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을 본 적이 있나요? (반양장) 보름달문고 44
김려령 지음, 장경혜 그림 / 문학동네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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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을 본 적이 있나요?

 

김려령의 이름만 들어도 완득이가 떠올라 눈물이 왈칵 쏟아지려고 한다. 그리고 입가에 웃음이 살짝 번진다. 완득이를 탄생시킨 그녀의 작품을 또 읽을 수 있다니 얼마나 기쁜 일이란 말인가. 김려령은 나처럼 이렇게 그녀의 책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나 있을까.

 

청소년 문학을 좋아하지만 얼마 전에 읽은 <마당을 나온 암탉> 때문에 요즘 동화에 빠져있다. 그래서 김려령이 선택한 동화에 더 반가울 수밖에 없다. 아직도 마당을 나온 암탉의 마지막 장면 때문에 가슴이 먹먹해진다. 동화가 이렇게 사람 가슴을 울릴 수 있다는 새로운 기쁨이었다.

 

김려령은 이번에 자신에게 딱 맞는 등장인물을 선택했다. 집단 따돌림으로 고통 받다가 세상을 등진 중학생의 주인공, 질풍노도의 시기에 있었던 고딩 완득이가 주인공이었다면 이번은 동화를 쓰고 있는 작가인 자신이 주인공이 되었다.

동화 작가가 되어서 자신의 책이 서점에 있는 것을 볼 때면 부끄럽지만 그것이 좋아서 웃고 다닌다는 소박한 그녀처럼 < 그 사람을 본적이 있나요?>속의 화자는 문학상을 타고 동화작가로 등단한 작가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야기의 서술 구조를 얘기 할뿐 풀어 나가는 인물은 따로있다.

 

십여년 전에 갔었던 필리핀의 작은 동네에서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도로에 신호등과 건널목이 없다는 것이었다. 차도를 지나는 차선만 있을 뿐, 사람들이 건너가야 할 건널목이라는 것이 하나도 없는 큰 도로는 놀라웠다. 무섭게 지나가는 차들을 지켜보며 건널 때마다 오금이 저렸다. 해외에 와서 이렇게 무단횡단하다 죽는 것 아닐까 걱정스러웠지만 무단횡단의 걱정스러움이 어느덧 사라져버렸다는 것이 더 당황스러웠던 것 같다.

우리 동네에도 그런 곳이 있다. 사람이 먼저가 아닌 차가 먼저가 되어버린 도로. 어느덧 사람이 서 있을 곳은 없고 차들만 쉴 수 있도록 만들어져버린 도로에는 한손을 예쁘게 올리고 건너 갈 수 있는 건널목이 너무 멀리 있거나 없을 때도 있다. 그런 곳에 ‘건널목’씨가 나타났다. 위험한 도로를 건너게 할 수 있도록 가방에 건널목을 그려 넣은 천을 깔아 없던 도로를 만들어 주는 건널목씨. 화자 ‘나’는 잊지 않고 있었던 오래된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며 그녀의 즐거운 글쓰기가 시작된다.

 

등단만 하면 모든 것이 다 될 것 같았다고 말했던 선배가 떠올랐다. 몇 년 동안 고생해서 작품 써서 등단했더니 작가가 되겠다고 열심히 썼던 글들은 모두 초기화가 되고 등단 이후부터 다시 처음이 되었다고 했다. 화자 ‘나’도 그렇다. 동화 작가가 되었지만 매일 종이를 찍어내듯 작품을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창작의 고통도 고통이지만 그 고통을 감내하느라 지내야 하는 시간을 지켜보는 가족들의 심난한 마음은 즐겁지만은 않다. 그래서 자신의 창작을 위해서 그리고 자신을 아무것도 안하는 것으로 인식하는 가족들을 위해서 시작한 <오명랑의 이야기 듣기 교실>. 보통은 글쓰기 교실인데 작가 오명랑은 이야기를 잘 들을 수 있는 준비를 할수 있는 교실을 열었다. 아이들의 얘기가 아니라 작가 자신이 하는 얘기들을 아이들이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처음은 시범적으로 한 달간 무료라는 것에 아이들은 오명랑을 찾아오게 되고 가슴에 꺼내기 어려웠던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가 초등학교를 다닐 때는 국어는 딱 하나였는데 요즘은 국어도 4종류로 나눠져 있다. 읽기, 말하기, 듣기, 쓰기 수업으로 나눠져 있고 듣기 수업에서는 동화나 이야기를 듣고 상상해서 다음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수업이더라. 어쩌다 아이들을 가르쳤던 내가 아이들의 국어 과정이 바뀌어있는 것을 보면서 정말로 격세지감을 느꼈다. 그리고 국어가 이렇게 나눠져 목적에 맞게 수업이 이뤄지고 있다는 것에 놀라웠다.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들어야 문맥을 파악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은 당연한 얘기지만, 우리는 누군가의 말을 잘 듣는 일에 서툴기만 하다. 그래서 오명랑의 듣기 수업은 참 특별한 것 같다. 나의 얘기를 전달하기 위해서도 듣기가 잘되어야 할 텐데 그런 부분은 학습에 소외되기 일쑤다.

 

오명랑의 듣기 교실에서 시작된 건널목씨의 이야기.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가장 걱정스러운 부분이 있었다. 건널목씨가 아파트 사람들의 배려로 비어있는 경비실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돈을 받지도 않고 경비일을 봐주며 아이들을 위해 무거운 건널목 천을 가지고 다니지만 아동 성추행 범으로 오해를 받는 장면들이 나온다면 상처받을 것 같았다. 그리고 작가의 뻔한 스토리 전개에 더 실망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역시 김려령은 그런 상투적인 구성을 하지 않았다. 고마웠던 부분이었다.

감동을 받았던 그 부분에서 실망스러운 스토리 전개가 이뤄진다면 그 작가의 다음 작품은 절대로 기다려지지 않을 것이다.

뻔한 결말이 아닌 작가 나름의 고운 심성으로 결말이 맺어진 작품이었지만 사실 조금 심심한 부분도 없지 않아 뭔가 많이 먹었지만 헛배가 불러온 느낌이다. 아직도 김려령의 작품들에 독자인 내가 더 목마른 것 같다.

 

그래서 일까.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는 그런 좁은 도로를 지날 때면 나는 뒤뚱거리며 무거운 가방을 들고 걸어다가는 건널목씨를 떠올릴 것이다. 그가 나를 위한 건널목을 깔아줬으면 좋겠다. 매번 선택의 순간에 갈팡질팡하는 나를 위해 건널목을 놓아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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