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자의 기억법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1. 그는 연쇄살인범이었다.

 

 

 한때 연쇄살인범이었던 남자. 그에게는 '살인의 추억'이 불러일으키는 죄책감따위는 없었다. 그 날도 돌아오는 길에 사고가 없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사고 이후 수술을 받고 나서 그만두긴 했지만. 어딘가 파묻어버리고 싶은, 그런 류의 기억은 아니었던 것 같다. 딸과 함께 살게 된 이후 그는 한 번도 그러지 않았고 살았다. 수십여 년이 지나고 다 잊어버릴 시간이 되었는데, 그가 살고 있는 동네에 연쇄살인범이 나타난 거다. 이런! 내 딸은 안되는데... 한동안 쉬었지만 다시 재개할 기세다.

 

 

 한동안 쉬다 다시 시작하려니 이제 나이도 나이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다. 그는 지금 알츠하이머성 치매를 앓고 있다. 기억은 최근의 것부터 없어지기 시작한다. 의사가 그렇게 말했고, 점점 나빠지는 건 있어도 좋아질 건 없다는 걸 그도 안다. 그런데 나타난 연쇄살인범이라니!

 

 

 어쨌든 그냥 있을 수는 없었다. 기억을 잃지 않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이지만, 갈수록 난감하다. 이건 몰래카메란가? 내 지능에는 큰 문제가 없는 것 같은데, 기억에는 문제가 생겼다. 조금씩 없어지는 것 같다. 앞으로 생각을 해서 기록을 하고 녹음을 해도 멈출 수 없다. 남은 것이 점점 줄어드는 것이 혼란스럽다. 그러는 사이 평온하던 동네엔 연쇄살인범으로 추정되는 범인이 계속 희생자를 늘려간다. 범인 잡으려고 경찰대 학생들까지 나타나 찾고 있지만 잡히지 않고 있고, 그의 머릿 속에서도 알츠하이머라 불리는 알 수 없을 연쇄살인범이 머릿 속을 휘저어가면서 그를 조각내고 있다. 같은 시기, 한 사람의 안과 밖으로, 점점 정신없어지는 이유다.

 

 

 그는 이렇게 알고 있는데, 상대의 반응이 이상하다. 점점. 사랑하는 딸 은희도, 집 앞에 나타나는 개도, 가끔 들러 뭔가 잘알 것 같은 친근감을 주던 안형사도, 그리고 은희가 결혼상대로 인사시키러 데려왔던 박주태라는, 언젠가 봤던 그 수상해보이던... 하필이면. 그리고 어느 날엔 은희가 목에 손으로 눌린 자국이 있었다.

 

 

 요양원에 가야하나. 병원에 가는 거나, 감옥에 갇히는 거나 ... 은희는 그래도 잘 살아야 할 게 아닌가. 딸 앞으로 보험을 드는 것처럼 준비를 하고 싶지만, 그 자신에 대해서는 낙관적인 전망이 보이지 않는다. 안되면 준비한 주사가 있긴 하지만, 글쎄.

 

 

 은희가 보이지 않게 되고, 그는 나중에 경찰을 부르지만, 점점 더 이해못할 말만 하고 있다. 난 오늘 처음 봤는데, 어제도 봤다고 하면서. 난 잘 잊어버리지만, 그래도 치매에 걸리지 않았는데.

 

 

 2. 진짜였을까?

 

 

 초반부의 그는 불안해하지 않았다. 말할 수 없는 경력(?)을 털어놓을 때는 약간의 여유마저 느껴졌었다. 지난 날을 생각하면 한때의 즐거웠던 기억을 떠올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었다. 그건 그에게만은 그랬을지도 모른다. 좋든 싫든 그 땐 젊었던 시절이었다. 나름대로 전성기였을지도 모르지. 살인은 난폭한 아버지로부터 어머니와 여동생을 구하기 위해서 시작된 거였지만, 그 이후로도 이어졌다. 그리고 은희와 함께 살게 된 이후부터는 없었다. 그런 그에게 남은 유일한 가족은 딸 은희였다. 그 은희의 엄마를 죽이고 돌아오는 길에 사고가 생겼을 걸. 수술하고 나서 그는 살인에 흥미를 잃었다.

 

 

 범죄는 치밀하게 계획되어야 했고, 의심이 들 만한 일을 피하며, 의심을 받았을 때는 네 알리바이를 증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기억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알츠하이머는 그를 조금씩 조각내고 지우고 부순다. 처음에는 사소하게 느껴지는 것부터. 이전에 잘 하던 것을 할 수 없게 되고, 입맛도 달라지며, 방에 붙인 종이 이름을 모르겠고, 누군가 하는 말을 이해하기 힘들어진다. 어느 날은 날짜에 맞지 않는 날에 찾아가기도 하고. 나중에 마지막에 쓰기 위해 준비해 둔 주사도 어느 순간부터는 지워졌을 거다. 잊어버리는 게 아니라 지워지고 없어지고 조각조각난 것들은 점점 더 작게 조각난다. 그의 내부에 있어서 만큼은 기억을 살해하는 연쇄살인범이었다. 그리고 이 범인이 나타나면서, 동네에도 연쇄살인범이 나타났다.

 

 

 처음에는 앞으로의 일을 걱정한다. 기록을 하기도 하고, 녹음을 하기도 하고. 딸 앞으로 보험을 들어서 남은 딸의 미래를 걱정하기도 하고. 그러나 그 불안조차도 지워진다. 점점 당황스럽고 적응되지 않는 순간순간이 늘어간다. 그렇지만 그럴 여유가 없다. 연쇄살인범이 나타나 설치는 통에 내 딸이 위험한 상황이다. 바쁘면 대부분 그럴 듯한 이유가 생긴다. 그냥 잊어버릴 수도 있다. 딴 건 몰라도 그 놈은 잡아야한다.

 

 

 어느 순간, 지금까지의 그 세상이 아니라, 다른 세상에 와 버린 걸까. 다들 이게 뭔 소리냐는 듯 나를 쳐다본다. 마치 나는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처럼, 내가 알고 있는 건 모두 엉망이다. 내가 알던 사람은 없었고, 내가 알던 사람은 다른 사람이었다. 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이젠 잘 모르겠다. 그럴 수록, 점점 더 조각나고, 그는 먼지가 되어 어느 순간 사라진다.

 

 

 어쩌면 내가 기억했던 살인의 추억마저도, 모두 가짜였을지도 모르겠다.

 

 

3. 마지막까지, 나를 지킬 수 있을까.

 

 

  말하는 사람은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병이 진행되어 가면서 생기는 이전과 달라지는 것이 있었다. 때로는 사소해보이는 여러 가지가 계속해서 조금씩 늘어가는데, 운동기능이나 미각같은 것도 조금씩 변해가는 것이 느껴진다.  알츠하이머가 기억을 지우는 것과 함께 점점 진행되면서, 처음에는 알아차렸던 여러 증상조차도 어느 순간부터는 그 차이를 망각하게 된다.

 

 기억하려고 해도, 기억하려는 그 자체를 기억하지 못하는 건, 지금 있는 과거는 그나마 서서히 없어져도 앞으로는 더이상 기억날 과거가 생기지 않는다는 말처럼 들렸다. 내가 전과 달라지고 이상해진다는 것도 받아들이기 어려운데, 좀 더 진행되면 내가 이상한 것조차 알아차릴 수 없다니! 처음엔 무섭지만 그 마저도 사라진다니!

 

  그런 거야, 그런 거라구. 계속해서 바뀌는 상황에 적응하기 어려운 건 당하는 그나, 읽는 나나 다를 게 없었다. 누구 말처럼 이 동네에 평행우주라도 있는 건지. 아주 비슷해보이는 그 다른 세계에서 나만이 그들과는 다른 기억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엉뚱한 말을 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없지도 않은 거다. 의도적으로 나를 제외한 나머지 전부가 모두 다른 말을 하기로 했다면?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말을 통해서 내 기억이 부정되어야할 상황을 연속해서 만나게 된다면?

 

그럼 이제 뭐가 진짜인거지? 일관성이 없기는 그쪽이나 이쪽이나 다를 것도 없는 걸. 점점 더 구별할 수 없고, 어느 시점부터는 구별한다는 것이 무의미해지는 그 순간까지도 무차별적 살인은 계속된다. 그래도 지키고 싶었다. 내가 가진 기억을, 내가 사랑했던 딸을, 그런 나를.

 

 

 처음에는 씨익 웃어가면서 시작했는데, 뒷판 접착 없는 퍼즐 떨어지듯 없어지는 게 보이면서부터는 서서히 불안해지더니, 갈수록 나 자체를  아예 없애버리려는 것만 같았다.  다 읽고 마지막엔 무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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