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키아벨리 -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현자
김상근 지음 / 21세기북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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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론>,<국가론>을 어설프게 읽어버려서 사실 플라톤이나 마키아벨리에 관한 어떤 정의나 그들에 관한 편견이 전혀 없다. 그래서 김상근의 <마키아벨리>가 순수하게 와 닿을 것이라는 나의 생각과는 달랐다. 마치 소설을 읽듯 주인공을 증오하다 안쓰러워하다가 나중에는 그를 존경하게 되는 감정이입의 단계까지 와 버렸다.

 

제목은 자기 계발서에 맞게 짜여 있지만 마키아벨리의 생애를 통해 나열된 것이라 마키아벨리의 전기를 읽은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거부감 없이 술술 읽히다 가끔 보여주는 이탈리아 사진 때문에 여행을 가고 싶어 안달 나는 사람들이 있을까? 나는 그랬다.

 

 

저자가 말했던 권모술수에 능하고 ‘악의 교사’라고 규정되기까지 한 마키아벨리가 사실은 약자를 위한 인물이며 거짓을 말하지 않고 두 번이면 모든 죄를 불고 만다는 모진 고문이었던 ‘날개 꺾기’를 여섯 번을 당하고서도 자신의 진실을 밝히며 신념을 지켰다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청렴하고 신념이 있다고 한들 그의 말이 곱지 않게 들렸을 시대 상황을 보면 그는 가끔 주변에 있는 이런 사람인것 같다.

 

회사나 친구 중에 옳은 말만 하는 사람이 있다. 그들이 말하는 진실은 옳고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의 삶이 간혹 하얀 거짓말이 필요할 때가 있고 알면서도 모르는 척 눈감아주며 다독일 때도 있어야 하는데 그들은 그런 정서가 부족한 것이다. 오로지 자신이 가진 신념만이 중요한 것이다.

 

대중의 99%다 1%의 정치인들에게 지배당하는 현실은 그때가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하지만 무지한 대중의 99%를 움직일 수 있는 방법은 그들을 몰아 세워서 일으킬 수 있는 것만이 아니었지만 그의 표현 방식은 그들의 무지함을 깨우는 방법이 틀렸다고 본다.

 

 

“대중은 왜 늘 소수의 지배자에게 당하고 사는 것일까? 그것은 그들이 울보이기 때문이며, 쉽게 분노하면서 이성을 잃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국가]에서 마이카벨리와 똑같은 질문을 제기했다. <왜 한쪽은 언제나 지배하고, 다른 한쪽은 언제나 지배를 받아야 하는가?> 아리스토텔레스가 스스로 내린 대답은 마키아벨리의 대답과 동일했다. 지배를 하는 사람은 이성을 가진 반면, 지배를 받는 사람은 비이성적으로 행동하기 때문이다.”P105

 

 

때론 어떤 사실은 진실이 아님에도 진실처럼 읽혀진다. 마치 이 부분을 읽으면 그렇겠구나 싶다가도 사실 화가 치밀어 오르는 부분이 있다. 아, 그렇다면 지금의 나의 현실을 보면 나는 얼마나 비이성적이기에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일까 말이다.

 

화려한 과거를 뒤로하고 공직에서 물러나는 것도 아니고 어쩔 수 없는 시대에 쫓겨난 마키아벨리는 또 얼마나 이성적이어서 공직에 다시 오르기 위해 군주인 메디치에게 복직을 하기위해 <군주론>를 썼단 말인가. 나처럼 이런 비아냥거리며 마키아벨리를 본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그를 악의 교사며 권모술수에 능하다는 비판을 받았던 것은 아닐까.

 

그가 <군주론>에서 탁원한 지도자는 모두 인색해져야 한다고 했다. 작가는 이런 부분에서 그의 탁월함을 말했다. 분명 너무나 관대한 지도자는 문제가 될 것이다. 하지만 관대한 것의 범주와 인색함의 범주를 어디까지 볼 것이며 어떻게 선을 그을 것인가를 판단할 수 있는 지도가가 나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못한 인색한 지도자는 많은 희생을 가져 왔고 그것 때문에 불행한 역사를 만들었다는 것을 우리나라의 한 면을 보면 알 수 있지 않을까.

 

그를 알면 알수록 나는 그의 면들이 정감이 안가지만 그의 고생으로 만들어 놓은 역작들은 눈물겹다.

 

“이 세상의 모든 명작은 처절한 몸부림의 결과다. 명장은 스캔들이 아니라 작가가 신음 소리를 낼 때 탄생한다. 죽음의 한계와 인생의 유한함에 절망했던 미켈란젤로가 <최후의 심판>을 그려냈고, 지속적인 가난과 정신병 발작 때문에 도생에 대한 절대적인 부담감을 느꼈던 빈센트 반 고흐가 <까마귀 나는 밀밭>이라는 명작을 남겼듯이, 마키아벨리가 절망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군주론>을 썼다. <군주론>은 처세술에 대한 책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한 절규이자 신음소리였다.” P224~225

 

 

사람들은 자신이 처한 상황에 맞게 생각이 변하게 되는 것일까? <군주론>을 썼던 그가 <로마사 논고>를 쓰게 되었을 때 나는 그가 정말로 빈곤한 허기에 괴로워하고 있고 그것 때문에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투쟁할 수 있을 것 같은 투지까지 보였다. 비로소 나는 그가 사람다워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간혹 우리는 자신이 겪어 보지 않은 일에 대해서 참 쉽게 말할 때가 있다. 모든 일은 경험 할 수 없다. 경험을 해 보려고 해도 할 수 없는 것이 있고 일부러 그럴 필요도 없다. 그러니 어떤 일에 처한 누군가를 보면 쉽게 말 할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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