리 속에 형성되지 않는다. 그래도 그들의 지적 세계에 앨리스처럼 뛰어들어가 모험하고 싶다. 언젠가는 나의 헐거운 지식망이 테두리에서부터 짜여져 가운데까지 촘촘하게 짤 수 있다면, 그들의 이론을 전체적으로 현미경처럼 들여다 볼 수 있는 날이 오겠지 싶어서며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적 모험심이 지식망의 올을 끊고 싶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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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10-04-27 2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나라에는 왜 이런 지식인들이 없을까요?통섭,통섭 주장해도 무엇하나 제대로 논리적이게 그리고 재밌게 이런 세계를 못펼치네요.

기억의집 2010-04-28 14: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윌슨의 삶을 읽으면서 얼마나 감동 받았는지 몰라요. 저 사람이 동물의 사회구조를 연구하기 위해 사람들이 닿지 않는 원시림을 누비면서 자신의 연구 주제에 몰두했다는 상상을 하면 짜릿해요. 전 도킨스도 좋지만 윌슨쪽에 더 정이 가요. 저 사람책은 어렵기 하지만 진짜 작가로서의 우월감이 배어있지 않더라구요. 인간적으로 정이 가요. 그의 연구가 우파논란이 있긴 책을 읽어보면 사회적인 면모는 좌파 같아요^^

scott 2010-04-29 1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억의 집님 리뷰를 다시 찬찬히 읽어보니 윌슨이 걸어온 삶 자체가 도킨스랑 비교가 안되네요. 도킨스는 글만 딱딱하게 쓰는게 아니라 말도 그렇게 해서 적이 많아요. 그를 살린건 그의 저작물을 읽고 그의 의견에 동조해주는 독자들이 라고하더군요. 그 독자들은 도킨스를 직접 만나서 애기 해본적이 없어서 동조한다고 할정도로 도킨스는 쉽지않는 다가가기 힘든 학자래요. 그만큼 서양인들은 자신이 주장하는 학문의 세계에서 한치의 물러섬이 없어요. 이들의 특징은 책만 읽고 글만 써서 발표하는 학자들이 아니라 실천하는 학자들이라는 건데 그만큼 자신이 연구한 세계를 꽤 뚫어 볼수 있는 통찰력과 설득력으로 무장하고 있죠. 우리나라처럼 붕어빵 기계로 풀빵 찍어내듯이 글쓰고 말하는 학자들이 아니라는거죠.기억의 집님ㅋㅋ 이런류의 글들 자꾸 읽게 되면 소설들 시시하게 느껴질꺼에요. ^.~

기억의집 2010-04-29 16:08   좋아요 0 | URL
도킨스의 이론이 뛰어난 것은 사실인 거 같아요. 그리고 상당히 자신의 이론을 위해서는 물불 안 가리고 독선적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어요. 이런 사람 무섭죠. 그럼에도 그의 글쓰기는 카리스마가 있어 매력적이긴 해요. 저도 이런 글 한번 써 보고 싶을 정도로.
네, 맞아요. 소설이 사실 시시해요.
그래도 신간 나오면 사는 이유를 모르겠어요. ㅠㅠ
 
닉 혼비 런던스타일 책읽기
닉 혼비 지음, 이나경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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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몇 년전에 닉 혼비의 <피버 피치>를 너무나 힘겹고 재미 없게 읽었던 터라, 솔직히 이번에 신간으로 나온 <런던 스타일의 책 읽기>라는 책이 책에 대한 책 이야기가 아니었다면, 관심 밖의 작품이었을 것이다.  <피버 피치>이후 지금까지 닉 혼비의 모든 작품이 내 레이더 화면에 잡혀 본 적은 한번도 없다. 또 지루한 축구 타령이나 늘어놓겠지 싶어서...((스포츠는 보는 것도 읽는 것도 싫네!)  그의 소설이든 에세이지간에 상관 없이 쏴그리 무시했던 것이다. 그렇담, 뭐하러 악몽같았던 <피버 피치>를 물고 늘어졌느냐고? 그 때 시댁에 갈 때 가져갔던 책이 이 책밖에 없었다. 글중독자의 금단증상을 피하기 위하여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드라마나 스포츠는 보기 싫고 멍하니 하루종일 있기도 뭐하고 해서.    

편견은 독서의 최대의 적!  생각보다 이 책 너무 유쾌하게 읽었다.  내가 알고 있던 혼비 맞아! 닉 혼비가 이렇게 글을 톡 쏘며 재밌게 유머스럽게 쓰는 작가인 줄 몰랐다. 폭 넓은 독서가는 커녕  애들에 치여 진지한 독서는 일찍감히 내던진, 그래서 더욱더 나의 처지와 맞아 떨어지는 글로 가득찬 이 책을 내가 왜 사랑하지 않을소냐. 게다가 내 취향에 맞는 작품이 그렇게 많지 않았음데도 불.구.하.고 글을 너무 재미있게 쓰는기라~~~책을 소개받은 자리에서 대상 책보다 그 옆에서 있는 마담뚜에게 더 관심을 갖고 큭큭거렸다고 할까나. 만약에 혹 문장스타일에 관심이 있는 글쓰기 지망생이라면, 닉 혼비의 이 작품 꼭 한번 읽어보길 권한다. 아마 글의 스타일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닉을 피해가기는 힘들 것이다.   

이 책은 책에 대한 책이야기인줄 알았는데  미국의 <빌리버>라는 정기 간행물에 실린 리뷰칼럼을 모아 출간한 책이다. 영국작가이지만, 언어가 같고 닉이 들먹거리는 팝음악이라는 공통분모가 있어서 미국인들도 이질감은 느끼지 못했을 것 같다.(물론 나의 추측!) 나 또한 닉 혼비가 언급한 락음악이나 팝음악을 거의 듣고 자란 탓인지 리뷰도 리뷰지만 그가 소개하는 뮤지션이나 음악이 더 반가웠다. (닉혼비가 브루스 스프링스틴을 좋아하는지 처음 알았다. 나 또한 브루스 의 열혈팬이어서 그런지 닉의 글에 더욱더 끌린다는. 90년대 중반 이후의 음악을 잘 몰라서 90년대이후의 뮤지션을 거들먹거릴 때는 우왕좌왕하지만, 나랑 나이 차가 제법 나는 닉 혼비가 말하는 뮤지션들은 다 알겠더라는)   

닉은 플럭시블(flexible)한 독서가이며 독서 권장가다. 취향에 맞는 책을 선택하고 지루한 책을 끝까지 읽은 것은 선택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TV를 볼 때, 한 채널을 고정해서 보지 않고 이쪽저쪽 틀어대듯이, 책 또한 같은 맥락에서 생각하라는 것이다. 지루하면 내려놓아라! 좀 더 개인적으로 즐거운 책을,  읽을 많한 책을 선택하라고 그는 충고한다. 닉 혼비의 이 책을 읽으면서 그의 독서론에 공감한다. 요즘 드는 생각이 많은 사람들이 1차적으로 책을 통해서 지식이나 정보를 얻는 것도 중요하지만, 오락기능 또한 무시 못한다는 생각이 든다. 게다가 책을 좋아하고 읽는다고 해서 폭 넑고 다양한 독서를 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흔한 말로  책을 통해 더 넓은 세계로 더 미지의 세계로 간다는 거  그거 전부 다 거짓말이다. 사람들은 자기 취향의 책을 지칠 줄 모르고 찾고 찾고 또 찾아 읽는다. 잠깐, 외도는 할 지언정, 개개인의 독서 취향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예로 나는 자기계발서나 로맨스 소설은 읽지 않는다. 흥미도 없을 뿐더러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지만, 로맨스 분야의 책을 쓰고 읽는 사람이 있는 것을 보면, 책의 분류가 다양할 뿐, 독서가는 자기 관심이나 취향의 글을 꾸준히 찾고 좋아한다는 것이다. 그럼 아시포프는 ?여하튼 그게 바람직한 것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모든 종류의 책을 읽어야 한다는 강제성보다는 오히려 편안하게 책을 바라보는 시각을 갖는 거 또한 중요하다. 

닉 혼비는 그의 독서론만큼이나 편안하고 즐거운 글을 쓰는 작가라는 것을 이 책을 통해 처음 알았다. 그의 다음 신작이 나오면 나의 레이다 망에 꼭 반짝거릴 것 같은, 그런 작가였다. 

덧 : 나를 포복절도하게 만들었던 LA 메탈 밴드 모틀리 쿠가 알고 싶다면  http://blog.naver.com/kkhkmk1004/1300474697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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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를 리뷰해주세요.
100℃ - 뜨거운 기억, 6월민주항쟁
최규석 지음 / 창비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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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부끄러운 고백입니다만, 전 노사모인 애아빠를 만나기전까지만 해도 한나라당 지지자였습니다. 아니 지지라기보다는 뻣속부터 보수적이고 치맛속까지 한나라당인 부모님의 정치적 보수성과 지역적 편견을 그대로 담습했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젊은 날, 저에게 정치적 중립이나 정치적 소신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성인이 되어 투표권이 주어진 날조차 부모님이 찍으라고한  한나라당 후보에게 귀중한 한표를 행사를 할 정도였으니깐요. 분명 정치적으로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알만한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저의 선택권은 부모님의 정치적 성향에 의해 결정되었던 것입니다. 그 알만한 나이에 왜 그랬어?라고 물으시면, 전 정말 아~ 부끄러워 더욱더 얼굴이 화끈화끈거린다는.

중고등학교 시절 시내에서 바람을 타고 변두리까지 날아오는 최루탄 가스를 마시며 수업을 했고, 격렬하고 가슴 들 뜬 민주주의 성과를 이룬 6.10항쟁을 10대 후반에 직접 체험한, 슈바이츠가 말한 한 세대 전체의 운명을 체험한 세대이지만, 젊은 날의 후진 정치성향을 보인 것은, 일상의 정치와 당면해 있는 한국의 근현대사와 연결하기에는 저의 정치적 그리고 역사적 의식의 미성숙과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없었던 좁은 사회생활도 한 몫 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습죠? 투표권이 주어졌다면 제법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제법 알았을 법한 나이인데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부모님의 정치성에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필경 구차한 변명한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 가방끈 짧은, 하루하루 먹고 살기 바빴던 부모님이 정치에 대해 뭘 알겠습니까!  평생동안 그 분들은 떠돌아다니는 소문만을 귀 담아 듣고 편집광적인 미디어의 놀음에 놀아난 것뿐일텐데. 오히려  제법 책도 읽어 인문적 소양도 쌓였던 제가 한나라당같은 당에 지지를 보내고 투표를 한 것이 더 문제인거지요. 지식과 현실의 괴리가 바로 이런 게 아니겠습니까!(그럼 우파 지식인들은 뭐냐?고 반문하겠지요! 그건 그 사람들 사정이지 싶습니다. 평생 그렇게 살다가 죽던가 말던가!)

여하튼 한때 한날당에 적을 두고 있었다는 것에 수치스러움은 최규석의 100도를 읽으면서 더욱짙어져 얼굴이 화끈화끈 달아오르고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6.10 민주 항쟁에 대한 자료는 그렇게 많지 않고 있다하더라도 그렇게 쉽게 읽히는 글이 아니어서 그런지 애써 민주항쟁에 대한 글을 접하지 못했던 저로서는 6.10민주항쟁운동을 만화형식으로 풀어 낸  최규석의 100도씨는 현재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볼 기회를 가졌던 책이었습니다.  내가 가진 자유와 민주주의의 성취는 타인의 희생을 담보로 어부지리로 획득한 것은 아닐까하고 말입니다. 5.18 민주화운동, 6.10 민주항쟁은 권력자가 이루어낸 민주주의가 아니고  대한민국 국민들이 이루어 낸 민주주의라는 것을 말입니다. 수 많은 사람들이 일상의 안위를 버리고 거리로 나와 함성을 이루어 내던 날, 저는 tv 화면에 나온 수 많은 사람들을 물끄러미 보았을 뿐이었습니다. 역사에 만약이라는 것은 없지만, 만약에 민주화 운동과 민주항쟁이 없었다면, 우리는 지금 노무현같은 대통령을 만날 수 없었겠지요. 그리고 노통이 있었기에 민주화운동과 민주항쟁이 제대로 역사적으로 평가받을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더불어 최규석같은 만화가가 있어 6.10 민주항쟁은 우리의 기억 속에 빛을 발하며 역사의 한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인지 모릅니다. 진보니 보수니 이런 단어보다 무엇이 가치있는 것인지 그리고 진정한 가치가 무엇인지 아는 것 또한 중요한 것이 아닐까요. 탐욕스런 권력자들에 의해 폄하되는, 5.18 광주항쟁이나 6.10 민주항쟁은 우리가 민주주의를 쟁취할 수 있었던 가치있는 역사적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최규석, 당신이 있어 고마워! 

그리고 이 책에서 무엇보다도 제가 제일 부러운 것은 부모와 자식간의 정치적 타협입디다. 반공소년 영호는 대학에서 자신이 배운 반공의식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그리고 부모와의 정치적 이견때문에 현실참여문제로 갈등을 합니다. 하지만 그는 현실의 부조리함을 외면하지 않고 5공 정부에 저항을 하기로 결심하죠. 그의 부모는 자식의 변절(?)에 분노를 느끼지만, 아들 영호가 감옥에 가자 현실을 바로 보며 반정부 시위에 적극적으로 지지를 보냅니다. 그리고 마침내, 6.10 민주 항쟁을 인정합니다. 어쩌면 영호의 가족처럼 정치적 문제로 부모와의 갈등은 이젠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가족의 모습일지도 모릅니다. 전 친정모와 시모에게 정치이야기는 피하는 편입니다. 예전에 노통때문에 거의 의절까지 갈뻔한 사건도 있고 해서 정치이야기는 서로를 위해 거의 하지 않습니다.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거죠. 저는 엄마(시모)를, 엄마(시모)는 저를. 정책를 비판하는 것이 아닌 지역색과 인신공격의 말은 흘러 듣습니다. 수 백번 정책에 대해 비판을 해도 한날당이라는 이유만으로 용서되는 친정모를 이해 못하지만, 차마 정치적 이견이 있다고 해서  가족간의 의절은 못하겠더라구요. 그리고 정치적인 문제로 가족간의 의절은 아니다싶었구요. 하지만 고집불통의 두 분의 한날당 지지는 정치에 대한 회의와 왜 우리 가족은 정치적 화합을 이루어내지 못할까하는 회의감도 들기도 합니다. 정치적 이견이라는 수평적 간극은 간극대로 껴안고 살아가야겠구나 싶습니다. 그것이 바로 민주주의니깐요. 최규석의 가족간의 정치적 화합이 내러티브를 이끌어 내는 중요한 장치일 수 있겠지만, 언젠가 저 또한 가족간의 정치적 화합을 염원해봅니다.  

슬슬 꿈틀대는 이명박독재에 맞서 거리에서의 활발한 시위 보면서, 희망은 살아있다는 것을, 그리고 대한민국은 아이들에게 물려줘야할 민주공화국이라는 유산을 지켜야한다는 것을 이 책은 찐하게 말합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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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에게 용기를 주는 27가지 이야기
하인츠 야니쉬 글, 젤다 마를린 조간치 그림, 강명희 옮김 / 한겨레아이들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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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하인츠 야니쉬를 주목한게 된 것은 그의 2006년 국제아동도서전에서 라가치상을 수상했다는 <할아버지의 붉은 뺨>을 읽고 나서부터였다.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평범한 이야기가 아니다. 얼굴이 붉어질 정도로 과장과 허풍이 두루치기된 그런 이야기였고 할아버지의  몽상가적인 기질이 그대로 대를 이어 손자에게 전해지는 듯한 암시를 남기며 끝내는 그 그림책은 " 현실에 저항하고 판타지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이 책을 헌사하는 일러스트 작가 알료샤 블라우처럼 몽상가적 기질이 다분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공감할 만한 유머스러운 그림책이었다.  당근, 헐레벌떡 이 그림책 작가에게 관심을 가질 수 밖에!  운 좋게도 오스트리아 출신인 그의 그림책이  은근 슬쩍 꾸준히 우리나라에 제법 소개되고 있다는 것을 아시는지. 올 상반기만 해도 두 권의 그의 그림책이 나와 있고, 그 중에서 최근에 관심을 갖고 아이에게 읽어준 책이 바로 자기계발서 제목을 흉내 낸 <딸에게 용기를 주는 27가지 이야기>.  

사실 하인츠 야니쉬가 아니라면 자기계발서로 착각하여 관심을 갖지 않았을 터였지만, 야니쉬와 조간치가 콤비로 제법 많은 그림책을 발간했고 그들 작품에 대한 기대치가 한껏 높았기에 제목에 아랑곳없이 선택한 책이었다. 이 책은 작가 자신의 단편창작품과 대부분 유럽 각국의 전래동화 모아놓은 책이다. 딸에게 들려주고 싶다고 했지만, 그가 선택한 소재 열정, 용기, 지혜, 적극성, 대담함, 행복그리고 꿈은 부모라면 누구나 자신의 아이들이 가졌으면 하는 덕목일 것이다. 전래동화는 어떤 이야기는 변형되지 않은 채 실려있고 어떤 이야기는 현재의 가치관에 맞게 변형되어 있다. 기존의 전래동화를 변형하는데에는 그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수 세기동안 구전으로 전해오는 이야기가 현재의 우리의 모습과 다르고 수세기 동안 변하지 않았던 인식의 변화가 수십년만에 급격하게 변화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야기의 변형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야기의 상상력은 그 시대를 대변하는 사회적, 문화적, 제도적 가치관을 많이 내포하고 있다. 상상력은 그 시대를 사는 가치관의 틀을 그대로 반영할 수도 혹은 깰 수도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의 주제와 소재는 아이가 컸다면 충분히 결말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이야기꺼리를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개인적으로 전래동화중의 한나인 신데렐라책을 수집하고 있다.  수년동안 신데렐라 책을 수집하면서, 신데렐라 원형책만을 수집할 것인지 아니면 신데렐라 이야기의 변형책을 수집할 것인지에 대해 한동안 고민한 적이 있었다. 처음에 수집의 목적은 작가마다 같은 이야기에 다른 이미지가 투영되었다는 점에 흥미를 느껴 수집한 것이었다. 흥미로웠던 것은 신데렐라 이야기가 수 백년동안 변하지 않다가 여성의 사회 참여도가 높아지는 20세기 말에 들어와서 급격한 변형을 가져 왔다는 것이다. 특히나 다른 공주이야기보다도 더 신데렐라는 여타의 성구별 없이 많은 작가들의 타깃이 되었는데, 이제 신데렐라는 왕자에 의한 신분상승이 아닌 좀 더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여성상을 그리고 있다는 것이다. 수 세기 동안 변하지 않았던 여성의 신분상승의 이야기가 우리 시대의 독립적인여자 이야기로 변했다는 사실이 흥미롭지 않은가! 작가들의 상상력이 주도했다기보다는 사회의 변혁이 상상력을 불러일으켜 이야기의 변형을 야기시킨 경우였다. 

현대의 여성상과 비교하며 신데렐라의 원형이야기에 비판을 가할 생각은 없다. 신데렐라는 행운아도 어리석은 여성도 아니다 . 수세기 전에 살았던 여인일뿐이며 신데렐라의 원형이야말로 20세기 이전의 사회와 여성의 가치관을 그대로 대변하기 때문이다. 그 이야기는 그 이야기대로 내버려두자. 하지만 우리는 이제 신데렐라나 백설공주같은 이야기의 원형속에선 살 수 없다. 이야기의 변형이 가지고 온 결과는 우리 시대의 딸들에게 좀 더 앞 서 나아갈 수 있도록 주도하고 있다. 신데렐라 이야기 외에도  전래 동화의 원형과 변형 사이에서 우리는 시대의 자화상을, 그리고 작가적 상상력을 볼 수 있다. 야니쉬가 전래동화를 통해 딸들에게 전하고 싶은 것은 과거의 수동적인 여성상이 아니고 개척적이고 도전적이며 주체적인 딸들의 모습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어떤 작가의 상상력은 그 시대를 그래도 반영하지만 위대한 작가는 그 시대를 뛰어넘는 예지적 상상력의 이야기를 펼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책의 해설자 김경연씨는 후기에 이렇게 썼다. "이 책에 들어 있는 이야기 가운데 썩 마음에 들지 않는 이야기가 있으면 독자 스스로 이야기를 바꿔 봐도 좋겠다"라고 말이다. 이야기 변형이 과거의 틀에 박힌 인식과 가치관을 바꿀 수 있다. 비록 그것이 수세기가 걸리다 할지라도. 사회변동으로 상상력이 이야기를 만들어내든 상상의 이야기가 사회적 변혁을 가지고 오든지 간에 우리가 알아야할 것은 이야기는 힘을 가지고 있으며 그 힘은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을 만큼의 핵폭탄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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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제 마이트너 - 한 번도 인간적 면모를 잃은 적이 없는 여성 물리학자
샤를로테 케르너 지음, 이필렬 옮김 / 양문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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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에게 위인전만큼 동기부여의 성격이 짙은 책도 없다. 아이들에게 위인전을 읽도록 권장하는 독서지도의 목적은 아이가 위인전을 읽으므로해서 위인전의 공시적인 코드,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고 무엇인가를 이뤄낼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하기를 간절히 바라는, 내 아이도 그런 사람으로 되었으면 좋겠다라는 would be의 목적이 숨겨져 있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은연중에 어린 시절부터 읽는 자기계발서격인 어린이용 위인전기는 한 사람의 시련극복기이자 가장 밝은 조명의 하이라이트의 긍정적인 기록서이다. 반면에  성인이 한 사람의 인생역전사인 평전이나 자서전을 찾는 이유는 그 인물의 생애와 학문에 대한 경외심(respect)와 더불어 그 인물의 또 다른 측면을 엿보고 싶어하는 voyeurism의 성격이 짙기 때문에 찾아 읽는 것이 아닐까하고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물론 그렇면이 없지는 않겠지, 사실 어린이용 전기처럼 明한 쪽만 기술했다면 그거 뭐하러 찾아 읽냐고, 일상적으로 몰랐던 부분, 그 사람의 暗의 실체를 속속들히 알고 싶은거지.   

리제 마이트너는 대한 관심은 데이빗 보더니스의 E=mc²에서 아인슈타인의 에너지는 질량과 같다라는 공식을 바탕으로 핵분열을 이끌어낸 오토 한과  슈트라스만 그리고 마이트너를  소개할 때, 오토한을 극악무도한 치사한 놈으로 몰아부칠 때 증폭되었다. 당시만 해도 여자가 물리학을 쉽게 접할 수 없었던 시대였고, 궁극적으로 오토 한의 노벨화학상 수상이 리제 마이트너의 書伸(서신) 속에 이루어진 것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노벨상 수상은 전적으로 자신의 능력이었음을 신문,방송 할 거 없이 여기저기 떠벌리고 다니는 것을 못 마땅하게 여기는 데이빗 보더니스의 신랄한 감정적 서술이 인상적으로 남아있었던 것이다.    

이 책은 독일 청소년용으로 만들어진 샤를로테 케르너가 쓴 리제 마이트너의 전기이다. 상당히 얉아서 청소년들이 읽기에 적당하고 전문적인 물리학자를 다룸에도 불구하고 서술용어도 그렇게 어려운 것은 없다. 객관적인 시각을 유지하였고 데이빗 보더니스와 달리 오토 한을 파렴치범으로 몰아세우지는 않았다. 물론 오토 한을 파렴치범으로 몰아세우지 않았다는 이유로 객관적인 서술이라고 한 것은 아니다. 그녀 또한 마이트너가 배제돤 오토의 노벨상 수상에 대해 확실하게 언급을 하고 있다. 근데 뭐랄까, 데이빗 보더니스의 오토를 보는 격앙된 시선과는 달리 차분한 느낌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보더니스와 케르너의 서술방식을 통해 작가의 다양한 서술 방식이 굳이 객관적일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더니스의 서술방식이 감정적이라 원시적일 수 있지만 독자를 전율 시키는 힘은 그 쪽이 더 우세하지 않나 싶다. 그렇다고 이 책이 재미없다는 것은 아니다. 상당히 술술 넘어간다.  

1878년 11월 17일, 오스트리아에서 변호사이자 자유사상가였던 필립 마이트너의 셋때 딸로 태어난 리제 마이트너는 어린 시절부터 수학과 물리학에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그녀의 부모는 그녀의 재능을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썩히도록 두지는 않았다. 여성이 대학에 들어가는 것이 허용되는 않았던 시대에 그녀의 부모는 마이트너가 대학에 들어갈 수 있도록 노력했고, 대학에 들어가서  마이트너는 이론 물리학자인 볼츠만 교수(이사람에 대해서는 http://navercast.naver.com/science/physics/133을 참조)의 강의를 통해 자신의 앞으로 무엇을 해야할지에 대한 진로선택이 확고하게 결정되었고 그녀는 평생의 업으로 물리학을 선택하였다.   

프란츠 하버는 연구자의 삶을 생성기, 존재기, 그리고 인정기 세단계로 나누었다고 한다. 마이트너의 생성기는 오토 한과 만나 공동연구했던 베를린 목공소 시절(1907~1912)이 생성기였고, 카이저빌헬름 연구소에서 독자적으로 핵물리학 분과를 구축할 때1912~1920)가 존재기(p94)였다. 그리고 나치에 의해 할 수 없이 독일을 떠나 스웨덴으로 정착하면서 오토한과의 지속적인 서신으로 오토 한이 풀 수 없었던 문제를 그녀가 아인슈타인의 E=mc² 공식을 끄집어내, 성공시킨 오토 한의 우라늄 핵분열 발견은 미국이 핵을 만들 수 있는 길을 터주었다. 핵이 만들어져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비극을  남긴 그때부터 그녀의 명성은 거의 확고해진, 인정기라고 할 수 있다.    

리제 마이트너의 전기를 읽으면서 새삼 노벨상의 위력이 얼마나 폭발적인지 극단적으로 알 수 있다. 우리는 여성과학자라고 하면 대개 마리 퀴리(혹은 그녀의 딸 이레나 퀴리)을 떠 올리는데, 그녀가  노벨상을 받지 않았다면 과연 우리는 애어른 할 것 없이 그녀를 위대한 여성과학자중 한사람으로 추앙했을까! 리제 마이트너는 핵의 시대를 연 이론 물리학자였고 오토 한과 노벨상을 받아야했음에도 불구하고 받지 못하면서 그녀의 명성은 사실 그렇지 드높지 않다. 물리학과에서나 명성이 자자한 저명한 여성과학자정도. 그녀는 오토한에게 이렇게 썼다.     

"1917년 카이저빌헬름 화학연구소 행정이사회는 나에게 공식적으로 물리학 분과장을 맡겼고, 나는 21년간 그 분과를 이끌었다. 너도 한번 내 입장을 생각해보기 바란다.내가 나의 어떤 좋은 친구도 격게 되기를 원하지 앟는 15년의 시간을 보낸 후에, 이제는 학문적인 과거까지도 빼앗겨야 하는 것일까? 과연 이것이 공정한 것일까? 애 이런 일들이 일어날까? 만약 네가 나의 오랜 연구원으로 표현된다면 넌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  

물론 현재 수 많은 과학역사가들에게 의해 그리고 여성운동가들에게 그녀는 우라늄핵분열연구(혹은 원자폭탄)의 창시자라는 타이틀을 역사에 남기고 있다. 시대를 앞선 그녀는결혼도 하지 않은 채 여성으로서, 엄마로서의 삶도 포기한 채, 오로지 연구에만 매달렸고 90세의 나이로 영면할때까지 수십편의 논문을 남겼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결과가 좋든 나쁘든간에 이제 그녀의 명성이 페이머스 쪽이든 아니면 notorious쪽으로 남는 것은 순전히 후세인 우리들의 몫으로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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