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 마플이 울던 새벽
김살로메 지음 / 도서출판 아시아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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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벌써 6월이 되었어요. 언제 그렇게? 벽에 걸린 달력이 벌써 다섯 장 지나간 요즘은 아침에 해가 일찍 뜨고, 저녁에는 늦게 집니다. 오늘은 4시에도 새 소리가 들려서 깜짝 놀랐어요. 4시는 머릿 속에서는 한밤중, 그런데 조금씩 스미는 빛이 느껴지는 새벽이 되었더라구요. 벌써, 언제, 어느새.

 

 새벽에 일찍 일어나는 사람은 부지런한 사람, 새벽까지 잠 못 이루는 사람은 마음에 큰 근심 있는 사람, 새벽이 될 때까지 밤을 지나 일하는 사람에게는 고단한 시간. 누군가 눈물 흘리는 새벽이라면 차가운 공기에 뜨거운 눈물 닿는 시간이 떠오릅니다.

 

 <미스 마플이 울던 새벽>은 일천(一千) 글자 미니에세이라는 부제가 있는 책입니다. 한 편의 길이가 다른 에세이보다는 길지 않아서 미니에세이라는 표현이 있는 것 같습니다만, 그만큼 수록된 글은 많습니다. 크게 5부로 나누어진 내용은 서로 다른 느낌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1부인 <봄비 또는 안개>에서는 일상에서 만나는 평범한 꽃, 사물 등을 통해서 이전의 기억과 이어진 이야기를 꺼내고, 2부 <참 쉽죠?>에서는 '참 쉽죠?'라는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화가 밥 로스의 이야기로 시작해서 문학과 영화의 한 장면에서 생각했던 이야기를, 3부 <장갑을 낀 시인>은 폴란드 시인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일화에서 가져온 제목으로 보이며, 그외에도 많이 알려진 <호밀밭의 파수꾼>, <자기 앞의 생>,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데미안>과 <롤리타>와 같은 책의 이야기를 하나씩 써 갑니다. 2부와 3부가 책과 영화와 함께 하는 시간이었다면, 4부 <파리의 날개처럼>에 이르면 고전속에 등장하는 명언, 오래된 경구, 그리고 멀지 않은 최근의 이야기 속에서 삶의 자세에 대한 성찰이 나타나고, 마지막인  5부 <먹은 밥은 글이 되고>에서는 앞의 많은 것들을 지나오면서 배우고 깨닫고 남은 것들을 어떻게 좋은 글로 남길 수 있을지 고민하는 글쓰는 사람의 시간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1부에서 시작되어 5부에 이르기 까지의 시간은 일상적인 것이 주는 친근함에서 시작해서 책과 영화에서 보았던 한 장면의 느낌을 공유하고, 오랜 시간동안 많은 사람들을 지나온 고전과 경구를 통해 한 번 더 생각해보며, 다시 이러한 생각과 감정과 순간의 느낌을 어떻게 쓸 것인지를 고민한 흔적을 느끼게 합니다. 어느 부분에서는 막막한 새벽을 지나는 마음이 되기도 하고, 어느 순간에는 따뜻한 꽃 피는 거리를 지나는 느낌이, 어느 때에는 바람 부는 해안에 서 있기도 합니다. 그리고 읽었던 책과 영화지만 잘 기억나지 않는 어느 장면을 기억 속에서 한 번 더 꺼내보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이 책에 실린 글은 일천 글자의 짧은 글입니다. 하얀 종이 위에 글자를 쓰기 시작하면 어느 날에는 무척 많은 이야기가 하고 싶고, 또 어느 날에는 단 한 글자도 쓸 수 없을 것 같은 날이 있습니다. 쓰기도 쉽지 않지만, 그 중에서 다시 줄이고 줄여서, 더이상 줄일 수 없는 것만 남길 때까지는 지우고 싶지 않은 문장과, 포기하고 싶지 않은 단어를 줄이는 시간도 있습니다. 그렇게 줄이고 나서 남은 것들은 화가 밥 로스의 "참 쉽죠?" 같은 느낌일지도 모르지만, 그런 날이 오기 까지 지나온 많은 새벽이 뜨거운 눈물과 고쳐쓴 종이 위로 지나갔을 것을 생각합니다.

 

 길지 않은 글이라서 금방 읽을 것 같았는데도 생각했던 것보다 조금 더 천천히 읽었던 이유도, 간결함을 살려 꼭 필요한 것만 남은 글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전문가에게나 쉬운 일이지 초보자에게 쉬운 게 어디 있겠나. 보고 말하고 듣기에나 쉽지, 뭐든지 손수 겪어 보면 쉬운 건 세상에 없다. 적어도 한 분야에 일가를 이루려면 그만한 시간과 노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너무 쉬워 보이는 밥 아저씨의 그림은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흉내 낼 때나 만만한 것이지, 실제 캔버스 앞에 앉는 순간 아득한 절망감에 몸서리치게 된다. 쉬워 보이는 한 가지 길엔 약간의 재능과 함께 언제나 땀이란 수고가 따라다닌다. 참 쉽죠? 이 말은 ‘부단히 노력했지요‘ 라는 말의 에두른 고백임을 그때 알았다.
- <미스 마플이 울던 새벽>, 김살로메, 도서출판 아시아, p.64~65,참 쉽죠?

거의 매일 일천 글자 쓰기를 했다. 직장인 일하듯 썼다. 다시 잠들지 못하는 새벽을 보내기엔 더할 나위 없는 작업이었다. 육백여 편에 이르렀을 때 쓰기를 중단했다. 소설 쓰기에 집중할 수 없다는 핑계가 있었고, 무엇보다 자기복제의 동어반복에서 오는 피로감이 두려웠다.

스무 살 시절, 쓰고 싶다는 욕망은 내게 숨기고픈 부끄러움이었다. 뭔가를 끼적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친구가 말했다. 너는 미스 마플 같아. 그때까지 나는 탐정물을 읽지 않았으므로(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지만) 애거서 크리스티를 잘 몰랐다. 그녀의 독창적인 인물인 제인 마플에 대해서도 알 리가 없었다. 흔들의자에 앉아 뜨개질이나 하고, 망원경으로 새나 관찰하는 독신녀 제인 마플. 별일 하지 않는 척, 아무 것도 못 본 척하는 그녀는 시골 마을 세인트 메리 미드에서 일어나는 여러 일들을 요란 없이 꿰차는 노파 탐정이었다.

미스 마플이 될 수도, 그럴 마음도 없었던 나는 다만 이런 생각에 잠기곤 했다. 무심해 보이는 그녀도 멜랑콜리에 젖은 옷소매를 말리기 위해 바람 드는 새벽 창가를 찾는 일이 잦았을 거라고. 단단해 보이는 한낮의 미스 마플일수록 울지 않은 새벽은 드물었을 것이다. 해결하지 못할 숱한 과제 앞에서 눈물짓는 미스 마플이야말로 내 오랜 친구였다.

다섯 장으로 나뉜 미니 에세이는 각각 사람, 생활, 책, 일상, 글과 관련된 것들이다. 딱히 주제별로 분류할 만큼 경계가 뚜렷한 것은 아니니 손길 가는 대로 편하게 펼쳐주셨으면 좋겠다. 내 안을 적시던 말들이 누군가의 손톱 끝에 닿아 순간의 꽃물이라도 들일 수 있다면.

- <미스 마플이 울던 새벽>, 김살로메, 도서출판 아시아,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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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07 23: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6-08 08: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페크(pek0501) 2018-06-08 19:1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어느 부분에서는 막막한 새벽을 지나는 마음이 되기도 하고, 어느 순간에는 따뜻한 꽃 피는 거리를 지나는 느낌이, 어느 때에는 바람 부는 해안에 서 있기도 합니다. 그리고 읽었던 책과 영화지만 잘 기억나지 않는 어느 장면을 기억 속에서 한 번 더 꺼내보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 이 글이 잘 쓴 글로 생각되어 몇 번을 읽었습니다.
서니데이 님은 리뷰를 참 잘 쓰십니다.ㅋ

서니데이 2018-06-08 19:23   좋아요 2 | URL
부족한 제 리뷰 여러번 읽어주시고 칭찬해주셔서 감사해요.
김살로메 작가님이 멋진 에세이를 써주셔서 저도 조금 더 생생한 느낌을 받았을거예요. 지금은 잘 쓰지 못해도 좋은 말씀을 들으면서 앞으로 조금 더 나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페크님, 저녁 맛있게 드시고, 시원하고 기분 좋은 금요일 저녁시간 보내세요.^^