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 읽다가 메모를 해 둔 부분인데, 도무지 찾을 수 없어서 다시 뒤적여보았습니다.
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뗄 수 있는가?
강신주 지음 / 동녘 / 2014년
6월
강신주의 <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뗄 수 있는가?> 라는 책은 <무문관>의 48칙을 원문과 함께 해석을 실었고, 그리고 저자의 설명을 더한 책입니다. <무문관>은 불교경전이라서 낯설지만, 여기 실린 고사는 전에 들어본 것처럼 낯설지 않은 내용도 적지 않습니다.
얼마전부터 이부분이 생각나서 며칠 미루다 찾으려고 책을 뒤적였습니다.
자, 생각해보세요. 학생은 시험을 보아야 하는 입장입니다. 스승이 원하는 정답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바로 학생이니까요. 반면 우리는 졸업을 했다면 시험을 볼 필요가 없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상좌스님은 충실하게 시험을 치렀고 모범 답안을 내 놓았습니다. 그런데 위산 스님은 시험 자체를 거부합니다. 위산 스님이 물병을 걷어차고 자리를 떠 버린 것은 자신은 더이상 당신의 제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 겁니다. 그러니까 이미 자신은 당신에게 더 배울 것이 없다는 겁니다. 하긴 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에게 누군가 초등학교 중간 시험 문제지를 주면 그는 당연히 그 문제지를 박박 찢어 버릴 겁니다. 당연히 찢어야지요. 만일 문제지가 주어졌다고 해서 정답을 찾으려고 고심한다면, 박사 학위를 받은 그 사람은 정말 문제가 있는 사람 아닐까요? 물론 장난으로 문제지를 풀 수도 있지만, 그것은 글자 그대로 진지한 시험이 아니라 장난일 뿐일 겁니다.
시험을 볼 필요가 없다면 이미 졸업을 한 것입니다. 이미 학생이 아닌 것입니다. 이제 백장 문하를 떠나도 된다는 겁니다. 학생이 졸업을 했다면 무엇을 하든지 자신의 삶을 스스로 개척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는 것 아닐까요. 반대로 모범 답안을 마련한 상좌 스님을 대위산 주인으로 보냈다고 해 보세요. 상좌 스님은 위기 상황에 스스로 대처하지 못하고, 자신이 생각한 것이 모범 답안인지 확인하러 계속 스승 백장을 찾아올 겁니다. 어떻게 이런 사람을 한 사찰의 주지로, 여러 스님들을 주인으로 이끌 스승으로 보낼 수 있겠습니까? 삶의 주인공은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스스로 당당하게 자신의 삶을 개척해야 합니다. 계속 선생님을 찾거나 부모님을 찾아서 자문을 구하는 사람이 어떻게 자신의 삶을 주인으로 영위할 수 있겠습니까? 위산 스님이 물병을 거침없이 치는 순간은 선종 오가 중 하나인 위앙종이 탄생하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백장의 기대대로 위산은 그의 제자 앙산과 함께 하나의 뚜렷한 개성을 가진 종파를 만들기 때문입니다. - 페이지 238~239
이 앞에 나오는, 무문관 원문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위산 회상이 백장 문하에서 공양주[典座]의 일을 맡고 있을 때였다. 백장은 대위산의 주인을 선출하려고 위한에게 수좌와 함께 여러 스님들에게 자신의 경지를 말하도록 했다. "빼어난 사람이 대위산의 주인으로 가는 것이다." 백장은 물병을 들어 바닥에 놓고 말했다. "물병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너희 둘은 무엇이라고 부르겠는가!" 수좌가 먼저 말했다. "나무토막이라고 불러서는 안 됩니다." 백장은 이어 위산에게 물었다. 그러자 위산은 물병을 걷어차 넘어뜨리고 나가 버렸다. "수좌는 위산에게 졌구나!" 라고 웃으면서 마침내 위한을 대위산의 주인으로 임명했다.
- <무문관> 40칙, '적도정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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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에 날씨가 좋다고 하는데, 점점 봄에 가까워지는 중일거예요.
휴식과 재충전의 시간 되셨으면 좋겠어요.
좋은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